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63화 (263/415)

263화. 그렇게 이어졌다

* * *

랜턴이 흔들렸다.

하벨이 흔들지 않았음에도 랜턴이 흔들렸다.

룬델은 갑자기 밀려는 사실에 숨을 쉬지 못했다.

그저 이게 무슨 소리냐며 하벨에게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하벨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룬델의 모습에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렇게 룬델이 무너져내릴까 봐, 넬시아와 라르웬이 희망이라는 이름을 단 절망을 맛볼까 봐, 두려웠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버거우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아주 많이요."

제 품에서 꿈틀거리는 아라가 있기에 하벨은 움츠러들었던 마음을 다시금 펼쳤다.

"하벨 티에라가 제 의식 속에 아직 있다는 사실은 저도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어요."

하벨은 룬델의 시선과 마주하며 자신이 숨겼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고, 가주님도, 누님과 형님에게 또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습니다."

죽었던,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면 분명 기쁠 테지.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그 생각이 자꾸만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벨 티에라가 돌아올 수 있었다면 기뻤겠죠. 하지만 저는 드웰에게 하벨 티에라에게 다시 몸을 돌려줄 수 없다는 사실을 듣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벨이 느꼈던 좌절감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드러나자 룬델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신은 그 당시 하벨이 짓는 표정에서 이미 짐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 아이는 그 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마법사 협회가 제 마지막 희망이었어요."

"하벨아……. 왜… 왜……."

룬델은 가슴이 미어졌다.

하벨이 마법사 협회를 부숴버린 진짜 이유가 그 사실 때문이라니.

높디높은 마법사의 탑에서 하벨이 떨어진 뒤 상태를 알기 위해 사용한 연락용 아이템 너머로 고통에 찬 하벨의 비명이 생각이나 가슴을 찔러왔다.

"…어디에도 방법은 없었어요."

하벨이 실소를 내뱉었다.

"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렇지 않아도 돌려줄 수 없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저는 앞으로 하벨로 살아갈 거예요. 계속요."

강한 다짐이 섞인 하벨의 말에 룬델은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희망이 현실에게 꺾였기에 하벨은 룬델의 슬픔과 마주하기로 했다.

"세상은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부터 세상의 멸망을 저지할 생각입니다."

하벨은 랜턴이 달린 팔찌를 찬 팔을 꽉 쥐었다.

"그게 하벨 티에라가 바라는 일이자,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됐습니다."

"왜… 네가 맡는 것이더냐.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것까지 네가 담당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바꾸지 않았더냐."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하벨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룬델이 오해한 모양이었다.

"지금 세상을 멸망에 빠트리는 자가 아무래도 절 죽인 자와 같은 놈이라 판단했습니다."

에른스트.

그 이름을 겨우 알았다.

하벨의 눈꼬리가 바짝 섰다.

"그래서 하는 겁니다. 똑같이 되풀이되고 싶지 않아서 하는 겁니다."

"…그놈이 또, 널 죽이려고 했더냐?"

하벨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예. 제게 저주를 걸어놨더라고요. 제가 힘을 찾으면 찾을수록 짙어지는 저주를 말입니다. 지금은 용용이가 억눌러주고 있어요."

룬델은 입술을 깨물며 손을 들어 하벨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 속에 저주가 남아 있다니.

애초에 저주란 터무니 없을 만큼 저급한 마법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의문을 모조리 잡아먹을 만큼 큰 의문이 맴돌았다.

"어떻게 그놈이 살아 있을 수 있더냐?"

"모릅니다. 제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에른스트 그놈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왜 자신을 죽였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하벨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하벨 티에라가 어떻게 회귀했는지 모르지만, 같이 합심한 자를 알고 있습니다."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겠더냐?"

"죽은 줄 알았던."

하벨은 잠깐 숨을 몰아쉬며 눈동자에 깊은 반가움을 실었다.

"…제 가족. 류아가 살아 있었습니다."

분명 하벨은 가족을 다 잃어 깊은 절망에 빠졌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이 다시 살아왔다면 지금 하벨이 느낄 감정이 단순히 기쁨이 아닐 거라고 룬델은 생각했다.

룬델 역시 덩달아 미소를 내보였다.

"류아가 하벨 티에라와 어떤 거래를 한 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알아볼 겁니다. 그리고……."

하벨의 시선이 다시 룬델에게 향했다.

"해외에 나가야 합니다, 가주님."

"그건……."

"왕실에서 제 원래 육체를 봤다고 말씀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

"그 육체가 제 잘린 머리였다고 말씀드리면… 절 보내주시겠습니까?"

