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다시 만났다(3)
* * *
류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 다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약속했으니 지켜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용왕님."
류아가 활짝 웃었다.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고 익숙했던 반가움이 몰아쳤다.
하벨은 다시금 눈을 감고 눈을 떴다.
환상이 아니었다. 지워지지 않은 그리움의 흔적 역시 아니었다.
"류아야."
하벨이 말하고.
"예, 용왕님."
류아가 답을 했다.
"류아야."
하벨이 재차 류아를 부르자 그는 전보다 더 힘차게 대답했다.
"예, 용왕님.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다.
그 말보다 더 확실한 말이 어디 있을까.
하벨의 눈을 따라 눈물 자국이 그려졌다.
"정말… 너야? 정말 류아라고?"
하벨이 손을 뻗자 류아는 당장 무릎을 꿇고 하벨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렇습니다. 용왕님의 철부지인 형이자 오른팔이자… 영원한 충신인 저 류아입니다."
하벨은 멍하니 류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진실을 고하고 있었다.
―류아가 맞아요.
―네. 류아에요, 용왕님.
물이 겨우 입을 열었다.
하벨은 그 말에 멈칫거리고, 더욱 일그러진 얼굴로 류아를 마주했다.
화르르륵.
청아한 밝은 빛이 랜턴 너머로 풍겨왔다.
'나를 하벨 티에라에 빙의시키고, 하벨 티에라를 도운 게 너였다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 있었겠지.
손을 들어 류아를 만지자 차가웠다.
꼭 죽은 사람처럼 너무도 차가웠다.
"그때… 죽었어?"
안쓰러움이 담긴 목소리에 류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지 않았어요."
"폭발이 아… 팠어?"
"아프지 않았어요. 저희를 용왕님께서 보호해주셨습니다. 오히려."
류아의 눈동자가 금세 일렁거렸다.
"돌아가신 건… 용왕님이셨죠."
류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비참했던 죽음이 생각이 나 너무도 쉽게 눈물이 떨어졌다.
용왕을 보면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배와 가슴팍에 수십 개의 무기로 난도질당하면서도 끝까지 바다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 모습이 생생해 눈물이 흘러내렸다.
류아의 그 모습에 하벨은 그를 왈칵 안았다.
지금 무엇이 중요할까.
하벨은 울먹이며 꺼내고 싶었던 말을 내질러보았다.
"보고 싶었어, 류아야. 네가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자신도 인간처럼 꿈이라는 걸 꿔보길.
죽었던 자들을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어 얼마나 빌었던가.
"저도요. 저도… 너무. 너무 많이 그리웠습니다, 용왕님."
류아는 그간의 서러움을 토하듯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벨은 한 손으로 류아의 등을 토닥였다.
"가여운 것. 이 안쓰러운 것."
"…지금, 지금 이 모습을 보시고도 그러십니까? 또 그렇게 용왕님만 빼고 말씀하시는 버릇은 그대로입니까?"
류아는 하벨이 꺼내는 말에 울다 말고 당황해 소리쳤다.
지금 하벨이 손에 쥔 건 자기 자신의 머리였다.
"누가 누구한테 해야 할 말씀을……."
몸을 뒤로 빼자 하벨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소리도 죽이며 자기 자신의 머리를 쥔 채로 눈물을 흘렸다.
"…이걸 네가 옮긴 거지, 류아야?"
"예. 제가 옮겼습니다."
"자른 건 그놈이고."
"…예. 그놈이 잘랐습니다."
"왜?"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마지막에 널 봤어. 무날이랑 태련이도 보았지."
"그 뒤에 바다가… 모든 물이 폭주했습니다."
류아가 훌쩍거리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는 아직도 남아 있어요, 용왕님."
"내가 사라지면… 바다가, 물이 사라질 텐데?"
"예. 그랬어야 했지만, 세계가 멸망하지 않게 막으신 분은 분명 용왕님이십니다. 용왕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까지도 물과 바다를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류아는 잠깐 허공을 쳐다보더니 말을 멈췄다.
그 뒤를 물이 이어받았다.
―맞아요. 용왕님하고 연결이 끊어졌지만, 용왕님께서 우리의 마지막 정신을 붙잡아줬어요.
―아프지 말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그렇게 계속 다독여줬어요.
물이 하벨의 뺨을 쓰다듬어주었고, 류아는 조금 조급하게 말을 꺼냈다.
"그놈, 에른스트, 그놈이 그 사실을 알고 용왕님을 이렇게 쪼개놓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놈은 용왕님을 이용했고요. 그래서 저는……."
"…쿨럭!"
하벨이 피를 쏟았다.
