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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82화 (282/415)

282화. 눈을 뜨다(2)

* * *

"미안해. 이건 진짜 미안하네. 그러고 보니 내가 말한 적이 없지?"

[이… 개자식.]

"없는데 이렇게 해버렸네. 네가 이해해줘. 내 힘이 용왕의 힘과 상극이라 좀 아프긴 할 텐데, 살짝 긁혔으니 죽진 않을 거야. 그보다 더 깊었으면 또 모르겠지만."

에른스트의 눈이 휘었다.

"지금 새로운 정령왕을 찾고, 이렇게 가두고 싶지 않거든. 너무, 귀찮아서. 어쨌든, 미안. 요새 의심병이 도져서 말이야."

[네놈은 대체 어디까지 나를 우롱할 셈인가!]

왕은 물이 내는 울음에 에른스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계속. 재밌잖아? 나도 외롭거든. 뭐, 어쨌든 미안한 마음에 하나 알려줄게."

에른스트는 낄낄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아까 용왕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그랬지? 뭐, 정확히 말하면 변질된 힘이야. 용왕의 힘이랑 다르다는 거지. 하지만 근본이 그놈 힘이기에 멋대로 내가 만든 오염을 정화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어."

'…빌어먹을, 에른스트.'

하벨은 필사적으로 제 입을 막았다.

저놈이었다.

기어코 저놈이 오염까지 퍼트렸다.

세계를, 자신이 지켰던 그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전 삶에서도 놈은 유렌을 시켜 바다와 자신의 연결부터 흩트려 놓았으니까.

'그렇게도 내가 두려웠나? 내 힘이 담긴 바다를 더럽힐 만큼.'

입을 막은 손가락 사이로 피가 꾸역꾸역 튀어나왔다.

'버텨라.'

눈을 질끈 감았다. 물이 자신의 상처를 꾹 누르고 있었다.

'버텨야 한다.'

신음도.

고통도.

모든 것을.

이곳에서 자신의 모든 걸 망가트린 놈에게 다시 또 무너질 수 없었다.

"그래서 널 가둔 거야, 귀여운 새야. 알겠어?"

[왜 이제야… 그 말을 하는 건가?]

"왜겠어. 아주 자신만만하다는 거지. 준비는 거의 다 끝났거든. 죽은 네 주인인, 용왕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푸핫.

에른스트는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과 조롱, 멸시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거 진짜 웃긴데? 너, 기억 못 하잖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

에른스트의 웃음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러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별소리 아니니까."

[나는… 네놈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왕은 비참함을 담아 말했다.

왜 에른스트가 이렇게 주절주절 떠들어대겠는가.

벌레가 신경 쓰여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자신은 그 벌레조차 못하다는 의미겠지.

"물론이지. 너는 여기서 못 벗어나. 이곳에 나 이외에는 아무도 올 수 없어. 새로운 정령왕이 태어나지 않는 이상은."

아라가 그 말에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네가 죽기 전까지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이건 세계의 법칙이야. 나도 깰 수 없는 법칙. 그러니까 이렇게 너한테 종종 찾아와 떠드는 거야. 나도 답답할 때가 있으니까."

에른스트는 왕을 한껏 비웃었다.

영원히 새장에 갇힐 새에게 무얼 털어놓든 무슨 상관일까.

"그래도 내가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면 용왕의 비석 정도는 세워놔야겠어. 이 모든 건 놈이 멍청해서 할 수 있었으니까."

에른스트의 발소리가 다시 움직였다.

멀어졌다.

[원래 자리라니? 네놈은 대체 뭐지?]

"하늘이자, 땅이자, 바다이자 그 모든 것."

에른스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살포시 감겼다.

"그럼 안녕. 나중에 또 찾아올게. 나의 귀여운 새야."

통.

통.

에른스트는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바다 너머로 사라졌다.

왕은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품에 숨겨두었던 아라와 하벨을 보았다.

햇살이 보이자 스르르 하벨의 몸이 땅으로 쓰러졌고, 아라는 꾹 참고 참았던 울음을 토했다.

[어헝헝!]

아라의 얼굴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라는 울음을 꾹 참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대장 배에 자꾸 피가 나아! 헤레스한테 가야 하는데, 이 몸은… 이 몸은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모르겠어! 나가게 해줘, 아저씨!]

아라는 간절히 왕에게 부탁했다.

왕은 하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배 부근에서 검은빛이 아직도 살아서는 하벨의 배를 갉아 먹고 있었다.

이건 위험했다.

