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용용이와 용
* * *
'…뭐?'
하벨은 기가 찼다.
왜 하필 이 순간에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건지.
"용용아. 너 왜 그래?"
하벨은 칼리우스를 손을 잡았다.
[지, 진정해, 용용아. 심호흡부터 해보자. 이 몸을 따라 해줘. 후. 하.]
아라가 칼리우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를 진정시켜 보았다.
"…도련님."
하지만 칼리우스에게 일어난 혼란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숨소리가 빨라지자 하벨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용용아."
"나."
칼리우스의 눈꼬리가 살짝 매서워졌다.
"나, 지금 너무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
하벨이 칼리우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맞아요. 지금 어떻게 이상한지 말씀해주실래요?"
헤레스가 칼리우스의 손을 잡았다.
칼리우스는 용이기에 그가 어디 다치거나 아픈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만큼 헤레스는 너무도 놀랐다.
"예전에도 이랬어. 이 땅이 용용이한테 무슨 작용을 하는가 봐."
하벨은 짧게나마 헤레스를 진정시킬 말을 꺼냈다.
"어떤 작용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 사실을 알려고 용용이를 데려온 것도 있어."
이곳에 정령들이 많아진 만큼 순수한 마나가 가득했다.
요새 칼리우스가 마나를 사용할 일이 많아 그가 반드시 이곳에 와야 할 이유도 있었고.
하지만 이전보다 심해질 줄은 몰랐다.
'마나 탓인가?'
하벨은 지금 상황에서 마나와 얽힌 무언가가 작동해 칼리우스를 흔드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막."
칼리우스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꺼냈다.
"막, 소리가 들려. 소리가 너무 많이 들려. 처음… 처음 왔을 때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려."
또 자신의 감정과는 다른,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이 땅에 무언가가 있어. 나를 자꾸 불러. 나보고, 나보고 분노해야 한다고 말해. 나보고 무언가를 잊으면 안 된다고 그러는데. 나는 몰라."
칼리우스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하벨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어, 어떡해, 도련님."
"진정해, 용용아."
"내가 사로잡혀 버릴 것 같아. 내가 나를 놓아버릴 것 같아!"
"용용아, 나 봐봐."
하벨은 당장 칼리우스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카샬을 말렸다.
우선 칼리우스의 정신부터 잡아야 했다.
"모두 잠깐 조용히 해줘."
하벨은 모두에게 조용하길 요청했지만, 일부 정령들은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해 떠들며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했다.
[잠깐만 조용히 해줘. 지금 용용이 상태가 좋지 않아. 부탁이야.]
하벨의 미간이 찌푸려질 때쯤, 아라가 답답한 마음에 정령들을 보며 호소했다.
떠들던 정령들마저 입을 다물고 마치 원래 그랬듯이 자연스럽게 아라를 주목했다.
[고마워, 모두들.]
아라가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하벨은 물 흐르듯 아라의 말을 듣는 정령들의 행동에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칼리우스를 진정시켰다.
"용용아. 심호흡부터 해."
후. 하.
칼리우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라가 가르쳐줬던 방법으로 몇 번이고 심호흡했다.
"용용아. 너는 강해졌어."
하벨이 던진 말에 칼리우스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땅이 너한테 무어라 말했는지 나는 몰라. 아마 네가 나한테 말해주는 것도 일부일 뿐이겠지. 그렇지?"
"으… 으응."
칼리우스는 당장 울먹거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용용아. 네가 그 말에 휩쓸려버리는 순간, 너는 더는 네가 아니게 되는 거야."
"그, 그러면 어떡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랑 같이 너한테 억지로 의지를 주입하는 곳을 찾자."
"내, 내가 먹히면 어떡해."
하벨이 용왕의 힘을 끌어올렸다.
지끈.
가슴팍에서부터 통증이 올라왔지만, 괜찮았다.
칼리우스가 온전한 용이 되기 전까지 자신이 감당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몽글.
용왕의 힘이 담긴 물이 나타나자 정령들이 그 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다다.]
[바다야.]
아라가 꺼냈던 말조차 잊어버릴 만큼 하벨이 꺼낸 그 힘은 보자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몰려왔다.
오죽하면 그 그리움이 너무 커 울먹이거나 벌써 우는 정령들마저 생겨날 정도였다.
[대장은 지금 그 힘은 꺼내면 안 되는…….]
