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그렇게 이어졌다(3)
* * *
"…혹시 열이 납니까?"
바안은 미안함이 쏙 들어갈 정도로 하벨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보석은 뭐고, 무얼 해결했다는 건지.
"뭐 그런 게 있습니다. 그것만 알아두세요."
[어제 재밌었어!]
테이블 위를 도르르 굴러다니던 아라가 귀를 쫑긋 세워서는 상체를 일으켰다.
[대장이랑 엄청 예쁜 걸 만들었다?]
'맞아. 참 예뻤지.'
어젯밤, 하벨은 자신을 말리는 룬델의 말에도 아라와 함께 밤놀이에 나섰다.
그때는 자신의 머리를 봤기에 제정신이라 미처 판단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각 나라에 자신의 육체가 흩어진 모양이었다.
―나머지는 코스모피안 왕국, 시엘느, 레놀드, 헤스트리아, 바닷속, 그리고…….
류아가 말하지 않았던가. 비록 마지막이 어딘지 듣지 못했지만.
이번에 자신이 육체 속에 있던 영혼을 얻은 것처럼 당연하게도 그 속에 흩어진 영혼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에르티안 왕국은 지금까지 자신의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권능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일단은 그 힘이 유지가 되어야 에른스트 그놈의 눈도 가릴 수 있기에 물의 흐름을 따라 자신의 권능이 가장 강한 곳을 찾았다.
―이 몸이 정화제를 만들어? 진짜? 이 몸하고만 해도 되는 거야?
자신이 한 말에 아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아라 혼자서 정화제를 만들어본 적이 없어 놀랄 수 있었다.
조금이지만, 자신의 힘이 회복됐기에 아라의 잠재력이 제 눈에 보였다.
다른 정령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물의 힘이 아라의 주변에 맴도는 걸 확인했다.
―응! 대장이 할 수 있다면 이 몸은 해낼 수 있어!
조금은 긴장한 아라와 함께 정화제를 만들었다.
평소처럼 정령수가 스며들었을 뿐이었지만, 하벨은 왜 자신과 정령들이 만든 정화제가 영구적인 정화제가 되는지를 알아챘다.
'…설마하니 정령이 사용하는 힘의 뿌리가 내 힘일 줄이야.'
정령들이 가진 힘이 시간에 따라 변형된 힘일지라도 그 시작은 자신의 힘에서 출발했다.
자신이 태어나면서 자신과 연결된 그 물방울이 어떤 이유로 하나의 인격체를 이루고 바뀌고 변화해서 지금의 정령이라는 존재 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정령수를 무제한으로 받을 수도, 나와 함께 만든 정령수가 영구적인 정화제가 될 수도 없다.'
그중 가장 특별했던 존재는 바로 아라였다.
정령들이 수십은 달렸어야 만들어진 반영구 정화제가 아주 쉽게 만들어졌으니.
―우, 우오옵! 이 몸이 만들었어! 이 몸이!
하벨은 그 모습에 아라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느꼈다.
아라가 가진 저 특별함은 '정령왕'이라는 사실 말고는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아라는 미성숙한, 완전하지 않은 왕으로 태어나고 말았고.
[왜 그래, 대장?]
하벨이 아라를 빤히 보자 시선을 느낀 아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라가 왕이 아니길 빌었는데.'
하벨은 아라가 걸어가야 할 먼 길을 떠올리며 씁쓸함을 느꼈다.
'많이 아플 텐데. 많이… 힘들 텐데.'
"하벨 공?"
바안의 목소리에 하벨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 전하."
"무엇이 되었든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분명 약속했는데, 공을 다치게 했어요."
바안은 하벨에게 찾아온 이유부터 꺼냈다.
자신만만했지만, 그 과정에 문제가 생겼고 결국 하벨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던가.
룬델이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도 마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아닙니다. 전하께서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로요."
"하지만 이번 일은 내 잘못입니다."
"아뇨, 별개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아, 몸 상태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마 전하께서 헤레스에게 직접 물어보셔도 저와 똑같은 대답을 들을 겁니다."
오늘만큼은 하벨이 목에 힘이 가득 주었다.
몸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좋았으니. 이런 날은 빙의 되고 난 후에 거의 처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에른스트가 자신에게 건 저주로 침식이 더 깊어졌을까, 걱정스러워 고민이 살짝 생겼다.
"전하."
"하벨 공."
"예, 전하."
"이번 일로 내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무얼 말입니까?"
"공이 소유한 그 땅에 저택이 완공되었다고 하더군요."
"……예?"
하벨은 잠깐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곧 그쪽에 병사들을 붙일 셈입니다. 정령들에게 무척 소중한 장소가 되었으니 제가 공에게 할 수 있는……."
