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76화 (276/415)

276화. 다독이자(2)

* * *

하지만 하벨은 우선 카샬의 생각부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일단 그란덴은 레디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간부지만, 실질적으로 주요 업무에서 배제된 상황이었고요."

"정말로 검은 달이 저질렀던 일을 거의 몰랐다는 거네? 설령 알았다고 해도 목적이 전혀 다르게 그란덴한테 전달이 되었고?"

"맞습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있더라고요."

조용히 열린 문으로 레디나가 걸어왔다.

레디나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어제 봤을 때보다 더 어두웠다.

"사실 그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진심이었어요. 저는 거짓말쟁이들을 수없이 봐와서 잘 알거든요."

"어떻게 하기로 마음먹었어?"

하벨이 묻자 레디나는 그대로 멈췄다. 그가 자신을 존중해 모든 걸 맡긴 걸 알지만, 솔직히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모르겠어요. 간부든 누구든 다 본다면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요. 막상 얼굴을 보니 마음이 흔들리네요."

하벨을 기다리는 사이에 그란덴을 향한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의 첫마디에 자신은 주춤거렸다.

―레디나. 제발 사실을 말해줘. 검은 달이 정말로… 그런 짓을 벌였다고?

변명도, 자신을 회유하는 말도 아닌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를 쓰는 그 모습에 레디나는 그란덴이 변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변한 건 자신이었다.

아이였던 자신은 어른이 되었고, 벽을 낙서하던 그 작은 손은 어느새 피로 물들게 되었으니.

"…그란덴은 말이죠. 검은 달과 엄마의 오른팔 같은 사람이자 비록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저한테는 삼촌이었어요."

하벨은 레디나가 꺼낸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래서 저는 너무 미웠어요. 어떻게 엄마를 배신할 수 있는지, 그 배신의 대가가 간부의 위치라는 사실에 더 용서할 수 없었는데!"

레디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도련님. 사실, 그란덴이 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옛날 생각이 눈앞에 아른거려왔다.

그 따스함이 손끝에 스며들어 단검이 왜 이렇게 무겁던지.

"정답을 알고 있잖아, 레디나?"

하벨은 레디나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정답을 알고 있어도 용서할 수 없으면요……? 결국, 엄마를 배신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요. 엄마가… 죽지 않게 도와줄 수도 있었잖아요. 적어도 엄마가 도망칠 수 있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레디나는 감정을 세게 내비치자마자 고개를 떨구더니 말을 아꼈다.

곧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너를 도와줘도 되겠어?"

하벨이 물었다.

자신이 하고자 한 행동은 검은 달을 부서트리는 일이었고, 레디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여 레디나를 존중해 검은 달과 관련된 일이라면 대부분 그녀에게 맡겼고, 부서트리는 것 외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자신이 검은 달과 어떻게 엮였든 간에 이건 레디나의 문제였으니까.

"도련님."

레디나는 결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레디나."

"제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은 죽이고, 베고, 도망치고, 숨고, 시체를 처리하고. 이런 일들뿐이었어요."

기회를 엿보고, 그 기회를 이용한 것 역시 자신의 능력 중 하나였다.

하벨은 무언가를 짊어지는 걸 싫어했기에 지금까지 하벨과 '거래'라는 조건으로 일을 진행시켜왔다.

하지만 지금은 더 깊이 발을 디디는 게 아닌가.

왜 하벨이 짊어지는 걸 싫어하는지 알게 된 지금 무작정 부탁할 수 없었다.

하여 하벨에게 부담이 가장 없는 거래를 선택했다.

"그 일은 지금처럼 제가 할 테니,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주세요."

"레디나."

"네, 도련님."

"그렇게 거래를 시도하지 않아도 나는 너를 도울 생각이었어. 그러니까, 평소처럼 부탁해도 된다는 말이야."

하벨이 웃자 레디나는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레디나, 네가 말했잖아. 여기는 집 같다고. 네가 계속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나는 언제든지 여기 있을 테니까."

레디나는 집을 잃고 방황하는 아이와 같았다.

