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다독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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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벨은 칼리우스를 조심스레 안고 가는 헤레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도련님께서는 이쪽으로 오시죠. 그만 누우셔야 합니다."
카샬이 하벨을 재촉했다.
[…맞아. 이 몸이 봐도 대장 지금 진짜 너무 안 좋아 보여. 링거 달았다고 안심하면 안 돼.]
"그렇지 않아도 이제 갈 거야."
하벨은 무너질 것 같은 몸을 붙잡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저는, 밖에서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레디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검은 달의 간부인 그란덴을 붙잡고 심문할 사이에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 줄이야.
"그러지 마. 때론 누구한테나 중요한 순간이 찾아오니까. 오늘이 그랬을 뿐이야."
하벨은 레디나의 자책을 부정했다.
"정 마음이 쓰이면 나중에 누님이랑 형님한테 혼날 때 슬쩍 보호 좀 해줘. 그러면 돼."
"그렇게 눈치 보이신다면 이참에 입까지 좀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카샬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대로 업고 가야 하나 망설여졌다.
"이제 쉴 거야. 요양 왔는데 나도 사건에 휩쓸리는 건 사양이라고."
하벨은 실실 웃었지만, 그 웃음마저 힘이 없어 보였다.
"…아."
방으로 걸어가던 하벨은 잠깐 아라를 보았다.
아라가 귀를 쫑긋 세웠다.
[왜에, 대장?]
"아까 어디로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바람이 저쪽 큰 나무로 가길 원했는데, 이 몸은 나중에 가면 돼. 대장이 잠들면, 아니, 몸이 좋아지면 갈 거야. 그러니까 대장은…….]
딸깍.
하벨 티에라의 과거가 켜지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왜 지금, 갑자기 그러는 것인가? 야. 야! 이 망할…….'
하벨은 불만에 휩싸이기도 전에 눈 앞에 펼쳐진 하벨 티에라의 과거를 바라보았다.
《콰아아앙!
거센 힘에 눈앞에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부서졌다.
심장이 당장 터질 듯이 뛰었고,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였다.
티에라 가문을 습격한 자가 있었다.
단 한 명.
아니, 한 명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도, 도련님. 어서… 도……."
카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대체 얼마나 다친 거지?
아니, 카샬은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딜 둘러봐도 건물 잔해뿐이고, 먼지만 자욱했다.
하지만 다리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지금 카샬한테 달려가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카샬한테서 튄 피였기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봐."
자욱한 연기 너머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이전에도 봤던, 검고 검은 존재.
자신을 마지막 용이라 소개했던 칼리우스, 그 이름이 떠올랐다.
"이봐. 귀가 안 들려?"
칼리우스는 살짝 무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놈을 보며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왜 티에라 가문을 공격한 거냐고.
왜 하필 우리를 공격을 한 거냐고.
아버지는 무사하신지, 카샬은 살아 있는지.
"아. 겁을 먹었구나."
칼리우스는 어쩐지 그립다는 표정을 했다.
나를 보면서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너는 안 죽여. 걱정하지 마. 아, 저 녀석도 안 죽일 거야."
"…왜."
"왜 죽이지 않는 거냐고?"
칼리우스는 가볍게 웃었다.
"약하니까."
그 말이 가슴을 찔렀다.
수없이 들어본 말이었다. 설마 이렇게 또 들을 줄이야.
"가여우니까. 정령들에게 버림받았으니까."
칼리우스의 시선이 허공을 떠돌았다.
"티에라 가문에 그렇게 많은 정령이 있는데 네 주변에는, 저 녀석 주변에는 하나도 없잖아. 그게 가여워서 죽이지 않으려고."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티에라 가문을 부수러 온 놈에게까지 동정을 받다니.
너무 비참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아버지를, 어떻게… 한 거야?"
"그것도 걱정하지 마. 룬델 티에라는 죽이지 않을 셈이야."
칼리우스가 장난기를 가득 담으며 웃었다.
"내가 부수고 싶은 건 티에라 그 자체니까. 정령들이 흩어지고, 정령사들이 죽고, 정화제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을 원하거든."
내 시선이 흔들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뭐야.
티에라를 부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 이해할 수 없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
칼리우스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가엽게 바라보았다.
"이해하지 마. 어차피 이해해봤자 너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약자니까."
"아니. 이, 이해 못 하는 건 너야. 티에라 가문을… 부서트리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알지. 왜 모르겠어. 이제 여기만 남았는데."
