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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73화 (273/415)

273화. 용용이와 용(2)

* * *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참는 칼리우스의 표정과 함께 랜턴에 다시 검은 불꽃이 붙었다.

화르르륵.

다시는 꺼지지 않을 만큼 활활 타올라 자신의 팔마저 익을 것만 같았다.

'…기어코 이렇게 되어버렸다.'

하벨은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세상을 멸망시킨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칼리우스였다.

분명 칼리우스가 천천히 바뀌어나갈 거라 믿었다.

실제로도 그 불꽃이 처음과 비교하면 절반 이상 줄어든 크기라 자신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려줬다.

'…다만, 가장 큰 이유가 남아 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이 땅에 있었고.

하벨은 칼리우스에게 걸어갔다.

"지금, 그 목소리가 너한테 뭐라고 하고 있어?"

칼리우스는 하벨이 다가온 이상 뒷걸음질 쳤다.

지금 자신을 놓아버려 하벨을 해칠 것만 같았다.

―증오하라.

"…증오하라고."

―분노하라.

"분노하라고."

칼리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계속 귀에 맴도는 그 소리에 미칠 것만 같았다.

"…나. 나, 너무 무서워."

하벨이 지금 만들어낸 물로 자신을 막아주고 있다는 걸 알아도 무서웠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바로 그 감정에 동화되어가는 자신이었다.

무언가 알 듯 말 듯 한 사실이 머릿속으로 흘러오면서 마나가 요동쳤다.

"애초에 여기…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하나 봐."

분명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자신은 틀려먹었다.

"용용아."

하벨이 칼리우스가 물러난 만큼 다가갔다.

"지금 잘 버티고 있잖아? 예전과 달리 아직 누굴 공격하지 않았어."

하벨은 아라와 헤레스, 그리고 정령들을 가리켰다.

"네가 누구인지 잊으면 안 돼. 이름을 속으로 되뇌어."

자신이 먹히지 않으려면 이름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이름이야말로 자신이 자신이라는 걸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응."

"천천히 네 마나로 여기 돌멩이를 계속 띄우고 있어."

마나를 움직여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정신력을 한곳에 모으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어떤 존재가 칼리우스의 정신력을 흩트려 놓고 있으니.

하벨이 한쪽 무릎을 꿇고 땅에 손을 댔다.

"내가 먼저 살필게. 넌 걱정하지 말고 정신을 한곳에 붙잡아."

하벨의 눈동자가 다시 푸르게 물들었다.

이곳에 있는 물의 사념을 끌어올 셈이었다. 장소가 정확하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을 테지.

'내게 모이거라.'

촤아악.

하벨이 물줄기를 찾자마자 명령했다.

땅에서 물이 솟아올라 마치 손길을 느끼려 다가오는 것처럼 하벨 주변에 맴돌았다.

가슴팍이 또 지끈거려왔지만, 하벨은 꾹 참고는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내게 이곳에 사념을 보이거라.'

물은 기뻐 날뛰며 하벨에게 이곳에 있었던 기억을 전부를 내보였다.

파직.

물속에 여러 글자가 떠돌아다녔다.

아주 작게 쓰였지만, 하벨은 그 글자가 머릿속에 전부 와닿았다.

'…으으.'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몰라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져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하벨이 바라본 건 각자 따로 노는 글자가 아닌 서로 이어지는 글자였다.

'이게 아니야.'

이곳에 누가 왔는지, 무얼 했는지, 쓸데없는 말이 많았다.

기껏 멈췄던 코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대장! 그만해!]

아라가 소리쳤고, 헤레스가 하벨의 코피를 닦아주었다.

"도련님. 이 이상 하시면 안 됩니다. 잠깐만, 정말 잠깐만 숨 좀 돌려주세요."

애초에 하벨이 이곳에 온 이유는 바안의 명령이기도 하면서 요양 목적이 아닌가.

이런 식이면 요양은커녕, 쉬는 것도 무서워서 말을 못 할 지경이었다.

'나는 괜찮다.'

하벨은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말 대신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괜찮다고 알렸다.

칼리우스가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는 이상, 반드시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략적으로라도 찾아야 그를 도울 수가 있었다.

"…읍."

하벨은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커다란 고통에 신음을 쏟았다.

한 장.

두 장.

여러 개 책을 옆에 쌓아두는 느낌으로 하나씩 되짚어가다 하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찾았다.'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물속에 남아 있었다.

「용이 이곳에 있었다.

두 세상이 합쳐졌다.

용은 바라보았다.

마나가 사라졌다.

용은 스스로 죽었다.

마지막 용의 알이 남았다.」

하나씩 글자가 이어지고 쌓일 때마다 누군가 제 머리를 망치로 힘껏 후려치는 느낌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글자까지 읽고 난 후에야 하벨은 당장 물을 흐트러뜨리다 그만 주저앉았다.

"하."

짧으면서도 깊은숨을 내쉰 하벨의 눈동자에 핏줄이 섰다.

'그러니까…….'

하벨은 머릿속에서 자신이 보았던 글자들을 조합하다가 목구멍을 건드는 익숙한 뜨거움에 그만 내뱉고 말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피가 흙을 적시고, 하벨의 신발을 적셨음에도 생각을 멈추질 않았다.

