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눈을 뜨다
* * *
[그, 그건 안 돼!]
아라가 기겁한 걸 시작으로 주변에 물이 나타나서는 강력한 항의를 하듯 넘실거렸다.
"정령이 가진 힘의 근원은 나야. 대체 왜 말리는 건데?"
하벨이 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미쳤어요? 지금 그 힘을 용왕님께서 받겠다고요?
―그건 절대 안 돼요! 절대요! 이제는 다른 힘이에요! 용왕님이 위험해진다고요!
―빨리 전해줘. 지금 용왕님의 귀에 우리 말이 안 들리니까.
물이 왕을 콕콕 쑤시자 왕은 물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고 말을 전해주었다.
[…미쳤냐고, 위험하다고 전혀 다른 힘이니 안 된다고 물이 그대에게 떠듭니다.]
"빌어먹을……."
하벨이 입술을 깨물자 아라가 앞발을 뻗어 입술에 발바닥을 올렸다.
하벨의 시선이 아라를 향했다.
아라는 굳게 다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대장은 더는 하지 마. 이 몸은 그게 더 싫어!]
"내가 너를… 왕으로 태어나게 했어. 내가 너를 책임져야 해."
[쉬잇. 이 몸이 좋아서 태어난 거야. 이 몸은 대장이 너무 좋아서.]
아라는 울음을 꾹 참듯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러니까, 이 몸이 할 거야. 이 몸이 해야 해.]
"아라야. 되기 싫은 건……."
[이 몸은 왕이 되기 싫어. 하지만 이 몸은 이 몸 때문에 대장이 아픈 건 더 싫어……!]
아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은 하벨의 힘을 먹고 자라났다.
이제는 하벨이 아픈 이유가 에른스트가 남긴 침식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간 자신을 성장시키려 힘을 쓰는 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하지만 하벨은 단 한 번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에 환히 웃고 반겨주었다.
[대장은 이미 왕이었고, 그때 아팠잖아. 엄청, 엄청 아팠잖아!]
하벨은 아라의 걱정에 마음이 찡하게 울렸다.
[대장은 금화 모양 초콜릿처럼 부드럽고, 다정해. 그래서 대장이 이 몸을 탄생시켜줬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기쁜데.]
아라는 아랫입술을 힘겹게 올렸다.
[대장이 또 이 몸을 위해서 아프려고 하잖아. 이 몸은 그게 싫어…….]
"아라야."
[더는 이 몸한테 주지 않아도 돼. 대장은 너무 많이 이 몸한테 줬다구. 그걸 생각하면 이 몸은 너무 슬퍼.]
"그게 왜 슬픈 거야? 그건 당연한 거야. 나는 아라 네가 소중하니까……."
[그래도 당연한 건 없어. 이 몸도 그걸 알아!]
아라는 하벨의 품을 파고들며 고개를 휘저었다.
성장할 때마다 하벨에게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느껴져 오히려 무서웠다.
[이 몸은… 대장이 너무 좋아. 너무 좋으니까, 대장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아.]
"아니야, 아라야.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너를 정말로 좋아하니까, 네가 힘든 걸 아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거야."
하벨은 아라를 보며 실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그럼 아라야. 왜 왕이 되기 싫은지 말해줄 수 있어? 내가 같이 고민해볼게."
[대장하고.]
아라는 머리를 하벨 품에 기대며 웅얼거렸다.
[대장하고…….]
아라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과 뒤섞인 아주 작은 소리가 나왔다.
[…헤어져야 하잖아.]
"……?"
하벨은 잠깐 머리를 맞은 표정을 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이 몸은 대장하고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대장 옆에 매일매일 있고 싶은데.]
어헝헝.
아라는 눈을 꼭 감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왕이 되면 이 몸은 대장 옆에 있지도 못하구, 대장이랑 그림도 못 그리구, 대장이랑 놀러도 못하구. 대장하고… 어헝헝, 대장하고 같이 자는 것도 못해에……!]
하벨은 손을 올려 필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아차 하면 그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몰랐다.
누군가에게는 턱없이 작은 일일지라도 아라한테는 무척 컸다니.
"그런 일은 없어, 아라야."
하벨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으응……?]
