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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45화 (245/415)

245화. 들어가기 전

* * *

엘란이 여전히 웃으며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정말이에요. 이거, 그, 검은 달입니다."

거짓말이었다.

엘란이 가리키는 저 가엾은 사람은 그저 갑작스럽게 나타난 틈의 세계에 떠밀려 뒤처진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하벨은 엘란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이번 일은 처음이 아니며 엘란은, 아니, 저 개새끼는 세상을 위해 죽여야 할 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거짓말쟁이! 이 몸은 다 들었어! 왜 사람들을 죽인 거야! 사람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자신을 대신해 아라가 분노도 터트려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 이제 얼른 가죠."

그렇기에 하벨은 엘란이 벌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차분히 그를 재촉할 뿐이었다.

"예. 이렇게 또 습격할 줄은 몰랐네요. 사람들을 미리 대피시키길 잘했어요. 그게 아니었으면 끔찍할 뻔했네요."

엘란이 태연하게 반응하자 하여 하벨 역시 태연하게 맞장구쳤다.

"이 정도면 큰일이 날 뻔했는데, 대응이 아주 뛰어납니다. 대단하시네요."

[…으으. 이런 거 보면 인간들은 참 무서워. 어떻게 속마음을 숨기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정령은 엘란과 하벨을 바라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놀랄 만하죠. 하지만 제가 클로저를 몇 년이나 했는데요."

"얼마나 하신 거예요?"

하벨은 엘란이 자연스럽게 한 발자국 더 자신에게로 움직인다는 걸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했다.

"정확히 세어보지 않았네요. 그나저나 라르웬 형님은요?"

"마무리를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먼저니까요."

"라르웬 형님은 정말 대단하죠. 제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어요. 제가 알기로 클로저 중에서도 틈의 세계를 빠르게 처리하는 사람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요."

하벨은 엘란이 자신을 향한 수작질을 너머 라르웬까지 넘보는 그 더러운 입에 더욱 차분해졌다.

언제부터 라르웬을 노렸을까.

"오. 그래서요?"

하지만 하벨은 신이 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 틈의 세계를 닫는 데 실패한 횟수 역시 적은 데다가 티에라 가문의 둘째 아들이니 같이 일하는데 자랑스럽죠."

"정말 라르웬 씨를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하벨은 천연덕스럽게 손가락을 튕겼다.

[신호야!]

불만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짓던 아라가 금방 꼬리를 흔들었다.

[신호라니?]

정령이 물었다.

[대장한테 정령수를 넣어주면 돼.]

[으음.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는데.]

[뭐얼?]

[정령사가 아무리 우리 정령수를 받을 수 있어도, 무한히 받을 수는 없어. 아까도 하벨의 부탁이라 도와주러 갔지, 라르웬한테 정령수를 주려고 간 건 아니야.]

[어어? 이상한데? 대장은 그게 가능했는데? 정령들이 엄청 많이 정령수를 넣으면 넣을수록 힘이 더 강해졌어.]

[…하벨이 신기한 게 아닐까? 정령사든 인간이든 순환의 길에는 분명 한계가 있는데. 하벨은 꼭 바다 같네?]

[응! 대장은 바다야.]

아라는 하벨의 칭찬을 기뻐하며 그에게 정령수를 밀어 넣었다.

"예. 좋아하죠."

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벽면을 긁는 듯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손아귀에 피를 묻히면 어떤 심정일지, 죽기 전에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

하벨이 말을 끝내기 전에 잔잔한 빛을 두른 엘란의 손아귀가 하벨을 덮쳤다.

콰앙.

엘란은 하벨의 팔을 잡았고, 히쭉 웃었다.

"경험해보면 되겠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엘란이 힘을 가득 준 그때, 달님이 흙처럼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

엘란은 흙더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팔을 잡은 촉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엘란의 눈동자가 바람이 부는 쪽으로 움직였고, 무언가가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얼굴 쪽으로 손을 올렸다.

하벨이 휘두른 발이 엘란의 얼굴을 고스란히 후려버렸다.

