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긴장을 풀고(3)
* * *
<그것도 알겠습니다. 한데,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옆에 그 녀석 목소리가 들리는데요?>
페트리오 말에 하벨은 배시시 웃었다.
"맞아. 아주 화가 났지. 그러니 이만 끊을게."
<예, 예! 얼른 쉬십시오! 푹, 아주 푹 쉬시면 됩니다!>
갑자기 감정 폭이 커진 페트리오의 목소리에 하벨은 멈칫거렸다.
"너……."
<어서 쉬셔야죠. 먼저 끊어 주십시오.>
"아니, 끊을 건데 왜 이렇게 좋아해?"
<저는 예전부터 쉰다는 말을 되게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제일 좋아하는 말이 되었…….>
하벨은 페트리오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연락을 끊었다.
"안녕, 카샬. 좋은……."
하벨은 손을 흔들다 말고 밖을 잠깐 보았다.
"좋은 오후네."
카샬을 향해 활짝 웃는 하벨의 표정이 너무도 해맑았다.
이마를 때리고 싶을 만큼.
카샬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딱, 30분만 자리를 비웠습니다."
"알아. 좀도둑하고 연락했다며?"
"…도련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뭐, 예상을 빗나가는 일이 종종 있을 테니까. 레디나는?"
"어딜 갔겠습니까?"
카샬은 쪽지를 넘겼다.
―저 부수러 가요! 곧 돌아올게요! 야호오!
흘려진 글자나 내용이나 둘 다 봤을 때, 신이 나 참을 수 없는 게 느껴졌다.
"아직 지부를 다 부수지 못했다는 소리는 들었어. 레디나는 언제 나갔어?"
"어제 나갔습니다. 제가 그놈하고 통화하는 걸 들었거든요."
"이쯤 되면 간부가 간을 보고 있을 텐데."
"다리 집어 넣으시죠. 거기까지 하십시오."
카샬은 이불 밖으로 슬쩍 나온 하벨의 발가락을 가리켰다.
"가주님하고, 형님이랑 누님, 그리고 전하까지 남았어."
"아가씨하고, 둘째 도련님께는 제가 다 설명했습니다. 그놈한테 설명하지 않은, 시체 이야기까지 자세히 말이죠. 그럼 가주님과 바안 전하까지 닿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나한테 해줄 말 없어?"
"있습니다. 아주 많이요."
카샬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취해서는 하벨에 온 여러 쪽지를 전달했다.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
"이게 맞습니다."
'이거 원, 작정이라고 했나. 쪽지가 왜 이렇게 많아?'
하벨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쪽지를 쥐었다.
[우와.]
아라가 흥미로운 내용에 냄새를 맡고는 하벨의 앞에 앉았다.
[자자, 대장. 얼른 이 몸한테 보여줘.]
서슴없이 하벨을 재촉하는 아라의 모습에 그는 웃겼다.
―제발, 깨어나면 아무것도 하지 마, 막내야. 그냥 누워 있어. 내가 금방 갈 거니까, 기다려.
이건 라르웬이.
―얼른 깨어나, 하벨. 지금 즉위식 준비로 바빠서 밤에 찾아와서 미안해. 아, 아버지께서 왕실로 오셨어.
이건 넬시아가.
'…룬델이?'
하벨은 잠깐 멈칫거렸다.
쿵쿵.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평생에 한 번뿐인 즉위식이니 당연히 룬델이 참석하는 건 맞지만,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룬델에게 모든 걸 설명해야 하는 일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대장? 왜 안 넘겨?]
하벨 앞에 앉아 있던 아라가 고개를 올려 하벨을 쳐다보았다.
"아니야. 넘길 거야."
하벨은 바로 다음 쪽지를 보았다.
―하벨아.
갑자기 훅 들어온 글자에 하벨이 움찔거렸다.
'룬델이다.'
왜 이렇게 타이밍 좋게 다가오는 건지.
'아니, 애초에 룬델이 나한테 왜 쪽지를 쓴 거지?'
하벨의 눈가가 좁혀지더니 카샬을 올려보았다.
