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58화 (258/415)

258화. 즉위식(2)

* * *

"맞습니다. 하벨 공이 말한 대로 누군가 자꾸 전쟁을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바안은 그날, 하벨이 자신을 말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붉은 여우의 동상을 매일 보며 그날을 떠올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이 알아낸 사실까지 겹치니 머리가 복잡하지 않을 수 없지요."

바안은 피식 웃으며 하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공이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벨은 에르티안 왕국의 복덩어리였다.

하벨이 신성 국가 시엘느와 검은 달, 그리고 마법사 협회의 연결점을 알아냈다.

더불어 코스모피안 왕국의 동맹을 추진했기에 이번 전쟁을 막을 수 있었으며 나아가 현재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았던가.

"아뇨. 전하께서 아주 큰 일을 막으셨습니다. 하마터면 모든 게 허상이 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현명하십니다."

"코스모피안 왕국의 암살 사건을 막은 건 하벨 공이 날 도왔기에, 내 정신을 바로 잡아주어 가능했던 일입니다."

"저는 그저 티에라 가문을 지키고, 나아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시엘느가 시체를 만들고, 검은 달이 그 시체를 옮기고, 마법사 협회가 그 시체를 통해 부정한 것들과 오미너스, 그리고 금지된 마법까지 손을 댔습니다."

바안은 헤레스에게 부탁해 오미너스의 표본을 본 적이 있었다.

탁하고 탁한 그 존재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얼마나 소름이 돋았던가.

이게 오염된 물을 통해 만들어진 거라니.

하벨이 막지 않았으면.

하벨이 알지 않았으면.

오염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오미너스가 나타났을까.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벨 공께서 그 고리를 하나도 아니라 무려 두 개나 자르지 않았습니까?"

마법사 협회와 검은 달.

하벨은 이 두 개를 벌써 아작 냈고, 아작 내고 있지 않던가.

"하나는 아직 진행 중입니다."

진행 상황을 언급하는 하벨의 말에 바안은 면목이 없이 고개가 저절로 아래로 떨구어졌다.

찻잔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도 왜 이렇게 별로인지.

"…미안합니다."

바안은 입안이 썼다.

사실 저 일은 자신이 주관해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하벨한테 다 맡긴 꼴이 아닌가.

"미안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좀 걱정이 듭니다."

"걱정이라뇨? 하긴, 걱정이 없을 리가 없죠. 많이… 심각합니까?"

"때론 왕보다 유능한 백성이 나올 수도 있는 법이죠. 아니, 그 가능성이 더 크죠. 그럴 때마다 왕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전부 모가지를 베어 버리는 상황 역시……."

"하."

바안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었는데 그런 이야기일 줄이야.

"나는 그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벨 공을 포함한 인재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인재가 필요합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사실 그게 막연히 쉬운 건 아닙니다. 애초에 백성과 전하의 차이가 월등하게 나는 일이 아니라면 사람은 누구나 질투에 빠지기 마련이지요."

그토록 유능했던 유렌이 자신을 질투해 왕이었던 자신을 죽이는 데 일조했듯 바안 역시 질투에 눈이 멀 가능성이 왜 없겠는가.

"으음. 확실히 왜 하벨 공이 걱정하는지 알겠습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참아보겠습니다. 일생을 거쳐서 이 마음을 던져버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제 곧 진짜 왕이 되십니다."

하벨은 손에 쥔 쿠키를 내려놓으려 바안을 바라보았다.

즉위식이 곧 열리지 않던가.

즉위식은 전 나라를 상대로 왕이 되었음을 공포하는 하나의 의식에 가까웠다.

"혹여나 도망가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하겠지만, 죄책감에 사로잡히겠지만, 곧 닥쳐올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도망칠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왔습니까? 그렇다면 조금 실망입니다. 하벨 공께서 날 그렇게 보고 있었다니."

바안은 말과 달리 실망한 표정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지금 하벨이 자신을 위해 말을 해준다는 걸 왜 모를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처음 왕자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본다면 전하께서는 많이 성장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바안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하벨 공과의 만남이 나를 바꿨습니다."

"어엿한 왕이라는 말씀은 아직 못 드립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니까요."

"그렇죠. 이제 시작이죠."

"하지만 지금까지는 잘하셨습니다."

하벨은 바안에게 닥친 불안함을 알기에 그를 위로했다.

자신도 왕이었다.

사람들을 수많이 이끌고 난 후에야 즉위식을 겪었다. 그때, 그 불안함을 왜 모를까.

