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즉위식
* * *
"들어오세요."
하벨의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룬델도, 세렌도 안녕!]
아라가 룬델과 세렌을 보며 활짝 웃었다.
"오, 그동안 잘 지냈어?"
룬델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아라를 반겼다. 아라가 룬델을 안고 머리를 비비며 말했다.
[응응! …아니. 이 몸은 요새 대장이 깨어나지 않아서 계속 슬펐어.]
[하여튼, 저 사고뭉치…….]
세렌은 하벨을 보며 혀를 찼다. 하루라도 가만히 있는 날이 없고, 아라에게 왜 걱정만 하게 하는지.
"하벨아."
룬델이 아라를 다독이며 하벨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안도과 반가움, 그리고 기쁨이 뒤섞인 웃음에 하벨은 불편하면서도 덩달아 반가워서 미소가 퍼져나갔다.
"가주님. 저 일어났어요."
"잘했다. 네가 일어날 줄 알았단다. 언제 깨어났더냐?"
"방금요."
"카샬이 내 방에 찾아왔을 때, 얼마나 심장이 뛰었는지. 상처가… 많이 나아졌더구나."
룬델은 당장 하벨 옆에 앉아 그의 손을 붙잡았다.
창백하면서 핼쑥한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이렇게 자신을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엘라힘 신관이 치료해줬어요."
"이야기 들었다. 아주… 아주 긴 이야기더구나."
룬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마법사 협회와 검은 달, 그리고 신성 국가 시엘느.
전혀 이어지지 못할 단체와 나라가 연결될 줄이야.
"고맙단다, 하벨아."
하벨이 물고 늘어지고, 쫓고, 구르고, 그 모든 것들을 했기에 저 고리를 알아낼 수 있었다.
"네 덕에 에르티안 왕국에 돌던 정화제가 어디에서 막혔는지를 알아냈단다."
룬델은 다시금 고마움을 담아 하벨의 손등을 만져주었다.
"설마, 정화제를 또 만드는 곳이 있었습니까?"
하벨의 눈이 커지자 룬델은 하벨을 다독였다.
"아니란다. 정화제 경로 중에 미심쩍은 구석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네 덕에 찾았구나. 몇 년이나 쫓았는데, 주 거래자인 마법사 협회가 무너지자마자 알아낼 수 있었단다."
[그간, 부정한 것들로 막혀 있었던 곳 중에 있었어. …그건, 고, 고마워.]
아라를 쓰다듬던 세렌은 불에 녹아내린 떡처럼 되었던 표정을 다잡고는 고개를 돌렸다.
[에르티안 왕국에 있던 부정한 것들도 점점 사라져가고, 정령들이 얼마나 많이 너한테 고마움을 표하고 갔는지 몰라. 그렇게 많은 정령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정말……?]
아라가 눈을 크게 뜨자 세렌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래. 정말이야, 아라야.]
"하나씩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구나. 다 네 덕이란다."
[네 덕에 룬델이 오랜만에 숨 좀 돌렸어. 그렇게 좋아하는 낚시도 몇 년 만에 했는지 몰라.]
세렌이 룬델을 위해 그가 좋아하는 걸 언급했다. 룬델이 소심하니 어쩌겠는가. 자신이라도 도와줘야지.
"…낚시요?"
하지만 하벨이 떨떠름하게 대답했고, 그는 무언가 이상해지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말을 돌렸다.
"아직 방심하기에 이릅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단다. 어쩌면 이제야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닐까 싶구나."
"즉위식이 끝나면 해외로 나가겠습니다. 허락해주세요."
"……."
갑자기 훅 들어온 하벨의 말에 룬델은 말문을 잃었다.
"즉위식 후에 전하께서 티에라 가문을 옭아매고 있는 목줄을 풀어주시잖습니까. 하면 저도 나갈 수 있습니다."
목줄이라고 한다면 티에라 가문이 에르티안 왕국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드는 힘을 일컬었다.
