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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71화 (271/415)

271화. 부질없는 게 아니다(3)

* * *

하벨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넓디넓은 밭에 듬성듬성 자란 잡초만이 가득한 이 공간에 꽃이라니.

아주 큰 정원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벨은 벽처럼 높이 선 꽃나무의 모습에도 놀랐지만, 자신이 내리자 길이 드러나는 모습도 엄청 신기했다.

사실 자신도 마차가 멈추기 전까지 이곳이 자신의 땅이라는 걸 몰랐다.

누가 본다면 그저 아주 잘 꾸며진 숲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서 와!]

[안녕, 하벨. 안녕, 아라야!]

[반가워! 놀랐지?]

[여기 되게 이쁘지? 우리가 꾸민 거다?]

정말로 많은 정령이 모여 조잘조잘 떠들었다.

아름다운 보석들이 한곳에 모인 것처럼 예뻤고, 마치 물들이 중얼거리는 것만 같았다.

따스한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와 하벨의 머리카락을 간질여줬다.

위를 살짝 보자 유난히 높이 솟은 나무가 보였다.

'…저번에 내가 권능으로 힘을 준 그 나무인가?'

혼자만 높이 자라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 안으로 방긋 웃는 정령들이 보였다.

[여기 너무 좋은 거 있잖아. 이렇게 행복의 나라가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어.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정령 기사들도 우리한테 함부로 하지 않고, 여기 있는 자연들까지 우리를 소중히 보호해주고 있어.]

[맞아. 나무도 쑥쑥 자라났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벨은 아직 자신이 온다는 사실을 몰라 배웅 오지 않은 정령 기사들을 의식하며 물었다.

[여기가,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어. 마치 정령왕께서 계신 것 같아.]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엄청 편안하고, 자연이 우리를 더 소중하게 대해주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하벨은 슬쩍 아라를 보았다.

아라의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게 아주 큰 기쁨을 드러낸 것 같았다.

[이 몸도 그래! 이 몸은 막 보드랍고, 따끈따끈한 것 위에 올라간 기분이야! 그래서…….]

아라는 하벨을 떠나 허공을 뛰어다니다가 멈칫거렸다.

바람이 아라의 주변에 살랑살랑 불어왔다.

[으응?]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라야?"

[바람이 이 몸 보고 저 나무로 오라고 그랬어. 이 몸이 꼭 와야 한대. 그런데 이 몸은 천천히 갈래. 다 둘러보고 싶어, 헤헤.]

아라의 눈이 포근하게 감겨왔다.

이곳은 너무도 예뻤고, 꼭 집처럼 느껴져 좋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도, 땅에 있는 돌멩이도, 어디선가 은은하게 맴도는 온기도, 그냥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이 마치 자신의 손에 다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아라 너를……."

하벨은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자신들보다 늦게 출발한 마차가 도착했다.

하벨은 정령들에게 잠깐이라는 말을 건네며 마차를 향해 뛰었다.

"누님, 괜찮으세요?"

룬델에게 이야기를 들었기에 넬시아가 틈의 세계에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먼저 내린 라르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마차를 따로 분리한 건 라르웬의 의견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누님의 트라우마가 살아나면 좀 신경이 날카로워져. 이건 누구 때문도 아니니까 마음 쓰지 마.

간신히 마차에 내린 넬시아는 아직도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미안, 하벨. 내가 너를 도왔어야 했는데."

랜턴이 흔들렸다.

"나는 살아있습니다, 누님."

하벨은 넬시아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넬시아가 다른 손을 들어 하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마치 손가락 끝으로 하벨의 온기를 느끼는 듯했다.

"누나."

"응, 하벨아."

"내가 죽였어요."

서황을.

죽지 않는 자를.

어쩌면 티에라 가문의 진짜 막내를 죽인 범인일지도 모르는 자를.

"나는 저들을 죽일 수 있어요."

오래전에 새겼던, 어쩌면 기억 속에 잊혔던,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한 그 사실이 자신에게 무기가 되어주었다.

그들이 죽지 않는 자가 되었음에도 지워지지 않은 맹세에 그 긴 시간 동안 두려움에 떨었을 걸 생각하니 너무도 기뻤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요."

하벨은 자신이 죽었음에도 맹세가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 이상했다.

이상했지만, 그 이유를 알기에는 해결해야 할 것도 알아야 하는 것도 많았다.

무엇이 되었든, 오늘 자신이 서황을 죽인 일은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는 일이며 넬시아와 라르웬에게는 복수를 한 셈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그걸로 됐다.'

이렇게 얽히고 얽힐 줄이야.

하벨은 넬시아를 위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래."

