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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70화 (270/415)

270화. 부질없는 게 아니다(2)

* * *

"계속… 계속, 용왕님의 흔적을 쫓고 있었습니다. 맹세가… 사라지지 않아서."

"그건 알고 있어. 네 표정만 봐도 알겠는데? 자잘한 건 됐고."

하벨은 서황의 입을 잠깐 막았다.

"그래서 너희는 뭘 하려는 거야? 왜 틈의 세계라는 걸 만들었지?"

"만든 게 아닙니다."

서황은 눈살을 찌푸렸다.

"빠져나가려고, 그런데 세계가 허락하지 않아서… 갇혀버렸습니다."

"갇혔다고?"

―저는 틈의 세계에 얽혀 있습니다. 아니, 무수히 많은 존재가 이 틈의 세계에 얽혀 있습니다.

하벨은 그제야 류아가 말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류아도 저놈처럼 틈의 세계에 갇힌 걸까.

"그래서 이곳에서 계속 나오려고 했는데, 매번 이 맹세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그래서……."

횡설수설하던 서황은 말을 꺼낼 때마다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래서… 왜 이랬을까요?"

서황은 조용히 흐느꼈다.

조금 전 무료하고, 지루함을 느꼈던 사람이라고 볼 수조차 없었다.

"…용서해주세요."

서황은 하벨에게 빌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용왕님."

하벨에게 빌며 울먹거렸다.

"저는… 정말로 용왕님을 죽일 생각이 없었어요. 저는, 그저, 나라를 지키고 싶었… 습니다."

잠깐 숨을 고른 서황은 눈을 꽈악 감으며 입가에 침이 엉겨 붙는 것도 모르는 채로 애타게 소리쳤다.

"…용왕님께서 버린, 나라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이대로는 무너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벌써 지상에서는 용왕님을, 이곳을 잊어버렸으니까요! 함께였던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어느새 우리를 파괴하고 있었으니까요!"

사람은 바다에서 살 수 없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나눠질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너무도 빨리 성장했다.

그러나 지상은 바다를 잊어버렸다.

용왕이 세운 모든 걸 잊고 발전과 함께 따라온 여러 부작용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 이유로 얼마나 죽었던가.

하지만 용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벨의 미소가 멈췄다.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왕으로서 제 역할을 못 했으니까."

서황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하벨의 모습마저 왜인지 무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황아. 먼저 내 자리를 빼앗은 건 너희였어."

살짝 미간을 찌푸린 하벨은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그 후에는 너희가 알아서 했어야지. 나를 허수아비로 두었다면 제대로 했어야지."

하벨은 유렌이 에른스트와 손을 잡고 자신의 모든 걸 빼앗기 위해 하나씩 행동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하지만 너희는 나를 찾아왔고, 내 마음속 약점을 파고들어 명령했지. 내가 너희를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기에 서황이 지껄이는 모든 게 역겨웠다.

"바다를 정화하도록, 바다를 구하도록. 지상에서 쏟는 여러 가지를 바다에 닿지 않도록!"

마지막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날, 자신이 죽었던 그 날은 저들의 바람이 이뤄졌던 날이었다.

"육지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더는 바다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그 날."

육지에서 흘린 발전의 부작용들을 다시 고스란히 그들 손에 들어가게 했고, 바다가 정해준 양만큼 빼앗을 수 있게, 바다가 허락해야 바다에 들어올 수 있게, 바다를 더럽히지 못하게 모든 제한 두며 육지와 바다가 명확히 나눠진 날.

"너희는 나를 죽였다!"

하벨의 눈동자에 깊은 물살이 몰아쳤다.

[…뭐야. 그건, 그건 너무 하잖아! 대장한테 나쁜 짓을 한 후에 대장한테 여러 가지를 시킨 거였어?]

아라는 분노했다.

[넌 너무 나빠! 정말 나빠…!]

아라 주변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고, 얼음이 더 단단해지며 땅이 천천히 울리기 시작했다.

루룸이 흔들리는 눈으로 아라를 바라보았다.

'자연이 같이 분노하고 있다고?'

"개소리를 작작 늘어놔야 사람 말인지 알지. 이 썩을 새끼들! 막내를… 막내를 대체 어디까지 떨어트려 버린 거야!"

참고, 참았지만, 라르웬은 솟구친 저 분노를 삼키지 못했다.

지금 저 말만 들어도 하벨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벨은 저들에게 있어 그냥 물건이었다.

