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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61화 (261/415)

261화. 다시 만났다(2)

* * *

하벨의 손등에 보였던 둥근 빛 고리가 바안의 손등처럼 까맣게 식어가는 게 보였다.

[…허어.]

초대 왕은 하벨의 결정에 탄식했다.

저렇게 겁도 없이 결정해버리다니.

[그 결정에 후회가 없길 바란다, 티에라 가문의 후손이여.]

"후회는… 없습니다. 아니, 없어야 합니다."

하벨의 눈빛에 깃든 의지에 바안은 입을 뻐끔거리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합의된 결정이었기에 독단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변했듯 자신은 이 결정을 무를 수도 없었고.

[그것이 결정이라면. 하나, 티에라 가문의 후손이여.]

초대 왕은 하벨을 딱하면서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부디, 조심하게. 이 맹약은 애초에 그분이 주도했으며 나는 맹약이 사라진 세상을 보지 못했으니.]

"애초에 그게 걱정됐다면 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기서 도망이나 쳤겠죠."

[그래. 패기 하나는 마음에 드는구나.]

초대 왕은 껄껄 웃었다.

그를 이루던 물방울이 점차 흩어지자 그는 바안을 바라보았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백성들을, 에르티안 왕국을 부탁한다, 후손이여.]

바안의 눈이 커졌고, 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에르티안 왕국을 지키겠습니다."

바안은 초대 왕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았고, 하벨은 거대 보석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초대 왕이 사라지자 생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보석은 반짝임을 잃었다.

쩌어억.

그 소리에 바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보석이 갈라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이자 바안은 하벨을 잡았다.

"위험합니다. 이리 오세요."

하지만 주변에 있던 물이 갑자기 하벨에게 달려들었고, 바안은 깜짝 놀라 손을 놓아버렸다.

"하, 하벨 공!"

바안이 놀라 물에 둘러싸인 하벨을 구하러 다시금 앞으로 달려드는 그때, 물이 꿈틀거리며 자신을 막았다.

마치 더는 오면 안 된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듯했다.

'이게 왜 이러는 거지?'

바안의 눈을 크게 떴다.

언제나 둥둥 떠 있던 물이 이렇게 의지를 내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마치 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공격적으로 자신에게 달려들자 거대한 물살에 본능적으로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 쳤다.

바안이 다시금 나아가려다 물에 붙잡혀 다리가 당겨졌다.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발뒤꿈치에 무언가 닿자 바안은 흔들리는 몸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문턱이라고?'

언제 여기까지 온 건지 그저 놀라웠다.

바안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움직이는 순간,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어버렸다.

탁.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바안은 눈을 깜빡거리며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앞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는 투명한 문을 두드렸다.

쾅쾅!

"하벨 공! 하벨 공!"

바안은 애타게 하벨을 불렀다.

* * *

―들리시나요?

보석이 갈라지자마자 소리가 들렸다.

물이 하벨 자신에게 건네는 목소리였다.

―저희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용왕님?

하벨은 귀에 닿는 소리에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물의 말이 들리다니.

용왕의 힘은 아직 꺼내지 않았을 텐데.

'저 안에 대체 뭐가 있는 건가? 뭐가 있길래 내가 말을 들을 수 있는 건데?'

"위험합니다. 이리 오세요."

바안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하벨이 뒤를 돌아본 순간, 물이 자신을 감쌌다.

―죄송해요. 저자는 지금 이곳에 있으면 안 돼요. 위험하기도 하고, 혹여나 용왕님께서 잘못될까 봐 그래요.

탁.

문이 닫혔다.

"…이게."

그 소리에 하벨은 겨우 말문을 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줘."

하벨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자 물이 그를 달랬다.

―진정하세요.

―맞아요. 진정하셔야 해요, 용왕님.

하벨은 물을 쳐다보다 균열이 깊게 일어난 커다란 보석을 바라보았다.

어떤 설명보다 직접 보는 게 빠르다는 걸 알지만, 하벨은 진실을 보는 게 너무도 두려웠다.

용왕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는 용왕뿐이었다.

그 간단한 사실이 무얼 의미할까.

하벨은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곧 무너질 보석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손끝이 떨렸다.

촤악.

물이 자신의 손을 잡았다.

―저 앞에 뭐가 있든 간에 절망하시면 안 됩니다.

―마음을, 굳게 잡으셔야 해요.

하벨은 물이 경고하는 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 수 없고, 그 방향이 항상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벨은 숨을 멈추며 보석을 툭 하고 건드렸다.