넬시아는 하벨을 와락 안았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네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직도 덜덜 떨리는 넬시아를 위해 하벨은 그녀를 토닥였다.

부디 오늘, 잠깐이라도 영원히 이어지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길.

* * *

정령 기사들이 정령들의 반응에 다급히 찾아와서는 자신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무려 티에라 가문의 사람이 다 모였지 않던가.

이곳 정령 기사들을 관리하는 기사단장은 아직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괜찮네. 말없이 먼저 온 건 우리니까."

하벨은 몇 번이고 기사들을 달래도 그들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넬시아의 상태가 좋지 않아 라르웬이 그녀를 데리고 먼저 저택에 갔을 텐데.

'…아.'

여전히 귀를 간질이는 정령들의 조잘거리는 소리에 하벨은 왜 그들이 긴장했는지를 이해했다.

이렇게 많은 정령이 몰리는 건 처음이겠지.

자신의 부탁으로 고루고루 퍼져 있지만, 언뜻 봐도 자신에게 쏠린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라도 신이 나 정령들과 쫑알거렸고.

[그런데 이제는 대장이 왜 좋아? 처음에는 막 불쾌하다고 그랬잖아.]

아라가 목소리를 낮춰 슬쩍 물어보았다.

하벨이 자신보고 무슨 말을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기에 밀려드는 호기심에 이것저것 물어보게 됐다.

[멀리서는 음, 그랬지. 하지만 가까이서는 아니야. 오히려 그리운 느낌을 일으켜.]

[맞아, 맞아. 아직 이게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어. 알고 싶은데, 모르겠어. 아주 중요한 걸 잊은 기분이야.]

하벨은 평소처럼 정령들의 말을 들어도 모르는 척, 저택으로 나아갔다.

정령들에게 자주 들었던 '바다가 생각난다', '그리운 느낌이 든다'라는 말이 사실은 저들의 근원을 알리는 말일 줄이야.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오만했고, 자신도 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혼의 조각을 얻은 지금, 저들의 근원이 자신과 함께했던 '물'이었다는 걸 생각하니 이제야 이해가 갔다.

물 역시 자신 이외에는 오만하게 굴었으니까.

'저들이 내게 느낀 불쾌한, 불길한 감각은 에른스트가 남긴 저주의 흔적 때문이었다.'

하벨의 눈동자가 잠깐 떨렸다.

저택을 앞두고 그의 걸음이 느려지며 어느덧 시선이 랜턴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빙의 전부터 정령들이 하벨 티에라를 싫어하지 않았던가?'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사실이 갑자기 바람처럼 자신의 몸을 건드렸다.

하벨 티에라는 분명 정령들을 보지 못하며 그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왜 미움받았는지 딱히 궁금하지 않아 물은 적은 없었지만, 처음 정령들이 자신을 너무 싫어한 이유와 이어져 있질 않던가.

하벨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낯선 세계가 사실은 자신이 있던 세계이며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류아와 대신들이 살아있었다.

그들은 틈의 세계와 얽매여 있으며 괴물이라 생각했던 이들 모두가 어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역시 거의 확실해졌고.

이 모든 해답은 류아와 하벨 티에라가 손에 쥐고 있었다.

'다시 되돌아보니 내가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 건 맞다.'

하벨은 잠깐 억눌렀던 참담함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에른스트, 그놈 때문에 제 죽음이 아직도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니.

[대장?]

아라가 조용히 자신을 불렀고, 뒤이어 카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어?"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야. 괜찮아."

"괜찮으신 건 아닙니다. 그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헤레스가 슬쩍 끼어들었다.

하벨이 힘을 사용했다. 눈이 푸르게 변한 걸 본다면 분명 용왕의 힘까지 사용한 게 틀림없었다.

―이 검은 실 같은 건 에른스트, 그놈이 나한테 건 저주야. 정확한 건 내 힘에 반응하며 일어나는 거라 강한 힘을 쓰면 쓸수록 침식이 빨라져. 물론, 지금도 진행 중인데 용용이가 지금 막아주고, 엘라힘이 신의 은총으로 진행을 늦춰줬어.

조금 전 마차에서 하벨이 알려주지 않았던가.

하벨이 길게 설명했지만, 결국,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의 생명이 줄어드는 저주인 건 분명했다.

'가뜩이나 영혼의 부작용도 겪고 계시는데.'

헤레스는 하벨의 몸에 덕지덕지 붙은 여러 상황이 그를 얼마나 힘들게 할지 몰라 화가 났다.

"그래서 요양하러 왔잖아?"

하벨은 헤레스의 눈에 깃든 걱정을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정말… 쉬셔야 합니다, 도련님."

"알아. 이제 먼 길을 떠날 테니까 나도 대비는 해야지."

