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와그작(2)
* * *
"솔직히 이렇게 숨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역시 살벌하네."
하벨이 뒤로 물러서자 다가온 카샬이 바닥을 그어버리듯 놈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 움직임에 누가 보아도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어우. 화났어, 꽃님아?"
"몸, 움직이지 마십시오. 손가락도 까닥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바로 앞에서 꿈틀거리는데 이걸 어떻게 참아?"
[이 몸은 못 봤는데.]
아라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괜찮아."
하벨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아직 아라가 모를 수도 있었다. 정령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생각보다 둔감한 부분도 꽤 많았으니까.
"괜찮아……?"
칼리우스가 헐레벌떡 뛰어와 하벨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지금 내 호위가 얼마나 많은지 보이지?"
하벨은 주변을 바라보며 멈췄던 걸음을 움직였다.
여기서 라르웬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하벨은 이번 일을 위해 자신의 옆에 있겠다고 하던 라르웬마저 말렸다.
이번 작전에는 역할을 명확히 나눴다.
클로저들은 정문으로. 자신들을 후문으로.
이건 앞으로 자신들과 클로저 사이에 신뢰를 판단할 첫걸음이자 서로를 향한 시험에 가까웠기에 역할을 나눠야만 했다.
"응응, 보여."
칼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하벨의 호위는 두터웠다. 상대가 나쁜 게 아닐까.
"하지만 왜 두 번 다 달님을 노린 거야? 달님이 반짝거려서 그런가?"
하벨은 이상하게 눈에 띄었다.
그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시야 안에 있으면 저절로 눈길이 갔다.
"그렇지 않을까?"
하벨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탓인지 몰라도 사람의 시선을 끄는 어떤 힘이 다시 생겨버렸다.
그게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는 힘이기에 하벨은 그 덕 좀 보고자 지금처럼 움직였을 뿐이었다.
뭐든 작든 크든 일이 일어나면 적의 수장을 노리는 건 가장 기본 중 하나였으니 적들의 시선을 끄는 역할은 자신하고 잘 맞았다.
[…으음. 이 몸도 그렇게 생각해. 대장은 진짜 반짝거려.]
아라는 생각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정령들하고 놀든, 대화하면서 웃고 있든 하벨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눈에 들어왔으니까.
"그건 좋은 게 아닙니다. 화살받이가 될 수 있다는 거잖습니까."
카샬이 기가 차 하며 말했다.
"이건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뭐, 덕분에 잘됐잖아?"
"잘됐습니까? 이게요?"
"방금도 봤잖아."
하벨은 태연하게 죽은 암살자들을 가리켰다.
"조용히 내 뒤나 밟아서 죽이면 될 것을 괜히 나서다가 죽었잖아. 이게 다 내 덕이라는 거지."
당당한 하벨의 말에 카샬은 할 말을 잃었다.
"그것도 맞긴 맞아요. 좀 조급한 게 보였거든요. 아마도 침입자가 있었던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죠."
레디나가 말을 끝내자마자 갑자기 손을 귀 옆까지 들었다.
"시작되나 봐요. 신난다."
레디나는 발까지 동동 굴렀다.
[뭐가 시작된다는 거야, 레디나?]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뭔가가 오고 있었다.
쿠쿠쿠쿠.
땅이 진동했다.
"…와. 화가 많이 났나 봐."
하벨은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덩달아 신이 났다.
레디나는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럼요. 조직원을 배신하면 다 죽어버려야죠. 배신자는 다 죽여야 해요. 아니, 최대한 고통받으면서 오래오래 살다가 죽어야겠죠?"
낄낄.
레디나가 웃었다.
현존하는 검은 달은 전부 배신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놈들을 죽여야 했다.
엄마를 위해서라도 검은 달은 죽어야 했다.
흠칫.
레디나는 손가락 끝에 닿는 낯선 촉감에 순간, 놀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하벨과 시선이 마주했다. 어쩐지 그가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레디나는 멈칫거리다 손끝에 닿았던 감각을 확인했다.
물이었다.
"잡아먹히면 안 돼. 그렇지?"
"…봤어요?"
"그럼. 나는 다 보고 있어."
레디나는 이어지는 하벨의 목소리에 어쩐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분명 평소와 같은 목소리임에도 어떤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게 왕이라는 걸까.'
어릴 적, 아직 모든 게 시작되기 전에 보았던 동화에 나오는 왕과 닮았단 생각을 했다.
거대했다.
가끔 모든 게 짓눌리는 기분을 느끼곤 했는데, 지금도 그랬다.
"괜찮아, 구름아. 내가 너를 보고 있으니까."
하벨의 목소리는 마치 자신을 다독이는 것처럼, 이 정도는 멈춰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기에 레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괜찮아요."
엄마의 죽음에서 시작된 이, 참을 수 없는 살의를 누군가 눌러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레디나는 기뻤다.
"…혹시 작전이 시작됐어, 달님?"
칼리우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그래. 클로저들이 움직였어."
정문과 후문 쪽. 과연 어느 쪽에 몰리게 될까.
정답은 없었다.
