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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54화 (254/415)

254화. 긴장을 풀고

* * *

칼리우스가 던진 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으아앗! 진짜로? 진짜로 가능해, 용용아?]

아라가 엄청 놀라며 앞발을 허둥거렸다.

"응. 가능해."

[신이 아주 아주 큰 존재인 건 이 몸도 알아. 그런 신을 사람들이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어!]

"그, 음, 사람들이 만든다는 게 아니야, 아라야."

칼리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봐봐, 용용아."

하벨의 재촉에 칼리우스는 손에 묻어난 땀을 닦았다.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하벨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혼내지 않았기에 칼리우스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용의 지식이 말하는데, 신이 땅에 내려온 적이 실제로 있었대."

"부활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소환이라는 개념인가?"

하벨이 중얼거리자 레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그래요. 신을 부활시킨다는 소리는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새삼스럽지만, 시엘느에서 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내부에서도 진짜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네요."

"언제부터 그런 말이 떠돌았어?"

"최근 몇 년 전부터요. 시엘느의 수입 대부분은 은총 벌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시엘느에서 어느 순간 직접 대면한 치료를 약으로 대체하고, 대면 치료마저 예약제로 바꿨대요."

"왜 이런 사건이 크게 주목받지 못했는지 알겠네."

"왜 그런 거야?"

칼리우스가 하벨이 던진 말에 의문을 가지며 물었다.

"시엘느에서는 큰 사건이지. 그렇지, 용용아?"

"응. 맞아."

"그런데 사실 아주 급한 상황 아니면 약이나 의사들이 치료할 수 있단 말이지."

"그건 언니가 뛰어나서 그렇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레디나가 슬쩍 끼어들며 묻자 하벨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것도 당연히 있지. 헤레스는 최고지. 아주 신뢰하니까."

"아. 그래서 도련님께서는 여기에 계시고요?"

"아니, 그, 어쨌든, 전 세계로 보자면 신관을 통해 치료를 받는 것보다 약 사용이 높은 건 사실이잖아?"

"그거야, 사실이긴 하죠."

레디나는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의존도도 낮은 상태에서 물의 오염이라는 더 큰 재난이자 문제가 있는데, 관심이 쏠릴까 싶네."

"아! 물의 오염이 더 중요하니까 관심을 덜 받는 거구나! 이제 이해했어! 고마워, 도련님."

해맑게 웃는 칼리우스의 모습은 마치 아라 처럼 꼬리를 붕붕 흔드는 것 같았다.

하벨은 칼리우스를 보며 활짝 웃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일단 발을 움직였다.

"레디나. 혹시 있잖아."

"네, 말씀하세요."

"신의 은총으로 물의 저주도 치료할 수 있어?"

"아뇨. 제가 알기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어요. 치료제는, 음, 오직 정화제뿐이라고 들었거든요."

[어어? 신의 은총을 쓰는 건데도 안 되는 거야? 엘라힘이 쓰는 힘은 엄청, 엄청, 대단했는데? 이 몸이 신성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만큼 엄청 대단했어!]

"그럼 나중에 엘라힘한테 물어보자."

하벨은 그 이유를 지금 이곳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정령사와 정령들이 만든 정화제는 물의 저주를 치료할 수 있으나, 신의 힘을 받았다고 알려진 힘으로는 물의 저주를 치료할 수 없다는 이 논리가 말이 되지 않았다.

마치 신의 힘이 물의 저주를 치료하길 꺼리는 것 같지 않은가.

'…진짜 이상해.'

* * *

작은 전쟁을 마치고 온 브란스를 포함한 클로저들의 꼴이 피비린내로 뒤섞여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하벨은 개의치 않았다.

저들은 승리를 쟁취해 자신이 있는 곳까지 찾아왔다.

죽은 자들은 없어도 상처를 입은 이들이 왜 없을까. 그렇기에 하벨은 순순히 클로저와 관련된 자료를 넘길 생각이었다.

'카샬은 아직 안 왔네.'

하벨은 엘라힘과 클로저가 서로 마주하지 않은 상황을 안도하며 자료를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브란스 씨."

"…이게 자료입니까?"

브란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쩐지 살짝 넋이 나가 있는 것만 같았다.

[브란스나, 클로저들이나 사람을 이렇게 많이 죽여본 게 처음이라서 그래.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하벨.]

루룸이 먼저 하벨에게 다가가 말해주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사망자는 없었으니까. 라르웬도 무사해.]

[루룸도 괜… 멀쩡해 보여!]

아라가 루룸의 앞발을 붙잡으려다 멈추고 조금은 사납게 목소리에 힘을 주자 루룸이 배시시 웃었다.

[그럼. 나는 괜찮아.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라야.]

'다행이네.'

하벨은 라르웰을 힐끔 바라본 뒤에 안도해서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예. 클로저와 관련된 자료입니다. 복사본도 아닌, 원본입니다."