갈 곳도, 마음을 둘 곳도 잃어버린 그녀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게 검은 달이었다.

제 손으로 죽인 어머니의 흔적을 붙잡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뒤를 돌아봤을 때 남은 거라고는 검은 달 뿐이기에 손에서 놓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레디나."

"…네, 도련님."

"복수하다가 힘들면 그냥 다 손에 놓아버리든지 잠깐 멈추든, 언제든지 와도 돼. 나도 복수 중이긴 한데,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

티에라 가문.

이제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뭉클거리는 감정에 레디나는 눈가가 시큰거렸다.

이렇게 기분 좋은 통증이 있었을까.

레디나는 환하게 웃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하벨과 만난 건 기적이었다. 정말 하벨은 신 같지 않은가.

"네, 그럴게요. 저도 이제 돌아갈 곳이 있어요. 의지할 사람도 생겼고요."

레디나는 신이 난 목소리로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도련님이 제집이에요. 도련님이 있는 곳이 어디든 제집이에요."

"그럼, 그란덴을 불러와야겠지? 감히 레디나 네 집을 노린 놈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어?"

자연스럽게 진행된 이야기에 끼어들 수가 없어서 가만히 보고 있던 카샬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에 먹먹하게 레디나를 바라본 아라 역시 카샬의 한숨에 속았다는 걸 알아챘다.

[아앗. 이, 이 몸은 또 속았어!]

힐끔 카샬을 보더니 아라 역시 앞발 두 개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장 나빠.

작게 구시렁거렸다.

* * *

"…그란덴 씨라고 하면 되겠어?"

하벨이 꺼낸 말과 함께 그란덴이 그에게 뛰쳐 갔다.

[으, 으엇, 안 돼!]

아라가 흙더미를 일으켜 그란덴의 다리를 붙잡았고, 카샬이 놈의 머리를 잡으며 땅으로 내리찍었다.

콰앙!

"이 미친 새끼. 거기가 어디라도 뛰쳐나가?"

카샬은 무릎으로 그란덴의 목을 짓눌렀다.

"이거, 개였네. 목줄이 필요하겠어."

하벨은 자신을 보며 으르렁거리듯 노려보는 그란덴의 살기에 웃음기를 흘렸다.

"제 말이 맞죠?"

레디나가 그란덴의 다리를 세게 밟으며 단검을 꺼냈다.

휘리릭.

"다리라도 자를까요? 그 정도는 안 죽고요, 계속 생각하고는 있었던 부위에요."

단검이 휘둘러지는 소리에 그란덴은 저항을 포기하며 하벨을 노려보았다.

"대체 레디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내가……?"

하벨은 예상과 다른 말에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곧 낄낄 웃었다.

"이거, 오해가 깊은데? 세뇌는 내가 아니라 네가 당한 게 아닐까? 두 눈은 괜찮아? 잘 보는 거 맞아?"

"레디나가 네놈 때문에 이렇게 변했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레디나가 나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냐!"

그란덴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카샬이 보고해준 그대로 검은 달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하벨은 귀찮은 듯이 대답했다.

"검은 달이 쓰레기라고 대충 말해줬겠지."

"어떻게 아셨어요? 하지만 쓰레기를 뭐라고 말해요?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해도 쓰레기인데요."

레디나는 입을 살짝 가렸고, 그란덴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하벨은 침대에 걸터앉아서는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 오해하지 말고 들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싫다고 그랬는데 레디나가 따라왔어."

"도련님은 제 신이잖아요."

레디나가 키득키득 웃자 하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란덴."

"뭐?"

"뭐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욕망에 충실하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란덴은 같잖은 수작질을 하는 하벨을 연거푸 노려보았다.

"사실은 엄청 궁금하잖아? 레디나가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지, 레디나가 말한 게 사실인지 말이야."

하벨이 그란덴을 긁자 레디나는 손뼉을 마주치려다 다급히 하벨을 살폈다.

그란덴에 신경을 쓴다고 잠깐 잊어버렸지만, 하벨은 지금 자신보다 더 큰 일에 휘말렸다.