침식이 다시금 일렁거리기 시작하자 하벨의 눈이 반쯤 풀려버렸다.
"괘, 괜찮으십니까?"
류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다 하벨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이건 놈이 용왕님께 새긴 저주입니다. 용왕님께서 힘을 찾으면 찾을수록 점점 강해지는 저주 말입니다. …빌어먹을 새끼."
―아주아주 죽여버리고 싶은 놈이야. 우리 용왕님을 이렇게 만들었잖아.
―우리 용왕님, 어떡해. 너무 아파서 어떡해요.
물은 최대한 하벨의 침식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짓눌렀다.
보글보글.
금세 물이 끓었다.
"너는 왜… 그곳에 있었어?"
하벨이 힘없이 물었다.
"용왕님. 지금 용왕님의 모든 게 불안해지신 건 육체가 쪼개지면서 영혼 역시 쪼개졌기 때문입니다."
'…에른스트.'
하벨은 자신을 이 꼴로 만든 검정의 이름을 되뇌었다.
"저 역시 용왕님의 거대한 영혼을 전부 모을 수가 없어 불안정하지만, 그 상태로 빙의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금 이 육체에 깃들어 있던 남은 영혼이 용왕님께 옮겨간 걸 알아채지 않았습니까?"
류아가 일부러 말을 돌리자 하벨은 그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류아야."
"괴로우시겠지만, 힘을 찾으셔야 합니다. 반드시 그려서야 합니다."
류아는 하벨의 손을 꼭 잡았다.
"류아야. 왜…….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제가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됩니다. 오래 있으면 틈의 세계가 많이 열릴 겁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가야겠습니다, 용왕님."
"틈의 세계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말해줘."
"…이제 이 육신은 힘을 잃었으니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류아는 하벨에게 손을 뻗었다.
"류아야… 콜록, 콜록."
하벨이 기침하자 피가 섞여 나왔다.
"제 말을 들으면 분명 괴로워하실 겁니다. 자책… 하실 겁니다."
"……말해줘. 너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아. 또, 후회하고 싶지 않아."
쩌어억.
매개체를 잃은 공간에 금이 갔다.
류아는 그 모습에 얼굴을 구겼다.
"저는 틈의 세계에 얽혀 있습니다. 아니, 무수히 많은 존재가 이 틈의 세계에 얽혀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존재?"
"용왕님."
류아가 손을 뻗자 허공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틈의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정말로 류아가 틈의 세계에서 나온 존재라니.
하벨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물었다.
"그럼… 그 괴물들은?"
"괴물이 아닙니다, 용왕님. 용왕님께 나타났던 그들은 결코 괴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류아의 눈이 커졌다.
틈의 세계로부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가야겠습니다, 용왕님. 죽지 않은 자들이 절 쫓아오고 있습니다."
류아가 재촉하자 하벨은 자신의 머리를 그에게 넘겼다.
류아가 말한 대로 저것은 이제 텅 비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코스모피안 왕국, 시엘느, 레놀드, 헤스트리아, 바닷속, 그리고……."
마지막 말을 마치지 못한 류아는 머리를 받자마자 틈의 세계로 들어갔다.
"에른스트를… 틈의 세계에 나온 진짜 괴물을 조심하십시오."
류아가 마지막 말을 남긴 채 틈의 세계가 닫혔다.
"류, 류아야!"
하벨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순간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팔을 몸을 지탱하나 손에 묻은 피 때문에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어서 나가요, 용왕님.
―여긴 다른 공간 같은 곳이에요. 무너지고 있으니 어서 나가야 해요.
"너희는……?"
하벨은 물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물었다.
―에이, 우린 용왕님께서 부르면 어디든지 가죠.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프지도 마시고요.
―우리 목소리가 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놀라지 마세요. 다시 들을 수 있는 날이 올 거예요.
―쭉 기다렸어요. 류아가 이곳에 용왕님의 머리를 두고 갔을 때부터 여기서 쭉 기다렸어요.
"미안해……."
하벨의 사과에 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뇨. 저흰 말이죠. 용왕님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아를 가질 수 있게 됐어요. 아시죠? 그때도 처음부터 용왕님께서 저희 말을 알아들었던 건 아니었잖아요.
―괜찮아요. 저흰 사라지지 않아요. 사라진 건 용왕님이고… 아프신 것도 용왕님이시고, 돌아가신 것도…….
하벨의 양손이 물을 향했다.
천천히 쓰다듬자 물은 눈물을 흘리듯 방울방울 맺힌 물방울을 떨어트렸다.
"…고마워. 나를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용왕님. 저희가 사라지지 않게 해줘서요.
탁!
물의 힘으로 문이 열렸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안의 눈이 커졌다.