'…용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하벨은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벌벌 떨던 칼리우스가 짧은 미소를 지었다.

눈빛이 싹 뒤바뀌었다.

머리카락을 잡은 손을 천천히 내리며 온화한 목소리를 냈다.

"그 사실을 알아버렸는가."

[용용… 아?]

아라가 낯선 눈빛으로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칼리우스와 다른 느낌이 들어 아라는 뒤로 물러나 하벨의 옷자락을 쥐었다.

"…용용이는 어디로 갔지?"

하벨은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칼리우스가 변했다.

이는 칼리우스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힘이 그를 덮친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저 의식이 칼리우스에게 깃들었을지도 몰랐다.

"여기에 있단다, 인간의 아이여."

놈은 칼리우스의 몸을 가리켰다.

"다들 날 보고 '아이'라고 말하는 게 취미인가 모르겠네. 네가 얼마나 살았는지 몰라도 나도 나이라면 어딜 가도 안 밀리거든."

57일째라는 말이 하벨의 입에 맴돌았지만, 꾹 참았다.

아마도 카샬이 있었으면 내뱉었겠지.

"어서 용용이의 몸을 내놔. 너 때문에 용용이가 힘든 거라면 용서할 생각도 없으니까."

"이 아가의 이름은 '칼리우스'란다, 인간의 아이야."

놈은 칼리우스의 얼굴로 비웃음을 그렸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 열 받았다.

"내가 그걸 모르겠어? 딴말하지 말고 꺼지라고."

[맞아. 이 몸도 알고 있어! 얼른 용용이를 불러내! 나, 나쁜 짓 그만하구!]

"이 아가가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길 바랐는데 기어코 내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가는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듣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하벨은 자신을 억누르는 기세에 말을 멈추고 놈을 바라보았다.

"잘 듣거라, 인간의 아이야."

"아니."

하벨 역시 권능을 끌어오며 놈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바다가 넘실거리는 듯한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자 순간, 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인간인 네가 어, 어떻게?"

"자기소개의 기본은 이름부터야. 용용이의 의식에서 기생해 기억까지 봤다면 내가 누구인지 알겠지. 그럼 네가 말할 차례야. 이름 말이야."

당돌한 하벨의 말에 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용의 수장이었던 '카르밀'이다."

"용은 왜 죽어버린 거지?"

[…오오옵!]

하벨이 꺼낸 말에 아라가 깜짝 놀랐다.

[뭐어?]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진짜로? 정말이야? 사라진 게 아니라고?]

정령들까지 호들갑을 떨자 카르밀은 활짝 웃었다. 여전히 칼리우스와 다른 웃음이었다.

"역시 보았구나, 인간의 아이야."

카르밀은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용은 사라진 게 아니라 세상을 위해 기꺼이 죽었다."

"하지만 세상에 불만을 가득 품은 것처럼 보이던데?"

"너희에게 안타깝겠지만, 이 세계는 멸망해야 하구나."

카르밀은 정령들을 딱하게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 너 지금 네가 누구인지 잊었어? 너는 용이야. 세상을 수호해야 하는 용 말이야!]

"이 아가는 우리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지. 이 아가의 부모가 내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했기에 내 의식을 마법으로 심을 수 있었다."

카르밀은 다시금 칼리우스의 손으로 가슴팍에 올리며 토닥였다.

"부디, 칼리우스를 올바르게 이끌어 달라고 말이지."

"…그게 용의 지식이었나?"

하벨은 칼리우스가 종종 언급했던 '용의 지식'을 떠올려 물었다.

"그래. 이는 칼리우스를 위해 내가 배치한 나의 지식이지."

카르밀은 하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용왕. 그 단어는 나한테서 없는 말이구나. 아주 낯선 존재라는 의미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칼리우스를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보았다. 하지만 나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지."

"어떤 가능성을 말하는 거지?"

"이 아이와 세상. 그 둘을……."

"개소리 집어치워!"

하벨은 당장 언성을 올렸고, 카르밀은 놀랍다는 눈을 했다.

"왜 네가 화를 내지?"

"그럼 누가 내? 누가 화를 내는데!"

하벨은 카르밀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이 몸도 화를 낼 거야. 방금 그 말은 이 몸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구!]

"대체 어디에서 화를 내는지 모르겠구나."

아라까지 성을 내자 카르밀은 하벨과 아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네놈이 칼리우스의 의식 속에서 제대로 봤다면 그딴 개소리는 하지 못했을 거야!"

[맞아! 용용이를 멋대로 판단하지 마! 용용이는 엄청 똑똑하구, 엄청 대단하고, 엄청 멋지단 말이야!]

"칼리우스 님을 놓아줘. 당신이 함부로 판단해도 될 분이 아니라고. 그분의 다정함을 네가 뭘 알아?"

헤레스 역시 언성을 높였다.

서툴지만, 칼리우스는 언제나 배워야 할 하나가 있다면 그 하나를 위해 끝까지 붙잡으면서 배워왔다.

