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술래잡기(3)
* * *
허공에 균열이 일어났다.
쩌어억.
점점 갈라지는 그 틈 사이로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자신이 틈의 세계를 목격한 지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또 틈의 세계가 자신의 주변에 열려버리다니.
'…정말로 형님의 가설이 맞았다.'
하벨은 밀려오는 충격을 억지로 눌렀다.
지금은 가설이 진짜가 된 사실을 파고들 게 아니라 틈의 세계가 먼저였다.
[트, 트, 틈의 세계가 열렸어!]
아라가 기겁하며 하벨에게 매달렸다.
[여기서 틈의 세계라니. 정말 너무한데?]
루룸의 시선이 라르웬에게 향했다.
"엘란, 칼피오. 당장 사람들을 대피시켜."
라르웬이 차분히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알겠어요!"
"브란스 형님과 연락할게!"
엘란이 고개를 끄덕였고, 칼피오가 클로저용 연락 아이템을 들며 사람들을 향해 먼저 나아갔다.
"잠깐……."
"으아아악!"
하벨의 말은 틈의 세계를 보며 내지른 사람들의 비명에 파묻히고 말았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엘란을 따로 보내다니.
"칼피오 형님. 이거 아무래도 저랑 형님이랑 역할을 나눠야 할 것 같은데요?"
엘란이 우르르 몰리는 사람들을 보다 말고 제안했다.
"좋은 생각이야. 내가 먼저 대피시킬 테니까, 너는 남거나 뒤처지는 사람들 좀 도와줘."
"알겠어요."
엘란의 대답에 칼피오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얇은 원통을 꺼내 뚜껑을 연 뒤에 뒤집어 성냥을 켜듯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신호 막대에 불이 붙자 사람들이 연기를 바라보았다.
"클로저입니다!"
클로저라는 말과 함께 칼피오가 손에 낀 반지를 내밀었다.
반짝이는 빛이 퍼지며 닫혀 있는 문이 모습이 허공에 떠올랐다.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클로저를 상징하는 문양에 칼피오의 목소리가 그제야 닿았고, 사람들은 헐레벌떡 그를 따라 움직였다.
"저도 금방 올게요!"
엘란은 칼피오를 따르는 무리를 따라 움직였다.
하벨은 그 모습에 주먹에 힘을 주었다.
이건 하늘이 엘란을 돕는 게 아닌가.
쩌어억.
더 갈라진 틈 사이로 괴물이 얼굴을 드러내자 라르웬은 하벨을 향해 말을 걸었다.
"쫓아가."
"…뭐라고요?"
"너도 얼른 쫓아가라고. 저놈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 비도 올 거고. 어서 쫓아가."
"형님은요?"
하벨이 묻자 라르웬의 손아귀에 번개가 어렸다.
파지지직.
"내가 클로저인 거 잊었어?"
라르웬은 하벨을 보며 씩 웃었다.
"엘란이 검은 달과 내통했다는 게 무척 충격적인데, 또 이해가 가거든. 평소에도 좀 또라이였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까 네가 먼저 가서 확인해. 나는 걱정하지 말고."
[그래, 하벨.]
루룸이 하벨의 가면을 꾹 눌렀다.
[라르웬은 강해.]
"방금 칼피오가 내보인 신호 막대 봤지? 곧 클로저들이 올……."
콰아앙!
건물 기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길게 뻗어 나온 손이 라르웬을 휩쓸기 전에 그가 먼저 발을 굴렀다.
콰드드드득!
단번에 땅이 일어나 두꺼운 벽이 되어 괴물의 팔을 멈췄고, 갑자기 바람 소리가 일어났다.
'바람… 소리?'
라르웬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하벨이 저기에 있었다.
"이, 이……!"
당장 욕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기에 라르웬은 이를 악물었다.
겨우 병석에서 벗어났는데. 이래서 보내려고 했는데.
하벨은 양손으로 투명한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거세게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보자 바람의 힘을 이용한다는 걸 알았다.
[으아아아! 바, 바람아아!]
아라가 필사적으로 하벨에게 매달리며 소리쳤다.
하벨은 그 순간, 자신이 만든 바람의 대검이 더욱 길어지는 걸 느꼈다.
떨어지는 순간에 맞춰 괴물의 팔을 길게 베어냈다.
쉬이익!
괴물의 팔이 반으로 쪼개졌고, 하벨은 속으로 통증을 호소했다.
'으으, 미친.'
발바닥부터 올라오는 아찔한 감각이 머리 꼭대기까지 도달해 잠깐 부르르 떨어야 했다.
'바닥에 미리 식물로 깔아놨어야 했는데.'
하벨은 뒤늦게 후회하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푸욱!
무언가를 쑤셔 넣는 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고개를 돌렸다.