"불안하실 겁니다. 너무도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시겠죠."

이미 어인들과 사람들을 이끌어보았고, 왕이라 불렸음에도 즉위식이 되니 달랐다.

바안과 자신은 비슷하되 다른 상황을 겪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점이 있기에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토닥였으면 어땠을까.

아쉽고도 속상한 그 마음을 이제야 풀어보았다.

"자기 자신에게 수많은 물음이 이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이것만큼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잘하고 계십니다. 정말로 잘하고 계세요."

하벨의 목소리에 담긴 그 토닥임에 바안은 얼굴을 일그러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치 아버지가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정말 모든 걸 이해한다는 말에 기껏 여러 겹으로 둘러쌌던 가면이 와르르 부서져 민낯이 드러났다.

"내가… 내가 정말로 잘하고 있습니까?"

이제 갓 성인이 된, 아직 소년티가 나는 바안이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그 속에는 너무도 많은 감정이 별이 되어 이루고 있었다.

자신도 저런 눈빛을 했을까.

'아니. 나는 하지 못했다.'

지금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왕은 자신뿐이었고, 마지막까지 자신이 왕이었다.

설령 차후에 생겨난 왕이 있다 한들, 바닥에 쓰러지거나, 목이 땅에 떨어지며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망의 눈으로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나는… 위로받을 수 없었다.'

하벨은 답을 갈구하는 바안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예. 정말 잘하고 계십니다."

그때의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기분에 하벨은 온 힘을 다해 활짝 웃었다.

이는 예전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주변에서 전하를 도왔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전하께서는 혼자셨습니다. 다른 이들이 왕이 될 수가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처음부터 용왕은 자신뿐이었던 그 상황과 몹시 닮아있었다.

"이를 악무셨잖습니까. 밤새, 매일, 매번, 고뇌와 싸우며 여기까지 무사히 왔습니다. 허물어져 가던 이곳에 천천히 기둥을 세우셨잖습니까."

수족들에게 지배당하던 세상에 자신이 조금씩, 조금씩 어인들과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을 만들어나갔다.

"앞으로 많은 피가 흐를 겁니다. 또, 많은 피를 보실 겁니다. 그 피가 가장 가까운 자들의 것이기도 하며 가장 먼 자들의 것이기도 할 겁니다."

작든 크든 벌어지는 전쟁에서 백성들이 죽어 나갔다.

"분명 좌절하실 일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 사라져버렸다.

"전하의 모든 것을 앗아버릴 만큼, 가장 잔인하게 마음을 파먹고, 생각을 찢어버리고, 행동을 멈출 만큼 깊은 슬픔이 찾아올 겁니다."

바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벨이 꺼내는 저 담담한 목소리에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몰랐다.

분명 하벨은 평온하거늘,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절망감과 슬픔이 몰려왔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백성들만큼은 버리시면 안 됩니다."

하벨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바안이 앉았던 그 자리에 어렸던 자신이 보였다.

순진하고 어설픈 칼리우스를 닮은 자신.

모든 게 낯설고 어려워 쉽게 흔들리고 흔들리던 자신을.

'나는 너를 버리고 말았다.'

깊은 슬픔에 묻혀버렸고, 깊은 절망감에 무릎을 꿇었다.

'너를 버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벨의 시선이 어린 자신을 보며 흔들렸다.

'이래서 내가 용용이가 세상을 파멸시킬 용이라는 걸 알면서도 버리지 못했다.'

마치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자신은 용용이를 품에 두었다.

하벨은 바안이, 그리고 어린 자신이 들어주길 원하며 하소연하듯 말을 꺼냈다.

"그때가 바로 전하의 모든 약점이 드러날 순간이며 지금까지 쌓았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허수아비가 될 순간이기도 합니다."

무너진 자신의 그 틈을 노린 자들이 백성들은 손에 쥐었고,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 자신의 모든 걸 뺏어갔다.

백성들이 자신의 마지막 꽃임을 모른 채, 모두가 흘린 피이자 희생이며 삶이 담겨 있는 줄도 모르고 놓아버린 죄라고 그땐 생각했다.

"하나, 만약 실수한다면. 크게 실수해 정말 허수아비가 되셨다면."

하지만 아니었다.

기회는 분명 수많이 있었다.

지금에서야 그 기회가 보였다.

하벨은 조용히 분노했다.

저 어린 자신을 흔들고, 농락한 저들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전하께서는 좌절하실 게 아니라, 다 놓아버리실 게 아니라 전하의 모든 걸 앗아간 적들을 더욱 거세게 물어뜯으셔야 합니다."