하벨이 잠깐 걸음을 멈춰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자신을 빤히 보는 아라의 시선과 마주했다.

아라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주변 눈치를 바라보았다.

원래 정령 기사들이 이렇게 많지 않다면 당장 하벨에게 달려가 그를 안아줄 텐데.

"봐. 이런 곳이라면 아픈 곳도 빠르게 나아버리겠는데?"

하벨은 자신의 땅을 자랑스럽게 가리켰다.

헤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었고, 하벨이 요양하기에 딱 좋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령들이 가득하지 않던가.

하벨이 정령들의 힘을 받아 상태가 호전되는 걸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자, 여러분."

하벨의 시선이 정령 기사들에게 향했다.

"이 정도로 했으면 배웅은 됐네. 나는 걱정하지 말고, 각자 볼일 보게. 여기 밖을 벗어날 생각도 없으니 따라오지 않아도 돼. 늘 하던 대로 하게."

하벨은 일단 정령 기사들부터 떼어내기로 했다.

그들이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정령들을 지키는 일이었다.

자신들이 왔기에 우선순위가 바뀔 수 있지만, 하벨은 그들의 감시 같은 호위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련님께서 오셨으니 우선순위가 바뀌는 건 당연한 겁니다."

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나도 아네. 하지만 나는 요양을 왔고, 누님에 형님까지 있으니 뭐가 걱정일까? 괜찮네."

[하벨이 괜찮다는데 그만 좀 물어보면 안 돼?]

[하벨의 안색 좀 봐봐. 지금 더 지체했다가 쓰러질 것 같아.]

[너희가 걱정스러운 건 알아. 우리를 계속 배려해주고 있다는 것도 알아. 그런데 걱정하지 마. 우리가 지킬게. 그럼 됐지?]

하벨의 거듭된 거절과 정령들의 낯선 반응에 기사단장은 더는 이를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기사단장은 힐끔 정령들을 보았다.

하벨을 향한 정령들의 태도가 누그러졌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를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소문보다 더하질 않은가.

혹여나 하벨이 부서질까 노심초사하는 모습까지, 정령들의 이런 모습은 룬델 이외에 처음 봤다.

"무슨 일이 있으면 당장 달려오겠습니다."

기사단장은 계속되는 정령들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끼며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기사단장의 명령에 기사들이 물러가자 하벨은 여유롭게 걸었다.

'이제야 살겠네.'

우르르 몰려 있는 건 예전부터 질색이었다.

'정령들만 뺀다면.'

저들의 근원을 알기 전부터 무척 편했다.

정령들이 하벨의 손을 잡았다.

[히히.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쪽으로 오면 돼. 여기가 더 예뻐.]

[아. 저택이 만들어질 때 우리가 엄청 도왔어!]

[맞아. 하벨이 지낸다고 생각하니까, 다 예쁜 것만 주고 싶더라. 우리가 골랐어. 우리가 다독이면서 집을 완성했어.]

"어쩐지 예쁘더라."

하벨은 진심으로 말했다.

정령들이 만든 저택은 기존의 양식과 차이가 크게 났다.

온갖 예쁜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동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포근해 보였다.

[맞아! 엄청 예뻤어! 자꾸 이 몸 입에서 '와'라는 말이 멈추질 않았어! 하지만 만든다고 힘들었겠어. 힘들지 않았어……?]

아라가 꼬리를 흔들며 활짝 웃다 곧 그들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정령들은 아라를 사랑스럽게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전혀 힘들지 않았어. 아라 널 위해 만든 곳도 있다?]

[이, 이, 이 몸을 위해서?]

아라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이미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알 수 없는 느낌이 코끝을 간질였는데.

더 가슴이 따뜻해졌다.

"고마워."

하벨은 저들이 얼마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빨리 저택 완공일을 앞당겼는지 느껴졌기에 활짝 웃었다.

그 미소에 정령들의 웃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보드랍게 들려왔다.

정말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인 것 같다고 생각하다 하벨은 문득 조용한 칼리우스의 상태에 정신이 확 들었다.

레디나는 지금 정령 기사들의 눈을 피해 그란덴을 먼저 저택에 놓고 온다고 했고, 헤레스는 정령을 볼 수 없으며 아코는 정령들이 많은 상황을 좋아하지 않아 나오지 않았으니 카샬 역시 정령이 보이질 않았다.

칼리우스는 다를 텐데.

분명 소리치며 좋아했을 텐데.

"…도, 도련님."

불안하게 하벨을 부르는 칼리우스의 안색이 창백했다.

"나, 이상해."

그 순간, 랜턴이 흔들렸다.

화르르르륵!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재앙의 원인을 상징하는 검은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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