룬델은 정말로 에르티안 왕국 밖으로 나가지 못하며 라르웬과 넬시아는 일정 시간만 허락이 되어 다시 에르티안 왕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놀랍게도 그 힘은 피가 섞이지 않은 하벨 티에라에게까지 적용이 되어 있었다.
애초에 이 힘은 '티에라'라는 이름을 속박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했다.
"이제 제가 적을 쫓을 차례입니다. 뒤통수는 이미 많이 맞았잖습니까?"
하벨이 웃자 룬델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즉위식 후에 가주님께 해야 할 말도 있어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중요한… 말?'
룬델은 새삼 그 말이 낯설게 다가왔다.
하벨과 나누는 말 대부분이 중요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하지만 하벨이 직접 이렇게 중요하다는 말까지 꺼낼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중요하다는 건지.
룬델은 왠지 긴장됐다.
"하벨아. 이 문제는… 나 역시 즉위식 후로 미뤄도 되겠더냐?"
"물론입니다. 미뤄도 됩니다. 저 역시 말을 미뤘는데 이는 당연한 겁니다."
"그래. 고맙구나."
자신을 이해해주는 하벨의 마음씨에 룬델은 마음이 포근해졌다.
"가주님."
"그래."
"잘 먹고 다니세요."
잠깐 눈을 깜박거린 룬델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를 저렇게 뻔뻔하게 하는지. 기특하기도 했고, 어여쁘기도 했다.
아라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대체 왜 룬델이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배가 고프지 않더냐?"
룬델이 묻자 하벨은 그제야 배를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면서 카샬한테 말을 해둘 테니, 일단 누우렴."
"벌써 가십니까?"
하벨이 아쉬운 표정을 하자 룬델은 차마 일어나지 못했다.
"나도 가기 싫구나. 정말로 싫구나. 너와 이렇게 노닥거리는 게 즐거운데 말이다."
룬델이 하벨을 바라보는 눈동자 너머에 묘한 분함도 엿보였다.
'진짜로 가기 싫은 모양이다.'
하벨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도 가기 싫어. 에이씨, 짜증 나. 룬델 너는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건데? 여기저기 불려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지금 대체 몇 명을 만나는 거야? 넬시아가 이미 만나고 있다며?]
시렌은 얼굴을 가득 구기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나도 만나기 싫어. 하지만 내가 만나지 않으면 별의별 시답잖은 이유로 꼬투리를 잡고 늘어질 게 분명한데 이걸 어떻게 그냥 보고 있어? 마음 같아서는 꽉 밟아버리고 싶지."
룬델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시비를 나한테만 거는 것도 아니고, 내 딸하고 내 아들들한테도 할 텐데 차라리 내가 고생하는 게 낫지."
"무슨 시비를 거는 겁니까? 다른 나라 귀족들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지. 아무래도 티에라 가문이 힘이 있다고 한들, 에르티안 왕국만 놓고 본다면 끈이 떨어진 왕국에 가깝지 않더냐?"
"하지만 이제 많이 회복됐습니다. 정말 많이요."
"그걸 우리만 알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단다."
"알겠어요.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죠. 다른 나라들이 뒤통수 맞을 모습을 생각하니 되게 즐거운데요? 에르티안 왕국이 이렇게 강해졌다니 하면서요."
"즉위식에 참석……."
"참석합니다. 말리지 마세요."
"그럴 줄 알았단다. 준비는 이미 해뒀단다. 다른 귀족들의 동향은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다 막으마."
"네. 그럼 저도 쉴게요. 정말로요."
하벨은 룬델을 향해 웃다가 잠깐 눈동자를 움직였다.
"아, 바안 전하만 만나고요."
[오늘은 안 돼!]
아라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라 말대로 오늘은 그만두는 게 어떻겠더냐?"
"오늘은 아닙니다. 즉위식 전에,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래요."