하지만 하벨은 당연하게도 정문에 몰리는 인원이 많을 거라 판단했다.
가면단이라는, 생소한 집단과 이미 익히 알고 있는 클로저들 중 뭐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을 내리겠는가.
'마법사 협회도 움직이고 있으니 지원은 없을 테고, 이곳은 이제 고립되었다.'
상황만 본다면 왜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을까.
자신을 껴안은 아라의 발바닥에 힘이 들어가자 하벨은 아라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다.
하벨의 시선은 바로 정령들이 올 복도를 바라보았다.
[왔어!]
아라가 힘차게 소리쳤다.
[아라야!]
[하벨!]
정령들이 기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하벨 네가 말한 인간을 발견했어. 우릴 따라와. 안내해줄게.]
[여긴 부정한 것들이 없어서 좋아.]
[힐끔 보고 왔는데, 저기 정문 쪽에 난리가 났어. 피가 엄청 튀고, 막 죽고, 그래. 착한 아이는 보면 안 되는 장면인데.]
"누가 더 우세해 보였어?"
하벨이 묻자 방금 정문 쪽 이야기를 하던 정령이 앞발을 할짝거렸다.
[내가 보기에 클로저들 쪽이 우세해 보였어! 어, 특히 라르웬이 엄청 날뛰더라. 여기저기 벼락이…….]
콰르르릉!
정령은 말을 하다 말고 태연하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깐 안 들렸는데, 지금은 들리네? 저렇게 벼락이 떨어졌어!]
'…이제 안심이다.'
하벨은 혹시 모르니, 언제든 라르웬에게 갈 수 있게 연락용 아이템을 안쪽 주머니에 넣은 상태였다.
검은 달이 위험하다는 걸 왜 모를까.
하벨은 얼른 지부장을 잡아 사건을 끝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안내해줘."
탁.
동시에 손가락을 튕기자 아라를 포함한 다른 정령들이 꺼낸 정령수가 밀려왔다.
하벨은 독의 힘으로 삼지창을 꺼내 넘치는 정령수를 이용해 독을 아주 가득 바른 뒤 자신의 근처에 띄웠다.
호신용으로 쓰기에 딱 좋지 않을까 싶었다.
"자, 나를 잘 지켜줘. 나는 이제 앞만 볼 테니까."
하벨은 '미치셨습니까?'라고 말하는 카샬의 말을 흘리며 달렸다.
자신의 몸에 얇은 막이 하나 생겨났다.
이건 칼리우스의 힘이었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이 몸도 지켜줄게.]
칼리우스의 힘 옆에 아라가 만든 바람이 둘려 있었다.
[이쪽 골목을 돌고.]
하벨은 정령들의 지시를 따라 골목을 돌았다.
소곤소곤.
물이 자신에게 위험을 알렸다.
하지만 카샬이 나타나 여러 개의 검을 단번에 움직였다.
푸욱!
허공에 몇 놈이 칼에 맞아 벽에 꽂혀 대롱거렸다.
소곤소곤.
물은 여전히 자신에게 경고했으나, 하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까드드득!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이어 불꽃이 튀었다.
레디나의 잔상이 얼추 보였다.
암살자들이 동시에 하벨을 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콰드득.
벽에서 나타난 암석으로 된 손이 암살자들의 목을 단숨에 쥐었다.
"그런 거 안 돼."
칼리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벨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저기 문이 보이지?]
정령들의 말과 함께 하벨은 우산을 집어넣고 삼지창을 쥐었다.
왼쪽.
하벨은 삼지창을 던졌다.
콱.
어깻죽지를 잡고 암살자가 무너졌다.
정말 우연이 벽지가 일렁거리는 걸 보고 던졌을 뿐이었다.
'…쳇. 머리를 노렸는데 진짜 못 맞추네.'
하벨은 삼지창을 거두며 우산을 들었다.
"커, 커허어억!"
고통에 찬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콱!
누군가 저놈을 땅에 박는 소리가 들려오며 침묵이 일어났다.
절대로 저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 애를 쓰지만, 하벨에게 어떤 공격도 닿지 않았다.
하벨은 거리를 계산하며 땅의 힘을 끌어올렸다.
바닥이 꿈틀거리다 금세 흙과 돌멩이를 가득 담고 일어났다.
쿠르르르.
흙과 돌멩이가 하벨 쪽으로 길게 뻗어 나오며 점점 형태를 잡더니 주먹이 되었다.
'가자.'
하벨의 지시에 맞춰 땅의 힘이 담긴 주먹이 문을 향해 뻗어갔다.
쿵!
주먹이 문에 닿는 순간, 단번에 쪼개졌다.
콰직!
쪼개진 문의 흔적이 사방에 튀었고, 방 안이 드러났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하하."
레디나가 신이 나게 웃으며 하벨을 스치고 방으로 달려갔다.
저기에 있었다.
자신의 눈에는 보였다.
저 흐릿한 잔상.
"하하하!"
레디나는 자신의 다리가 둘리는 바람의 힘을 느꼈다.
하벨이었다.