타악!

제대로 된 공격이 들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엘란의 하체가 무너지지 않았다.

"와. 역시 클로저라 그런지 다르네. 단단해."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엘란은 얼얼한 손바닥을 매만지며 하벨을 노려보았다.

"분명히 내가 너를 쥐었을 텐데."

"쥐었지. 엉뚱한 걸 쥐었지만."

하벨은 조금 전, 땅의 힘을 사용해 겉껍질을 덮는 것처럼 몸에 씌웠다.

침대에 꼼짝없이 붙어 있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아라한테 여러 번 지적을 받았지만, 가지고 있는 힘이나 조합하면서 노는 게 제일 재미있으니 이걸 어떻게 포기할까.

하벨은 방심하지 않되, 마음의 여유를 가졌다.

시렌을 상대할 때와 달랐다.

그녀가 하나씩 터트리는 마법을 막아줬던 건 정령들이었다.

수십의 정령이 달려들어야 멈출 만큼의 위력이었다는 뜻과 같았다.

'길게 끌 거 없어.'

하벨은 순환의 길에 충만한 정령수를 느끼며 엘란의 다리부터 무너트렸다.

갑자기 엘란이 서 있던 지대가 무너졌다.

제아무리 중심을 잘 잡더라도 지반이 무너졌는데 어쩌겠는가.

"…뭐?"

엘란이 당황했고 하벨은 그가 중심을 잡으러 허둥지둥한 모습을 예상했기에 키득거리며 바람을 쏘았다.

슈욱!

돌멩이처럼 쏘아진 바람이 엘란의 이마를 강타했다.

머리가 뒤로 꺾여서는 중심이 완전히 무너지자 하벨은 근처 식물들을 키워 그의 팔과 다리를 묶었다.

엘란의 다리와 팔에 조금 전 빛이 감돌았다.

오러.

이미 본 적이 있었다.

하벨은 놈이 오러로 식물들을 뭉개버리기 전 바람을 타 엘란 앞으로 돌진했다.

엘란의 눈이 커지고, 하벨은 재빨리 우산을 꺼내 가볍게 휘둘렀다.

엘란은 상체로 오는 공격을 막으려 손을 위로 뻗었지만, 우산의 방향이 달랐다.

"땡. 거기 아니야."

장난기가 가득한 하벨의 목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는 소리가 퍼졌다.

빠악!

엘란의 다리가 달랑거렸다.

[으아아아.]

아라가 그 모습에 놀라 고개를 휙 놀렸다.

"끄아아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엘란이 비명을 질렀고, 하벨은 여유롭게 삼지창을 움직여 찔렀다.

움직임을 뺏어갈 마비 독이 주입됐다.

삼지창을 공중에 띄운 하벨은 우산을 땅에 짚었다.

탁.

엘란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땀을 줄줄 흘렸다.

"왜? 아파?"

그 와중에도 용케도 식물을 끊어낸 엘란의 모습을 하벨은 비웃었다.

엘란은 부들거리며 고개를 들었고, 하벨의 손가락이 태연하게 움직였다.

서서히 만들어지는 그림자에 엘란의 눈이 커졌다.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아는데,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피해야 해. 피해야 하는데…….'

주먹을 닮은 거대한 흙덩어리가 공중에서 엘란의 복부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콰아앙!

"…커헉!"

엘란은 피를 쏟으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자신은 클로저였다.

실전에 얼마나 많이 투입되었던가.

방심한 건 사실이나, 뭔가 달랐다. 한 번 무너져내렸다고 이렇게 무참히 당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공격에 기척이 느껴지질 않았다.

'…정령사인가? 정령사?'

그럴 리가.

정령사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이 정령사도 죽여봐서 알고 있었다.

'다르다. 뭔가 달라.'

누군가를 죽이는 데 있어 망설임은 누구나 가지고 있음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싸움이 이렇게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 역시 처음 봤다.

'분명 단순한 공격이었는데……!'