아라는 왜인지 기뻐하는 하벨의 표정에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물었다.
왕은 아라의 시선에 맞춰 몸을 낮췄다.
[맞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만약 아라 당신이 고독을 원한다고 해도 내가 반대할 생각이었습니다.]
[아니었어……?]
아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물었다.
[이 몸은 대장하고 헤어지지 않아도 돼? 정말로?]
아라는 너무도 간절히 왕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누구도 아라 당신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우, 우와아아!]
아라는 그대로 하벨을 꽉 안았다.
[이 몸이 왕이 돼도, 대장이랑 함께 해도 된대!]
언제 울었냐는 듯 아라는 헤헤헤 웃으며 기쁨에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면 이 몸은 왕이 돼도 돼.]
"…아라야?"
하벨은 깜짝 놀랐다.
[이 몸은 정령들을 도와주고 싶어. 대장이 다치지 않게 강해지고 싶어. 대장하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면 뭐든 괜찮아.]
아라는 오히려 하벨을 쓰다듬어주고는 왕을 바라보았다.
[그럼 왕은 뭘 하는 거야?]
[당신의 전부이자, 당신의 영원한 편이자, 당신의 힘인 정령들을 지켜야 하는 자를 말합니다.]
"두리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해줘. 저번에 들어보니까, 정령은 세계를 유지하는 자라고 말했으니까."
하벨은 아라를 위해 왕에게 부탁했다.
[그 부분은 왕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라 설명은 불필요해 보입니다.]
왕은 발가락을 들어 아라를 조심스레 쓰다듬고는 하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처 알아보지 못해 미안합니다, 저희의 모든 것이여.]
하벨을 향한 왕의 지칭이 바뀌었다.
"그런 호칭은 됐어. 그냥 하벨이라고 불러."
[제가 왕으로 태어나 이전 왕에게 처음 들었던 말이 바로 당신을 향한 겁니다.]
―기억해. 절대로 잊지 마. 우리의 뿌리를. 곧 돌아오실 우리의 전부를.
대체 누구를 향한 말인지 전 왕은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 말을 기억했고, 그 냄새를 기억했으며 그 그리움 역시 기억했다.
[당신을 기억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더 빨리 알아봤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아직 미숙해서 그래. 무엇보다 평행한 두 세계가 합쳐진 후유증일지 모르지."
평행 세계가 합쳐져 정령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졌고, 틈의 세계가 나타난 것처럼.
"너한테 미안하지만, 대관식은 잠깐 미뤄줬으면 좋겠어. 물론, 완전히 미뤄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하벨은 이전과 다른 말을 꺼냈다.
에른스트가 얽혔다는 사실에 지금 이 과정을 그냥 볼 수 없었다.
[저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습니다. 많이 어려운 부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할게."
자신의 존재로 정령왕이 지금까지 내려왔던 법칙 뒤틀렸다. 왕이 죽음을 알기도 전에 아라가 태어나버렸으니 책임이 있었다.
왕에게 자신의 힘이 있으니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부분을 가라앉히는 건 가능할 테지.
"에른스트가 널 협박했다며."
[예.]
"그 일과 별개로 네가 직접 아라를 만나러 오지 못하는 것 보면 단순한 협박 같은 게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데? 정말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제가 있는 이곳에 바다는 단순히 오염된 바다가 아닙니다.]
"단순히 오염된 바다가 아니라고?"
하벨은 자신의 뒤에 펼쳐진 바다를 보았다.
정령왕이 어떤 힘으로 자신의 땅과 연결했는지 몰라도 결국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은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오염된 물에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한 이 몸이 멀쩡한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저는 부정한 것에도 버틸 힘이 있습니다. 오염된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아라가 부러워하며 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힘은 다릅니다. 제 모든 걸 억누르고, 닿기만 해도 녹여버립니다. 그야말로 모든 걸 집어삼키는 힘입니다.]
하벨은 그 말에 서황이 가졌던, 대신들이 자신을 죽일 때 사용하던 무기를 떠올렸다.
'비슷한 걸까?'
의문이 맴돌자 하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마도 너를 감시하기 위함이겠지. 네가 사라진 걸 안다면 놈은 또 정령왕을 찾을 거야."