"그래. 오늘이 아니면 됐다. 이제 일어나마. 편히 쉬거라."
룬델이 일어나자 세렌이 투덜거렸다.
[왜 벌써 일어나? 앉은 지 얼마 됐다고. 진짜 갈 거야? 네 아들이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를 때는 언제… 읍읍.]
룬델이 세렌의 입을 막고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에는 제가 찾아갈게요."
생각해보면 처음 자신이 룬델을 찾아간 뒤로 언제 그를 찾아갔던가.
매번 룬델이 자신을 찾아왔다.
"고맙구나."
그 말에 룬델은 잠깐 멈칫거리다 이내 환하게 웃었다.
[안녕… 아라야.]
[안녕 세렌!]
시무룩한 세렌과 방긋거리는 아라의 모습이 대비되어 하벨은 어깨를 흔들었다.
* * *
"…왜 또 찾아왔습니까?"
바안은 하벨을 조금 차갑게 바라보았다.
"에이, 왜 이러실까요, 전하? 제가 좀 늦게 왔다고 삐졌습니까?"
"아뇨. 이보다 더 늦게 오길 바랐습니다. 깨어난 지 하루 뒤에 찾아오는 게 말이 됩니까?"
바안은 여전히 아픔을 드러낼 겸 분장하고 온 하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올 거라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이야.
"저도 즉위식 준비한다고 바쁩니다. 기껏 시간 내서 찾아왔더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천연덕스러운 하벨의 말에 바안은 기가 찼다.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내가 더 바쁜 건 알고 있지요? 그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기쁩니다."
언제 장난스럽게 굴었냐는 듯 또 진지해진 표정에 바안 역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각 나라에, 특히 코스모피안 왕국, 레놀드 왕국, 신성 국가 시엘느에 제가 들릴 수 있게 준비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정말로 해외로 나가실 셈입니까?"
"예. 정말 나갈 겁니다. 아니, 나가야 합니다. 보고 받으셨잖습니까."
어제 넬시아한테 찾아와 카샬한테 들은 보고를 정리해서 바안에게 넘겼다는 말을 들었기에 하벨은 알고 있었다.
바안은 '보고'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더 말리고 싶습니다. 아주 많이 뜯어말리고 싶더군요."
넬시아가 하벨을 대신해 보고한 내용은 기가 찼다.
그동안 하벨이 숨겨진 일을 파헤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져온 보고 내용은 신성 국가 시엘느, 검은 달이라는 암살자 조직, 그리고 에르티안 왕국의 마법사 협회.
이 세 개가 서로 손을 뻗고 있었단 말이었다.
이걸 알아낸 하벨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떠올리니 열이 받고, 가뜩이나 코스모피안 왕국의 사절단 대표인 게리온이 알려준 정보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기름에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뭐가 있는 모양입니다, 전하."
하벨은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 바안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렸다.
바안은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가령……."
손을 뻗은 하벨은 초콜릿이 가득 박힌 쿠키를 손에 쥐었다.
"제가 알려드린 코스모피안 왕국의 비밀 조직에 관해 게리온과 이야기하다가 뭔가가 나온 것처럼 보이는데요?"
"독심술… 이라는 게 있다고 하던데 그걸 실제로 목격할 줄은 몰랐습니다."
"전 그런 거 익힌 적이 없습니다. 그저 관찰력이 좋을 뿐이죠. 자, 뭐가 됐든 말씀해주세요. 저는 그걸 들으러 왔습니다."
"내가 보기에 공께서 어쩌다 얻어걸린 것까지 슬쩍 포함하는 기분이 드는데요?"
"그거나, 그거나 똑같지 않습니까? 피차 바쁜 사람끼리 뭘 그렇게 따지겠습니까?"
능글맞기까지 한 모습에 바안은 속을 진정시키려 향긋한 차를 입에 머금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하벨을 빤히 바라보았다.
