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다시 만났다
* * *
웃긴 게 분명 문이 열려 있음에도 그 속이 보이질 않았다.
마치 바다를 보는 것만 같았다.
하벨은 문을 뚫고 지나가자 그 소리가 들려왔다.
보글보글.
바다 거품 소리.
바닷속으로 들어온 그 기분과 함께 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몸이 이 앞에 있는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었다.
하벨은 그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 이상한 상황에 그저 숨을 죽이고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 바닷속 수면이 고스란히 펼쳐져 자꾸만 자신에게 바닷속이라는 느낌을 강요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바다일까.
왜 하필 바다처럼 보이는 걸까.
그 생각이 하벨의 머릿속에 펼쳐지고, 맴돌았다.
"놀랍죠?"
먼저 기다리고 있던 바안이 물었다.
"…여긴 처음부터 이랬습니까?"
"네. 원래부터 이랬어요. 자주 오고 싶은 곳이었지만, 이번에 세 번째네요. 보는 눈이 많아서 아버지도 나도 오지 못했죠."
바안은 얼어붙은 하벨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웃었다.
"여긴 이상한 곳이에요. '초대 왕의 축복'이라고 불리는데, 초대 왕께서 만든 곳이며 그 축복이 왕실을 지켜주고 있죠."
바안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깊고, 또, 기분 좋은 곳이라는 건 확실하잖아요. 하벨 공도 느끼고 계실 테고요."
멍한 표정으로 바안의 뒤를 따라가던 하벨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오로지 일직선밖에 없는 길을 따라가면 갈수록 소리가 들려왔다.
소곤소곤.
무언가를 경고하는 게 아닌, 마치 너무도 기뻐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소리 같지 않은가.
"여기 안에 있습니다. 티에라 가문의 족쇄를 풀 맹약이 말입니다."
바안이 가리킨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길게 뻗어간 길이 존재할 뿐.
하지만 하벨의 눈에 보였다.
저곳에 투명하지만, 또 다른 문이 존재했다.
바안이 손을 뻗자 물에서 튀어나오는 듯 '쏴아아'한 파도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쿵쿵.
그 소리와 함께 하벨은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느꼈다.
"들어가죠, 하벨 공."
바안은 열린 문으로 자신을 안내했다.
가고 싶지 않았다.
가고 싶었다.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저곳으로 간다면 몰랐던, 아니,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아버릴 것만 같았다.
'가자.'
하지만 하벨은 나아가기로 했다.
'후회는 한 번뿐이면 족하다.'
무엇이 되었든 나아가리라, 그렇게 마음먹지 않았던가.
하벨은 문으로 들어섰다.
* * *
보글보글.
또 바다 거품 소리부터 들려왔다.
밖이랑 달리 원형으로 된 공간이 드러났고, 정 가운데 사람 키보다 높이 뻗어 나간 보석이 존재했다.
마치 파도가 치는 한 장면 같기도 하며 물살이 휘몰아치는 순간을 고스란히 멈춰 저장한 듯 보이기도 했다.
한 발자국.
심장이 '웅웅'하고 울렸다.
두 발자국.
주변에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세 발자국.
갑자기 물이 나타났다.
하벨은 그 모습에 발걸음을 멈췄다.
"놀라지 마세요, 하벨 공."
바안은 우선 깜짝 놀란 하벨을 진정시켰다.
이 모습을 자신도 처음 봤을 때 당황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원래 이런 곳입니다. 사람이 오면 반기듯이 움직이죠. 저는 처음에 정령들이 가득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아뇨. 정령들은 없습니다."
하벨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물의 소리에 하벨은 가슴이 뛰어 미칠 것만 같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도 처음부터 그들이 기뻐 날뛰고 있다는 건 알았으니까.
마치 꼭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라 누군가 자신의 목을 조른 듯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고, 이제는 묻었다 생각했던 허망함이 몰아닥칠 것만 같았다.
불길한 힘에 무수히 뚫린 배와 가슴팍이 또 뜨거워졌다.
왜 이런 걸까.
몸이 멋대로 날뛰는 것만 같았다.
하벨의 숨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진정하세요, 하벨 공.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입니다."
바안은 하벨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벌벌 떠는 모습에 자신이 뭔가를 건드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요……!"
하벨의 언성이 갑자기 올라갔다.
바안은 처음 보는 낯선 모습에 살짝 멍하니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식은땀까지 흘리는 하벨의 상태에 바안은 다시 물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습니까? 정말 무리하고 있다면 지금 나가도 됩니다. 시간은 내가 다시 내보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하. 그냥, 그냥 많이 놀랐을 뿐입니다. 제가… 물과 친해서 그럴지도 모르고요."
"하벨 공이 가진 특별함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하벨이 자신을 물 마법사라고 밝혔던 그때, 근처에 정령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하벨은 어떻게 물을 사용했을까.
그 사실이 무척 궁금하고 알고 싶었지만, 때로는 물어보지 말아야 하는 것도 존재한다는 걸 알기에 지금도 물을 수 없었다.
