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와그작(3)
* * *
푸욱!
카샬의 검이 놈의 복부를 꿰뚫었다.
놈들이 얼마나 질긴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 정도는 괜찮았다.
와장창!
그대로 둘 다 밖으로 넘어가기 전에 하벨이 땅의 힘을 발동해 카샬과 놈을 같이 잡았다.
[으어어……. 이건 이 몸이 해도 되는 거야, 대장!]
아라가 아랫입술과 꼬리를 바짝 올리며 땅의 힘을 불러왔다.
뭔가 혼나는 기분에 하벨이 잠깐 머뭇거릴 사이 아라가 그들을 땅으로 조심스레 운반했다.
후.
숨 한 번 쉬고서는 놈을 온갖 흙더미로 짓눌렀다.
[봤지? 이 몸이 할 수 있다구.]
아라는 하벨에게 자신을 믿어달라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놔도 돼."
아라가 쌓은 흙더미가 꼭 모래 놀이를 하는 것 같이 보여 하벨은 웃으며 아직도 놈을 짓누른 카샬에게 말했다.
카샬은 놈의 복부에 검을 빼어내면서 하벨에게 당장 물었다.
"몸은 괜찮은 겁니까? 이렇게 마구잡이로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마구잡이로 사용한 적 없어."
하벨이 이게 무슨 말이냐는 반응을 보이자 카샬은 고개를 돌려 아라를 바라보았다.
"지금 달님께서 힘을 쓰셔도 되는 겁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판단하고 판단한 아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대장은 처음부터 괜찮지 않았어. 이제 대장은 힘을 사용하면 안 돼.]
"들으셨죠?"
카샬이 검을 놈에게 겨누자 카샬의 뒤에 떠 있던 검들마저 우르르 놈의 목을 겨눴다.
"신경은… 쓰고 있어."
아라까지 나선 마당에 하벨은 바로 세웠던 날을 숨기며 팔꿈치를 간질였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그렇지?"
하벨은 아라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 몸은 어음, 오늘은 좀 어려워. 하지만 평소보다는 아닌 건 맞아.]
아라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봤지?"
하벨이 우쭐거리자 카샬은 숨을 내쉬었다.
"크게 움직이신 건 아니지만, 중간중간에 전투의 흐름을 이어가도록 돕지 않았습니까? 그 역할이 얼마나 힘든지 압니다."
"일단 이놈부터."
카샬이 다시 말을 이어가기 전에 하벨은 놈의 얼굴을 밟았다.
"마법사 여러분. 밖으로 나가서 주변 좀 경계해주세요."
하벨의 지시가 떨어지자 마법사들은 고개를 숙인 후에 밖으로 나가 방어막부터 만들었다.
칼리우스가 꼭 쥔 손을 움직이며 하벨을 빤히 보았다.
자신은 뭘 해야 할지 묻는 것 같았다.
"소리를 막아줘. 해줄 수 있겠지?"
"응. 엄청 쉬워."
칼리우스가 손을 휘젓자 방안에 일렁이는 어떤 힘이 느껴졌다.
"이제 괜찮아. 준비됐어."
물어볼 준비가 갖춰지자 하벨은 흡족해하며 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이렇게 만나니 반갑네."
놈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하벨을 노려보았다.
"이상하지? 독인 건 분명한데 독이 통하다니. 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거야."
레디나에게 듣기로는 웬만한 암살자들은 독의 내성이 있기에 독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정령의 힘으로 만들어진 독이기에 달랐다.
"이참에 얼굴 좀 볼까?"
[복면 내리는 것도 이 몸이 할게.]
아라가 의지를 드러내자 하벨은 물러섰다.
'이거, 이거 오늘은 완전히 아라한테 찍혔는데?'
아라가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놈의 얼굴을 덮은 복면을 내렸다.
하벨은 놈의 얼굴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다행이다.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인상이 아니라서."
놈의 눈동자에 더한 살기가 어리자 하벨은 카샬을 보며 태연하게 지시를 내렸다.
"입 좀 벌려줄래?"
"알겠습니다."
카샬이 대답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고 손아귀에 힘을 꽉 쥐었다.
놈의 입이 단숨에 벌어졌다.
저항하려고 해도 손아귀의 힘이 왜 이렇게 센지.
그 틈 사이로 자백제를 만들어낸 하벨은 놈의 입속에 투여했다.
