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들어가기 전(3)
* * *
[으아앗! 대장만큼은 마구잡이로 부수면 안 돼. 지금 주먹만 휘둘러도 쓰러질 거야.]
아라가 자신의 볼때기를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아라야."
[이 몸이 보기에 그래. 그렇지 않아?]
아라가 다른 정령들에게 물어보자 그들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면을 벗으면 엄청날 것 같은데? 그래서 끼고 있는 거야?]
[아니야. 대장은 지금 이 가면이 없으면 숨쉬기가 힘들어서 그래.]
아라는 달 무늬가 가득 들어간 하벨의 가면과 다른, 복면에 가까운 까만 가면을 바라보았다.
"형님. 웨아스 마을에… 있는 지부에 클로저들 암살과 관련된 정보가 있을 겁니다. 제가 하거나 가면단을 통해 따로 정보를 빼낼 거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자."
지금 라르웬은 검은 달이고 뭐고 귀에 닿지 않았다.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는 막내가 그저 걱정됐고, 안쓰러웠다.
[오옵! 맞아! 대장은 이제 자야 해!]
아라가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런데 주사기 한 번으로 되겠어? 카샬은 보통 두 번 하던데?]
루룸이 하벨의 가면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오오, 루룸은 똑똑해. 이 몸도 카샬이 그러는 건 많이 봤어!]
"그래. 하나 더 놔줄게."
라르웬이 아공간 주머니를 열자 하벨은 살짝 움츠러들었다.
"형님은 카샬과 달리 좀 아픕니다. 많이 서투르시네요."
"어쩔 수 없지. 이런 건 헤레스가 아니면 카샬이 담당했으니까."
"형님이 알고 계신 게… 대단한 거였네요?"
"나도 그렇고 누님도 아버지도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는 알고 있어. 다만, 정화제 든 주사기를 들고 다니지 않았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라르웬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주사기를 꺼내 뚜껑을 빼냈다.
"이참에 그냥 많이 들고 다녀야겠네. 너는 한눈만 팔면, 아주 그냥 자발적으로 구르고 있잖아?"
"그렇지 않아요."
"아닌 애가 지금 이러고 있어? …하."
라르웬은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겼다.
틈의 세계가 닫히면 비가 오는 걸 알면서 도망치지 않았다.
왜 하벨 먼저 보냈겠는가. 일부러 시간도 끌었거늘, 다시 돌아온 모습에 얼마나 기가 찼는지 몰랐다.
"진짜 널 왕실로 보내고 싶다. 정말 이대로 그냥 집에 보냈으면 소원이 없겠네."
"소원은 그런 곳에 쓰는 거 아닙니다."
제법 단호한 하벨의 말에 라르웬은 주사를 놓으며 피식 웃었다
"소원이 전혀 안 아까운데? 당장 쓰고 싶을 정도야."
"…그러면 형님의 소원은 내가 이뤄드릴게요."
"내 소원은 네가 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거야."
라르웬은 퍽 진지했다.
[우와. 이 몸이랑 같다. 이 몸은 대장이 아프지 않는 거랑, 행복해지는 거랑,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면 좋겠다는 거랑 엄청 많이 있어!]
아라가 해맑게 웃자 하벨은 낯이 간지러운 상황에 살짝 당황했다.
다들 참 자신에게 왜 이렇게 따뜻한 꽃잎을 뿌리는지.
이러다 파묻혀 다시는 나오지 못할까 두렵기도 했다.
"불가능하다는 거 알지만, 아프지 좀 마라, 막내야. 몸도 멋대로 굴리지 말고."
진심이 담긴 라르웬의 표정에는 속상함이 가득 보였다.
"이건……."
"알아. 네 천성이 그런 거. 다 네 손으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지?"
"네. 다, 전부 다 내가 하고 싶어요."
"왜? 버겁지 않아?"
"아뇨. 전혀요. …오히려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더 괴로운걸요?"
잔잔히 퍼져가는 하벨의 목소리에 아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
비록 가면 때문에 하벨의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라르웬은 그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고스란히 와닿았다.
거의 모든 걸 하나씩 다 직접 보고 해결하는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하벨은 매번 깊게 발자국을 새기지 않았던가.
해결 후에 하벨은 당연히 손에 쥐어야 하는 것마저 외면한 채 해결했다는 자체에 행복함을 드러냈다.
'막내야. 너는 대체…….'
라르웬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올 것 같은 물음을 삼키고 또 삼켰다.
'대체 무얼 실패했어?'
대체 이전 삶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러는 건지.
"…괜찮습니다, 형님."
자신의 속마음을 읽었을까, 하벨이 꺼낸 말에 라르웬은 흠칫거렸다.
"다신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겁니다."
하벨은 실실거렸다.
"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거, 예. 한번 해볼게요."
"됐어! 그건 네가 할 필요 없어. 내 소원이니까 내가 해야지."
"아뇨."
하벨은 라르웬이 꺼낸 말을 부정했다.
