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용용이와 용(3)
* * *
투투투투.
카르밀이 서 있는 땅이 갈라졌다.
[왜, 왜 갑자기 그러는 거야, 카르밀? 싸울 필요는 없잖아. 그건 용용이 몸이구, 대장도 지금 아프단 말이야.]
아라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정령이여. 이 세상에 마나가 사라졌다고 알려주던 내 말을 기억하는가?"
카르밀은 작은 저 정령에게 거대한 힘을 느끼며 정중히 답해주었다.
[으응. 기억해.]
아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이 세상에 떠도는 마나는 누가 만들었는지 알겠는가?"
하벨의 시선이 카르밀을 떠나지 않았다.
설마.
'…용이 죽은 이유가 이거였어?'
천천히 하벨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카르밀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우리란다. 우리가 죽음으로서 가지고 있던 마나를 전부 내놓았다."
'…대체 내가 죽고 난 후에 무슨 일이 터진 건가?'
하벨은 이젠 혼란스러웠다.
적어도 자신이 살았을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 죽음으로 무언가 상황이 변했다고 생각하니 왜 이렇게 아찔한지 몰랐다.
'어쩌면 내가 세계가 변한 모든 일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럼… 용이 사라진 게 아니라, 마나로서 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고?]
정령들은 카르밀의 말에 기겁했다.
설마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제대로 이해했구나. 우리는 죽었되, 죽지 않았지. 마나가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며 마법사란 놈들이 우리를 멋대로 휘두르고 이용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이 얼마나 끔찍했던가. 우리의 종에 불과한 자들이."
[우, 우린 몰랐어. 미안해.]
[우리는 그때, 세상이 합쳐진 그때… 어?]
[우리… 그때 뭘 한 거야?]
정령들은 곧 의문을 가졌다.
그때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우리는 기억을 잃을 수가 없는데. 인간과 달리 망각이 없으니까.]
"몰랐겠지. 애초에 너희는 존재 자체도 없었으니까."
[뭐어……?]
아라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지금 뭐라고 말한 거야, 카르밀? 정령이 존재하지 않았다니?]
"너희는 원래 그저 자연의 일부로 자연에서 조금 특별한 존재에 불과했지. 하지만 세상이 합쳐진 뒤에 달라지더구나."
카르밀은 손을 뻗었다.
"이렇게 말도 하고, 자아라는 개념이 확실하니 말이야."
충격에 빠진 정령들을 가엾게 바라보며 카르밀은 아무 말도 못 하는 하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르밀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웃음이 번졌다.
용왕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몰라도 그 역시 이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보였으니.
"이제 왜 내가 이 아가를, 칼리우스를 가엽게 여기는지 알았는가?"
카르밀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이 땅은 우리가, 내가 몸을 바쳐 구했다! 하나, 인간들은 이곳을 망친 것도 모자라 이 아가를 핍박했다. 이 아가의 작은 기쁨을 빼앗고 괴물이라 몰아세우며 희망마저 짓밟았구나."
카르밀은 칼리우스의 눈으로 다 보았다.
"갓 태어난 용이 무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칼리우스를 보호하고자 만들어 놓은 마법조차 틈의 세계에 빨려 결계가 일찌감치 풀려버렸다."
카르밀은 그때의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입가가 부들거렸다.
"모두에게 축복을 받아야 하는 탄생이었음에도 사람들에게 발견돼, 괴물이라 불리며 쫓겼다! 칼리우스의 의식 속에 심긴 나조차 확실한 그때, 이 아가를 살리려 어서 사람의 모습을 둔갑할 수 있는 마법을 가르쳐야 했던 그 비참함을 알고 있는가?"
칼리우스의 목소리로 카르밀은 칼리우스를 대신해 분노를 토했다.
"겨우 사람의 모습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칼리우스에게 손길을 뻗었다. 쫓기고, 쫓기다가 손에 넣은 온기가 얼마나 따스했겠는가."
[용용이가……?]