[으어어엇.]
아라는 그 모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돼. 대장. 여기서 더 쓰면 진짜 안 돼! 독의 힘은 특히나 더 많은 불순물을 부르니까 더는 안 돼!]
아라는 눈을 질끈 감고 하벨에게 매달렸다. 불순물이 더 차올랐다.
"걱정하지 마. 더는 안 써."
하벨도 여기서 쓰러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밀려오는 여러 시선에 하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이야. 이번에는 좀 믿어줘."
"제가 달님의 신도지만, 그건 어렵겠는데요? 이래서 평소 행실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이건 진짜 탐나는데요?"
레디나가 아직 거두지 않은 카샬의 검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색은 죄다 거무튀튀한 게 마음에 들었다.
자신도 이참에 단검을 바꿀까 싶었는데.
"너도 좋은 거 있잖아. 내가 못 하는 걸 들고 있으면서."
"에이, 그렇게 말해버리면 민망하잖아요. 아, 그럼 이참에 꽃님이도 할래요? 불법 마법 시술이 확률이 낮긴 한데, 죽음을 각오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요. 대신, 음, 피가 좀 많이 필요하죠."
마법사들의 피가.
"됐어."
레디나는 카샬의 반응에 가볍게 웃더니 놈 앞에서 쪼그려 앉았다.
"지금 여러 가지 물어봐도 돼요?"
하벨을 올려다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긴 널 위한 자리야."
왕실에서 쓰이는 예법을 흉내 내듯 한 발을 뒤로 뺀 상태로 하벨이 고개를 숙이자 레디나는 키득거렸다.
"저한테 그렇게 해주는 사람은 달님밖에 없을걸요? 정말 달님 곁에 있으면서 많은 것들을 해보네요."
레디나가 손등을 가린 장갑을 빼자 빛이 났다.
"뭐……?"
놈은 당황했다.
자신의 손등에 있던 문양마저 빛이 났다.
설마하니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줄이야.
레디나가 가면을 벗자 해맑은 미소가 드러났다.
"…레디나."
놈의 눈이 커졌고, 충격적인 상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레디나라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가장 배신자가 아닐 인물이 등장했다.
찰싹.
"안녕."
레디나가 놈의 뺨을 친 후에 손을 흔들었다.
"…네가? 네가 검은 달을 배신해?"
놈은 당장 맞은 뺨보다 레디나의 배신이 더 충격적이었다.
"왜? 신기해?"
레디나가 여전히 해맑게 물었다.
"네가… 검은 달을 배신했다고?"
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레디나가 쥐어간 의뢰가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무려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인 하벨 티에라를 죽이는 일이 아닌가.
이 일은 티에라 가문이라는 특성상 단체로 움직일 수 없기에 간부를 제외한, 가장 강한 자가 가져가게 되어 있었다.
엄청난 부가 따르기에 탐을 내던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럴 리가.'
놈은 흔들렸다.
요새 레디나 답지 않다는 말이 오간 건 사실이었다.
누구보다 임무에 미쳤던 그녀가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끈 건 사실이었으니까.
"아니. 배신한 건 너희야."
레디나의 눈이 휘었고, 놈은 미간을 가득 찌푸렸다.
"…레디나. 나는 그 일에 가담한 적 없어."
"그래?"
"그래. 내,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 알지?"
레디나는 놈을 지그시 바라보다 활짝 웃었다.
"미안. 모르겠는데."
"자, 잠깐만……!"
"그날이 오래되어서 기억이 나질 않나 본데."
레디나의 손에 단검이 들리자 놈은 식은땀을 흘렸다.
같은 검은 달의 일원으로서 레디나가 어떤 존재인지 왜 모르겠는가.
사막의 붉은 잡초.
레디나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내가 죽였어."
독하고.
"내가 살려고 내 손으로 엄마를 죽였다고."
독해서.
"나는 그때, 고작 11살이었고, 아무도 나서주는 사람이 없었어. 너도, 거기 있는 모두 다 똑같은 쓰레기 새끼들이야."
절대로 죽지 않을 존재라고.
슥.
레디나의 단검이 움직이자 놈의 손목이 잘려나갔다.
특히, 피를 닮은 머리카락 때문에 '붉은 잡초'라는 말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으, 으으윽!"
놈이 신음을 토해냈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버렸어요. 괜찮아요? 지금 바로 지혈할게요."