물이 하벨을 붙잡고 데려오고 있었으니.
하벨을 바안의 품에 살포시 기대게 둔 물은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하벨에게도 바안에게도 물이 튀지 않았다.
"…하벨 공."
"헤레스한테… 미안하다고, 좀……."
자신에게 기댄 하벨의 무게가 무거워졌다.
저 문이 닫힌 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저 자신이 목격한 거라고는 아주 검고 검은빛이 문틈 사이로 들어간 것뿐이었다.
바안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아예 사라져버린 문을 보더니 곧바로 발을 움직였다.
타타타.
다급한 발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을 무렵, 하벨의 시종이 보였다.
"…도, 도련님은?"
말이 짧다는 걸 바안은 생각할 수 없었다.
"방금, 불길한 힘이 느껴졌어. 도련님이… 도련님!"
칼리우스가 하벨을 보더니 기겁했다.
그 작은 몸집으로 성큼 하벨을 들더니 조심히 땅에 눕혔다.
마법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대체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칼리우스는 뒤이어 자신을 잡으러 다가온 레디나의 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을 깨물었다.
지금 자신이 건 마법이 무너지면 너무 위험했다.
피가 하벨의 가슴팍에 떨어졌다.
투툭.
"뭐 하는 거예요?"
레디나가 깜짝 놀라자 칼리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마법으로 억눌러야 해. 나쁜 게 도련님을 잡아먹는다고!"
"…마법? 나쁜 거라뇨?"
바안이 중얼거리자 뒤늦게 도착한 카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곳에 펼쳐진 상황을 보니 당장 기절하고 싶을 정도였다.
* * *
콰앙!
에른스트가 나무를 때리자 흙먼지와 함께 일대 나무가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이히힝.
말이 시끄럽게 날뛰는 소리에 에른스트가 손을 뻗었고, 단번에 말라비틀어지며 죽어버렸다.
방금 분명히 자신의 힘을 사용했거늘,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또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렇다면 방금 그건 뭐야.'
에른스트는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짧지만, 용왕의 몸에 침식한 그 힘이 또 움직였다.
하지만 어디 쪽인지 애매해 알기 어려웠다.
갈기갈기 찢긴 용왕의 몸은 지금도 어딘가를 떠돌 테니까.
'요새 왜 이러는 거야?'
분명히 평소보다 살짝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언가가 크게 흔들렸기에 그는 의문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용왕이 살아 있다……?'
푸핫.
에른스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이 죽였다.
신이 거둬가려던 영혼을 낚아채 죽어버린 몸에 쑤셔 넣어 이 넓은 세계에 버리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역시 틈의 세계에서…….'
에른스트는 손가락을 올리며 이름을 언급했다.
"자안."
쩌어어억.
허공에 갈라진 틈에서 사람이 스르르 튀어나왔다.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자안은 에른스트를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틈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유렌은?"
"그자는 여전히 미동도 없습니다. 용왕이 죽고 난 후부터 쭉 말입니다."
"잘 감시해. 유렌이 만일 하나 잘못된 마음을 먹는다면 모든 건 무너질 테니까. 저번처럼 멋대로 날뛰게 두지 말고."
십여 년 전, 유렌이 멋대로 날뛴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쭉 동상처럼 지내지만.
"물론입니다."
자안이 고개를 숙이며 에른스트의 손짓에 조용히 틈의 세계로 들어갔다.
'저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변수라는 것만큼 즐겁고, 짜증 나는 건 없는데.'
에른스트는 입가를 핥으며 조용히 레놀드 왕궁을 바라보았다.
'자, 하벨 티에라.'
콰과과과광!
레놀드 왕국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넌 이제 어떻게 나올 거지? 세상에 유일한 물 마법사여. 제1 왕국에서 벌어진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세상에 어떤 희망을 줄 텐가. 몹시 기대되.'
에른스트는 하벨에게 바라는 바가 높았다.
'네가 이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 하니까.'
에르티안 왕국에서 벌어진 폭파 사건 때 하벨을 보면서 기대했다.
신의 위상조차 소용없을 만큼 감히 누구도 보지 못할, 진정한 영웅이 될 상이라는 걸.
* * *
잠에서 깨어나고, 또다시 잠에 빠지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헤레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카샬의 다급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울먹거리던 아라가 보였고, 칼리우스가 자신의 손을 꼭 잡으며 울었다.
넬시아가 몇 번이나 자신을 쓰다듬었으며 라르웬은 자책이 섞인 말을 했던 것 같았다.
미안하다며 말하던 바안과 애써 힘겹게 웃던 레디나 역시 몇 번이나 보았다.
