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휴식 그 끝에(3)
* * *
히끅.
아라는 깜짝 놀라 딸꾹질하고 말았다.
[정령왕… 이라구?]
아라가 조심스레 커다란 존재를 보았다.
[맞습니다. 내가 왕입니다.]
재차 물은 말에도 왕은 차분히 대답했다.
'정령왕… 이라니.'
아라는 너무 혼란스럽다가 갑자기 막 화가 났다.
그간 자신이 정령을 만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정령왕이었다.
왕이 사라졌다며 얼마나 슬퍼했던가.
[왕 아저씨는 왜 정령들을 슬프게 한 거야?]
아라는 아랫입술을 높이 올렸다.
[모두가 아저씨를 만나고 싶어 했어! 모두가 아저씨를 기다렸어! 왕이라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하벨이 바안에게, 가끔 칼리우스에게 왕이라는 자리를 말하곤 했다.
그때마다 자신은 여러 가지를 들었고, 정말 힘든 자리라고 느꼈다.
하지만 하벨이 여러 번 강조했던 건 '결코 백성들을 버리면 안 돼.'라는 말이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전부 미안합니다.]
황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일렁거렸다.
그 슬픔에 아라는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저씨는 정령들을 버린 게 아니었어……?]
[내가 어떻게 정령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들이 있기에 존재하며 그들을 위해 살아가는 이이거늘.]
[그럼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나는 괜찮으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어. 이렇게만 말해도 다들 행복해하며 기다렸을 거야.]
[그들이 나를 찾는 걸 왜 모르고 있겠습니까. 하지만…….]
왕은 시선을 내렸다.
숨을 한 번, 두 번 내쉬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래서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아라여.]
[이 몸을 왜 기다렸어? 이 몸은 왕 아저씨를 오늘 처음 보는데? 이 몸을 어떻게 아는 거야?]
[내가 바람을 불러와 당신을 이곳에 초대했습니다. 오직 나를 대신해 정령들을 이끌 자만이 이곳에 올 수가 있습니다.]
[아. 그래서 루룸이 오지 않…….]
조용히 흔들리던 아라의 꼬리가 잠깐 멈췄다.
[정령들을 이끌 자? 이, 이 몸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이 몸이…….]
아라는 앞발을 바라보았다.
아라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가 스쳐 지나갔다.
―…이건 왕께서 가지신 힘일 텐데?
정령사 사건 때, 정령이 그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때 자신은 너무 슬펐다.
정령들이 너무도 낯선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시선에 숨이 막힌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버렸다.
아라는 다시 꼬리를 잡았다.
왕이 자신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힘껏 소리쳤다.
[이 몸은 아니야! 왕은 둘일 수 없다고 정령들이 그랬어!]
[그래서 당신이 성장하지 못한 채로 태어났습니다. 나 때문에 성장하질 못한 겁니다. 이렇게 작지 않습니까?]
[아니야. 이 몸은 자라고 있어! 대장이… 대장이 그렇게 말해줬다구.]
아라는 리본을 잡았다.
[이것 봐봐. 이 몸한테 리본도 생겼어. 이 몸은 자라고 있어.]
[그럴 리가. 그건 불가능할 텐데요? 당신이 가져야 할 힘을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아니야! 이 몸은 해냈어! 이 몸은 지금도 계속 자라고 있어!]
[그건 불가능합니다.]
한 번도 아닌, 단호한 말에 아라는 왠지 속상했다.
저 왕이 하벨이 했던 모든 걸 부정하는 기분이라 화도 났다.
―다른 건 상관없어. 너하고 내가 다른 것처럼 누구든 다르니까. 그래서 내가 싫어?
[대장은… 이 몸이 달라도 괜찮다고 그랬어.]
아라는 앞발을 꼭 쥐었다.
―그런 거 아니야. 조금의 시간을 둘 뿐, 아이는 언젠가 어른이 되는 거야. 아라 너는 그 과정을 겪는 것뿐이고.
[대장은 이 몸이 어른이 될 수 있다고 그랬어!]