당장 저놈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라르웬은 꾹 참아야 했다.

―용왕의 미래는 사라졌지만, 내 미래를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요. 나는 하벨 티에라 덕에 미래를 이어갈 수 있었으니까요. 과거의 악연이자 내 현재가 되어버린 온갖 것들은 내가 자를 거예요. 내가요.

이건 하벨이 말한 대로 과거의 악연이 현재가 되어버렸다.

"너희는 왜 하나만 알고 있어?"

하벨은 다시금 서황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너란 존재도, 지금 바닥에 닿는 그 땅도, 지상과 바다라는 공간을 만들어준 것도 전부 나였어."

하벨은 이제 자신이 했던 것들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받아들였다.

자신이 이뤘던 그 모든 업적을 자랑스러워하기로.

"내가 모든 걸 내어줬어. 왜 그걸로 만족하지 못한 거야?"

슬픔이 깊게 잠긴 하벨의 목소리에 서황은 밀려오는 죄책감이 숨을 참았다.

"내가 너희에게 현재를 쟁취해 평화를 주었고, 미래를 주었지. 그런데 너희는 내 미래를 빼앗아 버렸잖아?"

하벨은 천천히 물로 만든 검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무슨 말을 하든 용서가 안 돼. 너희가 긴 시간을 버텨오며 달라진 것처럼 나도 그래.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폐에 차는 느낌이 너무도 차가웠기에 하벨의 눈동자는 이미 서황의 모든 걸 씹어 삼킬 만큼 매서워졌다.

"왕이 아닌 나는… 이제 너희를 놓았으니까."

응어리진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저것마저 백성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요, 용서를. 제발, 절 용서해주십시오! 아직 죽을 수 없습니다! 끌려다니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용서도, 무엇도……."

"그래?"

하벨은 활짝 웃었다.

"에른스트, 그놈에게 끌려다니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혹시나 행복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점점 올라가는 하벨의 입꼬리는 주변 사람들마저 소름이 돋아버릴 정도로 섬뜩했다.

"행복하지 않았구나."

하벨은 자신의 권능으로 만든 검으로 망설임 없이 놈의 가슴을 꿰뚫었다.

푸욱.

"커… 커허허헉!"

서황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얼마 만에 흘리는 피인지 모르기에 그는 공황에 빠져버렸다.

진짜로 죽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죽음이 목덜미에 손을 얹은 게 느껴졌다.

"즐겁지 않았다니."

키득.

하벨이 웃으며 검을 비틀었다.

"다행이야."

"아아아… 악!"

서황의 목이 뒤로 젖혀지며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자, 네 미래가 사라지는 소리가 들려?"

서늘한 하벨의 시선에 서황은 부들거렸다.

"사… 컥, 살려……."

하벨은 서황의 눈동자에 공포가 어리자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황아."

하벨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부드러워졌다.

"…아으으, 아윽!"

"나는… 너희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어."

마지막으로 진심을 토하는 하벨의 말에 서황의 눈동자에 조금 전과 다른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서황은 자신을 바라보는 용왕의 눈동자에 찬란한 빛을 마주했다.

그래, 저 빛이었다.

자신의 영혼이 울리듯 이끌려가던 그 빛이 바로 저거였다.

저 빛만 있다면 무엇이든, 어떤 명령이든 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수족과의 마지막 전투였던, 그 최전선에 류아와 무날, 태련을 포함한 그들이 죽자 그 빛은 사라지고 말았다.

까맣게 물들어버렸기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요, 왕님."

서황은 입을 열었다.

이제야 저 빛을 찾았는데 너무도 멀리 오지 않았는가.

자신이 대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저질러버린 걸까.

용왕이란 존재에 매혹된 그때처럼 그는 마지막으로 말을 꺼냈다.

"존경… 했습니다. 정말……."

하지만 하벨은 서황의 복부에서 빼낸 물의 검으로 목을 날렸다.

하벨은 서황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자 스르르 가루처럼 바스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다 부질없는 말이지."

조용히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냈다.

"…너와 내 말은."

하벨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하."

여전히 새어 나오는 김이 하늘을 높이 날았다.

피 맛과 숨이 뒤섞였다.

서황은 한때 자신의 사람이었으며 소중했던 백성이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증오한다는 말도.

하벨은 전부 하늘로 던져버렸다.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전부 부질없으니.

아라가 슬픔으로 꽉 차버린 하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 건드리며 꼭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벨의 얼굴에 튄 피도, 손에 묻은 피도 전부 그를 잡아먹을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장, 있잖아.]

