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아, 그렇게 됐단 말이지?
* * *
'비밀 장소는 언제나 가슴이 뛰지.'
하벨은 하벨 티에라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지 다시금 알았다.
비밀 장소.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그 장소에 뭐 이렇게 집착하는지.
하지만 그 속에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가득하기에 하벨 역시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그 전에.'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을 꺼내, 라르웬에게 연락했다.
5초 정도 됐을까.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을 끊어 라르웬에게 신호를 보냈다.
여기는 다 끝났다.
대충 그런 의미였다.
"내가 책상을 치워줄게."
칼리우스가 달려나가기 전에 레디나가 칼리우스를 불렀다.
"칼리우스 님."
"응? 왜 그래, 레디나?"
"잠깐 여기만 소리를 막아줄 수 있어요?"
레디나는 놈을 죽이기 전에 소리라도 막고 싶었다.
이곳에 아직 자라나야 할 예쁜 새싹들이 가득했으니까.
"응! 할 수 있어!"
칼리우스가 기뻐하며 말하자 레디나 역시 덩달아 웃었다.
뿌듯했다.
레디나 자신이 이렇게 남도 신경 쓸 수 있게 되어서.
피에 취하면 자신이 조금 달라진다는 걸 왜 모를까. 하지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게 자신이었으니까.
"고마워요. 그럼, 갔다 오세요. 다 치워놓고 있을게요."
레디나는 손을 흔든 뒤에 자신의 표정을 숨기려 다시 가면을 썼다.
자신과 놈을 감싼 얇은 막이 보이자 단숨에 놈의 등에 단검을 박아버렸다.
하지만 하벨에게 아무런 소리도 닿지 않았다.
드르르르륵.
칼리우스가 책상을 치우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응?"
칼리우스의 고개가 갸웃거려질 때쯤, 카샬이 검집에 넣은 검을 바닥에다 찍어버렸다.
콱!
바닥이 우수수 부서지자 아라의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났고, 칼리우스가 감탄했다.
"대단해.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맞아. 카샬은 대단해!]
"지하에서 나는 냄새가 나서."
카샬은 귀찮은 듯이 대답했다.
킁킁.
아라와 칼리우스가 거의 동시에 냄새를 맡으려고 시도해보나,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몸은 모르겠어.]
"나도."
"와. 용의 코보다 좋다니. 대단한데, 카샬? 누가 보면 지하에서 산 줄 알겠어."
하벨이 빈정거렸다.
"맞습니다."
아라가 피운 불을 보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하벨은 그대로 발을 멈추고 다급히 카샬을 보았다.
"…거짓말이지? 에이. 무슨 장난을 그렇게 험하게 쳐?"
하벨이 더듬거리며 묻자 카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저는 곰팡이와 벌레와 그리고 먼지들이 가득 쌓인 곳에서 살았습니다."
"노, 농담이라고 말해줘."
"제가 굳이 왜 도련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야, 음, 내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뭐, 그것도 해답이 되겠지만, 제가 드린 말씀은 진실이자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냄새를 잘 아는 거겠죠."
"하지만 네 몸에 묻어나온 격식이나 행동을 보면 아닌데?"
꽤 날카로운 하벨의 물음에 카샬은 가볍게 웃었다.
이건 이전 도련님도 모르던 사실이었는데.
카샬은 그냥 대답해주기 싫어 말을 빙글빙글 돌리며 망아지처럼 날뛰는 하벨의 기세를 한 번 꺾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신분이 무엇이든, 쓸모가 없으면 버려지는 법이죠. 자, 들어가십시오, 도련님."
자신이 카샬을 잘못 찔렀으니 어쩌겠는가. 조용히 입을 다무는 수밖에.
뒤쪽에서 카샬이 통쾌하다는 웃음을 흘려도 하벨은 할 말이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생각보다 짧아 아라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건 비밀 장소가 아니야. 이 몸은 실망했어.]
"하긴 그렇네. 한, 2층 반 정도의 높이였으니까."
하벨 역시 호기심을 빠르게 접었다.
그냥 딱 서류를 숨기려는 장소밖에 되지 않았으니.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이만큼 큰 상단을 보고 누가 여기가 암살자들이 우글거리는 지부라고 생각할까.'
하벨은 계단 끝에 있는 문을 보았다.
마법이 걸려 있었다. 어떤 종류의 마법인지 파악하기 전에 칼리우스가 말을 꺼냈다.
"도, 독이 걸려 있었어. 열쇠가 아니면 독이 튀어나와서 도련님이 큰일이 났을 거야."