아라를 안은 하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른스트라면.
이미 정령왕을 손에 넣은 놈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라가 왕이 된다면 놈은 분명 아라가 자발적으로 나오도록 정령을 죽이고, 또 죽이겠지. 너랑 똑같은 처지가 될 거야. 그걸 원하는 거야?"
에른스트는 정령을 볼 수 있었다.
그 사실 하나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왕은 고개를 떨구었다.
멋있게 늘어진 갈기도 힘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사과는 하지 마. 너는 이곳에서 천천히 약해지고 있었겠지. 얼마나 불안했겠어? 아마 놈도 그걸 알았을 거야."
하벨은 손을 들어 왕의 갈기를 부드럽게 만졌다.
이 안에서 얼마나 외롭게 지내왔을까.
외로움에는 아름다운 꽃도, 넓은 바다도 다 허망하게 보일 뿐이었을 텐데.
"네가 지금 얼마나 끔찍할지 아는데, 그 끔찍함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잖아?"
목소리는 가볍되, 그 속에 담긴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기에 왕은 자신을 이해하는 느낌까지 받았다.
"정 불안하면 네 힘의 반 정도만 아라한테 넘겨줄 수 있을까? 훨씬 더 쉽게 버틸 수 있을 거야."
[놈이 눈치채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거야. 어차피 목적은 너를 붙잡아두는 것뿐이고. 네가 약해지든 말든 놈은 그저 목적을 이루는 데만 신경……."
쿵.
순간, 하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쿵.
거칠게 이는 불길함에 심장이 뛰었다.
이미 왕실에서도 느꼈던 바로 그 불길함이었다.
'에른스트다.'
왜?
하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은 다급히 하벨을 안았다. 지금 이곳에서 자신의 품 이외에는 안전한 곳이 없었다.
[쉿. 놈입니다.]
자신의 땅과 연결한 힘은 어떻게 됐냐고 하벨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왕의 갈기 뒤로 숨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라 역시 앞발로 입을 막으며 하벨을 꼭 안았다.
왕은 아예 주저앉았기에 하벨 역시 쪼그렸다.
통.
통.
물 위를 걷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의구심을 드러냈다.
'정말로 바다 위를 가로지른 건가?'
당장 갈기를 열면 놈의 얼굴이 보이지만, 하벨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이렇게 정령왕이 있는 장소를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는 놈을 상대해봤자 힘이 없는 자신은 무조건 질 게 분명했으니까.
"안녕, 나 왔어."
에른스트가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가 맞았다. 자신을 죽였을 때 내던 목소리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바닷속에서 개 같은 인어족이 기어오나 아닌가 확인하다가 말이야, 갑자기 더러운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더라고. 마침 네가 있던 곳에서."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순간 낮아졌다.
날카로움과 매서움을 담아내며 천천히 유도하듯 지껄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놀랄까……? 혹시 누가 있었어?"
[당장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지거라!]
"에이, 의심 좀 했다고 너무 차갑잖아? 나라도 이렇게 안 오면 엄청 외로울 텐데?"
[대체 나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싶어서 온 것인가?]
왕은 단숨에 언성을 올렸다.
듣기만 해도 에른스트를 향한 적대감이 가득했다.
"진정해. 그냥 확인차 온 것뿐이라니까? 더러운 바다 냄새가 나는데 이걸 그냥 흘려?"
[…무슨 수작질이지? 또 내 아이들을 괴롭히려고 온 것인가?]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나는 그냥 길만 깔아줬어. 행동한 건 인간들이고. 그럼 내가 아니라 인간들을 원망해야지, 왜 애꿎은 날 원망할까."
에른스트는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내가 말했지? 나는 널 죽일 마음이 없다고. 무려 약속까지 했잖아?"
약속이라는 말에 하벨은 자신이 꿈에서 봤던 과거가 떠올렸다.
에른스트는 유렌과 어떤 거래를 나눴다.
아마도 이는 죽지 않는 자가 됐던 것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 보상은 확실히.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하거든.
하벨이 주목하는 건 바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당연함이 섞인 말이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걸까.
[그럼 나를 풀어주거라. 내 아이들이 죽어가는 소리가 들리니.]