상대방의 무게 중심을 무너트리는 건 싸움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설령 기본을 알고 있다 한들 놈은 마치 미래를 본 듯 자신의 행동을 '예측'을 하고 있었다.

"이건… 커헉."

엘란이 다시 피를 쏟았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왜?"

하벨은 조용히 다가와 우산 끝으로 엘란의 목덜미를 눌렀다.

"네가 이길 거라 자신만만했어?"

"내가… 클로저……."

"아. 클로저라면 다 이겨야 해?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지. 애초에 클로저가 상대하는 건 죽지 않는 괴물이야."

하벨은 가면을 벗고 마음껏 웃어주고 싶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건 다르단 말이지."

꾸욱.

하벨이 손끝에 힘을 주자 엘란이 다급히 바닥을 쳤다.

"아까 술래잡기라고 했지? 네 말이 맞아. 술래잡기였지. 그런데 술래는 네가 아니라 나였어."

하벨은 엘란의 손짓 하나에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손짓이 점점 느려진다는 건 달리 말하자면 독이 점점 퍼진다는 증거였으니.

"널 잡으러 왔거든, 내통자."

하벨이 꺼낸 말에 엘란은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것도 어떻게 알았냐고?"

하벨은 자신의 눈이 살포시 감기는 걸 느꼈다.

"내가 잘났거든."

하벨은 독의 힘을 사용해 손아귀에 자백제를 만들어냈다.

독의 힘이 강한 만큼 정령수가 빠르게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네가 살인에 미쳤든 아니든 안 궁금해. 다만, 그냥은 못 데리고 가지."

화르르륵.

엘란의 두 손아귀 위에 불이 만들어졌다.

그 뜨거움에 엘란은 손을 멈췄다. 단순히 손 위에 있는 게 아니었다.

미묘하지만, 자신의 손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조심해, 엘란. 이 몸이 불꽃을 어떻게 움직일지도 몰라.]

아라가 으쓱거리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

"…다 말하겠습니다."

하벨은 말과 달리 밑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는 엘란의 행동에 팔을 불로 지져버렸다.

벌써 수작질이라니. 저놈에게는 두 손이 아까울 정도였다.

"으아아악……!"

엘란이 아등바등하자, 하벨은 우산에 다시금 힘을 줬다.

"커… 헉."

하벨은 넓게 벌어진 엘란의 입속으로 자백제를 넣었다.

"다음 경고는 없어."

자연스럽게 경고하며 자백제가 입속에 떨어지는 순간에 맞춰 우산을 떼어냈다.

꿀꺽.

엘란은 숨을 쉬며 반사적으로 입속에 자백제를 삼켰다.

하벨이 웃었고, 엘란은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검은 달의 어떤 지부가 네 역할을 보고하는 곳이지?"

하벨의 물음에 엘란은 침묵하는 눈빛과 달리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웨아스… 마을에 있는 지부입니다."

'웨아스 마을이라면 내가 가려던 곳 근처다. 방향을 바꾼다고 좀도둑한테 말해둬야겠네.'

하벨은 자백제의 효능을 확인하며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틈의 세계가 열리면 사람들이 일으키는 혼란에 실제로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괴물 손에 죽어가는 모습에 이거다 싶었을 거야."

마치 속삭이는 소리처럼 엘란의 귀를 간질였다.

"일반인을 죽이고, 틈의 세계를 닫고 난 후에 모든 걸 괴물 탓이라 한 그 말을 모두가 믿었을 때, 짜릿했겠지. 언제 들킬지 모르는 설렘, 누군가 위에 선 쾌감. …그렇지 않아?"

"그게, 허억, 맞습니다. 제대로 설명해주셨어요."

알렌은 자백제의 효과로 눈은 살짝 풀렸고, 숨이 가빠졌다.

"처음에는 우연… 이었어요. 하지만 점점 그 맛을 너무, 참을 수가 없어져서 어느새 더 강한 놈을 죽이고 싶어졌어요. 옆에… 하아, 바로 옆에 클로저가 있잖아요?"

"그때, 검은 달이 너한테 권유를 한 거야?"