[이게, 이 못된 게 대장을 먹고 있어……!]

아라는 처음으로 무언가에 분노하며 상처 부근에 손을 댔다.

치이이익.

무언가 녹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만해. 그만, 아라야.'

하벨은 잠깐 정신을 잃다 그 소리에 정신 줄을 붙잡았다.

[아라여. 그만두십시오. 손이… 으윽, 손이 녹아내립니다!]

왕은 신음을 흘리며 아라를 말렸다.

[대장이 아픈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 몸은 아파도 돼! 이 몸은 괜찮아!]

어헝헝.

하벨의 배에 어린 검은 빛에 발바닥이 녹아 피가 터져도 아라는 멈추질 않았다.

[제발, 멈춰줘! 더는 대장을 아프게 하지 마!]

물이 아라의 감정에 반응하듯 앞발을 감쌌다.

하지만 물이 닿았음에도 검은빛은 여전히 하벨의 배를 갉아 먹었다.

[물인데, 분명 대장도 물을 썼는데, 왜 이 물은 안 되는 거야? 왜 안 되는 거야?]

아라는 분했다.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벨의 피가 새어 나오지 않게 막고, 주변에 떠도는 물로 상처 부위를 짓누르지만, 그 검은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왜 이 몸의 물만! 왜 이 몸의 물만 안 되는 거야?]

무언가 부족했다.

무언가.

이게 차이일까.

하벨과 자신이 부릴 수 있는 물의 차이.

'아… 라야.'

하벨의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흐려졌다가 선명해진 그 사이에 아라의 눈동자가 푸르게 물든 모습을 보았다.

[안 됩니다, 아라여. 당신은 아직 그 힘을 일깨울 수가 없습니다.]

왕은 아라를 말렸다.

아라가 아직 완전한 정령왕이 아님에도 정령왕의 힘을 깨우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합니다.]

왕은 일깨웠던 순수한 물을 움직여 하벨의 상처 부위에 손을 올렸다.

눈동자가 파랗게 변했다.

치이이익.

또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달랐다.

검은빛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정신 차리십시오! 여기서 이렇게 정신을 놓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놈의 힘이 당신을 갉아 먹고 있습니다.]

'…알아.'

하벨은 자꾸만 더 깊이 들어오는 놈의 힘에 정신이 검고, 아늑한 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대자아앙! 안 돼에! 죽지 마아! 이 몸은, 싫어. 싫다구…….]

'나도 알아, 아라야.'

그 힘이 살을 파고들고, 그 너머 영혼까지 닿을 것만 같았다.

'…웃기지 마.'

겨우 이 정도에.

겨우 이런 상처에.

하벨의 손가락이 다시 꿈틀거렸다.

"커헉……."

입가에 피가 튀어나오며 하벨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정신이 한순간 아득해졌지만, 하벨은 삶을 붙잡았다.

하벨의 눈동자가 푸르게 변했다.

목이 터지라 하벨을 부르던 아라는 고개를 들었다.

콧물과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물이 변해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처럼 순순하게 변해갔다.

치이익.

그 물이 하벨의 배를 갉아 먹던 검은 빛을 바로 꺼버렸다.

아라는 그제야 히끅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이 잔잔하게 움직여 왕의 가슴팍을 쓰다듬어주었고, 다시 움직여 아라의 얼굴을 닦았다.

'놈은… 없다.'

에른스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벨은 당장 울려고 하는 모든 물에게 명령했다.

"…가만히 있거라. 내가 없는 것처럼."

[…대자앙?]

아라가 숨을 멈추고 하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벨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아파 죽는 줄 알았네. 다들 걱정하지 마.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까."

하벨은 물을 바라보았다.

―못된, 에른스트!

―죽지 마요. 두 번은 안 돼요. 정말로 싫어요.

"쉬잇. 지금은 뚝하자."

하벨의 말에 물은 잠잠해졌다.

왕은 이 모든 게 거짓말처럼 다가왔다.

물이 누군가를 위해 펑펑 우는 모습도 하벨에게 느껴지는 막연한 위대함도.

대체 무얼 말해야 할지 머릿속이 캄캄했다.

하벨은 상체를 일으켜 뚫린 배를 바라보았다.

'더럽게도 크게 뚫어놨네.'

이건 상처는 좀 심각했다.

지금 자신의 힘을 사용해 억지로 피를 돌게 하고 있었으니.

[으흑, 대장… 이제 안 아파?]

아라가 울먹이며 묻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서 가야 했지만, 하벨은 계속 마음에 걸려 손을 뻗어 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생 많았어.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닙… 니다.]