'…이 바보야! 도련님도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에르티안 왕실에서 옛 육체를 봤다고 했다. 그것도 잘린 머리를.

'그것부터 신경 써야 했는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왜 이렇게 서툰지.

하벨과 카샬, 그리고 모두와 함께하면서 하나씩 알게 됐다.

자신이 얼마나 비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레디나."

하벨의 목소리에 레디나는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괜찮으니까, 됐어. 지금은 너만 신경 써."

"……."

레디나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카샬이 목소리를 죽이며 그녀에게 슬쩍 말했다.

"이제 독심술이라는 게 진짜 있다고 생각하지?"

카샬이 종종 하벨이 독심술을 익힌 게 맞다며 말하곤 했는데, 몇 번이나 당해보니 확실했다.

레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란덴은 레디나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모르던,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디나는… 검은 달을 배신할 리가 없어. 절대로 그럴 수가 없어."

현재 상황을 부정하듯 그란덴은 이를 악물었다.

"왜?"

하벨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검은 달은 레디나의 전부니까."

"푸흡."

하벨은 그만 대답이 웃겨 실소를 내뱉었다.

"그란덴. 이제 그만 좀 하자."

"레디나를 돌려줘."

"레디나는 스스로 여기로 왔어. 검은 달이 아니라.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진 않잖아."

"……."

그란덴은 짧게 침묵했다.

하벨을 만나기 전부터 레디나한테 여러 가지를 들었다.

전부 허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없는 게 아니었으니까.

"네가 아는 검은 달은 없어. 레디나가 사랑하던 검은 달 역시 없어. 레디나가 여기에 왔다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증명하니까."

하벨은 선고하듯 그란덴에게 하나씩 알렸다.

"나를 죽여서 너희가 얻을 이득이 무엇이지?"

"너희가 독점하고 있는 정화제를……."

"나눠준다고? 그 뒤에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협력할 거라 생각했고? 아니면 정화제가 다 떨어질 때까지 정의라 믿으며 현실에 눈을 감을 생각인가 봐?"

싸아아.

그란덴은 치미는 감정에 온몸이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레디나의 모친이자 이전 주인을 배신한 네가 기댈 곳이 어디 있었겠어? 네가 하는 일은 정당하다. 네가 하는 일은 옳다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겠지."

하벨은 그란덴의 눈을 찌르듯 손가락을 내밀었다.

"너는 도망쳤어. 레디나를 버리고."

"아니야. 나는……."

"그래놓고 레디나가 검은 달을 배신할 수 없다고?"

하벨의 표정이 싹 변했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마라, 그란덴."

갑자기 하벨에게 몰아치는 압박감에 그란덴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검은 달은 저물었다. 그곳은 이제 정의를 울부짖던 단체가 아니야."

"…아, 아니야."

"세상에 멸망을 부르는, 검은 달이 없애왔던 악이 되었을 뿐이니까."

"그럴 리가… 없어!"

그란덴은 조금 전부터 밀려드는 감정에 파묻힐 것만 같았다.

갈 곳 없는 시선이 레디나한테 멈췄다.

이건 부끄러움이자 후회였다.

그란덴은 입술을 깨물며 부르르 떨었다.

현 검은 달의 수장인, 레이엘느. 그자가 분명 자신한테 속삭이지 않았던가.

―그란덴. 너는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내가 곧 정의며 내가 곧 검은 달이니까. 너는 그러면 돼.

부끄러웠다.

현실에서 눈을 돌린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러니까, 네가 알아봐."

하벨은 싱긋 웃자 그란덴은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에서 해방되었다. 멍하니 하벨을 바라보았다.

"…뭐?"

"네가 직접 눈으로 보라고. 대신, 때가 될 때까지 레디나가 배신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줘.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지금 나, 나를 풀어주겠다고."

"그럼. 나는 지금까지 상식이라는 걸 모르는 놈들과 부대껴서 네가 상식이라는 걸 가지고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하벨이 배시시 웃었다.