여전히 덤덤한 하벨의 말에 룬델의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넘쳐흐르는 이 안쓰러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놈이 했더냐? 에른스트, 그놈이 널 이렇게……."

"제 육체를 자른 건 놈이 맞습니다. 하지만 왕실에 제 육체를 둔 건 류아였습니다."

"왜!"

룬델의 언성이 단번에 올라갔다.

분명 하벨에게 가족 같은 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분노가 느껴졌기에 하벨은 제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아라를 달래며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놈이 내버려 둔 제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서이며 제가 용왕이기 때문에 퍼트려놓은 거라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구나."

"원래라면 모든 바다와 물의 지배자인 제가 죽으면 세상에 모든 물이 사라져야 했습니다."

룬델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하벨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바람이 하벨의 머리카락을 건드는 모습조차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그 말 하나로 하벨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알아버렸다.

세상의 운명이 하벨의 어깨에 얹어진 것과 무슨 차이일까.

그렇게도 무거운 걸 지고도 절망에 빠질 정도라면 얼마나 깊은 슬픔이 휘몰아쳤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막았다고 하더군요. 제가 죽어가면서 바다와 물을 진정시켜 세상의 멸망을 막았다고."

이제는 기억했다.

그 당시 눈앞에 류아와 무날, 태련이가 왔음에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세상이 멸망하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사실을 에른스트가 알아채 제 육체를 잘게 쪼개 바다에 던졌는데 그 속에 든 제 영혼이 어쩌다 발생한 물의 오염까지 막았다고,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하벨은 실소했다.

"우습지요? 뭐가 그렇게 미련이 많은지. 죽어서까지도 아무것도 놓아주질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단다, 하벨아. 누가 감히 널 비웃겠더냐? 누가 감히… 너를 비웃을 수가 있을까."

룬델은 온갖 감정이 밀려와 마음이 너무나도 떨리고, 또 떨려오는 걸 느꼈다.

바다가 오염됐다.

모든 물의 근원이 오염됐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하벨아. 전 세계에 정화제를 공급하기에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단다."

"의문이요?"

"정화제가 과도한 현상을 일으키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곤 했지. 하나의 정화제로도 호수가 정화되거나, 두 개의 정화제로 강의 오염이 사라지던 기적을 말이다. 나는 이런 기적이 수없이 많이 일어나길 기도했지."

내내 느끼던 이상함. 그 이상함을 드디어 오늘로 해결이 됐다.

"…너였구나."

하벨이었다.

하벨이 가진 힘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었다니.

"네가 계속 세계를 지켜주었구나."

그 말에 하벨은 잠깐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저는 몰랐어요. 제… 육체가 이곳에 있다는 것도, 이 세계가 제가 있던 곳이라는 것도 몰랐는데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 사실을 더 빨리 알았더라면.

'…알았다면 무엇을 했겠는가?'

하벨은 마음이 복잡했다. 세계가 이렇게 된 게 결국 자신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너무도 쓰라렸다.

"몰랐다고 한들, 설령 네가 우연이라고 말해도 네가 이 세상을 지켜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단다.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렴. 그 누구보다 당당해도 된단다."

룬델은 말 한마디에 진심을 꾹 눌렀다.

모두가 하벨에게 빚을 진 셈이 아닌가.

그런 하벨이 다시금 세상을 위해 나아가겠다고 말했으니, 그 울림이 너무도 벅찼다.

"…하벨아."

룬델은 하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아도 된단다."

하벨을 말리고 싶었다.

"너를 또 희생하지 않아도 돼."

또 그 소용돌이에 휩쓸리기에는 하벨의 상처가 깊었다. 벌써 저렇게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데.

"가주님."

"그래, 하벨아."

"한 번은 지키지 못했어요. 그런데 두 번째까지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이미 세상은 멸망했다.

그 미래를 하벨 티에라가 보고 말았다.

"두 번이나 놈에게 이 세상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요."

하벨은 잠깐 입술을 부들거렸다.

그의 시선이 룬델을 향했고, 아라를 향했다.

"두 번이나… 내 가족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예요."

하벨은 눈물을 참느라,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룬델은 숨을 가늘게 내쉬며 하벨의 말을 아주 천천히 이해했다.

내 가족.

그 강한 울림에 룬델은 더는 가슴을 긁은 따스함을 참을 수 없었다.

하벨을 안았다.

"그… 래, 하벨아."

룬델은 눈을 질끈 감으며 눈물을 쏟아냈다.

"그래, 내 아들, 하벨아."

겨우, 겨우 다시 손에 넣은 이 따스함이 너무도 포근해서, 자신을 받아준 하벨이 너무도 고마워서 룬델은 참고, 참았던 슬픔을 터트리며 목놓아 울었다.