"그럼, 하벨 공. 좀 괜찮아진 후에 여기에 손을 올리시면 됩니다."
바안은 이번에도 의문을 삼키고 커다란 보석을 가리켰다.
괜찮다는 걸 알리기 위해 자신이 먼저 보석에 손을 댔다.
"…알겠습니다."
하벨은 숨을 토하며 말을 꺼냈다.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라가 보고 싶었다.
해맑은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준다면 이토록 불안하게 뛰는 마음도 잠잠해질 텐데.
하벨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대한 보석을 향해 걸어갔다.
초대 왕의 가호가 있다고 이곳은 자신에게 너무도 익숙한 장소였다.
처음부터 몇 번이나 자신에게 알려준 것처럼 바닷속 그 자체였다.
밀려오는 여러 감정을 억누르고, 억눌러도 자꾸만 손아귀로 새어 나가버렸다.
―당신의 힘은 결단코,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왜 그렇게 무리하십니까. 물이 움직이지 않는 건 용왕님의 몸이 위험하기 때문이잖습니까.
칼리우스를 만나라며 자신을 떠밀고 자신의 정체를 알았던 그자가 꺼낸 말이 생각이 났다.
―미안하고. 미안하다. …아들아.
―잃어버린 것들을 찾거라.
엘라힘이 자신을 치료하면서 여러 번이나 들었다던 신의 목소리 역시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쩌면.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정말 어쩌면.
―이제야 떠올렸지만,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았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게 맞다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용왕님.
정령사 사건 때, 길을 잃은 정령이 자신에게 꺼냈던 그 말도.
―우리도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요. 누군가가 용왕님을 죽였고, 그리고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여기에 있었어요.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었어요.
마법사 협회 때 최상층에서 떨어져 권능을 발휘한 뒤, 바다와 나눈 그 말 역시 하나의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이곳은 원래 내가 있던 곳이다.'
하벨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럴 수가 없다고.
자신이 몇 번이나 믿지 않았던 그 사실이 갑자기 다가왔기에 하벨은 밀려드는 혼란스러움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낯설게 변해버린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벨은 표정을 다잡고 거대한 보석에 매달리다시피 손을 뻗었다.
하벨이 손을 대자마자 거대한 보석에 파동이 일어났다.
'……?'
그 울림이 마치 자신의 영혼을 쥐고 흔드는 것만 같았다.
여기에 내가 있다.
울림이 그런 말로 다가와 하벨은 입이 바짝 탔다.
"족쇄를 푸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바안은 태연하게 목소리를 냈다.
"…지금, 못 보셨습니까?"
"뭘 말입니까?"
바안은 하벨의 말에 주변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물이 허공에 떠돌아다녔다.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이렇게 활발하게 움직이진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하벨 쪽에만 물이 몰려드는 것처럼 보여 그게 의문이긴 했다.
"특별한 건 보이지 않… 하벨 공? 정말 계속해도 됩니까?"
"…예. 계속하셔도 됩니다."
평소와 달리 하벨의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바안은 그 사실이 계속 신경 쓰였지만, 시간을 더는 지체할 수 없기에 일단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해제한다는 말을 꺼낼 테니, 공께서는 동의한다는 말만 해주셔도 됩니다. 이해했나요?"
"시작하시죠."
하벨은 이를 악물었다.
어서 빨리 자신에게 몰려드는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다.
초대 왕의 가호 앞에서 한 맹약이 끝이 나면 무언가가 달라질 테니까.
바안은 하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왕이시여."
바안의 시선이 거대한 보석을 향했다.
"당신의 후손인 저 바안 에르티안이 간절히 부탁하노니, 티에라 가문과 맺은 맹약을 보여주소서."
지이이잉.
거대한 보석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곳에 손을 댄 두 사람의 손등에 동그란 빛이 그려졌다.
'…정말로 피가 아닌 이름으로 맺어졌다니.'
하벨은 당연하게 등장한 맹약의 흔적에 깜짝 놀랐다.
이곳에 와서 왜 이렇게 놀랄 게 많은지.
많은 것들을 봐온 만큼 어지간하면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용서하십시오, 초대 왕이시여. 오늘 티에라 가문과 맺은 맹약을 해제하고자 합니다. 이는 당신의 후손인 바안 에르티안의 의지이며 현 에르티안 왕인 저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바안의 말에 그의 손등에 나타난 동그란 빛이 까만빛으로 물들어가자 자신 쪽의 동의가 끝났다는 걸 알았다.
자연스럽게 하벨에게 동의를 요청하는 말을 꺼냈다.
"티에라 가문의 후손이여. 그대는 에르티안 왕실과 한 맹약을 해지하길 바랍니까?"
하벨은 잠깐 보석을 바라본 뒤 목소리에 힘을 줬다.
"저 하벨 티에라는 티에라 가문의 대표로서 맹약의 해지를 바랍니다."