[아라여. 내 말을 들어주세요. 정령은 태어나면서 성장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하지만 아라 당신은 모든 게 불안정해요. 이건 나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의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라는 진지한 저 말에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만약에 하벨이 그간 자신에게 해준 말이 없었다면 분명히 절망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왕은 또 자신을 부정했으니까.
'대장이 보고 싶어.'
하벨이 그리웠다.
하벨과 잠깐 떨어졌지만, 그가 얼마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자신이라도 사랑할 수 있게 하벨이 바꿔주지 않았던가.
―도련님이 희망이야! 내게 희망은 도련님이라고! 내 세계를 넓힌 것도, 나보고 강하다고 말해준 것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해준 것도!
칼리우스가 카르밀한테 몸을 빼앗겼으면서도 악착같이 내지른, 그 간절한 말이 떠올랐다.
그때도 느꼈지만, 지금은 더 깊이 느끼고 있었다.
[아저씨는 나빠! 왜 이 몸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데!]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었던 '희망'이라는 말은 하벨을 가리킨다는 걸.
[아라여, 나는…….]
[대장이 이 몸에게 주었던 희망을 빼앗지 마! 이 몸의 가능성을 무시하지 마! 이 몸의 지나왔던 흔적들을 가짜로 만들지 말라구!]
파지지직!
뒤쪽에서 일어나는 빛의 불꽃에 왕이 다급히 아라 앞에 섰다.
[누구죠……?]
바다가 있는 그곳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아라는 그 손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자신이 수없이 많이 본, 아주 사랑스러운 손이었다.
"누구긴 누구겠어?"
[대장!]
아라는 하벨을 향해 달려갔다.
"나다."
하벨은 당장 아라를 안으며 왕을 노려보았다.
"네가 우리 아라를 괴롭히고 있었어?"
[앗. 그런 거 아니야. 이 몸을 괴롭히고 있던 건 아니었어. 그냥, 이 몸이 자랄 수 없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해서 울적해졌어.]
아라는 하벨의 품을 파고들면서 훌쩍였다.
"이거 아주 쓰레기네. 네가 뭔데 아라의 노력을 부정하는 건데?"
[인간이… 어떻게 여길 올 수 있는 겁니까?]
왕은 하벨의 말이 들리지 않을 만큼 놀랐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정령사라는 걸 추측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왜 올 수가 없어? 여기에 아라가 있다고 대놓고 알려주던데?"
[무엇이?]
왕의 목소리가 떨렸다.
"물이."
강한 하벨의 대답에 왕은 더욱 흔들렸다.
[어째서 그랬습니까?]
왕이 주변에 있는 물에게 강하게 쏘아붙이자 오히려 물은 코웃음을 쳤다.
―어째서 그랬냐고? 눈 뜨고 잘 봐봐. 네가 누구와 마주했는지.
왕은 난생처음 느끼는 물의 차가움에 이상했다.
자연 중에 물이 가장 까다롭기는 하나, 물 역시 자연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반응한 적은 없었다.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어주며 주변을 살폈다.
'여긴 아라가 말한 곳인데.'
하벨의 시선은 다시 왕으로 향했다. 눈빛도 말투도 곱지 않았다.
"네가 정령왕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사자는 정령왕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대체 그대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한풀 꺾인 정령왕의 모습에 하벨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 전에 묻지. 왜 아라를 불렀지?"
[내 다음을 이을 자이기에 불렀습니다.]
쿵.
왕이 전한 말에 하벨은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역시 그랬어.'
어떻게 본다면 계승식을 자신이 방해한 꼴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은 아라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대장.]
아라가 왕이 꺼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이 몸은… 싫어.]
아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두 번이나 같은 말이 언급되자 아라는 왕이 더는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 몸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아.]
하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령왕이라는 자리는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 유일한 용왕이었던 자신처럼.
[아라여. 왕이란 이 자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
하벨이 왕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일주일일지, 한 달일지. 이 불안정함에 나 역시 당황스럽습니다.]
"정령들이 분명 왕은 하나라고 그랬어. 아라가 왕이라면 너는 어떻게 된 거지?"
[왕은 원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죽음이 임박하기 전, 다음 왕이 어디에서 태어나는지 알고 있죠. 이는 가진 힘을 다음 왕에게 넘겨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입니다.]