"아직 뒤에 더 남아 있습니다, 도련님."
"이거 누가 하자고 한 거야?"
"가주님께서 처음에 시작하셨습니다."
당당한 카샬의 말에 하벨은 할 말이 없어졌다.
룬델이 그랬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도련님께서 일어나지 않으셔서 많이 속상해하셨고요."
"으음, 눈이 안 떠지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이번에는 꿈을 꾸지 않았다.
꿈을 꾸지 않았음에도 이렇게나 빨리 깨어나지 못했다는 건 자신이 몸을 혹사한 게 아닐까 싶었다.
'에이, 설마.'
하벨은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헤레스가… 아니야. 아무것도."
[헤레스가 옆에서 엄청 기도했어. 아! 엘라힘도 왔었어.]
"…엘라힘도 왔다고?"
하벨이 놀라며 묻자 카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에는 기도만 했지만요. 아무래도 물의 저주이다 보니까, 신력이 통하지 않잖습니까. 헤레스 씨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지만, 도련님께서 눈을 뜨지 않으셨으니 다들 오죽했으면 쪽지를 썼겠습니까?"
카샬은 평소랑 방향을 달리해 하벨의 양심을 눌렀다가 금방 후회했다.
금세 시무룩한 하벨의 표정에 카샬은 숨을 짧게 내쉬다, 다시 말을 꺼냈다.
평소에는 이러지도 않더니.
"이제 눈을 뜨셨으니 다들 좋아할 겁니다."
"그런데 카샬."
"예?"
"즉위식이 언제 열려? 오늘이 며칠인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일단 보시죠."
카샬은 차마 언제 열리는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꺼내는 순간, 득달같이 달려들 게 뻔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고, 마침 하벨의 시선이 내려가자 그제야 안도한 카샬은 침묵을 지켰다.
―네가 자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단다. 즉위식 전에 깨어났으면 얼마나 좋겠더냐. 바안 전하께서 늠름한 모습으로 왕관을 쓰는 모습을 봐야지, 하벨아. 그러니 어서 깨어나렴.
쪽지를 쥔 하벨은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안 되겠다. 연락을 드려야겠어."
하벨이 연락용 아이템을 꺼낼 동안 아라가 다음 쪽지를 넘겼다.
―멈추세요.
순간, 쪽지에 쓰인 구절이 눈에 들어와 하벨은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어후."
―제발, 가만히 있어 주세요. 비와 그렇게 오래 가까이했기에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제발요, 도련님!
[우왓. 헤레스가 지금 상황을 봤나 봐. 엄청 신기해.]
아라가 꼬리를 흔들며 기뻐했다.
"다들… 뭐 하는데?"
하벨은 이쯤 되면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다들 쪽지로 남긴 건지. 바쁠 일이 생긴 걸까.
"도련님이 잠들어 있는 동안 밀렸던 일 때문에 바쁜 겁니다. 걱정스러운 일은 정말로 없습니다."
카샬은 하벨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헤레스 씨는 도련님의 상태가 안정되고 나서 헤일리스를 잠깐 만나 오미너스의 표본을 받고 이를 없앨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으음."
칼리우스가 잠꼬대 도중에 입맛을 다셨다.
어쩌면 지금 제일 한가한 게 그가 아닐까 싶었다.
"아가씨와 둘째 도련님께서는 정말 즉위식 때문에 바쁘십니다. 가주님께서도 이곳에 도착하셨고 마찬가지 이유로 여유가 없으십니다."
"…아."
그제야 경직됐던 하벨의 어깨가 풀어지자 카샬은 그 역시 여러 가지 일로 예민해진 게 아닐까 싶었다.
"즉위식은 4일 뒤에 열립니다. 그때까지 긴장 풀고 편안하게 쉬십시오, 도련님. 나머지 일은 이제 자잘하게 처리가 될 테니까요."
"아직 간부가 남았어."
"압니다. 그래도 오늘은 편안하게 계십시오."