"다시금 묻겠습니다. 정말로 맹약의 해지를 바랍니까?"
"예. 이는 티에라 가문의 의지임을 분명히……."
탁.
하벨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누군가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물이 모여 어떤 형상을 이뤘고 머리에 왕관을 쓴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야.]
정령들이 꺼내는 말처럼 귀에 닿는 말이 아니라 머리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이는 장난으로 해지해서는 안 될 맹약이다.]
누군가 단호한 말로 하벨을 꾸짖었다.
"다, 당신은……."
너무 놀란 바안과 달리 하벨은 저 존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저 남자는 선왕과 닮아 있어 초대 왕이 아닐까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여기에 의지를 불어넣게 한 모양이지.'
의지를 남긴다는 게 마법으로 가능한 일인지 몰라도 하벨은 이 맹약에 얽힌 복잡한 사연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누가 장난이라고 했습니까?"
지금은 의문을 해결할 순간을 방해한 저 존재가 몹시 못마땅했다.
자신이 계속 느낀 이 불안함의 정체가 초대 왕이었을까. 아니면 별개였을까.
하벨은 손을 떼고 초대 왕을 바라보았다.
"서로 이야기를 나눴고, 합의 후에 결정한 겁니다. 대체 어떤 힘으로 이렇게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지는 몰라도 후대의 결정을 마음대로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당황은커녕 하나씩 받아치는 모습에 초대 왕은 코웃음을 쳤다.
[요 맹랑한 녀석을 보아라. 아이야. 네가 티에라 가문의 후손이렸다?]
"예. 뭐, 그렇게 되겠죠?"
[그럼 네가 내 후손이란 말이고.]
"그렇습니다. 후손이 인사드리겠습니다."
초대 왕은 바안이 고개를 숙이자 손을 휘저었다.
[됐다. 됐어. 나는 이러려고 이곳에 내 돈과 시간을 투자해 경고하러 온 게 아니니.]
초대 왕은 거대한 보석을 가리켰다.
[이 맹약을 가벼운 마음으로 해제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 겁니까? 이 맹약이 티에라 가문을 얽매고 있지 않습니까."
하벨은 삐딱하게 초대 왕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 이런 이유로 의지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경고해도 그 의지가 누군가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지 않으면 그뿐이니까.]
초대 왕은 가볍게 혀를 찼다.
[여기에는 건드려서는 안 될 게 존재한다, 아이들아.]
"건드리… 면 안 될 거라뇨? 초대 왕이시여. 저는 이해할 수가 없는 말입니다."
바안은 난감함을 드러냈다.
그런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없었다.
[하면 듣거라, 아이들아.]
초대 왕은 하벨과 바안을 내려다보았다.
[티에라 가문과 우리는 존귀한 힘을 노리려는 놈들을 피해 숨겼고, 서로의 비밀을 위해 맹약이라는 이름으로 족쇄를 찼다. 에르티안 왕족은,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도록 했고, 티에라 가문은 에르티안 왕국을 벗어날 수 없게 했다. 그게 맹약이다.]
"존귀한 힘이라뇨?"
하벨은 무언가가 이상하게 진행되는 걸 느끼며 물었다.
[물이 오염됐다. 하나, 우리는 살아 있구나. 이게 우연이라 생각했는가, 아가야.]
어쩌면 당연할 질문을 초대 왕이 꺼냈다.
하벨의 시선이 천천히 거대한 보석으로 향하자 초대 왕은 긍정했다.
[그래, 아가야. 이 힘이 우리를 오염으로부터 지키고 있었다. 물론, 완벽한 건 아니지만, 직접 보지 않았던가. 왕실에 비가 내리지 않는 말도 안 되는 힘을.]
하벨은 오염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킬 힘을 알고 있었다.
알기에 절로 언성이 올라갔다.
"…저기에 대체 뭐가 있는 겁니까? 뭐가 있기에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아가야. 나도 네 기분을 안다. 나 역시 그분이 이 힘을 전해주기 전까지 그분이 말씀하던 사실을 믿지 못했으니까. 어쨌든, 힘을 숨기기 위한 맹약이다. 맹약을 풀게 되면 더는 힘을 숨길 수가 없단다.]
"그분이요? 그분이 누구입니까?"
[모른다. 갑자기 나타난 오염에 절망하고 있는 참에 이걸 전했으니.]
초대 왕은 하벨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이미 죽었다. 죽었지만, 철부지처럼 이 맹약을 풀어버릴 그때를 위해 기다렸다. 너희 둘은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어떤 적이 찾아올지 모른다. 이를 정말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벨은 망설임 없이 거대 보석에 손을 올렸다.
오염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킬 힘.
그건 정화제가 아니었다. 정령들의 힘 역시 아니었다.
온갖 마법도, 아닌 와중에 무엇이 남았겠는가.
바로 용왕의 힘.
자신의 권능이었다.
"맹약을 해지한다."
하벨은 반드시 저 너머에 숨겨진 걸 반드시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