하지만 아라는 용기를 내어 하벨의 옷자락을 쥐었다.

"개새끼!"

"쓰레기 같은 새끼!"

"썩을 새끼! 빌어 처먹을 놈!"

라르웬과 카샬, 레디나가 거의 순서대로 소리쳤다.

그 말에 아라가 깜짝 놀랐다.

푸흡.

하벨의 웃음이 터져 나오자 아라는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나쁜 새…….]

하벨이 다급히 아라의 입을 막았다.

"아라 너는, 아직 안 돼!"

이어 하벨은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용용이 너도! 절대로 안 돼!"

힘껏 배를 부풀리던 칼리우스가 '푸쉬쉬'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하."

하벨은 그제야 안도하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뭔가 웃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웃긴지 몰랐다.

"나는 괜찮……."

"조용히 해, 막내야. 넌 하나도 안 괜찮으니까."

라르웬이 하벨의 말을 자르고는 괜히 눈치를 보았다.

"…크흠."

라르웬은 고개를 휙 돌린 채로 손을 뻗었다.

[자자, 어서 들어가.]

루룸이 벌써 키득거리며 하벨의 등을 밀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하벨은 뭔가 꺼림칙함을 느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순간, 하벨은 눈앞이 캄캄하게 변하고 말았다.

몸이 주저앉는가 싶더니 누군가 자신을 붙잡았다.

"봤지? 하나도 안 괜찮아."

라르웬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시야와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자 하벨은 왜인지 가슴이 일렁거렸다.

"이건 그냥 후유증……."

"됐어. 넌 잘했어. 엄청 잘했어, 막내야. 저놈이 먼저 널 버렸고, 널 해쳤고, 널 죽였어. 무엇이 되었든 너는 잘한 거야."

라르웬의 목소리가 너무도 필사적으로 들려왔다.

그 속에 안도감까지 섞여 있자 하벨은 라르웬을 토닥거렸다.

하.

라르웬이 잠깐 웃었다.

"막내야. 지금 토닥거려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하지만 너무 감정적이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이 일로 에른스트가 나를 알아채는 게 아닐까 모르겠어요."

하벨은 걱정이 밀려왔다.

서황을 살린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 살려야 하는가.

"에른스트가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이 일 때문에 알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용왕이라는 건 모르겠지. 오히려 적의 움직임이 더 잘 보일지도 몰라. 분명 네가 두려울 테니까."

라르웬은 하벨이 서황을 죽이는 모습을 똑바로 보았다.

분명 서황은 여느 틈의 세계에서 나온 죽지 않는 괴물과 마찬가지로 죽지 않는 자였다.

"…나하고 했던 맹세가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죽일 수 있었던 거예요, 형님."

가끔 훅 들어오는 하벨의 말에 라르웬은 다시금 그를 토닥였다.

"사실… 살아 있을지는 몰랐어요. 류아도 살아 있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는데, 날 죽인 자까지 살아 있을 줄은 정말로 몰랐어요. 마음이… 복잡합니다."

"알아. 네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도 가지 않네."

라르웬은 자신의 품에서 조용히 떠는 하벨을 위로했다.

이미 하벨이 겪었던 일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 너무도 컸다.

설령 정말 우연에 우연을 더해 과거를 청산할 기회가 있다 한들, 저들을 아꼈던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치료가 되지 않겠지.

자신이 그랬듯이.

"가자, 막내야. 비가 오겠다."

이것도 틈의 세계가 맞다면 반드시 비가 올 테니까.

* * *

바사사삭.

하벨은 초콜릿이 가득 담긴 쿠키를 먹으며 말을 마쳤다.

이 긴 이야기를 하고자 일부로 마차를 바꿔 탔다.

자신의 땅으로 가게 되면 작은 친구들도, 정령 기사들도, 마법사들도 수많은 시선이 있을 테니까.

그리 떳떳한 과거는 아니었다. 그렇게 자랑을 할 과거 역시 아니었다.

말하면 속도, 마음도 쓰기에 단 게 필요했다.

초콜릿도 젤리도, 쿠키도 전부 그걸 위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된 거야. 알겠지?"

[이 몸은… 또 들어도, 진짜…….]

아라가 울먹이다 하벨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미 눈물바다가 된 칼리우스를 토닥거리고 있던 다른 손으로 아라를 위로했다.

이렇게 또 아라를 울리게 될 줄이야. 하벨은 몹시 미안했다.