* * *

"…진정되셨어요?"

하벨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직도 잠에 깨지 않은 아라를 쓰다듬었다.

"미안… 하구나."

룬델의 눈가가 아직도 붉었다.

그는 민망함을 담아 하벨을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제 대답이 길었어요. 그래서 이해해요. 얼마나 조급했을까요?"

"고맙구나, 하벨아."

"가주님."

"그래."

"이런 상황에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어요."

하벨은 아라의 발바닥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말해보렴."

"틈의 세계가… 어쩌면 저로 인해 열리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하벨은 겨우 말을 토해냈다.

처음에는 틈의 세계에서 나온 괴물이 찾는 사람이 어쩌면 하벨 티에라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괴물이 아닙니다, 용왕님. 용왕님께 나타났던 그들은 결코 괴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류아가 틈의 세계에서 나왔고, 그 속에 괴물이 아닌 다른 존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분명 무수히 많은 존재가 이 틈의 세계에 얽혀 있다고 했다.'

이제부터 '틈의 세계'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제 존재가 위협을 불러들이는 게 아닌지 조금 무섭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벨의 말에 룬델은 손을 뻗어 하벨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하벨아."

"…예."

"셋째는 말이다."

룬델은 가슴 속에 묻었던 이야기를 조용히 꺼냈다.

아니, 셋째가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셋째가 회귀자이기에 어쩌면 미래의 자신에게 들었을 수 있는 말일 테니까.

그렇다면 막내도 들어야지.

"틈의 세계에서 나왔단다."

룬델은 그때를 조용히 떠올렸고, 하벨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입을 벌리며 룬델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 하벨 티에라가 틈의 세계에서 나왔다고……?'

피부에 조용히 스며드는 소름을 하벨은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벨 티에라는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다.

정령도 보지 못하는, 마음이 여려 주변 시선에 한없이 위축되었던 소년.

―인간이 어떻게 회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 물음의 대답이 이거였다니.

'…정말로?'

하지만 하벨은 하벨 티에라가 자신에게 물은 질문이 단지 저기서 그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평범한 날이었단다. 그냥 평소와 같은, 평범한 날."

룬델은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와 아내, 넬시아와 라르웬, 그리고 막내. 이렇게 여행을 갔단다."

"…막내요?"

"그래. 그때가 다섯 살이었지."

룬델은 어쩐지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하벨 역시 그 이름을 물어볼 수 없기에 가만히 들었다.

"갑자기. …그냥 갑자기 틈의 세계가 나타났단다."

룬델은 잠깐 웃었다.

상당히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미안하구나. 원래 틈의 세계가 갑자기 나타나는 건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꺼내다니."

"아닙니다. 지금 마음이 너무 흔들린다면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니란다. 어쩌면 오늘이 아니면 이야기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들 앞에서 펑펑 울어버린, 오늘이 아니라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말을 꺼낼 날이 올까 싶었다.

"그전에도 틈의 세계를 몇 번 보긴 했지만, 그건 달랐단다."

"달랐다고요? 어떻게 달랐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에른스트를… 틈의 세계에 나온 진짜 괴물을 조심하십시오.

하벨은 문득 류아가 꺼냈던 말이 떠올랐다.

진짜 괴물을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 이었단다. 그때를 다시 생각해도 사람이라고밖에 못 느끼겠구나."

룬델은 자신의 손가락을 꽉 쥐었고, 하벨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전에 클로저인 칼피오한테 그 말을 듣지 않았던가.

틈의 세계에 사람을 보았다고.

"다만, 달랐던 게 하나 있었단다."

"달랐던 거요?"

룬델은 손가락에 힘을 풀고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피부에 비늘같이 된 부분이 있어서 완전한 사람이 아니지 않을까, 하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벨은 룬델의 대답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자신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어인이다.'

사람과 어인의 외형적 차이가 바로 그 비늘의 차이였다.

'어인들마저 틈의 세계에서 나왔다고?'

하벨은 그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가볍게 흘렸지만, 마법사의 탑에 떨어진 후에 바다와 대화다가 그들이 말했던 게 있었다.

―여기도요, 바닷속에서 어인들이 살아요. 자신들을 '인어'라고 하던데요?

물은 언제나 진실을 말해주지만, 가끔 허풍을 섞는 것 역시 알고 있어 그렇게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인어랑 관련이 있는 건가. 그게 아니면…….'

하벨은 유렌을 떠올렸다.

곧바로 눈이 살짝 커졌다.

에른스트와 합심해 자신을 죽인 옛 대신들.

'어인들이 정말 틈의 세계에서 나왔다면 그놈들이 어쩌면 류아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