"왜……."

"왜 이렇게 다 넘기냐고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승리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며 당신들과 관련된 일이 아닙니까? 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어차피 클로저들과 여기서 끝날 인연이 아니었기에 하벨은 최대한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저 역시 이번에는 원하는 바를 이뤘으니, 다음에도 뵙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이라뇨? 또 봐야 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요. 연락은, 라르웬 씨를 통해서 하시죠. 제 연락처를 드렸으니까요."

하벨은 브란스를 포함한 칼피오, 클로저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요, 달님 씨."

칼피오가 하벨을 붙잡았다. 하벨은 가다 말고 칼피오를 보았다.

"말씀하세요."

"자리를 옮길 수 있을까요?"

라르웬이 칼피오를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말릴 구석이 없었다.

"예. 괜찮습니다."

하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일단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칼피오가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칼피오는 착한 사람이야. 이렇게 사과를 할 줄 아는 건 대단한 거라고 대장이 그랬어. 착하다.]

아라는 칼피오를 슬쩍 건드렸다.

순간, 칼피오가 깜짝 놀라서는 뒤를 돌아보자 하벨은 태연하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뇨. 뭔가가 되게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져서요."

"사람을 죽인다는 게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니까요. 많이 힘드셨습니까?"

"솔직히… 좋은 기억은 아닙니다. 아마 클로저들 전부 그렇게 느끼고 있겠죠. 우리의 적은 오직 틈의 세계에서 기어 나오는 괴물들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네. 여기가 끝은 아닐 테니까요."

칼피오는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하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 봤겠지만, 사실 그런 일이 클로저 내부에서 생각보다… 음,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말을 이어나가기 힘든지 칼피오는 몇 번이고 망설였다.

아마도 엘란이 저지른 살인에 관해 이야기하는 거겠지.

하벨은 조금 전 칼피오가 생각보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다시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제 입을 다물게 할 생각이라면 틀렸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이렇게 달님 씨께 이야기를 드리는 건 브란스 형님께도 말했지만, 달님 씨한테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클로저는 변해야 합니다."

화르르륵!

랜턴에 검은 불꽃이 치솟았다.

"하여 제가 클로저들의 감시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걸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칼피오의 말과 함께 치솟았던 검은 불꽃이 갑자기 반쯤 줄어들었다.

'…뭔가가 변했다는 건가?'

하벨은 랜턴이 의미하는 바를 해석하면서도 의문을 느꼈다.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 결정에 시작점이시니까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감사합니다, 달님 씨. 종종 라르웬를 통해 연락하겠습니다."

칼피오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뭐가 됐든 좋은 방향인 건 맞겠지?'

하벨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 대장! 아까 칼피오가 대장한테 하려던 말을 물어보면 안 돼? 이 몸은 있지, 너무 궁금한데.]

"아."

하벨은 돌아서려다, 아라의 재촉에 칼피오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까 저한테 하려던 말이 혹시 뭡니까? 무용담 말입니다."

"…아, 그거요?"

칼피오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제가 말입니다. 괴물한테 붙잡혀서 틈의 세계에 끌려갈 뻔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속을 봤습니다."

[오오…….]

아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뭘 봤냐고 물어봐 줘, 대장.]

"거기서 뭘 봤습니까?"

하벨은 신이 난 아라를 위해 기꺼이 입을 빌려주었다.

칼피오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덩달아 아라 역시 앞발을 꼬옥 모았다.

"제가 거기에서 본 건 말입니다."

[응응. 칼피오가 본 건 뭐야?]

"…거기에서 사람을 봤습니다."

아라가 두 박자 늦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벨이 기가 찬 소리를 내자 칼피오는 콧잔등을 긁적이며 말했다.

달님한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분위기가 제법 무거웠기에 촐랑거리는 건 최대한 억눌렀다.

"진짜 맹세코 정말입니다. 그 속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칼피오는 잠깐 눈동자를 굴리다 다시 말을 살짝 바꿨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처럼 보인 거죠. 물론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알지만, 그 형태는 분명 사람이었는데… 음, 역시 라르웬의 말을 그냥 들을 걸 그랬습니다. 분위기가 싸늘하네요."

하벨은 그저 잠깐 생각했다.

'내가 봤던 작은 괴물, 그걸 말하는 걸까?'

멀리서 봤다면 사람으로 보일만 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일까.

밀려드는 궁금증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주 흥미롭네요. 그러면 정말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사람처럼 보였습니까?"

칼피오는 잠깐 눈을 깜박거렸다.

이 이야기를 달님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칼피오 역시 덩달아 진지해졌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마워요.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혹시 또 알게 된다면 뭐든 알려주세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정말 흥미로웠고, 의문이 맴돌았다.

이곳이 정말로 자신이 있던 세계라면 틈의 세계는 왜 벌어진 것이며 그곳에 있는 사람은 대체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왜 형님이 이 말을 막은 거지?'