왕은 울음이 터졌다.

그냥 울음이 나왔다.

하벨의 손을 따라 따뜻한 힘이 흘러나와 불안정했던 균형을 맞춰주었다.

[이젠, 버틸 수 있습니다. 더 많이, 버틸 수 있습니다. …용왕이시여.]

자신의 몸에 흐르는 물이 그 이름을 부르게 했다.

"미안해. 너한테 더 많은 말을 해주고 싶지만, 나한테 시간이 없네. 길을 열어줬으면 좋겠어."

하벨은 왕에게 부탁했다.

왕은 아라를 살짝 건드리며 동시에 문을 열었다.

커튼이 걷히듯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이걸 이을 수 있는 건 아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라와 제가 정령왕이기 때문이죠.]

왕은 고개를 넙죽 숙였다.

[그저 살아주십시오, 용왕이시여.]

"다음에 봐, 이안."

[이안… 이라뇨?]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왕이라고 부를게."

하벨은 이름이 없는 왕을 위해 이름을 주었다.

처음부터 정령왕은 자신의 이름을 말한 적이 없기에 그렇다고 추측했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게도 이름이 생기다니.]

이안은 고개를 올리며 활짝 웃었다.

[정령들이 많다면 다시 연결할 수 있으니 안심하시고 가십시오, 용왕님.]

하벨은 아라를 안으려 손을 뻗자 아라는 뒤로 물러났다.

[안 돼, 대장. 이 몸은 잘 걷는단 말이야. 오늘은 싫어. 이러지, 마.]

아라는 훌쩍이며 하벨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이어 하벨이 흘린 피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아플까.

상상을 할 수 없었다.

"갔다 올게, 이안."

하벨은 출구로 걷다가 한 걸음을 남긴 채 이안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안. 으흑, 이 몸이 처음에 나쁜 말 해서 미안해.]

[괜찮으니까, 어서 가세요. 용왕님을 부탁합니다, 아라여.]

왕은 울상을 지으며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아라를 향해 웃었다.

"다음에는 네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볼게."

하벨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저 너머로 사라졌다.

왕은 아라와 자신의 연결점이 끊어진 걸 느끼며 머나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벌써 그리움이 몰려들었다.

''갔다 올게'라니. 나도 이곳을 마지막으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왜 용왕인지 빨리 알아보지 못한 게 너무도 아쉬울 뿐이었다.

―봤지? 정말 자애로운 분이시지?

물이 그리움을 담아 말했다.

[예. 그렇네요.]

―괜찮으셔야 할 텐데.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이런 일을 또 겪게 했어.

―죄송하다는 말씀도 못 드렸어.

―분명 괜찮다고 하셨을 거야.

―아라는… 괜찮을까. 용왕님이 정말 아끼시는 분인데.

[나도 그분이 걱정되고, 벌써 그립습니다.]

이안은 눈매를 좁혔다.

부디 무사하길.

* * *

"…어우. 도련님은 진짜 하루라도 말썽을 안 피우시면 입안에 가시가 돋아나나 봐요."

레디나는 심통이나 꿍얼거렸다.

"물론, 아라 님과 얽혀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아요. 도련님께 아라 님은 특별한 의미잖아요."

하벨에게 있어 아라는 또 다른 생명이지 않을까 싶었다.

레디나는 하벨의 마지막 모습이 이곳에 끊어졌기에 쪼그려 앉아서는 그가 들어갔던 허공에 손을 뻗었다.

역시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치사하네.'

레디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리저리 주변을 맴돌던 카샬의 모습에 아코가 그를 찔렀다.

[정신 사납게 그러지 말고 너도 레디나처럼 앉아 있어.]

"하지만 도련님께서 사고를 치실까 걱정이 되는데."

[그래서 이렇게 있는 거잖아. 루룸도 부탁했고.]

―아라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나는 라르웬을 따라가 봐야겠어.

아코는 그 말을 떠올리며 카샬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긴 너무 이상했다. 그리움이 넘쳐흘러서 조금만 방심하다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혹시 말이에요. 도련님이 이미 사고를 치신 게 아닐까요?"

레디나가 실실거리며 물었다.

"설마 벌써 그럴……."

카샬은 말을 멈췄다.

허공에서 비틀거리며 나온 하벨을 보자 카샬은 자연스럽게 그를 붙잡았다.

"도……."

카샬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벨한테 풍기는 피 냄새가 너무도 짙었다.