아라는 두 손을 꼭 쥐며 귀를 내리고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미숙한 이 아가의 마법이 풀리고, 또 용이 되자 단번에 태도를 바뀌더구나. 이 아가가 그리 쫓겼다. 용의 모습이 되는 게 두려워 그리… 필사적으로 사람이 되고자 했다."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카르밀의 목소리가 먹먹해졌다.
"…이 작은 아가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세상을, 아니, 마법사란 이름으로 이 아가를 이용해먹으려는 인간들을 대체 내가 왜 용서해야 하는가."
"그래서?"
하벨이 입을 열었다.
―나는 마지막 용으로서 이 세상과 너희에게 복수하겠노라.
하벨 티에라의 회귀 전 과거 속 칼리우스가 왜 '복수'를 들먹였는지 이제야 알았다.
근본적인 원인이 용들의 수장이었던 카르밀일 줄이야.
―…세상이, 그리고 네놈들이 용을 죽였으니. 너희도, 이 세상도 이제 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때 '용을 죽였다'라는 말을 내뱉은 것 역시 이해가 갔다.
용들이 몸을 바쳐 구했던 세상임에도 사람들이 용인 칼리우스를 배신했기에 그 분노감에 내지른 말이었겠지.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는 세상을 부수겠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을 구했던 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바쳤던 것도, 모든 걸 내어주었던 이들에게 죽었다.
그 이유만으로는 부족했다.
하벨은 카르밀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놈은 무얼 하겠다는 거지?"
"세상을 부수겠다. 이 세상을 우리가 구했으니, 그들의 수장인 내가 세계를 부수는 건 정당하지 않은가."
"…하."
하벨은 카르밀을 비웃었다.
"그 사상을 칼리우스에게 주입하려고 했어? 감히."
"감히?"
그 건방진 소리에 카르밀은 하벨을 매섭게 노려보았고, 땅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해일처럼 몰아치는 모습에 하벨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 안 돼!]
아라는 하벨 앞에 서서 앞발을 벌렸다.
[떼엑!]
아라가 혼을 내자 흙더미가 그대로 멈춰 우르르 땅으로 떨어졌다.
"…뭐?"
카르밀이 눈을 크게 떴다.
"네가 무어라 하든, 칼리우스는 내 사람이야."
하벨은 우쭐거렸다.
"복수하든 뭘 하든 그건 칼리우스가 결정하는 거야. 같잖은 네놈이 아니라."
이곳에 정령이 몇인가.
이전에 정령들이 카르밀 말대로 아주 희미한 존재감을 가졌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세계가 겹쳐졌고, 자신이 만들었던 물이 정령의 근원이 되었다.
그렇기에 정령은 물처럼 말을 하고, 자아를 가지며 자연보다 위에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으니.
'그리고 여기에 정령왕이 있다.'
하벨은 아라를 듬직하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당신 편이에요.
아라는 땅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제 땅은 널 허락하지 않을 거야.]
아라가 갈라진 땅을 다시 복구시켰다.
[바람도!]
바람이 잠잠해졌다.
[불도! 번개도! 전부 다 네 말을 듣지 않을 거라구!]
모든 자연이 아라의 명령에 잠잠해지자 정령들은 입이 간지러웠다.
당장이라도 그 이름을 외치고 싶었다.
자랑스러운 그 아름다운 이름을.
"이, 이게 무슨……."
카르밀은 당황했다. 자신은 용이었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용.
비록 이 육체가 칼리우스라고 하나, 그 역시 용일 텐데.
'어떻게 자연이 하나도 응답을 하지 않는 거지?'
카르밀은 아라를 잠깐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 령왕?'
아무리 정령이 자연의 위인 존재가 됐다 한들, 이렇게 자연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존재는 정령왕뿐이었다.
'설마.'
찰랑.
물이 움직였다.
카르밀의 시선이 소리를 따라가자 그곳에 하벨이 있었다.
저 작은 정령이 자연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혼자 물을 부리다니.