"자, 잠시만요, 전하."
하벨은 바안의 말을 멈춰 세웠다.
"혹시 어디 아픕니까?"
바안이 놀라며 묻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라를 슬쩍 바라보았다.
아라 역시 놀란 표정을 하다 하벨하고 시선이 마주쳤다.
[…이, 이 몸도 못 들었어! 정말이야, 대장! 방금 엄청 놀랐는걸?]
'아라도 몰랐다고? 그럼 용용이도?'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바안이 재차 물어보자 하벨은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저 제가 몰랐던 사실이 나와 당황했을 뿐입니다. 저택이 완공되다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명 그 땅에는 티에라 가문의 정령 기사와 크라마의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 마법사들 덕에 저택의 완공일이 앞당겨질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어도 상당히 빨랐다.
'그런데 보고가 없다고?'
바안은 분명 룬델에게 들었을 테니 자신이 더 빨리 크라마한테 들었어야 정상이었다.
왕실이라서 보고가 조금 어려워도 다른 방법은 많았다.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카샬은 조금 전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음… 이제 사절단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왕실 내부가 좀 소란스럽더라고요. 아, 나중에 도련님께 다시 들를게요. 그때 기대해주세요.
헤레스가 뭔가 살짝 들떠 보이긴 했지만, 혹시 이 일 때문일까.
'……그래도 역시 범인은 카샬이네.'
허벨은 속으로 조용히 이를 갈았다.
페트리오가 자신이 움직이는 걸 끔찍이 싫어하나 새로운 정보를 없는 정보로 바꾸거나 숨기는 일은 없었다.
'크라마한테 이 보고를 들은 페트리오가 카샬한테 말했을 테고, 카샬이… 숨겼겠지.'
"진짜 몰랐습니까?"
바안이 활짝 웃었다.
"몰랐는데, …왜 이렇게 기뻐하십니까?"
"방금 내가 공에게 하려던 말과 이어져 있어 마침 좋은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방긋 웃는 바안의 표정에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몰랐다.
'하나를 알려주면 여러 개를 더 흡수하니, 성장 속도가 무시무시한 것도 좋지 않네.'
유자차를 후후 불던 하벨이 슬쩍 물었다.
"좋은 기회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십니까?"
"오늘 아침에 정무를 보던 중 룬델 공이 찾아와서 여러 가지 일을 보고하더군요. 그때 나 역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하벨은 유자차를 마시며 바안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까지 본 얼굴 중에 제일 즐거워 보였다.
"명령입니다, 하벨 공."
"…명령이요?"
"당분간 휴식하세요."
"예?"
"쉬세요, 하벨 공. 이는 룬델 공에게도 이미 넘긴, 내 도장이 찍힌 명령서입니다."
바안이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 옆에 붙은 황금 문양이 그렇게 열이 받을 수가 없었다.
"…그, 어, 그러니까."
하벨이 얼빠진 얼굴을 하자 바안은 양손 깍지를 끼며 활짝 웃었다.
"아무리 하벨 공이라고 해도 이건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왕국의 힘이 좀 돌아왔거든요. 아시잖습니까."
"와아……. 어마무시한데요?"
하벨은 웃음이 절로 났다.
바안은 지금 티에라 가문을 통째로 인질로 잡고 자신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것도 '휴식' 문제로. 아주 신선했다.
"이건 내 앞에 있는 하벨 공이 알려줬습니다. 틈을 노리고 덤비라고요."
"도장이 남아돕니까? 이런 곳에 찍게요?"
"이번 건은 남아돌아도 됩니다. 하벨 공은 에르티안 왕국의 인재이니 내가 지켜야죠."
"칭찬하겠습니다, 전하. 무릇 인재는 아껴야지요. 그럼 아끼는 김에 그 남아도는 도장을 다른 곳에도 찍어주시죠."
"어디요?"
"으음,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모든 디저트 가게 무료 이용권이요. 저만 쓸게요."
하벨이 실실 웃자 아라의 꼬리도 덩달아 흔들렸다.
[대장은 달달한 걸 엄청 좋아해.]
"좋습니다. 그 정도는 해드리죠."
바안이 흔쾌히 허락하자 하벨은 당황했다.
바안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도장을 꺼내 들었다.
"대금은 왕실에서 치르겠습니다. 일단 대중 적고 도장을 찍어둘 테니, 걱정하지 말고 뭐든 드세요. 음, 나중에 좀 더 제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돼, 됐습니다. 그냥 마음만 받겠습니다. 농담을 왜 이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십니까?"