"그건 안 돼. 넌 여기에 있어야 해. 하지만 나도 이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네가 어떤 느낌일지 나도 아니까."
'어떤 느낌인지 안다고?'
하벨은 계속 에른스트가 누구인지, 어떤 모습인지 추측했다.
[그렇다면 이유를 말해주거라. 대체 날 왜 가둔 것인가!]
왕이 자신을 의식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이유라……."
에른스트는 천천히 걸어왔다.
"이유. 으음. 내가 말을 안 해줬던가?"
[애초에 너와 내가 이렇게 말을 나누는 건 거의 드문 일이지.]
"아, 그래. 그랬어. 너는 매번 입만 다물었을 뿐이니까, 그런 너한테 내가 이유가 궁금하면 언제든지 물어봐도 된다고 했고."
놈의 목소리에 줄줄 흐르는 오만함과 모든 걸 손에 쥔 의기양양함까지 보이자 하벨은 덩달아 기분이 더러워졌다.
"좋아. 알려줄게."
가볍게 손뼉을 마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원하니까."
에른스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살짝 섞여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렸으니까. 내가, 내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뿐이야. 그러니 이번 일은 나중에 내가 다 보상해주지."
[보상……?]
왕은 참고, 참았지만,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은 내 아이들을 다시 되돌려 놓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래. 해줄게. 약속하지."
[해준다고? 누구도 죽은 자는 되돌릴 수 없다!]
"과연 그럴까?"
에른스트가 다시 왕을 향해 걸어오는지 발소리가 조금 더 가깝게 들려왔다.
"그런데 말이야."
에른스트가 갑자기 말꼬리를 늘였다.
"역시 여기에 누가 온 거야? 치사하네."
[무슨 개소리지?]
왕이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네놈이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역시 뭔가 기분 나쁜 게 느껴지잖아. 내 착각이 아니었나 봐."
에른스트는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아주 작아서, 너무 작아서 나도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모를 힘 말이야."
저벅.
발소리에 어떤 확신이 생겼는지 조금 빨라졌다.
'아니겠지.'
자신은 지금 겨우 영혼의 일부분을 손에 넣었을 뿐이니까.
하벨은 다른 손으로 아라의 입가를 가리며 숨을 참았다.
"가령, 아주 신선한 바다 말이야."
끈적한 목소리를 따라 부드럽게 아래로 뻗어 있던 갈기에 한순간, 아주 작은 틈이 열렸다.
그 틈 사이로 무언가 튀어나왔다.
하벨은 그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물이 움직이자 하벨은 물을 말렸다.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여기서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한다면 모든 게 무너질 테니까.
검고, 검은 빛줄기가 복부를 파고들었다.
푹.
피가 튀었다.
아라의 눈이 커지며 격렬하게 흔들렸다.
"재수 없는, 그 냄새가 나네?"
에른스트는 가볍게 웃으며 빛줄기를 뒤틀었다.
영혼까지 흔들릴 만한 충격에도 하벨은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그 작은 틈 사이에 보이는 에른스트의 모습을 기억하려고 했다.
'까만… 머리카락.'
하벨의 시선이 흐릿해졌다.
물이 더는 참지 못하고 다급히 움직여 검은 빛줄기를 잡았지만, 덩달아 검은 빛줄기에 닿은 왕이 신음했다.
[…크흑.]
"아, 미안. 너도 바다였지?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박했다니까."
에른스트는 웃으며 검은 빛줄기를 지워버렸다.
'쉬… 잇.'
하벨은 그제야 손을 부들거리며 아라의 입을 건드렸다.
[…미친 자식. 미친…….]
왕은 알아서 요동치는 물을 보며 힘을 끌어오질 않았다.
지금은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자신은 겨우 살짝 찔렸을 뿐인데, 아라나 하벨 중 누군가가 깊숙이 찔린 것 같았다.
혹여나 지금 아라와 하벨이 더 위험해질까 봐 왕은 움직이질 못했다.
"너무 화내지 마. 그러게 왜 나를 건드렸어? 네가, 아니 네 속에 용왕의 힘이 잠들어 있는 걸 알잖아? 알면서… 아."
에른스트는 갑자기 말을 멈추다가 크게 웃었다.
아주 즐거운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