물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마나로 그 물을 짓누르려고 했지만, 곧 마나를 이를 거부했다.
"뭐……?"
카르밀은 지금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몰랐다.
마나가 적이 아니라고 감히 그러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속삭이며 카르밀의 말을 거부하고 외면했다.
슈우우욱.
물이 카르밀의 목덜미를 쥐었다.
그것만으로도 카르밀은 의식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일반 물이 아니었다. 영혼까지 뒤흔드는 물이었다.
"대체 네 정체가 뭐길래… 용인 나를 이렇게 억압할 수 있지?"
카르밀은 오만상을 쓰며 목에 힘을 주었다.
"얌전히 칼리우스의 의식 속에 잠들어라."
하벨은 카르밀에게 다가갔다.
'단단한 용이니 이 정도가 아니면 안 되겠지.'
갑자기 카르밀이 환하게 웃었다.
마치 이렇게 해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무슨 속셈이지?'
찝찝하고 의문이 맴도나, 하벨은 행동을 멈추질 않았다.
하벨이 칼리우스의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었다.
투웅!
칼리우스에게 미안하지만, 하벨은 생명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몸속의 물을 뒤흔들었다.
고통이 가해지는 만큼 의식은 본래의 주인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러려면 아주 큰 고통이 필요했다.
하벨은 뒤흔든 물을 한 번 더 강하게 흔들었다.
"…으으윽!"
용인 카르밀이 신음을 내뱉었고.
"…커헉!"
하벨이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걸 헤레스가 붙잡았다.
삐삐삐.
정화 장치가 시끄럽게 울리자 헤레스는 당장 정화제가 든 주사기를 꺼냈다.
[괘, 괜찮아, 대장?]
아라가 하벨을 쓰다듬었다.
"나, 나가!"
그때, 칼리우스가 외쳤다.
"내 몸에서 당장 나가라고, 카르밀! 더는 도련님을 아프게 하지 마!"
칼리우스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당기고, 팔을 세게 쥐었다.
"…아가야.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주거라."
카르밀이 칼리우스를 다독이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아이야."
"지랄… 하지 말고, 꺼져. 용용이가 나가라는 말 못 들었어?"
하벨은 눈을 반쯤 떠서는 카르밀을 노려보았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지. 더는 이 아가의 몸을 빼앗는 것도 위험하니까."
"용도 뻔뻔해야 할 수 있다니. 덕분에 잘 알았어."
함부로 칼리우스의 몸을 빼앗아놓고 이제 와서 그를 걱정하는 척이라니.
하벨은 아니꼬웠다.
"애초에 나는 이 아가를 해칠 마음이 없었구나. 마지막 남은 용인 칼리우스를 해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지."
카르밀은 땅에 손을 댔다.
[땅의 힘이라면 못 써! 이 몸이 막았어!]
아라는 카르밀을 바라보았다.
힘을 쓰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리는 듯 방긋 웃자 아라는 주춤거렸다.
"칼리우스야. 세상은 네가 바라보는 것보다 아름답지 않단다. 때론 바라보며 괴로워질 바에야 차라리 네 손으로 부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카르밀은 조용히 칼리우스에게 말을 꺼냈다.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카르밀, 네가 용의 지식으로써 나를 가르쳤다면 용이 세상의 수호자라고 몇 번이나 말해준 건 너잖아!"
칼리우스의 외침에 카르밀은 웃었다.
저 말이 맞았다. 아주 정곡을 찔러오니 웃음이 날 수밖에.
자신이 저 아이한테 용은 세상의 수호자라고 몇 번이나 말해주었다.
"그래. 그랬지."
세상의 수호자.
그 말은 용이 가진 마지막 긍지였으니.
"그러니 칼리우스 네가 내게 보여주렴. 아직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씁쓸함이 거세게 몰려오자 칼리우스는 손가락을 들어 하벨을 가리켰다.
"도련님이 희망이야! 내게 희망은 도련님이라고! 내 세계를 넓힌 것도, 나보고 강하다고 말해준 것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해준 것도!"