이제 곧 웃음을 토해낼 거라 생각했지만, 레디나는 누군가를 보며 쩔쩔맸다.
"괜찮아. 자백제가 잘 돌고 있다는 증거니까. 살려달라고 저러고 있잖아?"
하벨은 놈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라가 하벨의 앞에 앉자 그는 다른 손으로 아라의 눈을 가렸다.
화르르륵.
하벨이 불꽃을 내뿜어 놈의 잘린 손을 지져버렸다.
"끄아, 아아악!"
놈은 밀려오는 고통에 비명을 참지 못했다.
"미, 미치이인!"
당장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가면을 벗은 놈의 모습을 본 순간 모든 게 멎어버렸다.
"안녕."
소년이 활짝 웃고 있었다.
아니, 하벨 티에라가 활짝 웃고 있었다.
"내 얼굴 알고 있지?"
"…네놈이 어떻게? 하벨 티에라 네놈이!"
"그래. 네놈들의 표적인 하벨 티에라. 이렇게 찾아왔어. 고맙지?"
가벼운 잡담으로 시작해 하벨은 천연덕스럽게 본론으로 이끌어갔다.
"자. 지금부터 뭘 좀 물어볼 거야. 대답 못 해도 괜찮아. 너 말고도 많으니까. 하지만 나름 기대하고 있어. 클로저 일까지 엮였잖아?"
하벨은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간식 상자를 꺼내 사탕 하나를 깠다.
"혹시 먹을래, 용용아?"
하벨이 내민 사탕에 칼리우스를 가면을 살짝 열고 입을 벌렸다.
"내가 좋아하는 딸기 사탕이야!"
사탕을 문 칼리우스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하벨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는 자신의 입에도 초코 사탕을 넣었다.
"자, 나와 클로저. 이 두 개 다 네놈이 아는 선에서 죄다 말해 봐."
하벨의 입에서 사탕이 도르르 굴렀다.
입에 든 사탕이 녹고 하벨이 깨물 때까지 놈은 하벨이 아는 이야기를 꺼냈다.
의뢰인은 모르고, 목적도 모르며 그저 지금처럼 레디나가 맡게 된, 자신을 죽이는 의뢰.
클로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미없네."
하벨은 쿠키를 먹으며 손가락을 가볍게 털었다.
기대했지만, 돌아온 건 실망이었다.
"이곳에 클로저들의 암살과 관련된 자료가 있어."
"그렇겠지. 당연히 있어야지. 애초에 그걸 위해서 여기에 왔는걸? 이게 끝이야?"
점점 흥미가 떨어지는 하벨의 표정이 웃긴지 놈은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게 전부야. 너와 클로저, 이 둘의 일은 간부와 수장님만 알고 계시지."
"으음. 여기서 끝이면 아쉬운데. 뭐 없어? 최근에 일어난 재미있는 일이라든지. 뭐든."
"…너희가 오기 전에 누굴 잡았어."
"누굴 잡아?"
하벨이 눈을 반짝거렸다.
"몰라.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어. 갑자기 여길 용감하게 쳐들어오더군. 인원은 많았지만, 그래 봤자 몇 놈만 뺀다면 우리 상대가 되지 않았어."
놈이 키득거렸다.
하벨은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 불현듯 떠올랐다.
'…설마.'
하벨은 밀려오는 생각을 일단 멈췄다.
"그래서 어디에다가 가둬놨는데?"
"여기 지하. 저기 책상 밑에 있어. 열쇠는 내 주머니 속에 있고. 이 열쇠가 없으면 열 수가 없어."
카샬은 놈의 대답에 주저 없이 주머니를 뒤져서는 꺼낸 열쇠를 흔들었다.
짤랑.
"마법이 걸려 있네?"
하벨이 알아보자 칼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건 내가 깰 수 있는 마법이야. 깨줄까?"
"아니. 그래도 열쇠를 얻었으니 써야지. 흔적은 되도록 남기지 않는 편이 좋고. 잠깐 앉아 봐, 용용아."
하벨은 쪼르르 달려와 자신의 옆에 앉는 칼리우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용용아. 사건이 벌어져도 마법으로 다 해결이 가능한 건 아니었잖아. 마법이 네 공격수단이라는 건 맞지만, 혹시 막힐 때를 대비해 부차적인 것도 있어야지."