"…예. 예. 몇 달 전에 검은 달의 간부라는 자가 제 앞에 나타났어요. 검은 달이 뭐 하는 데인지 몰랐는데. 간부가 지껄이는 그 속삭임이 너무 달콤했어요."

'간부가 나타났다고?'

하벨은 그 말에 속으로 놀랐다.

―검은 달의 간부가 되려고요.

레디나가 말하지 않았던가.

―네, 간부요. 간부가 되면 검은 달의 아지트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거든요.

그리고 레디나가 원하던 게 아니었나.

'간부가 클로저한테 접근했다?'

하벨은 볼 안쪽을 깨물었다.

이미 예사로운 일이 아니란 생각을 했지만, 이건 범위를 넘었다.

검은 달의 지부도 마법사 협회와 마찬가지로 에르티안 왕국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클로저들 역시 전 세계로 퍼져 있었다.

과연 검은 달이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클로저들만 노렸는지가 문제였다.

"…죽일 수 있게 해준대요."

알렌의 눈이 커지고 동공이 작아졌다.

"누굴?"

"클로저들을 다요. 저는 특히, 라르웬 형님을 죽이고 싶었거든요. 저한테 살려달라고 빌 거나, 죽었을 때 그 표정이 어떨까 너무 궁금했어요."

"그래서 허락했다고?"

"네. 살인은 어느새 제가 가장,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괴물은… 베는 맛도 없고, 애초에 죽일 수 없잖습니까."

―오. 잘 아시네요? 그 기분 진짜 좋죠. 손아귀에 퍼져가는 뭔가 부서지는 촉감도 좋고요!

하벨은 조금 전 엘란이 꺼냈던 말이 떠올랐다.

레디나와 뭔가 장단이 맞다고 보였지만, 역시 아니었다.

레디나와 다른 점이 바로 저기에 있었다. 그녀 역시 생명에 대한 생각이 가볍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존중할 줄 알았다.

"게다가 말입니다. 저 혼자 클로저들을 무찌를 수 없잖아요?"

엘란이 입꼬리를 가득 올리자 하벨은 그의 얼굴을 걷어차 기절시켜버렸다.

빡!

간부와 관련한 정보를 빼내야 했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놈.

'형님이 나중에 캐내 주시겠지.'

[우와! 이거지!]

정령이 하벨을 보더니 눈을 반짝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 나쁜 놈이 하던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는데! 하벨, 아주 멋졌어!]

정령은 하벨을 꼭 안아줬다.

찌르르.

교감이 느껴졌다.

[이 못된 인간. 목숨을 뺏는 일이 뭐가 즐겁다고 왜 같은 인간을 죽여?]

정령은 그대로 아래로 내려와 엘란을 발바닥으로 사정없이 때렸고, 하벨은 그의 멱살을 쥐었다.

그대로 들어 올리려다 꿈쩍도 하지 않자 하벨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뭘 먹었는지 몰라도 더럽게 무겁네."

[이 몸이 할게! 대장은 하지 마.]

아라가 하벨을 말리더니 땅의 힘을 사용했다.

엘란의 등과 딱 붙어 있던 흙이 일어나더니 발 모양을 바꿔 천천히 움직였다.

[봤지? 이 몸은 이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하벨은 으쓱거리는 아라를 안아주었다.

"잘했어, 아라야. 네가 최고야."

[헤헤. 이 몸이 잘했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아라의 꼬리가 하벨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자, 이제 가자."

하벨은 라르웬이 있는 곳을 쳐다보다 칼피오를 향해 걸었다.

* * *

"……."

칼피오가 할 말을 잃은 채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잘 대피해서 다행이네요."

태연한 목소리에 칼피오는 당장 하벨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쥐었다.

"무슨, 무슨… 이게 무슨 짓이야?"

"아. 이거요?"

하벨은 기절한 엘란을 가리켰다.

"이거라니. 지금 네가 누구를……."

"범인입니다."

"……?"

칼피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 새끼가 내통자라고요, 칼피오 씨."

하벨이 이를 조용히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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