"방금은 진지한 게 맞습니다. 하벨 공께서 무기가 필요하다면 왕실에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방금처럼 이 나라에 있는 디저트를 다 드시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해드릴 겁니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가 아니라… 하. 내가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말이 나온 김에 하겠습니다."
바안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넬시아 공과 라르웬 공이 내게 무얼 하소연했는지 아십니까?"
"누님하고 형님이 하소연을 했다고요……?"
"하벨 공이 이 나라를 위해 해준 게 이렇게도 많은데 어떻게 된 게 받은 게 하나도 없냐고요. 왜 안 챙겨주냐고요. 그렇게 내게 따졌습니다. 내가… 할 말이 없더군요. 모조리 맞는 말이라서요."
[오오. 저 말이 맞아! 응응, 엄청 맞아. 이 몸은 대장이 엄청 열심히 한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아라는 앞발을 마주치며 '짝짝' 소리를 냈다.
"저는 그러니까……."
"됐습니다."
바안은 하벨의 말을 막았다. 나올 말이 뻔했으니까.
"일단 하벨 공의 디저트는 내가 챙기겠습니다. 나머지 역시 룬델 공과 의견을 나누고 결정할 테니, 그냥 공은 지금처럼 앞으로 나아가세요."
하벨은 그 말에 실실거렸다.
왕으로서 행동이 이제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왕이라면 당연히 제 사람을 아껴야 했다. 그게 시작점이자 모든 것이었다.
"웃지 마세요, 하벨 공."
"칭찬하는 겁니다, 전하."
"어쨌든, 아까 룬델 공이 나를 찾아왔다고 말했죠?"
"예.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때, 룬델 공이 하벨 공의 해외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아, 그건 들었습니다."
―…네가 해외로 나가는 건 허락하마. 이미 두 손 다 들었단다. 내가 말린다면 너는 분명 불법적인 길이나, 억지로 길을 열어 가려 하겠지.
어제 룬델의 눈앞에서 물의 길로 들어갔다가 오자마자 그가 말했다.
한숨을 몇 번이나 섞었는지 도중에는 한숨 소리에 말이 귀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
"나도 준비하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쉬십시오. 명령입니다."
"저는 쉬는 게 싫은데요."
하벨이 투덜거리자 바안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이제야 하벨의 본심을 알자 저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다.
"다들 하벨 공을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하벨 공께서 휴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나 걸리시겠습니까? 최대한 빨리한다면요."
"공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저번에 세계를 움직이는 자……."
"에른스트입니다."
하벨이 이름을 언급하자 바안의 눈동자가 깊게 물들어갔다.
"일주일 정도면 됩니다."
"좋습니다. 그럼 부탁이 있습니다, 전하."
"부탁… 이요?"
바안은 또 뭔가 뒤통수를 맞은 느낌에 마냥 얼떨떨했다.
"엘라힘 신관을 보호해주십시오."
"보호… 라뇨?"
"제 핑계를 대며 엘라힘 신관을 정식으로 고용해주십시오. 아시잖습니까?"
"무얼 말하는 겁니까?"
"아, 누님이 이건 말씀을 드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엘라힘 신관은 단순히 신관이 아닌, 추기경입니다."
"……?"
바안의 눈이 커졌다.
추기경의 정보는 시엘느에서도 거의 극비로 취급하기에 알기 어려웠다.
"현재 시엘느에서 엘라힘 신관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죽을 확률이 높지요. 단순히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에르티안 왕국에 무수히 많은 해를 끼치고 죽을 겁니다."
바안은 하벨이 툭 하고 던진 말에 입술을 핥았다.
"무수히… 많은, 무수히 많은 해라뇨?"
"가령 시엘느 왕국으로 돌아온 엘라힘이 급사했다. 에르티안 왕국은 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 혹은 엘라힘 신관의 필체를 베껴 에르티안 왕국에게 무슨 무슨 일을 당했다며 자살로 위장할 수도 있죠. 쓸 수 있는 패는 많습니다. 그야 추기경이잖습니까?"
"공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세요."
"엘라힘 신관을 죽이지 못하게 할 겁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바안은 하벨의 저 의지를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 단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전하."
하벨은 신난 듯이 말했다. 이걸 기다리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하벨의 눈동자에 바안은 주춤거렸다.
에르티안 왕국이 이만큼이나 일어났으니 조금은 떼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룬델에게 알렸던 것처럼 바안에게 역시 전했다.
"현재 신성 국가 시엘느와 검은 달, 그리고 마법사 협회는 에른스트 그놈 손에 있습니다."
"예……?"
"서로 이어져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엘라힘 추기경이고요. 이제 보호해야 할 이유가 확실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