하벨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자 다정한 손길이 가슴팍을 토닥거렸다.
"좀 더 자거라."
룬델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화르르륵.
랜턴의 빛이 환해지자, 하벨은 단번에 의식을 잡으며 눈을 떴다.
"…가주님."
입술이 부르텄는지 말할 때마다 욱신거렸고, 입안에 물기가 전혀 없었다.
"그래, 하벨아. 나는 여기 있으니 안심하고 자도 된단다."
"저는……."
"헤레스가 그러더구나. '몸에 이상이 없는데, 오히려 더 좋아졌는데, 왜 갑자기 열이 나는지'하고 말이다."
"…하."
그제야 하벨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몸에 이상이 없음에도 열이 나는 건 분명 자신의 몸에 깃든 영혼 때문일지도 몰랐다.
인간의 몸으로 감당하기에 너무도 어려울 테니까.
혹여나 어디 한 곳이라도 고장이 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런데… 이걸 버틴다고?'
하벨은 곧바로 드는 의문에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 손이 아프더냐?"
룬델이 놀라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벨은 주변을 살폈고, 어두워진 밤이라는 걸 알자 곧바로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그것보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왜… 잠을 자지 않으세요?"
이미 룬델에게 닥친 일이 많을 텐데, 잠을 지새우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룬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괜찮단다. 일 때문에 밤을 지새운 것도 익숙하고. 오히려 기쁘단다. 네가 이렇게 깨어났으니. 그걸로 됐단다."
"…전하 때문이 아닙니다. 족쇄를 풀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벨은 오해부터 풀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건 에르티안 왕국과 티에라 가문이 체결한 맹약을 풀어서가 아니라는 걸.
"……."
룬델은 그저 하벨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숨길 수 없는 죄책감이 드러났다.
"…가주님."
하벨은 자신에게 꼭 붙어 있는 아라를 조심스레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이었다.
룬델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순간이.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걸 알았고, 그에게 들어야 할 말 역시 남아 있었다.
"잠깐… 밖으로 나가도 되겠습니까?"
하벨은 테라스를 가리켰다.
살짝 가슴이 답답해져 이곳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밖이 춥더구나. 잠깐만 기다리렴."
룬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벨이 자신의 눈을 마주했고, 강한 의지를 드러냈기에 룬델은 저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몰라도 자신을 바라보았던 하벨의 눈동자에 언제나 있던 죄책감이 사라졌다.
* * *
"춥지 않더냐?"
룬델은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오는 터라 하벨이 걱정되었다.
"딱 좋네요."
두꺼운 외투를 걸친 하벨은 모든 게 까맣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빛은 짙은 구름에 가려졌을까.
"가주님."
고개를 내린 하벨은 룬델과 잔잔히 눈을 마주쳤다.
"…그래, 하벨아."
"아마도 예상하셨겠지만, 저는 죽은 자입니다."
"……."
룬델은 잠깐 말을 잇지 못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했단다."
"이전 삶에서 저는 왕이었습니다. 백성들, 아니, 대신에게 배신당해 죽었죠."
룬델은 시선만큼이나 담담하게 꺼내는 하벨의 말에 숨을 짧게 들이켰다.
역시 하벨이 귀족들에게 내보이는 반감에 이유가 있었다.
"…아팠더냐?"
"아팠습니다. 아주 많이요. 그런데 아팠다는 것보다 저는 분했습니다."
"그래. 얼마나 분통하겠더냐."
"저에게도 가족이 있었습니다. 다… 죽었다고 생각해 절망에 빠졌죠. 그 틈을 적이 노렸고, 제 신하들을 유혹해 절 죽게 했습니다."
분명 아주 길었던 시간일 테지만, 하벨은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는 것처럼 말했다.
까드득.
룬델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요, 가주님."
하벨은 자신을 위해 화를 내어주는 룬델을 향해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적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뭐… 라고 했더냐?"
"이 세계는 어쩌면 제가 있던 세계였는지도 모릅니다."
하벨의 눈빛에 씁쓸함이 담겼다.
"제 모든 시작은 하벨 티에라가 절 이 몸에 빙의시키면서 시작됐습니다."
그곳이 출발점이라는 걸 룬델 역시 알고 있었다.
"가주님."
"…그래."
"하벨 티에라는 회귀자입니다."
룬델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갔다.
"하벨 티에라는 회귀자로서 미래를 보았기에 멸망밖에 없는 그 미래를 지키기 위해, 가주님과 형님, 누님을 지키기 위해 절 선택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룬델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입가를 쓸어내렸다.
"하벨 티에라는 아직 제 의식 속에 있습니다."
하벨은 팔찌를 찬 손을 내밀었다.
"바로 여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