라르웬이 익숙하다는 듯 어느새 넓적한 바윗덩어리를 닮은 괴물의 가슴팍에 안착한 것도 모자라 벌써 가슴을 열어젖혔다.
"괜찮아?"
태연한 라르웬의 물음에 하벨 역시 호들갑 떨지 않고 물었다.
"거기 핵이 있습니까?"
"아니."
라르웬은 자신을 향해 스쳐오는 괴물의 손길을 한 끗 차이로 피하며 루룸이 일으킨 바람의 힘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팍!
라르웬이 가슴팍을 열어젖힌 괴물 뒤로 틈의 세계에서 새로운 괴물이 땅으로 내려왔다.
전체적인 생긴 모양새가 꼭 새우와 닮아있었다.
"이…… 와."
바닥에 납작 엎드린 괴물이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하자 하벨은 우수수 올라온 소름에 다시금 몸을 떨어야 했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와. …리와."
괴물이 손을 휘젓듯 허우적거렸다.
'이리 오라고?'
하벨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아라야. 너도 저 괴물이 나한테 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
[이 몸은, 어어! 또 나온다!]
아라가 힘주어 말하던 순간, 이전 두 괴물보다 반 정도 작은 괴물이 틈의 세계에서 천천히 땅으로 떨어지며 등장했다.
라르웬이 작은 괴물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본 괴물 중 가장 크기가 작았다.
왜 하필, 인간 모습과 닮아있어 라르웬은 그 꼴이 너무도 불쾌했다.
"어서 엘란을 쫓아가."
"아뇨."
하벨은 생각을 바꿨다.
"이대로 못 떠납니다. 핵이라도 나오는 거 보고 쫓아가겠습니다."
작은 괴물은 조심히 앞으로 걸어왔다.
그 괴물의 손짓에 먼저 나온 괴물들이 행동을 돌연 멈췄다.
'괴물의 움직임이 멈췄다고?'
하벨은 그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마치 위아래가 존재하는 듯했다.
작은 괴물은 하벨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활짝 웃었다.
'…갑자기 왜 웃는 거야?'
하벨은 그 시선이 마냥 불쾌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흔들렸다.
푸욱.
작은 괴물은 느닷없이 자신의 가슴팍을 손으로 꿰뚫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익숙한 모양에 라르웬은 마침 루룸이 볼을 꼬집어준 덕분에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미친 거 아니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루룸이 기겁했다.
괴물이 꺼낸 건 핵이었다.
"…그래. 미친 거지."
라르웬은 손에 번개로 만든 창을 쥔 채로 굳어졌다.
괴물이 직접 핵을 꺼내다니.
"…아. 아가야."
작은 괴물이 어설픈 발음으로 말하자 하벨은 작은 괴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간 잘못 들은 게 아니라니.
'정말로 나한테 '아가야'라는 말을 꺼낼 줄이야.'
"이리……."
작은 괴물은 핵을 들지 않은 손을 올려서는 안쪽으로 끄덕거렸다.
"……와."
여전히 발음이 어설펐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가 아니었다.
이전 괴물들도 지금 괴물도 자신에게 꺼냈던 말이 '이리 와'가 맞았다.
'…뭐야.'
하벨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느꼈다.
[지, 지금 대장한테 이리 오라고 말한 거 맞지?]
자신에게 매달린 아라가 벌벌 떨며 물었다.
라르웬의 시선까지 자신에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위험… 없어. 아가… 야."
작은 괴물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핵을 보여준 건 자신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걸까.
"혹시 내 말을 알아들어?"
하벨이 한 걸음 다가가자 라르웬이 그를 말렸다.
"뭐 하는 거야?"
"형님 가설이 맞았습니다. 틈의 세계는 내가 있는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물러서."
"확인해야겠습니다."
"막내야!"
"저 괴물이 나를 '아가야'라고 부르는 거 들었잖습니까. 대화가 통하는 지금이 아니면 확인할 수 없습니다."
진지한 하벨의 목소리에 라르웬은 번개로 만든 창을 꽉 쥐며 물러섰다.
"내 말, 정말로 알아듣는 거야?"
다시 하벨이 차분히 묻자 작은 괴물은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리다 멈추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라고……?"
그 대답에 라르웬은 경악에 가까울 정도로 얼굴을 왈칵 구겼다.
지금 틈의 세계에 열린 괴물이 말을 알아듣는다고 대답하다니.
그러면 지금까지 자신이 만났던 괴물들 역시 똑같이 말을 알아들었단 말인가.
"그러면 왜."
라르웬은 치밀어오르는 역겨움을 삼켜야만 했다.
지금까지 죽어간 이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아… 가야. 구해야…… 해."
작은 괴물이 다시 하벨에게 손짓했다.
"너희는 누구지?"
작은 괴물이 갑자기 슬픈 눈빛을 지었다.