헤스트리아 왕국은 이미 무너졌다는 건가. 저놈이 부순 거야?
"그럼 세상을 왜… 무너트리는 건데? 요, 용이라며. 용은 세상의 수호자잖아!"
"수호자? 수호자라고? 하하하!"
칼리우스는 배를 잡고 웃었다.
뭐가 웃긴 거야. 제길, 대체 뭐가 웃기냐고.
속에서 두려움과 화가 치밀어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힘이 있었다면.
내게도 힘이 있었다면.
"웃겨서. 꼭 나 같잖아? 나도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었을 때가 있었거든. 하지만 딱 하나가 다르네."
칼리우스가 갑자기 손을 뻗어왔다.
콰직.
벽에 손만 댔을 뿐인데 우르르 무너졌다.
"힘도 없어서 입만 나불거리는 너랑 근본이 다르잖아? 나는 용이니까. 너, 운이 좋은 줄 알아. 아직도 내게 측은함이란 감정이 남아 있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눈 크게 뜨고 지켜 봐봐. 세상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서러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너무도 서러워 얼굴이 무너질 듯 일그러졌다.
"내게 모든 걸 빼앗은 건 너희야. 내게 희망을 앗아버린 건 너희니까."
칼리우스는 그렇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잖아?"
그리고 아이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벨은 눈을 깜박거리자 몸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바닥에 먼저 떨어진 건 피였다.
'용용아 너.'
하벨은 이런 생각은 하기 싫었지만, 자연스럽게 나오고 말았다.
'과거에는 카르밀을 닮아서 그런지… 진짜, 진짜 재수 없네.'
정말 한 대 콱, 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 * *
"…그, 잘 도착은 했는데요. 그게 말이죠."
<무, 무슨 일이 있더냐?>
라르웬은 룬델의 말에 뒷덜미를 긁적였다.
[아주 난리가 났지.]
루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리라니? 이게 무슨 소리더냐? 어서 말해주렴.>
"하."
라르웬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침착하게 들어주세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라르웬이 최대한 요약해서 말했음에도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었기에 몇 분 동안 설명이 이어져 도중에는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이거 내가 다른 정령들한테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하겠는데?]
루룸은 기가 찼다.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아버지?"
룬델에게서 대답이 없자 라르웬은 그를 재촉했다.
<그…….>
"압니다, 지금 아버지 심정이 어떤지 말입니다. 어쨌든, 사건은 다 해결됐고, 누님하고 하벨 상태를 유심히 보겠습니다."
<…둘 다 괜찮더냐?>
"누님은 아시다시피 과거 트라우마 때문에 마음이 아픈 거라 어떻게 될지는 누님한테 달렸고, 하벨은……."
라르웬은 진짜 독하게도 말도 안 듣는 하벨을 떠올리며 한숨이 또 새어 나왔다.
"지금 좀 안 좋네요. 헤레스가 치료했지만, 침식이 작용한 터라 곧 도착할 엘라힘 신관님을 기다려봐야겠습니다."
<…망할 새끼.>
룬델이 비속어를 입에 올리자 라르웬은 눈을 크게 뜨고 루룸은 앞발로 입을 가리며 씩 웃었다.
얼마나 열이 받았으면 저럴까 싶어 라르웬은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라르웬.>
"말씀하세요."
<클로저에는 어떻게 말할 셈이더냐.>
"지금은 안 됩니다. 클로저 내부에 숨어든 적들이 있어요.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검은 달 아지트를 모두 쓸었다고 해도 다른 나라는 아니잖아요?"
라르웬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상황이 복잡하네요. 얼마 전에 대장이 연락이 와서 '달님'하고 만나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벨한테 말하면 난리가 나겠죠?"
[당연한 질문을 왜 해?]
루룸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내가 잘못 물었네. 이건 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 * *
"…하아."
카샬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게 요양을 온 건지, 다치러 온 건지. 진짜 대단하십니다. 아주 대단하십니다."
오한이 와 덜덜 떠는 하벨을 보며 불만을 쏟아냈다.
저주에 걸려 침식이 진행된다는 걸 알면서도 힘을 사용하다니.
대체 얼마나 미련한 건지.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벨을 위해 주변 온기를 모아서 가져다줬지만, 떨림은 여전했다.
"…머리 울려, 카샬."
콜록.
하벨은 숨을 색색 내쉬며 카샬을 보았다.
[…아앗. 머리가 울리면 큰일이야!]
아라는 하벨의 머리 근처로 와 까치발을 들며 하벨을 이마를 통통 때렸다.
