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즉위식(3)
* * *
하벨이 바안을 보며 찬찬히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은 달랐다.
'바안, 저 망할 놈.'
하벨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하벨의 미소가 마치 선왕이 후대의 왕을 바라보는 듯 훈훈해 마치 두 왕이 존재하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하벨에게 점점 쏠리는 시선에 마침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시종이 하벨보다 살짝 뒤에 섰다.
오오.
덩달아 움직이는 시종의 행동에 시선이 따라왔던 이들이 감탄하기 바빴다.
시종이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쥔 받침대 위에 곱디고운 천을 깔고 앉은,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아름다운 보석으로 수를 놓은 왕관이 놓여 있었다.
그 찬란함에 왜 감탄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하벨만큼은 저 왕관의 존재에 당장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우, 끔찍하다.'
다시금 속으로 곱씹었다.
―내 왕관을 하벨 공께서 씌워주세요. 사적인 마음도 있지만, 이는 공적으로도 분명 공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바안이 꺼낸 말이 아직도 귓가를 찔러왔다.
왜 저 말을 꺼내는지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바안을 얼추 저만큼 키워낸 것도 사실이니 그 고마움으로 왕관을 씌워달라고 말할 수 있다고 충분히 생각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분명 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옷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특별해 보였다.
'망할, 바안. 망할, 카샬.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도련님께서 물 마법사가 되신 후에 어쨌든 공식으로 처음 활동하시는 건데 대충 입고 가실 셈입니까?
옷이 왜 이렇게 요란하냐는 자신의 물음에 카샬이 꺼냈던 대답은 딱히 이상하지 않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아니지. 어쩐지 레디나가 유난히 더 많이 웃는다 싶었는데.'
―하벨아. 그쪽이 아니라 저쪽에 서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조금 전 당연하게 라르웬 옆에 앉자 룬델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곳은 바로 이곳이었고 자신은 당황했다.
왜 자신이 저곳에 서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바안.'
하벨은 이를 갈며 필사적으로 바안을 향해 웃었고, 그 역시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뒤에서 수작질하다니. 진짜 많이 컸다.'
다, 공이 알려준 덕분입니다.
바안은 자신의 눈빛에 그렇게 대답하는 듯했다.
오늘따라 바안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한 번뿐인 대관식이었지만, 앞서 선왕의 장례식이 있었기에 바안은 많은 절차를 생략했다.
바안이 자신과 같은 선상에 서자, 하벨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에 움직였다.
왕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에르티안 왕국은 신을 믿지 않기에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아야 했다.
하벨은 시종이 내미는 왕관을 향해 손을 천천히 뻗어갔다.
우수수.
비록 늘 착용하던 장갑을 꼈음에도 금속의 차가움이 손가락 끝까지 전해지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아났다.
식은땀이 하벨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잠깐 숨이 막히는 기분에 두 다리마저 흔들거릴 때쯤, 갑자기 바람이 살살 불어왔다.
뒤쪽에서 커튼이 흔들렸지만,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아니었다.
[후우!]
하벨은 눈동자를 움직였고, 룬델에게 매달린 아라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라는 손을 흔들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눈으로 응원했다.
힘내, 대장!
그 어여쁜 마음 때문에 하벨은 왠지 웃음이 났다.
'그래. 손에 쥔 왕관 따위 이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이건 자신이 아니라 바안이 착용하려고 만든 왕관일 테니.
'…후.'
하벨은 자신을 다독이며 바안에게 왕관을 씌우기 전, 형식적인 절차 중 하나인 왕의 물음을 꺼냈다.
"이제 곧 왕이 되실 귀중한 분이시여. 이 땅, 에르티안을 위해 육체와 정신, 그리고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었는지 감히 여쭤보겠습니다."
"내 모든 걸 이 땅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바칠 준비가 됐습니다."
"귀중한 분이시여. 이 땅을 노리고, 검을 들이밀며 간악한 말로 이곳을 짓밟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벨이 도중에 말을 바꾸자 바안은 그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왜 말을 바꿉니까?
마치 그렇게 묻는 듯했지만, 하벨은 흔들리지 않았다.
경고란 틈틈이 기회가 날 때마다 언급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장례식과 연장선으로 이어져 거의 모든 나라의 사절단이 모인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그놈들의 피와 심장을 이 땅에 바칠 준비가 되었는지 감히 여쭤보겠습니다."
당황했던 바안도 하벨의 의도를 알아채자 바로 목소리에 감정을 가득 실었다.