와르르.

손가락 끝이 닿자 사탕가루처럼 바스러진 보석은 바닥에 모래알같이 뿌려졌다.

그 속에서 곱디고운 비단으로 만든 실타래처럼 하얀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하벨은 숨을 들이켰다.

시선이 아주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오는 무언가를 따라 덩달아 움직였다.

온몸이 그 높았던 마법사의 탑에서 다시금 떨어지는 것 같았다.

손부터 걷잡을 수 없이 덜덜 떨려와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기어코 두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이게……."

하벨의 눈동자를 따라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이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저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닿자마자 가슴이 떨리며 상처가 난 제 영혼이 공명했다.

그 감각에 하벨은 아무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건 자신의 머리였다.

용왕이었던 자신의 머리였다.

하벨은 혹여나 부서질까, 아주 소중히 안았다.

"이게, 으흑……."

자신이 안은 얼굴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하벨은 고개가 점점 뒤로 젖혀졌다.

그의 눈이 허공을 떠돌았다.

"……으흐흑."

울음이 나왔다.

절망부터 고개를 들이미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몰라 울음소리밖에 새어 나오지 않았다.

"아아……."

입술을 꽉 깨무나, 목이 갈라진 소리가 퍼져 나왔다.

"아으흑……."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과 함께 튀어나온 목소리는 점점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워졌다.

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하벨 옆에 둥둥 떠 있었다.

하벨은 다시 고개를 내려 자신이 두 손에 쥔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에서 일어나는 떨림을 따라 하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분명 두 눈을 감고 있지만, 얼굴에 드러난 그때의 감정이 보였다.

절망.

좌절.

슬픔.

배신감.

죽음 이후의 마지막 표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으흑… 이, 이럴 순 없어."

하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 눈이 저절로 감길 만큼 괴로워 다시금 머리를 꼭 안았다.

"이럴 순 없어……."

―그래, 아가야. 이 힘이 우리를 오염으로부터 지켜지고 있었다. 물론, 완벽한 건 아니지만, 보지 않았던가. 왕실에 비가 내리지 않는 말도 안 되는 힘을.

초대 왕의 말을 떠올리니 자신은 더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은 그런 적이 없었다.

오염된 물도, 에르티안 왕국을 지킨다는 것도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가? 아니면 이용당한 것인가.'

그 애매한 선에서 하벨의 가슴속에 일어나는 혼란이 커졌다.

무엇이 되었든 머리가 이곳에 있다는 건, 자신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긴 채로 이렇게 쓰이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나한테 왜 그러는가.'

속이 갈기갈기 찢겨갔다.

'나한테 왜…….'

죽음 이후로도 자유롭지 않았다는 사실이 진실이 되어버리자 하벨은 울부짖었다.

울고, 또 울며 자신의 얼굴에 끌어안았다.

누구일까.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런 생각조차 온몸을 감싸는 절망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싸아아아.

하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살의에 하벨은 울음을 멈추며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다.

머리가 빠르게 차가워졌고, 몸을 갈기갈기 찢는 절망보다 더 큰 분노가 일어났다.

'…이 감각은.'

하벨은 천천히 눈을 떴다.

'검정이다.'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의 육체를 이렇게 만든 놈이 검정이었을까.

무엇이 되었든 속에서 살의가 요동쳤다.

날카로워진 하벨의 눈동자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요, 용왕님!

―놈의 힘이 느껴져요! 놈이 용왕님을 눈치챘어요!

물이 다급히 외쳤다.

―괜찮아요. 이번에는 우리가 보호할 거예요. 용왕님을 보호할 거라고요.

하벨은 그제야 물이 왜 자신을 감쌌는지를 알았다.

검정이 다가올 걸 예상했겠지.

처음부터.

'…내 힘이 느껴진다.'

자신의 머리를 안았던 순간, 하벨은 알았다.

에르티안 왕국을 지켰던 그 힘이 계속 작동했던 이유가 바로 이 속에 자신의 영혼 일부가 아직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걸.

공명하며 느꼈던 그때부터 이전 자신의 육체 깃들었던 영혼이 천천히 자신에게로 와 영혼의 상처를 조금 수복했다는 사실을.

바람을 타고 불길한 힘이 움직이자 하벨은 자신의 머리를 안고 놈이 오는 방향으로 쳐다보며 물을 움직였다.

금세 그의 눈동자가 푸르게 변했다.