"알았어. 바안 전하를 뵙는 일은 내일 할게. 하지만 가주님을 불러줄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
"알겠습니다. 금방 움직이겠습니다."
카샬은 만족스러워하며 허리를 숙인 뒤에 밖으로 나갔다. 이 정도라면 하벨이 정말 많이 양보했으니.
천천히 눈을 감은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이것저것 생각했다.
즉위식 후에 에르티안 왕국은 사실상 폭파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테지.
'그리고 내가 바깥으로 나갈 차례다.'
폭파 사건의 범인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고, 선왕을 죽인 범인에 관한 정보 역시 이렇다 할 만큼 모인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다른 나라들의 시선을 살짝 돌려줄 필요가 있으며 지금까지 찾았던 흔적들을 제대로 활용할 기회가 필요했다.
바안이 코스모피안 왕국의 사절단 대표인 '게리온'에게 그 나라의 비밀 조직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었느냐에 따라 자신이 갈 나라의 순서가 정해질지도 몰랐다.
'나라를 떠나기 전에 내 땅에도 들려보고.'
정령사 왕국인 헤스트리아에서 탈출한 정령들이 그곳에 있을까.
[대장?]
"…도련님?"
아라와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겹치자 하벨은 눈을 떴다.
"일어났어, 용용아?"
"도련님이다아."
칼리우스는 아직 잠이 덜 깬 채로 두 눈을 감으며 웃었다.
"진짜 도련님이야!"
[대장은 이제 건강해. 울면 안 돼, 용용아.]
"응응. 안 울어. 지금 엄청 기쁜데?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없어. 이제 멀쩡하거든."
칼리우스가 하벨을 향해 손을 뻗자 그의 가슴팍에 있던 칼리우스의 마법에서 빛이 났다.
"으음. 역시 좀 탁해졌어. 내가 피를 몇 방울만 떨어트려서 정화할게. 괜찮지, 도련님?"
칼리우스가 상체를 바로 세워 문 쪽을 슬쩍 보았다.
"헤레스는 지금 없어. 안심해도 돼. 나도 안심했거든."
하벨이 낄낄 웃자 칼리우스 역시 하벨을 따라 낄낄 웃었다.
[아플 텐데, 괜찮아?]
"안 아파, 아라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칼리우스는 자신의 이빨로 살짝 깨물어 피를 낸 뒤, 하벨의 가슴팍에 떨어트렸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이번에도 옷에 묻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 안에서 반짝거렸다.
"그런데 도련님."
하벨이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반창고를 꺼내며 대답했다.
"왜 그래?"
"도련님이 끼는 팔찌 있잖아."
"팔찌가 왜?"
하벨은 저번에 칼리우스가 팔찌를 빼면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니, 그때, 음, 뭔가가 걸려 있는데 지금 좀 약해졌어. 어… 한, 몇 달 뒤에 뺄 수 있겠는데?"
"……."
하벨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간이 없다던 하벨 티에라의 말이 이제야 와닿았다.
'조금만 기다려주거라. 조금만.'
이제야 이어졌다.
이제 배후가 누구인지 장막이 걷어지는 참인데 겨우 몇 달이라니.
"…혹시 내가 실수했어?"
칼리우스는 굳어진 하벨의 표정에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알려줘서 고마워."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용아. 곧 가주님이 올 거라서 아라랑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에 아라는 당장 하벨의 옷자락을 쥐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혹시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야?"
칼리우스가 묻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야기가 잘 끝나면 다 말해줄게."
"응. 이리 와, 아라야. 아직 왕실을 다 못 돌아봤잖아."
칼리우스가 아라에게 손짓하자 아라는 옷자락 뒤에 숨어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이 몸은 대장하고 있고 싶은데. 대장이 이제 막 깨어났잖아.]
"도련님은 가주님하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대. 나중에 같이 있자, 응?"
[이 몸은…….]
하벨은 아라의 뒷덜미를 잡고 자신의 손바닥에 앉혔다.
고개를 휙 돌리며 한껏 부풀어진 아라의 뺨에 하벨은 웃음을 터트렸다.
"삐졌어, 아라야?"