왕은 아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습니다. 왕은 이미 태어났고, 저는 뒤늦게 이를 알아버렸습니다.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은 이런 이유로 꺼낸 겁니다. 지금까지 전대 왕이 후세 왕에게 힘을 전해주지 못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 불안감을 더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라를 부른 거였어?]
[예. 저는 이 힘을 아라에게 넘겨주기 위해 불렀습니다.]
"그럼 왜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지?"
[예. 그 질문에 대답해야겠지요. 아라도 내게 물었으니까요.]
왕은 아라를 바라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갇혔습니다. 이곳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갇혔다고……?"
하벨은 갑자기 머리가 울리는 듯했다.
지금까지 정령왕이 갇혔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령들이 오염 때문에 많이 죽었다고 하지만, 그들의 왕이지 않은가.
왜 전 마법사 협회 협회장이었던 시렌이 부정한 것들을 이용해 정령들을 갈랐겠는가.
정령들은 물론, 그들의 왕 역시 아직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왕이 갇혔다니.
"누가 너를 가둘 수 있는데?"
하벨은 정답을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사실이 아니길 빌며.
[물이 그대를 감쌌습니다. 세상의 근원인 물이 말입니다.]
하지만 왕은 말하지 않았다. 인간이 이곳에 올 수 있다는 사실도, 물이 저 인간을 감싸는 사실 역시 의심스러웠다.
[아라여. 이리 오십시오.]
[싫어……. 이 몸은 대장 옆에 있을 거야.]
아라는 하벨의 옷자락을 꼭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답해줘. 나는 너의 적이 아니니까."
[아라가 그대를 좋아한다고 한들, 그대가 정령사로서 우리를 볼 수 있다고 한들, 인간은 믿을 수 없습니다.]
왕은 한껏 경계하며 가슴속에 솟구치는 분노를 드러냈다.
[인간들이 내 아이들을 해친 꼴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인간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물이 너한테 그렇게 말하고 있을 텐데? 나를 믿으라고."
여전히 왕이 꼼짝도 하지 않자 하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이상 힘을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에른스트가 지금 자신을 알면 곤란했다.
"갑자기 너한테 나타난 놈이 있을 거야. 너를 이곳에 가두고,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길 원하는 놈이 말이야."
왕은 그 말에 흔들렸다.
저 인간의 말이 맞았다. 그런 놈이 있었다. 자신의 행복을 산산조각 내버린 그놈이.
"그놈의 이름은 에른스트."
하벨이 이름을 말하자 왕의 표정이 바뀌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이 깃들었다.
"정답인가 보네. …빌어먹을."
하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또 에른스트가.'
에른스트는 물이 정화되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모든 게 오염된 물과 검은 물, 오미너스와 이어져 있었으니 물과 연결된 자는 또 누구겠는가.
당연하게도 '정령왕'이었다.
"그 개새끼가 너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겠지."
―용왕님. 백성들을 지키고 싶으시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그냥 왕좌에 앉아 계십시오. 그것만이 백성들을 지킬 유일한 방법입니다.
에른스트가 유렌의 입을 통했던 말.
"아무것도 하지 마라. 정령들을 지키고 싶다면."
하여 하벨은 왕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가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네 눈앞에서 정말로 많은 정령들을 죽였겠지."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젠장…….'
하벨은 자신과 똑같은 수법에 당한 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까우면서 화가 났다.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아. 네가 묶여버림으로써 정령들을 한곳에 모이지 못했고, 정령들이 그대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지."
자신이 마법사 협회 협회장, 시렌을 죽이기 전까지 그녀가 하던 행동이 아닌가.
[희망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겁을 먹었을 수도 있었죠. 그때, 그놈이… 그놈은 내가 죽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왕은 더 이상 올라오는 말을 막지 못했다.
저자가 하는 말이 다 맞았다.
거짓을 말한 것도 아니었으며 마치 에른스트를 겪은 것처럼 꺼낸 저 말에 가슴이 흔들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때, 그 남자가 보이던, 끔찍했던 힘이 떠올랐다.