하벨의 말이 맞았다. 세상에 마법으로 다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만일 하나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때론 정해진 답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
하벨은 열쇠를 흔들며 바로 문을 열었다.
딸깍.
문을 열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가면 틈으로 살며시 스며들었다.
지하 특유의 냄새였다.
"저는 바로 자료를 챙기겠습니다."
카샬은 도서관처럼 늘어진 자료들을 보자마자 하벨에게 말을 꺼냈다.
여기서 당장 어떤 자료를 찾는 것보다 다 가져가는 쪽이 나았다.
"나도 같이 도울게. 용용이랑 아라는 여기에 붙잡혔다는 사람을 찾아줘. 할 수 있겠어?"
지하가 꽤 넓기에 하벨은 자신이 돌아다니는 것보다 칼리우스와 아라가 돌아다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응! 이 몸은 할 수 있어!]
"응응!"
아라와 칼리우스가 힘차게 대답한 후에 당장 움직였다.
"우리, 서로 힘을 합쳐서 바로 찾아버리는 거야. 그럼 도련님이 깜짝 놀라겠지?"
[우와아! 아주 좋은 생각이야, 용용아! 빨리 찾으면 분명 대장이 놀랄 테니까. 헤헤.]
발소리와 함께 칼리우스와 아라가 속삭이는 말이 들려왔기에 하벨은 웃음을 참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꼭 자식 두 명을 가진 팔푼이 같아 카샬이 툭 하고 물었다.
"그럼. 둘 다 사랑스럽잖아. 너도 그렇게 보고 있잖아?"
"그거야,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도련님께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카샬은 망토를 들춰 불이 깜빡거리는 정화 장치를 보았다.
"…이걸 숨기려고 보내신 겁니까?"
역시 하벨이 이상했다.
원래라면 자료를 찾는 건 뒷전으로 하고 당장 이곳에 붙잡힌 자를 찾아 나설 텐데.
"뭐. 그것도 있고."
하벨은 가면을 벗었다.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몸이 좀 무겁기도 하고, 아라랑 용용이가 울먹일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하벨은 카샬이 주사기를 꺼내는 동안 용왕의 힘을 끌어와 물방울을 만들자 검에 깃들었던 아코가 다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아코가 당황해하자 그제야 카샬은 하벨이 무언가를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효율적인 일을 해보려고."
하벨은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보았다.
이곳에 정령들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자료 중 자신이 원하는 걸 어떻게 찾겠는가.
'하지만 물은 어디에서나 있지.'
지금 물과 소통을 할 수 없지만, 꼭 소통이라는 게 말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길을 안내해주거라.'
하벨이 손아귀에 만들어진 물방울을 떨어트리자 물은 엄지만 한 물고기로 변해 허공에서 헤엄쳤다.
[…뭐야, 뭐야? 이건 정령의 힘이 아닌데?]
아코는 상체를 높이 들어 작은 눈동자를 크게 떴다.
"이건 내 힘이야."
하벨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물고기를 쫓아갔다.
저 물고기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하벨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의 힘이 점점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니까.
'검정을 만나기 전에, 아니 나를 놈이 눈치채기 전에 내 힘을 되찾아야 한다.'
신기하게도 자신이 힘을 점점 되찾아도 하벨 티에라의 몸이 용케도 버텨주었다. 자신의 힘에 적응하는 걸까.
하벨은 아직도 검은 빛을 내뿜으며 타오르는 랜턴을 바라보았다.
새삼 하벨 티에라의 몸이 신기하다는 기분이 들면서 그와 협력한 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하벨 티에라는 내가 용왕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테지. 그렇다는 건 하벨 티에라와 협력한 그자가 날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나는 이곳을 모른다. 이곳은 내가 있던 곳이 아니다.'
―잊어버리고 있어서 미안해요.
정령사 사건 때, 아라가 죽은 뒤에 길을 잃어버린 정령들을 올바른 길로 보내주던 도중 그 정령들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린… 당신을 잊지 않았어요.
'마치 나를 잊은 게 자의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하벨은 앞으로 나아가며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있던 곳에 정령이란 존재는 없었을 텐데.'
정령은 이곳에서 처음 맞닥뜨린 존재였으며 그들이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 자체도 이상했다.
'대체 뭐가 뭔지.'
"도련님?"
카샬의 목소리가 닿자 하벨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잠깐 멍해서 그래."
"…화 안 내겠습니다. 많이 아프십니까?"
"아니야. 진짜 딱 기운만 없을 뿐이야. 그리고 아까 미안해. 내가 말을 함부로 했어."