주변이 일그러질 정도로 빠른 속도로 돌진한 레디나는 놈의 뼈다귀까지 분쇄해버릴 정도로 단검을 찔렀다.
까드드드득!
거친 불꽃이 튀자 레디나는 머리 꼭대기까지 밀려오는 쾌감에 웃음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이 미친."
적은 당황했으나, 손길은 달랐다.
반대 손을 들어 단검이 안쪽으로 향하도록 쥐어 레디나의 팔을 노렸다.
팅!
하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손뼈를 부서트릴 정도의 힘이 손등을 때리자 놈이 쥔 단검이 바닥에 떨어지고, 뒤늦게 몰려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에이. 그건 안 되지. 그건 너무 뻔히 보였어."
하벨이 씩 웃었다.
적의 눈빛에 빛이 어리자 모습을 감췄다.
어딜 노릴지 뻔했다.
'한 걸음.'
하벨은 속으로 발자국을 셌고, 아라가 꼬리를 바짝 세웠다.
[오, 온다!]
바람을 거슬리며 무언가 다가왔다.
[호들갑은.]
하지만 아코의 정령수로 검게 물든 카샬의 검이 더 빨리 움직였다.
까앙!
적과 카샬의 검이 강하게 맞부딪혔다.
"감히……!"
카샬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뒤에 날을 세운 검을 움직였다.
0.5초 차이를 두고 적을 향해 수많은 검이 매섭게 찔러가자 놈은 뒤로 움직이며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살살해. 캐내야 할 게 많으니까."
하벨은 뒤늦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입을 놀렸다.
[으어어…….]
아라가 비틀거리며 떨어지자 하벨이 아라를 붙잡았다.
[이, 이 몸은 엄청 놀랐어.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어.]
"겁이 그렇게 많아서 되겠어?"
하벨은 뒤를 돌아보며 칼리우스를 보았다.
카샬이 움직이지 않았으면 더 큰 존재가 움직였을지도 몰랐다.
아직 아기지만, 웅크린 용이.
딱.
하벨은 분노에 휩쓸린 칼리우스 앞에 손가락을 튕겼다.
"정신 차려야지, 햇님아."
하벨이 실실거리자 칼리우스는 그제야 숨을 토하며 옷자락을 쥐었다.
"살기는 감추고."
"…응응."
칼리우스는 살짝 주눅이 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가려는 길이 어렵다는 건 알았잖아? 각오했으면 참는 법부터 배워야지."
칼리우스가 억지로 세상의 수호자 역할을 떠맡으려는 걸 말린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그렇게 짊어져봤자 두 날개가 아주 쉽게 부러질 뿐이었다.
게다가 칼리우스가 가고자 하는 길은 수호자로서 모두의 생명을 존중하는, 아주 어려운 가시밭길이니까.
칼리우스가 제대로 준비가 될 때까지, 발에 가시가 박히는 건 자신이 감당하기로 했다.
이미 수천, 수만 번 박힌 가시였기에 이 정도는 괜찮아.
"응. 나는 참을 거야."
"잘했어."
하벨은 칼리우스를 칭찬했다.
"…네놈!"
당연히 적이 분노했다. 하벨은 이 역시 예상했다.
싸우는 와중에 이런 상황을 벌인다면 자신 역시 기분이 아주 더러울 테니까.
분노는 공격을 가중하기도 하지만, 방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좋았다.
지금처럼.
모습을 감춘 적이 나타나자 칼리우스가 손을 뻗었다.
쾅!
허공에서 놈을 짓누르는 중력의 힘에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놈은 당황하지 않고 레디나처럼 태연하게 모습을 지워나갔다.
콱!
레디나가 벽을 걷어차며 중력의 힘이 작동하는 곳으로 단검을 세운 채로 떨어졌지만, 놈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제기랄."
레디나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 이쪽에 있어!]
아라가 앞발로 창문 쪽을 가리켰다.
[바람이 알려줬어!]
'자자, 지창아. 힘 좀 빼자고.'
하벨은 칼리우스를 말리고, 삼지창을 다독이며 독을 살짝 빼냈다.
마비 정도면 되지 않을까.
카샬은 벌써 자신의 앞에 섰다.
"5까지 세고, 오른쪽 창문으로 뛰어서 붙잡아."
조용히 하벨의 지시가 떨어지자 카샬은 내색하지 않았다.
아코의 시선이 잠깐 아라를 향했다.
바람은 자신에게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는데.
하벨은 정령수를 이용하며 불을 일으켰다. 놈의 발목에서부터 일어난 불꽃이 단숨에 위로 퍼져나가자 당황한 그가 창문을 깨부쉈다.
쨍그랑!
바람이 몰아치자 하벨은 씩 웃었다.
[불꽃에는 바람이지!]
정령들이 소리쳤다.
하벨은 발버둥 치는 놈을 향해 마지막으로 삼지창을 던지며 불을 꺼트렸다.
슉!
삼지창은 꼬리에 바람을 싣고선 창문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팍!
삼지창이 꽂히기 전에 카샬은 이미 출발했고, 놈에게 삼지창이 꽂히자마자 카샬이 놈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