혹시 카르밀이 칼리우스의 소심한 부분을 보고 말하는 거라면 더더욱 화가 났다.

세상이 그를 그렇게 몰아넣었기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라면서 만들어진 성격이었다.

"칼리우스 님이 그렇게 걱정됐다면 혼자 남기지 말았어야지! 왜 이제야 걱정하는 척을 하는 거야?"

"아. 다들 칼리우스를 위해 화를 내는 건가?"

카르밀이 히쭉 웃었다.

칼리우스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하벨은 이를 악물었다.

"칼리우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지금은 얼마나 노력하는지 봤으면서 그딴 개소리를 지껄여?"

"이 아가는… 안타깝지만, 진정한 용이 될 수 없구나. 그러기에 너무 더뎌. 성장도, 발전도, 미래도 없는 이 아이가 나는 항상 가여웠기에 도와주려……."

"용용아."

하벨은 카르밀의 개소리를 자르며 칼리우스를 불렀다.

"내 목소리 들리지? 분명히 듣고 있을 거야."

하벨 티에라가 자신의 의식 속에 있듯 칼리우스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건 네 몸이야. 주도권은 네가 가지고 있어. 이딴 개소리를 계속 듣고 있을 셈이야?"

카르밀의 눈썹이 갑자기 안쪽으로 모였다.

역시나 반응이 있었다.

"내가 말했지? 너는 성장했다고. 강해졌다고. 내가 장담할게, 용용아."

하벨은 씩 웃었다.

"너는 미래에 그 누구보다 강해져."

미래에, 지금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미래에 칼리우스는 세상의 파멸을 불러올 존재가 될 테니 강해지는 건 분명했다.

그러니 장담할 수 있었다.

"칼리우스. 잘 들으렴."

카르밀은 몸을 돌려달라 소리를 지르는 칼리우스를 토닥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은 멸망하고 있구나. 나는 너를 이 세계에서 지켜주려는 거란다. 더는 상처 받지 않게. 희망을 품어서 슬프지 않게 말이다."

"그걸 당신이 판단할 권리는 없어."

마법사인 헤레스는 마나를 끌어오며 마나의 축복을 받은 용에게 반기를 들었다.

"판단?"

카르밀은 헤레스의 말을 한껏 비웃었다.

지금 누가 누구 앞에서 권리를 들이미는 건지.

"나는 그럴 권리가 있구나."

카르밀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리석은 이들이여. 세상은 본디 둘이었지.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같되 서로 다른 세상이 존재했다."

카르밀은 그날을 떠올렸다.

두 세계가 서로를 보게 되었던 날을.

"…뭐라고?"

하벨은 잠깐 사고가 정지됐다.

두 세계라니.

"모종의 이유로 두 평행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 아주 순식간이었지."

"언제…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하벨은 갑자기 입안이 바짝 말랐다.

"오래전에. 정확한 날짜는 모르는구나. 내 의식을 칼리우스에게 심었어도 완전하지 않으니."

카르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하벨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찝찝함에 초조함을 드러냈다.

세계가 갑자기, 이유 없이 합쳐졌을 리는 없었다.

"우리 용들은 세계가 합쳐진다는 걸 그 누구보다 빨리 알았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같되, 다른 두 세계가 만난다면 분명 혼란과 혼돈이 일어날 게 분명해 이를 막아야 했지. …설령 어떤 부작용이 오더라도."

카르밀은 한탄이 가득한 목소리로 먹먹함을 나타냈다.

"세계가 하나로 합쳐진 그 날, 마나가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이 생겨났을 것 같나?"

"…틈의 세계가 그때 만들어진 거야?"

하벨은 설마 하며 물었다.

"똑똑하구나."

살짝 미소를 흘린 카르밀을 보자마자 하벨은 목에 단번에 힘을 주었다.

"그게 대체 뭔데? 틈의 세계란 대체 뭐냔 말이야!"

류아가, 전 대신들이, 어인들이, 그리고 이젠 세계가 합쳐서 나타난 거라니.

"글쎄. 두 세계가 합쳐져 생긴 부작용이 아닐까 싶은데, 나도 정확한 건 모르구나. 내가 그곳이 무언인지 알았다면 칼리우스에게 알려줬겠지. 지금은 그저 마나를 흡수하며 세상의 멸망을 앞당기는 끔찍하고, 역겨운 곳일 뿐이구나."

'…용들의 수장도 모른다니.'

하벨은 서황이 떠올랐다. 그렇게 죽이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기에 후회하는구나. 우리의 희생이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니. 오히려 새로운 멸망을 부르지 않았던가."

카르밀은 슬픔이 가득 담아 정령들을 보았다.

"너희 역시 후회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세상을 수호한다면 유지하는 건 너희의 몫이었다."

카르밀의 말에 정령들 역시 덩달아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가고, 심지어 너희를 볼 수 있는 정령사마저 너희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희망이… 이곳에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아."

카르밀은 하벨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쿠우우웅.

발밑이 흔들렸다.

"…그러니 나는 이 세계를 부숴버리겠다."

순수하고, 또렷한 분노라는 감정이 카르밀의 눈동자에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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