[이 몸은 삐지지 않았어! 화가 났을 뿐이라구. 이 몸이 대장 옆에서 계속 기다렸는데, 대장 옆자리는 이 몸이었는데, 계속 달라져.]
아라의 어리광에 하벨은 마음이 단번에 약해졌다.
그간 일들을 천천히 되짚어본다면 아라가 받을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할까 싶었다.
바로 성장해 모든 걸 아는 기존 정령과 아라는 달리 정말로 하나씩 성장하고 있으니까.
"그럼 안 되겠네. 같이 있자."
딱히 아라가 들으면 안 될 이야기가 아니기에 하벨은 아라의 어리광에 넘어가 주었다.
"그럼 너는 용용아? 너도 여기에 있을래?"
하벨의 시선이 닿자 칼리우스는 당장 있고 싶다는 말을 꺼내려다 주춤거렸다.
"나는, 헤레스를 도와주고 올래. 헤레스가 엄청 힘들어 보였어."
헤레스가 오미너스의 구조를 파악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라면 헤레스를 더 많이 도울 수 있을 테고, 그 일이 결국, 하벨을 돕는 일이라 판단했다.
하벨에게 매달린 아라가 칼리우스를 보며 살짝 놀랐다.
칼리우스도 자신처럼 하벨에게 매달릴 줄 알았는데.
칼리우스의 달라진 모습에 아라는 고개를 내리자 턱밑이 쭈글해졌다.
"갔다 올게, 도련님, 아라야."
"아, 용용아."
"응?"
"즉위식이 끝나면 내 땅으로 갈 건데, 괜찮겠어?"
"응응! 나도 이제는 이겨낼 자신감이 붙었어. 왜 그 땅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건지 알고 싶어."
칼리우스의 눈빛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래. 갔다 와."
하벨은 칼리우스가 내적으로 살짝 성장한 게 아닐까 싶어 괜히 뿌듯해졌다.
감정 조절도 지금은 꽤 잘하고 있고.
왜인지 몰라도 칼리우스가 슬슬 날갯짓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용이기에 당연히 용의 왕은 칼리우스겠지.
'그리고 아라는…….'
[갔다 와, 용용아.]
아라는 왠지 자신이 부끄러워 칼리우스를 보지 않은 채로 손만 흔들었다.
칼리우스가 나가자 하벨은 아라를 쿡쿡 찔렀다.
"이번에는 왜 부끄러워하는 건데?"
단번에 정답을 맞힌 하벨의 말에 아라는 털을 바짝 세웠다.
[이 몸이…….]
아라는 곧 꼬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몸이 대장이랑 떨어지기 싫다고 막 고집부렸어. 그래서… 대장이 실망했을 거야.]
"실망 안 했는데? 아라 넌 아직 아이니까, 그래도 돼."
하벨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말하자 아라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아이답게 나한테 투정도 부리고, 화도 내고, 고집도 부려야지."
[아니야. 정령은 아이라는 게 없어. 다 어른인걸?]
"그럼, 내 눈에만 그런 거라고 하자."
[…이 몸만 다른 건 싫어.]
아라가 울먹이자 하벨은 아라를 조심스레 쥐었다.
"그런 거 아니야. 조금의 시간을 둘 뿐, 아이는 언젠가 어른이 되는 거야. 아라 너는 그 과정을 겪는 것뿐이고."
[이 몸도 어른이 될 수 있는 거야?]
꼬리 너머 반쯤 나온 아라의 눈동자에는 어떤 기대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럼. 아라 너도 어른이 되겠지."
하벨은 그 과정이 금방 오지 말았으면 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아라의 웃음이 천천히 사라진다는 의미니까.
[헤헤. 그럼 이 몸은 아이 해도 돼. 이 몸도 언젠가는 어른이 될 거니까.]
아라는 꼬리를 내리고 힘껏 흔들었다.
하벨은 아무것도 모르는 저 웃음이 오늘따라 마음에 걸려왔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룬델이다!]
다시 기분이 좋아진 아라가 힘껏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