"아뇨.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실이기도 하고, 저는 지금 더 좋은 곳에 있으니까요."
"널 누가 버렸는지 몰라도 엄청 후회할 거야. 넌 유능해. 아주 많이."
"…닭살 돋아났으니 그만하시죠."
카샬이 팔을 문지르자 하벨은 키득거렸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이런다고 저는 제 역할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전 무조건 도련님을 말릴 겁니다. 제가 말리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장례식이 열리던 그때 잘 봤거든요."
"알아. 너는 굽히지 않겠지. 보통 너 같은 사람을 보고 으레 '충신'이라고 하지."
"왜 자꾸 띄워줍니까. 안 되겠습니다."
하벨이 평소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카샬은 밀려오는 낯선 감각을 이기지 못하고 품에서 온도계를 꺼냈다.
"나는 네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어떻게 하벨 티에라와 만났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널 칭찬하는 것뿐인데?"
"이전 도련님하고는… 우연히 만났습니다."
카샬은 온도계를 꺼낸 채로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얼굴을 뒤덮는 가면이 있기에 어쩌면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싶었다.
"…제가, 스승님이 내어준 임무를 하다가 방심해버린 나머지 크게 다쳤습니다."
일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도적들의 아지트를 박살 내는 일이었으니까.
"그때는 지금보다 더 어리숙해 그런 일이 벌어졌죠. 어쩌면 자만심에 찬 실수였을지도 모릅니다."
"아. 그래서 네가 하벨 티에라한테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었어?"
"예. 절벽에 떨어졌고, 물살을 거스르다 강변에 운 좋게 걸린 절 이전 도련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구해주지 않으셨다면 그냥 죽어버릴 정도의 상처였고요. 제대로 걸어 다니는 데까지 반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말해줘서 고마워."
하벨이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장난기가 쏙 빠진 눈빛이 드러났다.
"카샬."
"예, 도련님."
카샬은 저절로 손이 앞에 공손히 모였다.
"널 버린 자들이 누구인지 몰라도 혹시 복수하고 싶다면 도와줄게."
"왜… 도와주시는 겁니까?"
카샬은 얼떨떨함을 숨기기 어려웠다. 자신이 보기에 하벨은 무언가를 짊어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하지만 이건 짊어지겠다고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일까.
"네가 감당하기에 큰 것처럼 보이거든."
"크긴 큽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도련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카샬은 자신들의 대화를 물끄러미 듣고 있는 아코를 쓰다듬었다.
"저는, 도련님 덕에 정령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영원히 이뤄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던 가장 큰 소원을 이뤘지요."
"그건 그거고,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언제든 내키면 말해."
"……."
카샬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구멍에 걸려 어떤 대답도 나올 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무얼 할까.
자신의 안식처라고는 없는 그곳에 가면 무얼 할까.
어린 시절에 모든 행복을 잡아먹은 그곳에 가서 복수한다면.
수없이 생각했지만,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혼자였고, 그곳은 아주 컸으니까.
하지만 하벨은 해낼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카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 여기 있네?"
하벨은 어느새 멈춰 있는 물고기를 발견해 서류를 꺼냈다.
"여기 클로저와 관련된 자료야."
하벨은 서류를 가볍게 흔든 뒤에 바로 열어 살폈다.
촤르르륵.
서류가 넘어갈 때마다 하벨은 미간에 생긴 주름이 깊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하벨은 도중에 자신이 가면을 쓰지 않았음을 알고는 가면을 썼다.
"에르티안 왕국은 일종의 실험 장소였고, 곧 다른 나라에 있는 검은 달에서 의뢰가 시작될 거야."
"이건 맛보기… 였단 말입니까?"
"그렇게 적혀 있네."
하벨은 카샬에게 서류를 넘겼다.
"검은 달의 지부는 에르티안 왕국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이곳이 맛보기라는 건 다른 나라에 있는 지부가 더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촤르르륵.
빠르게 넘어가던 서류의 종이가 멈춰 서야 카샬이 입을 열었다.
"뭔가 힘이 빠지는 결과네요."
"그럴 수도 있는데 나한테는 잘됐지. 형님한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또 내 주변에 틈의 세계가 나왔어. 이번 일이 재차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러니 이참에 클로저들과 더 친밀감을 쌓을……."
"찾았나 봅니다."
카샬이 하벨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었다.
카샬의 손가락을 따라 하벨이 고개를 돌리자 칼리우스와 아라가 뛰어오고 있었다.
"여기 찾았어!"
[우리가 찾았어!]
둘 다 무척 해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