[어헝, 카샬. 카샤아알. 대장이 다쳤어!]

아라는 카샬에게 와락 안겨 울먹였다.

"도… 도련님이 왜 이러세요?"

레디나는 손에 묻어난 피를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미친.]

아코가 하벨을 보며 인상을 가득 썼다.

[너. 너, 괜찮아, 하벨?]

아코는 정말 놀랐다.

"무슨… 무슨 일입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라 님!"

카샬은 하벨을 조심스레 눕히며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온갖 천들을 꺼내 상처 부위를 짓눌렀다.

"놀라… 지 마."

하벨이 말하자 레디나가 소리쳤다.

"입, 닥치세요!"

[에른스트가. 에른스트가아, 대장을 공격했어!]

"빌어먹을 새끼!"

카샬은 손에 힘을 계속 줬다.

이 피를 하벨이 멈추고 있다고 해도 언젠가 터져나갈 게 분명했다.

"진정……."

하벨은 말을 하다 벌써 시작된 가슴팍의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으… 으윽."

상처 부위에 흐르는 피를 틀어막고 지금도 계속 피를 돌리느라 평소보다 더 많이 힘을 쓴 건 사실이었다.

[으흑, 이제 그만 말해, 대장. 이 몸이, 이 몸이 물의 길을 열 테니까, 버텨줘! 제바알…….]

아라가 엉엉 울면서 말했다.

"…미안해."

하벨의 작은 소리에 카샬은 이를 악물었다.

체온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아니야. 미안해하지 마, 대장. 이 몸은 하나도 안 아픈걸. 이 몸은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아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목에 걸린 리본을 잠깐 바라보았다.

어쩐지 리본이 더 커진 것 같았다.

아라는 눈물을 닦으며 힘차게 말했다.

[오히려 뭔가 힘이 강해진 기분이 들어. 그러니까, 대장도 버텨야 해.]

아라는 앞발에 힘을 꼭 주었다.

[이 몸이 반드시, 반드시 안전하게 데려다줄게. 꼭.]

이번에야말로 대장을 지키겠다 다짐하며 물의 길을 열었다.

물의 길이 순간, 아라는 깜짝 놀랐다.

방 하나 정도의 크기만큼이나 커져 버렸다.

'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놀랄 때가 아니었다.

힘을 낭비하지 않으려 금세 하벨이 지나갈 만큼 크기를 줄였다.

"레디나."

카샬이 다급히 레디나를 불렀다.

"지금 둘째 도련님한테 가. 어디에 있는지 추적할 수 있지?"

레디나가 숨을 들이켜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자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너밖에 없어. 내 발은 너보다 느리니까."

"할 수… 있어요."

"만약에… 어, 엘라힘을 우리가 먼저, 젠장, 우리가 먼저 데려왔다면 당황하지 마. 알겠지?"

카샬은 만일 하나 가능성을 남긴 채 당장 하벨을 안고서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무조건 엘라힘의 힘이 필요했다.

덩달아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아라의 귀가 팔락거렸다.

저 멀리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정령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피부에 와닿는 것 같았다.

사실 조금 전에 이안이 자신에게 힘을 나눠주는 걸 느꼈다.

아주 조금이지만, 그 변화가 이렇게 빨리 와닿을 줄이야.

아라는 레디나를 바라보며 물의 길로 들어갔다.

방이 보였다.

여기가 누구 방인지 아라한테는 중요하지 않았다.

[헤레스으……!]

그저 눈앞에 보이는 헤레스가 하벨을 도와주길 빌었다.

"……?"

헤레스는 그대로 손에 쥔 펜을 놓쳤다.

잠깐 정신이 멍했다.

조금 전 하벨이 갑자기 아라가 부른다며 어디론가 달려가지 않았던가.

분명 그 뒤를 카샬과 레디나가 쫓았을 텐데.

그래서 자신은 도중에 엘라힘을 데리러 간 라르웬을 배웅하고는 차분히 하벨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며 오미너스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도련님."

카샬이 침대 위로 하벨을 내려놓자 헤레스의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배가 관통됐다니.

하지만 헤레스는 입술을 꽉 깨물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엘라힘이 온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언제인지 모르는 지금, 자신이 하벨을 살려야 했다.

"카샬. 여기에 누구도 들이지 마세요. 엘라힘 신관님을 제외하고요."

헤레스는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자신의 가방을 꺼냈다.

헤레스는 숨을 멈췄다.

가방이 스스로 열리더니 그곳에 있는 수술 도구가 헤레스 주변을 둥둥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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