"내 전부를 바쳐 에르티안 왕국을 조롱하고 뒤에서 검은 손을 뻗는 그 누구든 응징하며 피와 심장을 뽑아내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에르티안 왕국을 짓밟아갔던 귀족들에게 거액의 뒷돈을 넣었던 그놈을 반드시 죽이리라 다시금 다짐했다.
"실례하지만, 장차 에르티안 왕국을 이끌어나갈 귀중한 분의 성함을 감히 여쭙겠습니다."
"바안 에르티안. 내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하벨은 바안의 대답에 흡족해하며 자신보다 더 큰 바안에게 왕관을 씌우러 발판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바안이 슬쩍 자신을 보았고, 하벨은 조금 전 일이 아니꼬워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을 건넸다.
"장하십니다, 아주 많이 말입니다."
"좋은 선생님을 뒀지요. 그것보다 안색이 좋질 않습니다."
바안 역시 하벨과 대화하는 티를 내지 않고 작게 속삭였다.
곧 해외로 나갈 하벨을 위해 모두에게 다시금 그가 물 마법사라는 사실을 강조해도 아깝지 않았기에 이번에 주요 역할을 하벨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것까지 거절할 줄이야.
아직도 그 당황함이 가슴에 남아 있는지, 살짝 불만이 담긴 하벨의 표정을 보자 또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좋지 않네요. 제가 시선 알레르기가 있나 봅니다."
"혹여 왕관이 부러우십니까? 나중에 떼 드릴까요?"
"…필요 없습니다. 절대로요."
하벨은 딱 잘라 거절한 뒤에 왕관을 바안의 머리에 얹었다.
제 손을 떠나자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제가 부러워할 만큼 힘내십시오. 꼭 그러셔야 합니다."
하벨은 그대로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왕관을 쓴 바안은 새삼 달라보였다.
이제야 왕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기에 하벨은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힘내라, 꼬마 왕이여.'
바안은 천천히 등을 돌려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머리에 쓴 왕관이 너무도 무거워 자칫했다간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안은 주먹을 쥐고,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위해 똑바로 눈에 힘을 줬다.
'다들 보고 있습니까?'
바안은 막연하게 기뻐하는 이들과 환호하면서도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과 또 얼굴을 구기는 이들의 다양한 감정과 눈빛을 바라보았다.
겨우 이곳에 섰다.
여기까지 서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지금까지 습격이 왜 없었겠는가.
형제들이 죽었다.
독, 폭탄, 습격 등 다양한 공격에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나와 하벨을 보고 있습니까?'
그렇기에 바안은 당장 이 자리에 에르티안 왕국은 죽지 않았다며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에르티안 왕국의 불꽃은 바로 자신이라고, 그렇게 울부짖고 싶었다.
"바안 전하, 위대한 그 이름을 감히 올려봅니다."
하벨은 한 발 뒤로 뺀 상태에서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왕이 되소서."
진심이 느껴졌기에 바안은 가슴이 뭉클거렸다.
"바안 전하!"
하벨의 말이 끝난 그때, 기사들이 동시에 바안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가 홀을 가득 채울 만큼 우렁찼다.
"바안 전하시여, 에르티안 왕국의 위대한 왕이 되소서!"
이어 에르티안의 귀족들과 티에라 가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들이 꺼낸 말을 고스란히 언급하며 소리쳤다.
"바안 전하시여, 에르티안 왕국의 위대한 왕이 되소서!"
모두가 반기는 일이 아니라는 건 바안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에르티안 왕국의 왕은 이제 자신이라는 걸 모두에게 알렸다.
오늘은 그걸로 충분했다.
* * *
"…여기입니다."
바안은 유난히 화려한 문양이 가득한 문을 가리켰다.
하벨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자리를 빼던 와중에 바안에게 걸려버렸다.
―어디 가십니까, 하벨 공? 나하고 할 게 있잖습니까.
축하는 이미 다 끝냈고, 연회에 둘러싸여 이말 저말 듣느니 자신의 방에서 편안하게 맛있는 거나 실컷 먹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데.
[우와아.]
아라의 입이 커졌다.
저 안에 뭔가가 있다는 게 느껴져 꼬리를 흔들었다.
[있지, 이 몸은 저기에 뭔가 있는 것 같아!]
하벨의 망토에 숨어서 왔기에 아라는 마음껏 떠들 수 있는 지금 순간이 기뻐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나도 그래.
칼리우스는 작게 속삭였다.
'그건 나도 동감이긴 한데…….'
하벨은 저 앞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예측했다.
티에라 가문을 옭아매야 하니 무언가 특별한 마법이든 뭐든 사용하지 않았겠는가.
"전하."
하벨은 자신의 옆에 선 카샬과 레디나를 보며 이어 바안까지 쳐다보았다.