"그래서 나한테 레디나랑 선배한테 여러 가지를 배우게 시키는 거였어?"
칼리우스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그래. 살아남으려면 뭐든 배우는 게 좋아."
"그럼 도련님은?"
"나?"
"응. 도련님은 뭘 배우고 있어?"
"…음. 나야 세상을 배우고 있지."
"그게 무슨 말이야?"
알쏭달쏭함이 뒤섞인 칼리우스의 시선에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정말 말 그대로 이 세상을 배우고 있기에 딱히 덧붙일 말이 없었다.
"레디나. 이제 네가 묻고 싶은 거 물어봐도 돼. 나는 끝났어. 너도 들었다시피 좀 시시하게 끝이 났지."
"저는 묻고 싶은 건 없어요. 물어봤자 뭐하겠어요? 제가 잡고 싶은 놈은 하나에요."
레디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검은 달의 현 수장이요. 제가 엄마를 죽였지만, 그건 부정할 생각이 없지만, 거기까지 절 밀고 간 여러 행동은 절대로 용서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 네가 용서할 수 없으면 원하는 대로 해. 내가 원하는 건 검은 달의 몰락이니까."
하벨이 손바닥을 펼치자 레디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부딪혔다.
짝.
경쾌한 소리가 퍼졌다.
"…하!"
놈이 갑자기 웃었다.
하벨을 맹렬하게 노려보며 입을 놀렸다.
"두고 보아라. 간부가 너를 잡을 거다. 너와 레디나 둘 다 말이야!"
"바라던 바야. 직접 오면 좋겠네."
하벨은 너무도 편안할 상황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졌다.
"오. 저랑 통하셨네요? 누가 간부가 됐는지 모르던 참이었는데 진짜 좋은 기회에요."
레디나 역시 기뻐하자 놈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니었는데.
"이크크."
하벨은 아라를 한 손에 쥐고는 다른 손으로 무릎을 디딤대 삼아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카샬이 빈정거렸다.
"몸이 쑤시시죠? 왕실로 돌아갈 차례라는 겁니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하벨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아직 떠나지 않은 정령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이렇게 도와줘서. 덕분에 여기까지 닿을 수 있었어."
[아니야. 하벨 네 도움이 됐다면 기뻐.]
정령들이 활짝 웃었다.
[오늘, 우리는 거기로 갈 거야.]
"거기라니?"
하벨은 지하로 통하는 통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되물었다.
[하벨 네가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준 장소. 그곳에는 정말 많은 정령이 있다고 했어. 다들 그곳으로 모이고 있어.]
원래 정령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은 아니지만, 그들이 마음에 들었다면 하벨 역시 반가웠다.
[이 몸도 다시 가고 싶어! 정령들이 얼마나 모였는지 알고 싶어! 나중에 가자, 대장? 응?]
아라가 하벨을 꼬옥 안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래 나중에 가야지."
하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참에 경비를 더 늘려야겠네. 바안하고 룬델은 물론 좀도둑한테도 말해…….'
이 넓은 땅에 정령들이 편안하게 있을 장소로 왜 자신의 땅을 선택한 건지 문득 의문이 들어 하벨이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티에라 가문에는 왜 가질 않는 거야?"
[나는 정령사들이 껄끄러워서. 너는 좋아. 티에라 가문 역시 좋아. 하지만 아직 무서워. 그래서 그래. 물론, 거기도 정령사들이 있겠지. 하지만 티에라 가문 내부만큼은 아니잖아?]
"그렇지. 마법사들도 있을 테니까."
[나는 조용한 게 좋아. 그래서 가는 거야.]
정령들이 어여쁘게 웃으며 하벨을 안아주었다.
'너희는… 사람들이 무섭구나.'
하벨은 그제야 정령들이 왜 자신의 땅을 좋아하는지 알았다.
그곳은 원래 드넓은 밭이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찌르르.
교감이 느껴졌다.
하벨은 순환의 길에 차오른 불순물이 한층 가라앉는 느낌에 편안하게 웃었다.
[안녕, 하벨. 안녕, 아라야.]
정령들이 손을 흔들었고, 하벨과 아라 역시 덩달아 손을 흔들어주었다.
'내 작은 친구들을 위해 뭘 더 할 수 있을까.'
하벨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일단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이 일에 집중해야 했다.
책상 아래에 숨겨진 비밀 장소를 확인할 차례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