"마침 내가 하고 싶은 거랑 겹쳐서요. 그래서 하는 겁니다."
자신은 하벨 티에라에게 그가 처음부터 바라던, 세상과 가족을 지켜달라는 그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모든 건 자신이 죽었던 이유이자, 전부인 검정과 관련이 되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바다가 그 꼴이 되었다.'
하벨 자신은 마법사의 탑에서 떨어진 후에 용왕의 힘으로 바다와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설령 자신이 더는 용왕이 아니더라고 그들은 오랫동안 고통받아왔다.
자신을 기억하고, 기다려준 바다를 위해서라도 세계를 뒤덮은 오염은 반드시 없어져야 했다.
"…뭐, 아직 또렷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요."
하벨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다 알았으니까, 얼른 자. 졸리잖아?"
"…예. 졸리네요. 웨아스 마을로 가려면……."
[자장, 자장.]
아라가 하벨을 토닥거렸다.
"…아라야?"
[이 몸이 자장 해주는 거야. 대장이 지금 쉬어야 나중에 움직일 수 있으니까.]
하벨은 잠깐 가면을 내렸다.
식은땀을 고스란히 흘러내리는 모습이 보이자 아라는 바로 꼬리가 힘 없이 쳐졌다.
아라가 생각했던 것보다 하벨은 더 심하게 앓고 있었다.
"그럼 잘게. 고마워, 아라야."
하벨이 배시시 웃자 아라는 힘들게 꼬리를 흔들었다.
[응. 잘자, 대장.]
아라는 하벨을 토닥거렸다.
자장. 자장.
아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준비는 다 마쳤지만, 다른 지부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는지 경계가 한층 올라간 상황입니다. 조심하셔야겠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가면단과 가면단으로 위장한 마법사 협회가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페트리오의 보고에 하벨은 벌써 든든했다.
"그래. 늘 조심하고 있지. 걱정하지 마. 오늘도 고마워."
<이건 다 도련님께서 이루신 겁니다. 저는 그저 뒤에서 움직일 뿐이잖습니까. 그러니 고마움은 됐습니다.>
"관리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어. 그러니까 고맙다고 말한 거야."
하벨은 정화 장치를 힐끔 바라보았다.
경고처럼 등장하는 빛은 꺼졌지만, 정화 장치에는 아직 거품이 돌고 있었다.
몸도 무거웠고.
<틈의 세계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혹여 비를 맞으신 건 아니겠죠?>
"……?"
하벨은 이어 들려온 페트리오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하벨이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아라도 덩달아 두리번거렸다.
[어어, 주변에 아무도 없구. 온 사람도 없구. 라르웬도 아무 말도 안 했어. 걱정하지 마, 대장.]
"…와. 너 좀 무섭다, 좀도둑?"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 마을에 상단주로 위장한 가면단을 둔 건 접니다. 당연히 마을에도 따로 풀어뒀겠죠.>
"알고는 있는데 새삼 무섭네."
하벨은 미간을 찌푸리려다 말고 문득 든 생각에 언성이 살짝 올라갔다.
"…아니지. 내가 슬쩍 저택을 빠져나가서 마을 좀 돌았다고 혼난 적이 있었는데. 누가 알렸는가 했는데, 너였어?"
[아아앗! 이 몸도 기억나! 대장이 다쳤을 때, 어……? 언제 다쳤을 때였지? 다 카샬 몰래 슬쩍 나갔는데?]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언제를 말하는 걸까.
[뭐야? 다 나갔다고?]
루룸은 벌써 웃음을 터트릴 준비를 하듯 앞발로 배를 잡을 준비를 했다.
[아앗!]
아라가 다급히 입을 가렸고, 하벨은 자신의 얼굴이 왈칵 구겨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정령들이 가주님한테 고자질한 줄 알았는데, 너였다고?"
<…크흠.>
"와. 배신감이 엄청……."
순간, 하벨은 자신의 입을 막으며 옆을 쳐다보았다.
여기에 지금 자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막내야?"
라르웬이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이를 꽉 다물고 있었다.
꽈득.
설마하니 다친 몸을 이끌고 몰래몰래 밖으로 나갈 줄이야.
<저번에 도련님께서 음, 젤리 때문에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시기에 대비를 살짝 해둔 것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택 근처라고 한다면 가면단의 주 뿌리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이번에는 어쩌다 겹쳐졌을 뿐, 결코 감시의 목적이 없었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페트리오의 말이 하벨 귀에 닿지 않았다.
하벨은 조용히 연락을 끊고 짐마차 밖에서 자신을 째려보며 다가오는 라르웬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막내야."
"형님. 일단 화를 멈추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 막내는 다친 몸을 이끌고 나가는 게 취미인가 봐?"
[우옵!]
아라가 눈을 크게 뜨자 하벨은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저기 카샬이 온다! 레디나랑 용용이도!]