아라가 하벨을 말리려다 칼리우스의 숨소리가 편해지자 귀를 천천히 내렸다.
[…건데. 지금은, 지금은 이 몸이 생각해도 이게 옳아!]
아라는 손바닥에 힘을 꽉 주었다.
하벨이 가지고 있는 그 힘은 모든 걸 어루만지는 포근함이 있었다.
그 느낌은 자신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건 칼리우스의 표정만 봐도 충분히 이해했다.
"봤지? 이제 괜찮지?"
하벨이 씩 웃었다.
칼리우스는 울먹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러면 도련님이 아픈데? 지금, 내 마법이 작동하는 게 느껴지는데?"
"괜찮아. 지금은 널 억누르는 알 수 없는 힘부터 신경 쓰자고."
하벨은 언제까지 칼리우스가 가진 불안함을 놔두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바로 오늘 해결 봐야 했다.
"카샬. 너는 형님이랑 누님한테 연락 좀 해줘. 걱정하실라."
하벨은 카샬에게 우선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알아야 할 테니까.
그래야 정령 기사들을 자연스럽게 물려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카샬이 불만을 가진 채로 입을 열었지만, 지금은 주변 상황을 통제해야 할 때였다.
"아. 레디나한테도 말해줘. 지금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하벨은 이어 지시를 내린 뒤에 칼리우스에게 말했다.
"앞장 서줘, 용용아.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저도 있어요, 칼리우스 님."
[이 몸도 있어. 절대로 포기하면 안 돼, 용용아.]
칼리우스는 그들의 응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광증에 시달리는 이처럼 칼리우스는 걸으면서도 알 수 없는 의지와 싸우고 있었다.
[…아라야.]
말없이 칼리우스를 따라가던 도중 정령이 슬쩍 말을 걸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칼리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저 아이가 궁금하기도 했다.
[으응.]
아라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저 칼리우스라는 아이 말이야. 대체 누구인데 하벨이 저렇게까지 하는 거야?]
[…용용이는 용이야. 이 몸의 친구구.]
아라는 하나라도 칼리우스를 응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순간, 칼리우스를 보는 정령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용이… 살아 있었어?]
[…헛.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용이 살아 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저렇게 작은 아이가 용이었다니.]
정령들은 서로를 보며 작게 속닥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비록 왕이 모습을 감췄지만, 용을 지켜야 한다는 걸.
세계를 유지하는 자신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만,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하벨 옆에 용이 있었어.]
용이 하벨을 선택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일까.
그렇다면 하벨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정말 마지막으로 인간을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
정령들을 서로를 보며 굳은 결심을 했다.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
[나는 잠깐 공기를 움직여서 말을 흘릴게.]
[나도, 나도!]
[그럼 주변에 누가 없는지 살필게.]
[나는 정령 기사들이 오지 못하게 막을게.]
갑자기 하나씩 역할을 맡자 아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 몸한테 알려줘.]
[아라야. 우리는 너를 믿어.]
정령들을 아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장소를 하벨이 주었지만, 겨우 한 번 봤지만, 아라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꼭, 왕이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라를 위한 장소를 누구 하나 거절하지 않고 만들었다.
아주 행복하게.
[하벨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해줬지만, 그래도 아라 너를 믿고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들어줄 수 있어?]
[응응! 이 몸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
아라가 그들의 진심을 받아들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벨. 우리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해.]
하벨은 정령이 꺼내는 그 진지한 목소리에 잠깐 걸음을 늦추고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간절하게 자신을 보는지 몰랐다.
[우리가 인간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정말, 처음이야.]
"말해봐. 들어줄게."
[왕께서 사라지시고, 정령사마저 우릴 배신했어. 사람들은 우리를 계속 죽이고, 오염을… 점점 늘리기만 해. 세상의 멸망을 가까워져 오는데 우리는 아무한테도 말할 수가 없었어.]
[인간이 싫어, 무서워.]
[…그래도 곁을 떠날 수가 없었어. 정령사가 없으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사람들은 우리를 볼 수 없으니까.]
정령들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꾹 참으며 하벨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네 소식을 들었어, 하벨.]
어둡던 밤하늘에 나타난 달과 같았다.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지.
두 번째에는 의문이.
세 번째에는 호기심이.
네 번째에는 희망이 샘솟았다.