칼리우스는 카르밀이 자신에게도, 하벨에게도, 그리고 모두에게도 악의가 없다는 걸 유일하게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하지만 카르밀의 분노는 진심이었기에 혹여나 하벨을 해칠까 봐 무서웠다.
"전부, 전부 도련님이야! 그러니까, 내 희망을 빼앗지 말아줘!"
칼리우스는 간절하게 외쳤다.
피식.
카르밀이 웃었다.
저 어린 아가가 부리는 떼를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나 쓰다듬고 안아주고 싶은 것을.
"아가야."
카르밀이 부드럽게 칼리우스를 불렀다.
"여기에 마지막 남겨진 널 위해 우리의 마나를 남겨놓았다."
"…카르밀, 너 혹시 일부러 용용이가 이곳으로 오도록 마법사들을 유도한 건 아니지?"
마지막 마나라는 말에 하벨은 설마 하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는 아니었지만, 칼리우스가 우리의 마나를 감지하지 못하니 어쩌겠는가. 설령 이 아이를 써먹을 생각밖에 하지 않는 존재라도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해야지."
카르밀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마법사 협회가 카르밀이 친 덫에 걸려든 셈이었다.
'그래서 마법사 협회와 용용이가 이어진 거라니.'
하벨은 혀를 내둘렀다.
과거에 마법사 협회가 용용이를 이용한 게 아니라, 칼리우스, 아니, 카르밀이 마법사 협회를 이용한 게 틀림없었다.
"받거라."
땅에서부터 방대한 마나가 칼리우스의 손끝을 통해 스며들었다.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너무도 큰, 순수한 마나가 아닌가.
여기에 이런 건 없었는데.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용의 수장으로서 너에게 시험을 내리지. 내가 세상을 파괴하면 안 되는 이유를 가져오렴. 이 힘을 사용하면서 내게 정답을 알려주거라."
카르밀은 칼리우스에게 숙제를 내밀었다.
"그, 그러면 도련님을 해치지 않을 거야?"
푸핫.
카르밀은 웃었다.
어쩜 저렇게 순수한지. 참 걱정스러웠다.
"물론이란다."
카르밀은 칼리우스에게 다정히 말하다 조금 차갑게 하벨에게 손짓했다.
"인간의 아이야. 거의 다 죽어가면서 용왕이니 뭐니 무게 잡지 말고 이리 오렴."
"싫은데. …네가 와. 나 지금 완전 아프니까."
"…하. 이래서 어린애란."
카르밀은 이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적당한 만큼 마나를 남긴 채 이전처럼 일반 마나로 위장한 뒤에야 하벨에게 걸어갔다.
"칼리우스가 만든 그 마법은 완벽하지 않아. 그러니까 잘 보렴, 칼리우스."
카르밀은 하벨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허. 많이도 넣었네. 거기다 신의 은총까지 유지되고 있는 건가?"
카르밀은 구시렁거리며 무차별적으로 피를 쏟아 마법을 유지하는 게 아닌, 언제든 마나만 있다면 다시 복구할 수 있게 형태부터 잡아갔다.
가장 단단한 삼각형 모양을 이루며 살짝 옆에 뒀던 신의 은총을 조심스레 옮겨 틀을 닦았다.
"미안하구나."
카르밀은 사과한 뒤, 칼리우스의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뚝뚝.
삼각형 모양의 형태에 피가 쏟아지며 모양을 이뤘다.
균형 잡힌 모습에 하벨은 신기하게도 계속 가슴을 찌르던 통증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영광으로 알렴, 인간의 아이야. 용의 피는 귀중하며 이렇게 피로서 이어진 마나는 칼리우스 역시 그 위험을 안고 있으니."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네가 용용이를 비난하고, 그 몸을 빼앗았으니까. 하지만 용용아, 너는 고마워."
"이래서 인간의 아이란 유치하고, 유치한 생물이라니까."
"내가 너보다 더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는데?"
"인간의 아이야."