여기에 오려고 바안이 왕실 시종의 옷까지 준비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 싶었다.
"말하세요."
"지금 한가하십니까? 방금 대관식이 열렸고, 이제 막 연회가 시작됐는데 주인공이 빠지면 되겠습니까?"
하벨이 빈정거리자 바안은 키득거렸다.
"원래 눈치껏 빠져주는 시간도 필요한 법입니다. 이제 서로 속닥거려서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 나의 환심을 어떻게 살지 논의하는 시간을 가져야지요. 뭐, 옷도 갈아입는 김에 그냥 시간을 뺏습니다."
"그래서 왕실 시종의 옷으로 갈아입으셨습니까?"
"오늘 같은 날, 이 복장이 눈에 덜 띄잖습니까."
[응응. 이 몸도 그렇게 생각해.]
아라와 칼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절 데리고 왔습니까? 혹시 제가 빈둥거리는 게 배가 아프셨습니까?"
"지금 심통이 난 건 알지만, 하벨 공도 어엿한 티에라가 아닙니까?"
바안이 꺼낸 말에 하벨은 잠깐 멈칫거렸다.
랜턴이 흔들렸다.
'너는 빠져 있거라, 하벨 티에라.'
하벨은 흔들리는 랜턴을 살짝 째려보았다.
"지금부터 그리고 앞으로 아마 틈이 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니 지금이 기회입니다. 어서 족쇄를 풀어줘야겠다는 마음도 컸고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하벨은 물러섰다.
기왕 여기까지 와버린 거 뭘 더 어쩌겠는가.
바안은 하벨이 물러서자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이 앞은 나와 하벨 공만이 들어가야 합니다."
"혹시 정령도 안 됩니까?"
하벨은 벌써 자신한테 매달린 아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몸도 같이 가게 해줘, 바안. 응?]
"…정령은, 음, 모르겠네요. 하지만 안전을 위해 둘만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바안의 대답에 아라는 축 늘어졌다.
[대장의 안전이라면… 이 몸이 참을 수 있어.]
아라는 비틀거리며 칼리우스에게 다가가 어깨에 철퍼덕 쓰러졌다.
바안은 하벨의 사람들을 바라보다 자신에게 강렬히 시선을 보내는 저들을 위해 먼저 말을 꺼냈다.
"초대 왕의 가호가 담겼으니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제가 구해드리죠. 너희도 너무 걱정하지 마. 설마하니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하벨은 평소처럼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이제 들어갑시다, 전하."
"저들이 공을 저렇게도 아끼니, 천천히 들어오세요."
바안이 문에 손을 대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니 그의 손등에서 에르티안 왕국을 의미하는 문양이 떠올랐다.
철컥.
닫혔던 문이 열렸다.
'…이상한데?'
하벨은 안에서 새어 나오는 강대한 힘에 당장 의문을 드러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바안이 안으로 들어간 뒤에 카샬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에르티안 왕국에 처음 온 날 왕실에서 퍼져나가던 푸른 은하수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게 '초대 왕의 가호'였고, 지금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맴돌았다.
"…여긴, 음, 뭔가 도련님이랑 닮았어.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칼리우스가 작은 소리로 하벨에게 속삭였다.
'설명하지 않아도 나도 느끼고 있다.'
하벨은 칼리우스가 지적한 상황에 살짝 미소를 지웠다.
사실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느끼고 있었다.
저곳에 있는 힘이 자신을 저토록 애타게 부르고 있었으니.
무엇이 있는지 몰라도 이다지도 무섭고, 불안할 줄이야.
"괜찮아. 나도 느끼고 있으니까."
하벨은 품에서 사탕을 꺼내 칼리우스에게 넘겼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할 수 있지?"
"응응. 그 정도는 이제 쉬워."
하벨의 시선이 아라를 향했다.
"용용이처럼 기다릴 수 있지, 아라야?"
아라는 대답보다는 아랫입술을 올렸다.
[이 몸은 대장이랑 같이 가고 싶어.]
"알아. 아라 네 마음 알지."
[하지만 대장이 안전할 수만 있다면 오늘은 참을 수 있어.]
아라가 의지를 다지며 말하자 하벨 역시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저는 도련님만 데려올 거예요."
하벨의 시선이 닿자마자 레디나는 못을 박았다.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의지가 눈에 가득 보이기에 하벨은 웃었다.
"아니, 다들 왜 이래?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래서 불안한 겁니다."
하벨이 걱정하지 말라면 걱정할 일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
"…하."
카샬은 한숨을 깊게 내쉬다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하벨은 그 모습에 모두에게 손을 흔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조용히 울러 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