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저 모습에 그란덴은 경악하고, 또 경악했다.

"미쳤다고 생각해도 돼. 네가 직접 모든 사실을 알고 날뛰어줘. 검은 달이라는 이름을 먹칠하고 있는 놈들을 죽여줘. 나는 네가 그랬으면 좋겠어."

"무슨… 속셈이야?"

그란덴은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냐고!"

"속셈? 그런 거 없어.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든 너는 우직하니 네 갈 길을 갈 관상이 보이는데."

하벨은 장난기를 가득 담으며 다리를 꼬았다.

"자, 그란덴. 그냥 우리 이야기만 안 하면 되는 거야. 간단하지? 아니면 여기서 죽을래? 그래도 되긴 하는데. 아쉽게도 그냥은 못 죽어. 시체 처리 전문가한테 맡겨보려고."

페트리오.

―그 녀석이 미리 코스모피안 왕국으로 가 한 바퀴 돌고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카샬이 말하지 않았던가.

페트리오가 먼저 움직였다고.

'내가 코스모피안 왕국으로 갈 거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가버렸지. 하여튼, 대단해.'

이곳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뒷세계는 페트리오가 다 잡아먹었다.

이제는 무너트려야 할 곳도 없으니 해외로 진출하는 건 자연스러울지도 몰랐다.

'열심히 피를 모아뒀는데. 좀도둑이 얼마나 기발한 소식을 전해주려나.'

하벨은 기대하며 그란덴을 빤히 보았다.

"역시 살고 싶은 모양이야. 풀어줘."

레디나는 살기를 가득 뿌리며 그란덴의 손을 묶은 쇠사슬을 잘라냈다.

"배신자 새끼. 운이 좋은 줄 알아."

"카샬, 손님 나가신다."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을 맹렬하게 노려보는 그란덴을 위해 기꺼이 웃어주었다.

"이런 일은 꼭 절 맡기……."

"제가 갈게요, 도련님. 아직 식사 전이시죠? 잠도 주무시고 그러셔야죠."

카샬이 불만을 터트리던 그때, 레디나가 자진하며 말했다.

[응응. 이 몸도 이제 대장이 여기까지 하면 좋겠어.]

아라가 하벨에게 매달려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줄 수 있지, 대장? 응?]

하벨은 아라를 위해 한 발자국 물러났다.

몸이 무거운 것도 사실이었으니 잠을 한 번만 더 잔 뒤에 넬시아를 찾아가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하벨은 침대에 다리를 올리며 마지막으로 그란덴을 보며 활짝 웃었다.

"기대할게, 그란덴."

빈정거리는 말에도 그란덴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 * *

"…이제 됐어. 가."

레디나가 그란덴을 보냈다.

"레디나 나는 정말로……."

"닥치고, 내 말 잘 들어."

레디나는 입술을 열었다.

"도련님은 내 집이야. 누구든 도련님을 건드는 새끼는 내가 용서 안 해. 다 죽여버릴 거거든."

레디나가 살기를 드러내며 히쭉 웃자 그란덴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레디나."

"꺼져."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진짜 멍청한 새끼였어."

"그걸 이제야 알았어? 넌 멍청한 새끼가 맞아. 엄마를 외면했으면 끝까지 검은 달까지 외면하든가. 왜 이제 와서 다시 제대로 보는 건데?"

왜 이제 와서 다정한 삼촌 노릇을 하려는 건지.

짜증 났다.

너무 짜증 났다.

"…미안, 레디나.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닿지 않겠지만……."

"네 힘으로 의뢰를 잠깐 늦춰!"

레디나는 그란덴을 밀치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신성 국가 시엘느야. 멍청해도 이건 기억하겠지."

그란덴의 미간이 와락 구겨지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느새 더 멀어진 레디나를 보더니 몇 번이고 '미안'이라는 말을 꺼냈다.

이전 수장을 외면한 죄책감에 레디나의 손을 놓은 쪽은 자신이었으니까.

'진실을… 봐야겠어.'

그란덴은 숨을 짧게 몰아쉬며 그대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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