더는 놈들이 자신의 백성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자신이 왕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적들을 부서트려야 했다.

그간 땅에 스며든 가족과 백성들의 아픔과 죽음, 그리고 눈물을 이대로 손에 놓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 그랬어야 했다. 너를 위해서 그래야만 했다.'

하벨은 숨을 깊게 내쉬며 아직 수많은 피로 손이 붉게 물들기 전인, 바안이자 어린 자신을 마주하며 이를 악물었다.

"무조건 말입니다. 용서하시면 안 됩니다."

겨우, 한참 늦게 알아버린 말.

처음부터 알았어야 하는 말이 생각이 났다.

"그게 왕입니다."

왕.

왕은 실패하는 자가 아니었다.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자를 왕이라고 일컫는다는 걸.

하벨은 자신이 알았어야 하는 그 의미를 곱씹으며 찬찬히 웃어갔다.

'그 말을 너에게 해줬어야 했다. 포기하지 말라며 너를 다독였어야 했다.'

어린 자신이 멀뚱멀뚱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을 이해했을까, 알아들었을까.

불안함이 가슴속에 퍼져갈 때쯤, 눈을 깜박이던 어린 자신은 마치 이해했다는 것처럼 잔잔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고맙구나.'

"하, 하벨 공?"

바안은 당황했다.

"왜……. 왜 갑자기 우십니까?"

하벨은 그제야 자신의 볼을 적시는 눈물을 알았다.

"갑자기… 제가 몰랐던 게 떠올라서요."

눈물을 닦은 하벨이 다시 바안을 바라봤을 때, 그곳에 어린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기뻐 우는 겁니다."

하벨은 기뻤다.

어린 자신이 자신에게 웃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과거에 버렸던 자신이 용서해주는 것만 같아서 기뻤다.

그러다 잠깐 멈칫했다.

'…아.'

하벨은 정말로 바안을 어린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저 안쓰러움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바안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하벨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바안을 불렀다.

"전하."

"말하세요."

바안은 하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마치 겪어보았던 것처럼 흘리는 그 말이 그저 안타깝고, 먹먹해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았다.

"일단 눈물을 닦으세요, 하벨 공."

바안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무엇이 기뻤는지 몰라도, 다행입니다."

"전하. 제가 틀렸습니다."

두 박자 늦게 하벨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부디, 부디, 행복한 왕이 되십시오."

바안은 하벨의 말에 잠깐 멈칫거렸다.

―왕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저하.

그토록 단호했던 하벨이 바뀌자 바안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보았는지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그저 하벨이 달라졌기에, 왕은 행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기에 바안은 하벨이 말한 걸 이루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기뻤습니다."

바안은 조금 전까지 가슴을 맴돌던 불안감이 점차 가라앉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왕이란 자리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몰랐다.

"전부 머릿속에 새겨 넣을게요."

진짜로 겪은 일처럼 생생해 바안은 하벨이 다시금 달리 보였다.

만약 그렇다면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대단한 용기를 품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역시 왕의 길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섣불리 대답해주지 않았으니까.

한 사람의 긴 인생을 돌아 보이는 느낌이었기에 바안은 걱정을 떨쳐내고 자신을 위해 많은 것들을 내어준 하벨을 향해 고마움과 존경을 표했다.

"행복한… 왕이 되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하벨 공."

"…고맙습니다, 전하."

하벨은 바안을 향해 활짝 웃었다.

행복한 왕.

왕도 행복해질 수 있는, 그날이 반드시 오길 바라보았다.

* * *

모두가 자리에 앉은 넓은 홀에 금빛과 하얀색이 뒤덮인 옷을 입은 바안이 걸어왔다.

그의 뒤에 은빛 갑옷을 장착한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착.

발소리가 하나로 통일한 것처럼 들려왔다.

기울어져 가는 에르티안 왕국이 아닌, 다시 일어난, 다시 용맹스러운 에르티안 왕국임을 알리듯 바안은 근엄하되, 여유로움을 뽐냈다.

홀에 장식된 여러 장식이 눈에 닿지 않을 만큼 시선을 끌던 바안이 대관식이 진행되는 강단으로 향할수록 시선이 분산됐다.

그곳에 하벨이 있었다.

하얀 옷에 푸른색으로 틈틈이 강조한 그는 누가 보아도 마법사라는 느낌이 나는 의상을 입고 그곳에 서 있었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물 마법사.

그 존재만으로도 가히 바안을 잡아먹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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