"도련님께서는 정말……."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그 말에 헤레스는 화가 났다.

이게 어떻게 가볍게 '알겠지?'라고 끝날 말인가.

하벨이 왕실에서 과거에 잘린 자신의 몸을 보고 말았다.

분명 이곳이 다른 세계라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같은 곳이라는 점도, 하벨이 배신당해 죽었다는 것도 전부 괜찮지 않았다.

"정말 뭐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게… 그게 뭐예요? 왜 도련님한테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가뜩이나 꾹 참고 참았던 눈물이 금세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세상을 구했는데, 운도 더럽게 없지?"

하벨은 자신을 위해 화를 내주는 이들을 보며 실실 웃었다.

"…어떻게 다 담고 계셨습니까? 이렇게 커다란 일을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무겁지 않으셨습니까?"

카샬은 한숨을 섞으며 물었다.

그런 일을 당했음에도 처음 하벨이 이전 도련님의 몸에 들어왔을 때 태연하게 행동했던 그 모든 것들이 눈에 밟혔다.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죽었는데, 어떻게 또 자신들을 믿고 있을 수 있는지.

"버틸 수 있었어. 이 정도는."

"저는……."

카샬은 차마 하벨이 바보 같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야 그가 왜 그토록 짊어지는 걸 싫어했는지, 왜 귀족들을 싫어했는지, 왜 자신을 도우려는지를 알았다.

하벨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쓸모없어서 버려졌다는 그 전제가 왜 이렇게 닮았는지.

"레디나."

하벨이 레디나를 불렀다.

자신하고 반대편에 앉아 차마 토닥일 수 없었지만, 계속 마음이 쓰였다.

배신당했다는 그 자체에 이입을 많이 했는지도 몰랐다.

레디나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고, 자신은 부하들에게 죽었다.

차이는 간단했다.

"…더 잔인하게 죽이지 그랬어요. 손끝부터 하나씩 잘라내지 그랬어요."

레디나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

"…어떻게, 그 상황에서 믿는다는 말을 하신 거예요?"

하벨을 신이라 생각한 날부터 자신을 믿어주는 게 느껴졌지만, 알 수 없는 선이 존재했다.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바안 앞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때부터 남아 있던 선마저 싹 사라졌다고 느꼈다.

'그런데…….'

설마하니 하벨도 배신당했을 줄이야.

자신보다 훨씬 더. 더 많이.

그 새끼를 자신이 죽일 수 있었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럽게 죽였을 텐데.

"너희가 날 믿어줬으니까. 나한테 살아도 된다고 말해줬잖아? 엄청 기뻤어. 정말… 정말로 기뻤어."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 모든 걸 놓으려고 했던 그때, 저들이 자신을 붙잡아 주었다.

"이미 너희를 믿고 있었고, 사랑스럽기까지 한데? 여기 없는 좀도둑까지."

사랑스럽다.

이 얼마나 낯설면서도 따뜻한 말일까.

레디나는 다급히 고개를 올리며 하벨을 보았고, 헤레스는 울먹이던 표정을 싹 풀며 반짝거리는 눈빛을 지었고, 카샬은 얼굴을 와락 구겼으며 칼리우스는 눈물을 뚝 그쳤다.

아라의 꼬리가 흔들렸다.

헤헤 웃는 소리에 맞춰 하벨은 키득거렸다.

"정말이야."

때마침 마차가 멈췄다.

"타이밍이 좋았네. 다들 알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너희를 믿는다는 내 마음을 표현한 거라는 걸."

하벨은 찬찬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라르웬과 넬시아는 '가족'이라는, '티에라'라는 이름이 묶어주었지만, 저들은 아니었다.

"그거만 알아주면 돼. 설령 나를 떠나더라도 괜찮으니까, 나를……."

하벨은 말을 멈췄다.

자신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표정이 전부 부정하고 있었으니.

하벨은 그게 참 웃기면서도 고마웠다.

"알았어. 그런 말 안 할게. 어서 내리자. 나, 엄청 설레고 있단 말이야. 여긴 내 땅이니까."

카샬이 문을 열고 내렸다.

이어 하벨이 내리자 카샬이 단호할 정도로 하벨에게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상상도 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알아. 내가 잘못했……."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벨의 시선이 흔들렸다.

겨울이 다 되어감에도 이곳은 이상하게 따뜻했고, 만개한 꽃이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작은 친구들이 활짝 웃으며 여기저기 모여 손을 흔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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