"그, 취미까지는 아니지만, 그날따라 나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간다고 하면 말리셨을 거잖아요."
변명도 하지 않는 하벨의 태도에 라르웬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연하지!"
"나는 하고 싶은 건 할 겁니다. 나도 최대한 몸과 합의점을 찾아 움직인 겁니다. 그러니 모르는 척해주세요."
하벨이 가면에 손가락을 올렸다.
"지금, 모르는 척이라고?"
라르웬이 언성을 높이려고 하자, 두 사람의 발소리가 다급히 들려왔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레디나가 하벨 앞에서 갑자기 나타나자 그는 어깨를 들썩거리고 말았다.
"또, 몸에 나타난 푸른 기가 심해진 거 아니죠?"
"너는 괜찮아? 비 안 맞았어?"
레디나가 카샬과 라르웬에 비하면 내성이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벨이 물었다.
"저는 당연히 괜찮죠. 도련님께서는 다르잖아요?"
"이게 있어서 그나마 살았지 뭐야."
하벨이 천연덕스럽게 가면을 가리켰다.
"…도련님!"
카샬이 다급히 목소리를 내며 짐마차에 앉아 다리를 흔드는 하벨에게 단숨에 뛰어갔다.
"상태는 어떠십니까? 주사는 맞으셨습니까?"
"형님이 놔줬어."
"…하나 더 놔드리겠습니다."
하벨의 정화 장치를 본 카샬은 거품이 올라오는 걸 보며 당장 아공간 주머니에서 주사를 꺼냈다.
"지, 지금 열은 안 나?"
칼리우스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열이… 나는데? 여기부터 알 만큼 뜨거워."
"버틸 만해."
"하, 하, 하지만 도련님은 비가 내리면……."
"너한테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는데 틈의 세계가 열렸지 뭐야. 아쉽게 됐어."
하벨은 칼리우스를 진정시키며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간식 통을 꺼냈다.
"손 펼쳐봐, 용용아."
하벨의 말에 칼리우스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하벨은 간식 통에 든 사탕을 우르르 쏟아냈다.
촤르르.
"먹고 진정해."
"나, 나는 진정했어. 비 맞아도 아무렇지도 않아. 계속 도련님이 걱정됐을 뿐이야. 도련님한테 비는 독이잖아."
"착하네, 용용이."
하벨은 간식 통을 집어넣고는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짤막하게 건넸다.
그러던 와중에 뒤이어 도착한 브란스를 보며 하벨이 반겼다.
"아, 오셨어요?"
브란스 뒤로 칼피오가 보였다.
"여기입니까?"
브란스의 시선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마을로 향했다.
"예. 칼피오 씨한테 들었죠?"
"…면목이 없습니다."
브란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눈을 찌푸렸다.
이미 엘란이 내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치욕스러운데 클로저로서 일반인까지 건드려버리다니.
"면목은 저한테 하지 말고요, 그 마을에서 가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한테 비세요. 그게 맞는 겁니다."
하벨은 브란스의 사과를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달님 씨."
머뭇거리던 칼피오가 앞으로 나와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이거라면 당연히 받아야죠. 멱살이 잡혔잖아요. 보이시죠? 아직……."
하벨은 자신의 옷을 가리키다 피가 묻은 부분을 보더니 멈칫거렸다.
"…어쨌든, 다 모였으니 상단으로 위장해 갈 겁니다. 적의 아지트는 그 마을에서 제일 큰 상단입니다. 어때요? 가장 자연스럽겠죠?"
하벨은 땅으로 내려왔다.
잠깐 비틀거린다 싶을 때, 칼리우스가 하벨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하벨은 허공에 멈춘 느낌에 속으로 경악하며 지시를 내렸다.
"침입할 경로가 두 개입니다. 정면 쪽이 제일 위험하니 맡아주십시오. 제가 뒤를 맡겠습니다."
브란스가 자신의 제안에 거절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믿지 못했겠지만, 뭐가 됐든 내부에서 확인을 걸쳤고, 엘란이 내통자라는 걸 알게 됐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마을까지 가는 동안 내부 도면을 기억해주세요. 안타깝게도 제가 클로저분들을 만날 거라 생각하고 있지 않아 준비된 지도가 두 개뿐입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꼼꼼한 준비에 놀랄 뿐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원래부터 쫓고 있었다고요. 아마 절 만난 건 행운이실 겁니다."
하벨은 브란스에게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자신 주변에 틈의 세계가 등장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클로저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방법이 제일 좋다는 게 확실해졌다.
"어쨌든 잘 부탁드려요, 브란스 씨.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벨은 자신이 낼 수 있는 목소리 중 가장 상냥하게 내뱉었다.
우수수.
브란스는 손을 잡으려다 말고 어쩐지 소름이 돋아나 밀려오는 찝찝함을 숨기기는 어려웠다.
마치 덫에 걸린 기분이 들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뭐라도 잡아야 하는 법, 브란스는 이번에는 제대로 달님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