다섯 번째 들어서야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정령사가 나타났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리고 널 봤어, 아라야.]
하벨 옆에 있는 작고 작은 정령.
처음에는 정령일까 싶을 정도로 아주 미약했던 그 힘이 점점 달라졌다.
모두에게 이곳을 안내했던, 그저 단 하나의 정령이라고 생각하던 아라의 소식이 닿았다.
―아라가 우리를 인도했어. 아라가 길을 잃은 우리를 인도했다고!
왕께서 가진 힘.
이 소식이 자신들에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라를 본 순간 불안함은 싹 사라졌다.
이미 저렇게 반짝이는데, 보는 순간 사랑스러움 가득한데 그게 무슨 소용일까.
[…이 몸을?]
아라가 깜짝 놀라 조심스레 꼬리를 붙잡았다.
아라의 목소리에 모두가 자연스럽게 명령을 따랐다.
하지만 정령들은 그 이름을 감히 올리지 않았다.
아직 저렇게 작고 작기에 혹여나 큰일이라도 날까 두려워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응. 그러니 괜찮아. 이젠 말할 수 있어. 도와달라고, 세상이 이렇게 엉망이라고 말할 수 있어!]
정령들은 아라가 안심할 수 있게 배시시 웃었다.
[용은 사라졌어.]
정령들은 다시 하벨을 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용이 사라지고 난 후에 세상에 퍼진 마나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미치인.'
하벨은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봄이 찾아온 것처럼 따뜻하고 잔잔한 바람에 꽃이 휘날리는, 누가 봐도 평화로운 풍경 속에 갑자기 벼락이 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부터 시작해 뭐가 갑자기 터지는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 내가 보지 않으려고 했던 부분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미 멸망하고 있었고, 모두가 멀리서 세상을 바라보기에 천천히 죽어간다는 사실을 일상처럼 겪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신도 아예 외면하고 있었고.
이 와중에 랜턴이 마치 동의하듯 덩달아 흔들리자 하벨은 괜히 랜턴을 건드렸다.
'넌 조용히 하거라, 하벨 티에라.'
[왜… 에? 왜 그런 거야?]
아라가 놀라며 물었다.
[남아 있는 마나가 바람처럼 계속 돌아야 하는데 틈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또.'
하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또 틈의 세계인가.'
대체 틈의 세계란 무엇이길래 그 속에 어인들이 얽매여 있으며 괴물로 변한 이들은 물론 마나까지 빨려 들어가는 건지.
세계에 일어나는 단순한 균열이라기엔 이미 그 사실을 넘어버렸다.
[물이 세상을 이루는 근원이라면 마나는 그 근원을 유지해주는 힘이야. 근원부터 오염된 지금, 마나까지 사라진다면 세상은 정말 끝이야.]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든 마나가 흘러가게 했지만, 최근에 틈의 세계가 갑자기 너무도 많이 등장했어.]
'…나 때문이다.'
하벨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고, 헤레스는 하벨의 표정을 바라보며 어떤 상황인지 유추할 수밖에 없어 답답했다.
[이렇게 마나가 계속 빠져나가는 상황이라서 우리는 당연히 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어.]
세계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자꾸만 멸망으로 향하는 모래시계를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찾을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라, 찾을 수가 없었어. 단 하나의 용이라고 있다면 마나의 흐름이 이렇게 엉망으로 흐르지 않을 테니까. 그랬으면 우리가 찾았을 거야.]
하벨은 비로소 정령들이 용을 왜 지키려는지 알았다.
그리고 칼리우스 역시 아라처럼 불안정하다는 사실도.
'…그렇다면 그 불안정함이 지금 칼리우스에게 어떤 작용을 한다는 걸까.'
이곳은 기존 마법사 협회가 탐을 낸 땅이고, 가지려고 했을 정도로 가공되지 않은 마나가 담긴 물건인 마성물이 가득했으니까.
[마나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용이 있어야 해. 용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나의 축복을 받았으니까.]
[축복받았다는 건 유일하게 마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야. 정령사인 하벨 네가 우리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정령들의 시선이 칼리우스를 향했고, 그는 그들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걸음을 멈췄다.
저택과 꽤 떨어진 곳.
칼리우스는 땅을 가리키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여기야."
뾰족한 눈동자가 더욱 날을 세웠다.
"여기에서 소리가 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