말랑한 촉감에 하벨은 실없이 웃음이 났다.
"아, 누님이랑 형님은……."
"둘째 도련님께서 단속하셨기에 어제 벌어진 일은 일단 밖으로 돌지 않을 겁니다. 크라마가 마법사들을 데리고 주변을 수색하고 있기도 하고요."
하벨이 자신에게 넬시아와 라르웬을 찾아가 상황을 보고하라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상황을 대비하라는 거였다.
"아가씨께서는… 아직도 상태가 좋진 않습니다."
"그래."
하벨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트라우마가 어떻게 한 번에 치료가 될까.
"…고마워."
하벨의 대답에 카샬을 이를 악물었다.
"고마운 게 아니라, 하아……. 대체 이 망할 사건은 왜 자꾸 도련님께 들러붙는 겁니까?"
어제 일이 계속 눈에 밟혔다.
하필 이곳에 죽었던 용이 남긴 마나가 있을 줄이야.
그게 칼리우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의 의식 속에 숨어 있던 용의 수장인 카르밀이 칼리우스의 몸을 빼앗았다니.
"…내 말이."
하벨은 피식 웃었다.
칼리우스의 일은 분명 에른스트와 관련이 없을 텐데.
"용용이는?"
"아직 잡니다. 주변에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정령들이 토닥거리고……."
"……?"
카샬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사실을 하벨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아라가 말해줬어."
[응. 이 몸이 말해줬어! 정령들이 용용이를 쓰다듬어 주면서 얼른 나으라고 말했다고 전해줬어.]
하벨은 당당하게 아라를 가리키며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달랬다.
사실 어제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고양이처럼 조용히 칼리우스의 방으로 갔다.
―이러면 아라가 슬퍼할 테지만, 오늘은 비밀로 해줄게. 사실, 이런 거 해보고 싶었거든.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건지, 작은 용의 모습 그대로 웅크려 자고 있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몰라도 '히히'하고 웃자 하벨은 마음이 포근해졌다.
이제 정말로 칼리우스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걸로 충분했다.
"밥 먹고 누님한테 들릴 테니까, 레디나부터 잠깐 불러줄래?"
"……?"
카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헛것이 들리나 봅니다. 커피를 좀 먹고 오겠습니다. 아주 진한 커피 말입니다."
[아니야. 카샬이 잘 들은 거야.]
아라가 카샬에게 날아가 어깨에 기댔다. 카샬은 흠칫 놀랐다.
"…아라 님?"
[빨리 대장을 말려줘, 응?]
"에이, 요양이잖아."
하벨이 툭 하고 꺼낸 말에 카샬이 당장 소리쳤다.
"이게 무슨 요양입니까!"
[맞아! 이건 요양이 아니야! 자꾸 이러면 이 몸이 막을 거야.]
"카샬, 아라야."
아라가 다급히 날아와 하벨의 입에 두 앞발을 올렸다. 곧바로 하벨은 놀랐다.
"……?"
[쉬잇.]
아라가 아랫입술을 바짝 올려서는 누가 봐도 화가 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벨은 그 모습에 웃음이 저절로 났다.
[대장은 이 몸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지?]
아라가 어떤 말을 할지 기대가 됐기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이 몸 말을 들어주는 거야. 오늘 이 몸하고 정령들이랑 침대에 누워서…….]
하벨이 손을 들어 아라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이 몸은, 히히, 간지럽, 히히히.]
"아라야. 때론 시간을 놓쳐서는 안 될 일이 있어. 나는 누님이 걱정돼. 누님이 어떤지 보고 왔지?"
[…으응. 이 몸도 넬시아가 걱정돼서 보고 왔는데, 으음.]
아라가 시선을 잠깐 돌렸다.
[넬시아의 마음이… 너무 아픈가 봐. 막 이것저것 던져서 깨지구 부서지구. 톰톰이가 엄청 슬퍼했어. 원래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는데, 이번에 나타난 틈의 세계 여파가 컸대.]
"그래. 클 만해. 너무도 크지."
룬델에게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었기에 하벨은 이해했다.
과거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왜 미치지 않을까.
자신도 과거가 다시 현실로 나타났기에 피가 마르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카샬."
"…예, 도련님."
카샬은 못마땅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란덴은 네가 보기에 어때 보였어?"
"회유가 가능한지 물으시는 겁니까?"
"그래. 네 눈은 정확하니까."
"가능합니다. 놈은 회유할 수 있습니다."
카샬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그렇게 보였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