"하벨이야."
"그래, 하벨."
"뭐?"
"네 태도는 아니꼽지만, 칼리우스를 아껴주어 고맙구나."
카르밀은 진심을 담았다.
"우리 모두 혼자가 될 저 아이를 걱정했지만, 분명 우리의 희생 뒤에 평화가 찾아온 그 세상에서 행복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하벨을 만나기 전까지 칼리우스의 삶은 자신들이 바라던 것과 달랐다.
"이렇게 비참하게. 비참하게… 살아갈지는 몰랐구나."
마법사들에게 쫓기고, 괴물이라 손가락질받고, 집도 아닌 숲에서 잠을 청하고, 그럼에도 애정을 갈구해 사람 곁에서 떠나지 못하는, 칼리우스는 그런 비참한 삶을 살았다.
"이러니 왜 화가 나지 않을까. 왜 세상이 밉지 않겠는가."
"그건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네 감정을 용용이한테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는 걸 알잖아?"
말도 따박따박하고, 훈계까지 하는 하벨의 꼴에 카르밀은 참 우습다 싶었다.
하지만 저 말이 맞았다.
순간 분노에 휩싸인 건 사실이니까.
카르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칼리우스. 우리는 너를 사랑했단다. 모든 걸 희생했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너만은 그 속에 넣을 수 없었지. 결코, 너를 버린 게 아니란다.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칼리우스가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이제 괜찮아, 카르밀. 하벨을, 아라를, 모두를 만났어. 나는 이제 행복해. 그 어떤 순간보다 정말 행복해."
그리고 칼리우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니 나는 세상을 파괴하지 않을 거야. 모두가 하나씩 손을 댄 이 세계를 아낄 거야. 내가 마나를 되돌릴게, 카르밀. 나도… 위대한 용이니까."
피식.
카르밀이 웃었다.
의식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는 헤레스를 바라보았다.
"칼리우스가 좀 아플 거란다. 원래 성장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니 부탁한단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칼리우스 님은 제가 지킬 거예요."
헤레스는 목소리에 힘을 가득 주었다.
"고맙구나."
카르밀이 다시 눈을 감자 칼리우스가 스르르 땅으로 쓰러져 손가락부터 까맣게 물들었다.
'…이래서 그렇게 화가 났구나, 카르밀.'
하벨은 칼리우스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왜 카르밀이 화가 났는지, 왜 세상을 부수자고 칼리우스에게 말했는지 확실히 이해했다.
팔뚝만큼이나 작은 용이 칼리우스였다.
저렇게 작은 용이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 자라니.
하벨 티에라가 회귀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괴로움이 칼리우스를 덮쳤는지를 이해했다.
[…용용이는 이 몸만큼 작았어.]
아라가 측은한 마음을 드러냈지만, 사실 아라는 여전히 칼리우스의 반도 안 될 만큼 작았다.
하벨은 칼리우스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등에 달린 날개가 파닥였다.
힘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작았을 때, 이 모습을 들켰겠지.
그래서 카르밀이 말한 것처럼 무서워서 이 모습을 함부로 보여주지 못했겠지.
하지만 칼리우스는 자신을 위해 그 높은 마법사의 탑에서 뛰어내렸다.
두려웠음에도 날개를 펼치고, 자신에게 다가와줬다.
"…잘했어, 용용아."
하벨은 칼리우스를 꽉 안아주며 그를 다시 쓰다듬었다.
칼리우스가 원하던 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닐 게 분명했다.
따스한 품과 손길.
그리고 다정한 말이었겠지.
"지금까지 잘 버텼어."
칼리우스는 하벨의 토닥임에 그의 옷자락을 꽉 쥐고 그저 서럽게 울었다.
"…으흑. 흐으윽."
"네가 지키려는 세상은 나도 함께 지킬게. 약속해, 칼리우스."
하벨은 하벨 티에라를 위해 했던 약속 위에 칼리우스를 위한 약속을 얹었다.
후.
검은 불꽃이 조용히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