초롱초롱한 저 눈빛에 바안은 어버이가 된 느낌으로 하벨을 품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일단 코스모피안 왕국의 비밀 조직 중 이번 사건과 얽혀 있는 조직은 첫째 왕자, 레바놈 코스모피안과 얽혀 있다고 했습니다."
"왕자와 얽혀요?"
"그리고 왕자 수족인 푸렐 텔르나가 이를 관리한다고 말했습니다."
"…푸렐 텔르나?"
하벨은 그 이름을 되새겨 보았다.
왠지 익숙하지 않던가.
"혹시 들어봤습니까?"
바안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하벨에게 물었다.
―데론은 죽기 전에 코스모피안 왕국에 있는 '푸렐'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와 연락을 나눴습니다.
이전에 데론이라는 자를 통해 코스모피안 왕국이 에르티안 왕국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 카샬이 이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현재 코스모피안 왕국의 귀족인 푸렐 텔르나로 추정됩니다. 정확하다고 볼 순 없습니다. 푸렐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때 추정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니.'
하벨은 쿠키를 입에 물었다. 혀를 통해 달콤한 맛이 전해졌다.
"들어봤습니다. 그래서 전하를 심란하게 한 정보가 무엇입니까?"
"코스모피안 왕국에도 습격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마터면 왕이 암살을 당할 뻔했다더군요."
"붙잡았습니까?"
"그렇죠. 붙잡은 놈의 인적 사항을 적어 은밀히 내게 넘겼습니다."
바안은 품을 뒤져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 곳곳에 사진이 보였는데, 복장이나 여러 가지 모습을 봐도 익숙했다.
"복장이… 에르티안 왕국 같아 보이는데요?"
하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많이 보던 수법이 아닌가.
가령, 에르티안 왕국의 왕을 암살할 때 쓰던 방법을.
"맞습니다. 내가 그대로 당한 일을 코스모피안 왕국 역시 똑같이 겪을 뻔했어요."
바안은 분노를 섞으며 말을 꺼냈다.
"이걸 전해왔다는 건 둘 중 하나가 아닙니까? 전하께 남기는 경고이든, 보고이든. 어느 쪽입니까?"
"다행히도 보고입니다. 불현듯 밀려오는 불안감에 내가 코스모피안 왕에게 미리 경고했습니다. 암살을 조심하며, 이간질을 조심하라고요."
하벨은 평소와 달리 '잘했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건 무척 예민한 문제였으니까.
"적이 우리가 코스모피안 왕국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확실하네요."
"모르는 게 확실합니다. 다음 장을 봐보세요."
바안은 하벨을 재촉했다.
다음 장을 넘긴 하벨은 한쪽 눈을 올렸다.
붙잡은 놈의 몸에 어떤 표식이 있었다.
사과 모양 같기도 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겁니까?"
하벨의 물음에 바안의 미소가 길어졌다.
"내가 이 자리에 올라오면서 에르티안 왕국에 있던 비밀 조직이란 조직은 다 해산했습니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죽음에 얽혀 있지 않을까 싶었죠."
"그럼 이 문양이 에르티안 왕국이 소유한 비밀 조직의 문양이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몰랐겠죠. 적어도 이 나라에 범인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코스모피안 왕국에도 마찬가지겠고.'
하벨은 바안의 집중력을 흩트려 놓고 싶지 않았다.
"이 나라는, 아니, 지금 상황만 본다면 공이 이전에 말한 대로 세계를 주무르고 있는 자가 지금 에르티안과 코스모피안 왕국에 손을 가득 뻗고 있습니다."
"…마치 전쟁을 벌이도록 말이죠."
하벨은 말을 하면서 소름이 돋아났다.
과거 하벨 티에라가 보았던 그 전쟁이 이렇게 진행이 되었다니.
절반쯤 잘린 책의 나머지 부분을 보는 기분이라 하벨은 자연스럽게 이 상황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