하벨은 돌아서면서 발걸음만큼이나 의문이 쌓였다.

생각해본다면 허망할 수도 있고, 말도 안 되는 말인데 굳이 왜 말린 건지.

하벨은 랜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다음에 널 언제 만날지 모르겠지만, 만나서 물어볼 게 점점 늘어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아직 네가 내준 문제를 못 풀었으니까.'

―인간이 어떻게 회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하벨은 이제 와 본다면 그 질문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틈의 세계와 관련 있을지도 모르는 하벨 티에라가, 왜 자신을 제 몸에 빙의시키며 세상을 구해달라는 이유까지 한 번에 풀릴 수 있는 물음일 테니까.

'덤으로 폭파 사건 때나, 용용이를 언급했던 그 존재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은데.'

[있지, 대장.]

아라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이 몸이 틈의 세계가 나타나면 슬쩍 볼…….]

"안 돼."

하벨의 시선은 엘라힘을 데려다주고 이제야 돌아온 카샬에게 향해 있었다.

"절대 안 돼."

하벨이 한 번 더 강하게 언급하는 아라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대장. 화… 났어? 이 몸은 좋은 생각이라고 판단했는데.]

아라의 생각이 좋을 순 있지만, 괴물들이 정령을 볼 수 있는지 아닌지 여부는 라르웬에게 들은 적이 없었다.

라르웬이 싸웠을 때, 루룸이 그의 곁에 꼭 붙어 있는 걸 보면 어쩌면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

"위험해."

하벨은 카샬을 지그시 보며 아라에게 말했다.

[응응. 이 몸은 위험한 거 안 할게.]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심기가 이렇게 불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샬은 눈치껏 가짜로 사과했다.

"가자."

하벨이 브란슨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자 카샬과 레디나, 그리고 칼리우스가 그를 따랐다.

왔던 후문으로 그대로 나가자, 정령들이 그곳에 서 있었다.

"출발했던 거 아니었어?"

하벨이 묻자 정령들은 씨익 웃으며 이빨을 내보였다.

[이거 주려고 기다렸어.]

정령들은 그들이 나무에 숨긴 꽃무늬가 가득 박힌 등을 내밀었다.

[우와아! 그건 아까 마을에서 열렸던 축제에서 달렸던 등이잖아!]

아라가 행복함에 꼬리를 흔들었다.

[맞아! 아까 용용이한테 못 보여줘서 아쉬워하길래 가지고 왔어! 받아.]

하벨은 정령들이 꺼낸 등을 받았다.

'이걸 전해주러 나한테 오다니.'

자신의 작은 친구들은 정말로 갑자기, 느닷없이 훅하고 다가오는 봄꽃과 같았다.

[이젠 진짜 갈 거야. 안녕. 모두 안녕.]

[안녕, 잘 있어. 다시 또 만나자.]

정령들은 힘껏 손을 흔들었다.

하벨 역시 손을 흔들어주었다.

"조심히 가. 다치지 말고, 딴 길로 새지 말고."

[맞아. 누가 뭐 사준다고 하면 대장처럼 따라가면 안 돼.]

앞발을 흔들던 아라가 너무도 해맑게 웃자 하벨은 입이 가벼운 칼리우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아앗! 이거 비밀이었는데! 쉿, 용용아!]

아무래도 그 말을 꺼내려고 했는지, 칼리우스의 어깨가 잠깐 흔들렸다.

이미 라르웬한테 들킨 것만 해도 충분했기에 하벨은 속으로 빌어보았다.

'말하면 안 돼, 용용아. 나 카샬한테 죽는다고. 레디나한테는…….'

어우.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쫙 몰려왔다.

칼리우스가 입을 벙긋하지 않는 걸 보며 하벨은 안도와 함께 카샬을 불렀다.

"카샬."

"잘 모셔드렸고, 도중에 클로저들과 마주한 적도 없습니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가면단까지 붙였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잘 처리해줘서 고마워. 이제 왕실로 돌아갈……."

화르르륵!

랜턴에 검은 불꽃이 켜졌다.

하벨이 깜짝 놀랄 무렵, 갑자기 빛이 꺼졌다.

'…갑자기?'

후.

사건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하벨은 랜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라힘이 무사하다는 말이 듣자 랜턴의 빛이 꺼졌다. 이 절묘한 순간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뭐야? 랜턴 조작이 수동이었어?'

지금까지 긴가민가하던 사실이 진실로 드러난 순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벨은 일단 등을 칼리우스한테 넘겼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카샬이 진지한 목소리를 내자 하벨은 일단 그들을 진정시켰다.

장난기 많은 하벨 티에라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 보지 않았다.

"…놀라지 마."

"예?"

카샬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반응과 함께 그 소리가 들렸다.

딸깍.

또 눈앞에 과거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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