정령왕인 자신조차 삼킬 만큼 불길했다.
[내가 죽으면 다음 정령왕이 탄생할 테니까요.]
"…하."
하벨은 기가 차 헛웃음이 나왔다.
에른스트의 계획 중 하나가 자신이 그랬듯 정령왕 역시 허수아비가 되는 거라니.
하벨이 랜턴을 보자 그저 당황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정령을 볼 수 없는 하벨 티에라였기에.
―우리가 인간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정말, 처음이야.
과거에는 정령들이 사람을 온전히 믿지 못했기에.
정령왕은 정령들을 죽일 수 없어 자진해 허수아비가 됐으며 정령들은 정령왕이 살아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채로 그렇게 에른스트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이 영원히 비밀로 남아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아라가 태어났습니다.]
왕의 목소리에서 감격에 찬 울림이 느껴졌다.
에른스트의 계획을 깨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
그게 아라라고 왕은 말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에른스트의 계획을 비틀어버린 건 나였다.'
하벨은 아라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대장? 뭔가 슬퍼 보여.]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두 세계가 합쳐져 자신과 연결된 물이 자연에서 조금 특별한 존재와 뒤섞여 탄생한 게 정령이라는 걸 이제는 알지 않았던가.
정령들의 근원은 결국 자신이기에 그들의 왕인 정령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라를.'
하벨은 피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온몸을 휩쓸고 가는 참담함에 서러울 정도였다.
자신이 직접 만든 물과 함께 탄생한 존재, 그게 아라였다.
'내가 아라를 처음부터 정령왕으로 탄생시켰다.'
어떡하면 좋을까.
왕으로 태어났지만, 왕이 되고 싶지 않은 이 작은 아이를 어떡하면 좋을까.
하벨은 아라를 꼭 안았다.
'그럼 아라가 불안정하게 태어난 건…….'
[하지만 세계에 있는 정령왕은 단 하나입니다. 이 법칙은 누구나 깰 수 없기에 아라는 불안정하게 태어나고 말았습니다.]
왕의 뒷말에 하벨은 입술을 또 깨물었다.
자신은 애초에 평행하던 두 세계가 합쳐지기 전에 있던 존재였다.
지금 세계에 있어 이질적인 존재인 자신이 억지로 흐름을 깨어버렸기에 아라가 탄생했고, 그 결과 불안정해져 버렸다.
[이 불안정함은 계속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얼마나 버틸지 모르고요.]
왕은 아라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라여.]
[이 몸은…….]
[이제 당신이 정령왕입니다.]
[싫어. 이 몸은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미안해, 아라야."
말을 이어나가던 아라가 하벨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고개를 올렸다.
[대장이 왜 미안해하는 거야? 이 몸은 지금 잘 모르겠어.]
"너한테 말해주지 못한 게 있어."
하벨은 천천히 숙어지는 고개를 막지 못했다.
"내가."
속삭이는 것처럼 구슬프게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들려와 아라는 하벨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너를 탄생시켰어."
[대장이. …이 몸을?]
아라는 멍하니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용왕,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
하벨은 왕의 물음에 이를 악물며 말하자 하벨 주변에 갑자기 무수히 많은 물이 모여 춤을 추는 듯 출렁거렸다.
물로 된 망토를 두른 듯한 하벨의 모습에 존재가 한층 달라 보였다.
"두 세계가 합쳐질 때, 정령들의 근원이 된 물이 바로 내 물이었어."
[그게 무슨……?]
왕은 숨을 멈췄다.
"이 세계에 오염된 물도, 나와 네 주변에 흘러 다니는 물도."
하벨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다 나와 연결됐던, 나의 물이라고. 내가 그들의 왕이었으니까."
천천히 왕은 입을 벌렸고, 아라는 그제야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다… 대장의 물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정령들의 탄생도, 아라 너의 탄생도 전부 나로 인해 벌어진 거야."
하벨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이 모든 것이 제 죽음에서 시작됐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그냥 보고 있을 수 있을까.
"내게 줘."
하벨이 왕에게 손을 뻗었다.
"네가 아라한테 주려는 그 힘, 나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내게 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