하지만 하벨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염된 물처럼 이해할 수 없는 재난 중 하나가 바로 틈의 세계가 아닌가.
"누구길래 이러는 건데?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거야?"
하벨은 자신이 용왕이라는 사실은 겉으로 보기에 알 수 없으니 저 괴물이 원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하벨 티에라'가 아닐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
"아… 가야!"
뒤쪽에 멈췄던 괴물들이 갑자기 움직이자, 루룸이 번개를 쏘아냈고, 라르웬이 하벨을 잡고 뒤로 당겼다.
[와. 방심했으면 큰일 날뻔했네.]
루룸이 괴물을 노려보았다.
"너도 보는 것처럼 대화는 이제 틀렸어. 핵도 어디 있는지 알겠다, 어서 엘란을 쫓아!"
"형님!"
하벨은 아라가 키운 식물 위에 쓰러져서는 다시 일어나며 라르웬을 불렀다.
작은 괴물이 구슬픈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작은 괴물이 다른 괴물을 완전히 조종할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다… 시. 또."
작은 괴물은 애절함을 담아 말을 꺼냈고, 하벨은 그 눈빛이 마냥 낯설지가 않았다.
저 어둠으로 가득한 틈의 세계에 대체 무엇이 있는 건지.
"그래. 다음에 또."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하며 하벨은 돌아섰다.
[그래. 얼른 빨리 가. 라르웬이 널 신경 쓴다고 굼떠졌어.]
루룸은 하벨을 재촉했다.
"…알겠습니다. 다치지 마세요, 형님."
"그건 내가 할 소리인데?"
하벨은 기가 찬 표정을 지은 라르웬을 쳐다보다 말고 다시금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가야."
마치 자신에게 손을 뻗는 듯한 작은 괴물의 모습을 외면하며 하벨은 앞으로 달렸다.
"가자, 아라야."
[으응! 루룸, 먼저 갈게.]
[그래. 네가 하벨을 지켜.]
* * *
'저기 보인다.'
하벨은 연기의 방향이 보여 생각보다 손쉽게 칼피오와 엘란을 쫓았다.
'…피 냄새가 점점 짙어지고 있다고?'
틈의 세계는 지금 라르웬이 막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도 새어 나온 괴물도 없었음에도 왜 피 냄새가 나는지 알지 못했다.
퍼억!
바로 앞, 가게 안에서 누군가를 때리는 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경계했다.
'…아니겠지? 설마.'
머릿속에 그려지는 생각 하나에 하벨은 설마 하는 기분에 휩싸였다.
[얘들아. 혹시 여기 있어?]
아라가 주변 정령들을 불렀다.
정령들이 여기저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우리를 왜 불러?]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봤어?]
[봤어!]
아까 마을 축제 이야기를 하던 정령이 아라에게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아라의 물음과 별개로 하벨은 이미 조용히 움직였다.
하벨의 등 뒤에 독의 힘으로 만들어낸 삼지창이 둥둥 떠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서 더 자라났지만, 누군가를 죽이는 데 있어 크기는 필요 없었다.
[음, 너희랑 같이 있던 인간 중에 제일 어려 보이는 인간이 갑자기 뒤처진 인간들을 죽이던데? 그래서… 음, 솔직히 하벨 너한테 실망할 뻔했는데…….]
[대장이랑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대장은 저기 틈의 세계를 막고 왔다고!]
아라가 힘껏 소리치자 정령은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말하려고 했어. 내가 같이 가줄게.]
"아니. 나보다 형님을 도와줬으면 좋겠어. 저기 틈의 세계에서 나오는 괴물과 싸우고 있거든.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지?"
하벨은 목소리를 죽이며 정령들에게 말을 걸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정령들은 하벨의 시선에 여전히 건물 모서리 같은 곳에 매달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 부탁이라면 들어줄게. 언젠가 꼭 돕고 싶었어.]
[하지만 나는 널 도와줄래!]
조금 전 만난 정령은 하벨에게 매달렸다.
토끼 꼬리를 닮은 짧고 풍성한 꼬리가 흔들렸다.
[나도 하벨을 돕고 싶은데. 치사해.]
정령들은 하벨에게 매달린 정령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하벨이 왔던 곳에서 큰 소리가 나자 깜짝 놀라며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던 하벨 역시 주저 없이 엘란에게 다가갔다.
어쩌면 방금 그 소리가 라르웬이 마무리를 지으며 발생한 소리일지도 몰랐다.
"…아, 왔어요?"
엘란은 누군가를 죽여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활짝 웃었다.
'저놈을 미리 처리했어야 했나.'
후회가 밀려오자 하벨은 엘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자 엘란은 자신이 올라타 때리던 누군가를 내려다보았다.
"놀라지 마세요. 이거, 우리를 습격한 놈들이에요. 하도 여기저기 튀어나와서 제가 술래잡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