아주 쉽게 자신의 힘이 손아귀에 느껴졌다.

'…아니. 아직 이걸로는 부족하다.'

파지지직.

검정이 자신에게 심어둔 침식이 날뛰며 칼리우스가 자신을 위해 펼친 마법과 바로 부딪쳤다.

물이 날아와 하벨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듯 감쌌다.

―이게 우리와 용왕님의 연결을 끊어버렸던 그 힘인데. 그 힘이 맞는데… 용왕님의 몸까지 침식되다니.

침식과 맞닿는 부분에 물이 보글보글 끓었다.

주르륵.

하벨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아파요? 괜찮아요, 용왕님?

"…길을 열어라."

하지만 하벨은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아직 얼굴에 눈물 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하벨의 시선은 요동치는 바다와도 같았다.

검정.

갑자기 나타나 모든 것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자신을 죽인 개새끼가 아닌가.

지금 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어 당기려고 하고 있었다.

하벨을 감싸던 물의 길이 열리던 그 틈으로 불길함이 가득한 검은 빛을 보았다.

누가 봐도 자신을 죽이기 위한 살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놈이 온 게 아니었다. 이건 그저 무심코 던져본 공격에 불과했다.

하벨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놈은 아직 날 모른다.'

이게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도 이건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하벨은 갑자기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쩌어어억.

어디서 익숙한 소리가 귀에 닿을 무렵, 날카로운 언성이 들려왔다.

"안 됩니다!"

물이 열어둔 그 틈 사이로 누군가 다급히 나타나는 게 보였다.

하벨은 그자를 보며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만지지 마세요. 제가 합니다. 제가 해야 합니다. 절대 만지면 안 됩니다!"

'…저자는.'

지지지지직!

거대한 마찰이 퍼지는 소리에 하벨은 자신을 보호한 물을 거뒀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용왕님?

물이 기겁했지만, 하벨의 귀에 닿지 않았다.

천천히 시선이 올라갔다.

항상 제 몸을 가릴 정도로 두꺼운 후드를 눌러쓰던 그자가 눈앞에 있었으니.

불길함이 가득한 그 검은 빛은 빛이 아니라 자신을 죽일 때 쓰던 무기 중 하나로 보였으며 그자의 주변에 익숙한 종잇조각이 그 무기에도 덩달아 나풀거렸다.

"…만지시면 놈이 알아챌 겁니다! 그, 윽, 그러니까 안 됩니다!"

다시 들려오는 그자의 목소리에 하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는…….'

칼리우스를 알려준 자이며, 폭파 사건 때 자신을 '용왕'이라 부르던 자이기도 하며 필사적으로 검정의 공격을 막고 있는 자.

하벨은 그 존재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아버렸다.

온몸에 피가 쫙 빠지는 것만 같았다.

저 종잇조각은 공격 도구이자 방어 도구였고, 주술이라고 불리는 힘의 매개체였다.

자신이 용왕일 때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나한테 왜 이래.'

하벨은 미칠 것만 같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생각을 이어나가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으으!"

애를 쓰며 이를 악문 그자는 검정의 힘을 억지로 뒤틀어 어딘가로 넣어버렸다.

'틈의… 세계라고?'

하벨은 그자가 검정의 힘을 넣은 장소를 보자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 많은 것이 겹치고, 또 겹쳐버렸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건지.

하벨은 아직 자신의 머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부터 알지 못했는데.

"이제 괜찮습니다."

그자는 어깨로 숨을 내쉬며 하벨을 다독였다.

"오늘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 놈이 용왕님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채 힘을 사용할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마… 지금쯤 알게 되겠죠. 이번에도 허탕이었다는 걸요. 가끔 일어나는 고장 난 라디오 같은 거라고 말입니다."

그자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후드를 젖혔다.

"그걸 위해 이곳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

그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벨의 입 밖으로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진짜였다.

"…하하하."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겹쳐지는 상황이 너무도 기가 차 웃음이 계속 목구멍 너머로 흘러나왔다.

꿈일까.

오늘 이 모든 게 꿈에서 펼쳐지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벨의 웃음이 한순간 멈춰버렸다.

자신을 향해 짓는 그 미소에 하벨은 미친 듯이 밀려오는 반가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일그러진 얼굴 아래로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 반갑죠?"

그자가 장난스레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떨림을 숨길 수는 없었다.

"네가……."

하벨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건데?"

질문하면서도 하벨은 여전히 믿기지 않아 그 이름을 언급했다.

"…류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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