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손잡자(2)
* * *
"아,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달님이입니다."
하벨은 천연덕스럽게 한 명씩 가리켰다.
[이 몸은 아라야!]
에헴.
아라가 리본이 잘 보이게 가슴을 드러내며 말했다.
"여긴 구름이, 햇님이."
레디나가 손을 흔들었고, 키높이 신발을 신은 채 평소보다 더 커진 칼리우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벨은 마지막으로 가면단의 마스코트인 카샬을 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꽃님이입니다."
"…푸핫."
라르웬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생각보다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몰라도 왜 이렇게 웃긴지 몰랐다.
[아니. 아직도 그게 웃겨? 라르웬 너도 역시 어린아이네.]
루룸이 라르웬의 머리에서 내려와 그의 볼을 찔렀다.
"라르웬?"
브란스가 묻자 라르웬은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꽃님이라니 웃기잖아요."
"그래, 웃기고 말고를 떠나 왜 이곳에 온 거지? 여긴 오늘 우리 클로저가 모이기로 한 장소일 텐데."
브란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라르웬한테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3시간만 일찍 나와줄 수 없냐고 물었다.
원래는 클로저라는, 전 세계인이 모여 만들어진 특수한 조직의 상황상 사적인 만남이 허용되지 않으나, 라르웬이 이어 꺼낸 말 때문에 허락하고 말았다.
―얼마 전 습격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 달콤한 말을 어떻게 거절할까.
서로를 믿고 협력하며 각자의 구역에 틈의 세계를 닫는 거야말로 클로저들이 해야 할 행동지침이자 목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얼마 전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습격 사건으로 신뢰에 금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습격을 당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하필 오늘처럼 회의가 열린 후에 벌어지지 않았던가.
"제가 어제 연락을 드렸잖습니까."
뻔뻔한 라르웬의 말에 브란스는 단번에 언성을 높였다.
"라르웬."
라르웬은 일단 그를 말렸다.
"브란스, 잘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네가 클로저의 규칙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겠지."
"이번에 벌어진 습격은 우리끼리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과 지금 저 사람들이 온 게 무슨 상관이지?"
"절 습격하려고 왔던 놈을 심문하다가 달님과 마주했습니다."
"그렇게 우연히 찾아왔다고?"
브란스는 의심이 어린 시선으로 하벨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지.'
여기서 의심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상황이었기에 하벨은 여유롭게 말을 던졌다.
"제가 먼저 쫓았습니다."
"당신이 먼저 쫓았다뇨?"
브란스가 덥석 물자 하벨은 정보를 흘렸다.
"저들은 암살자 집단입니다. 놈들이 제 동료를 죽여버렸죠. 그래서 쫓고 있었습니다."
[누, 누가 죽었어?]
사전에 그런 말이 없었기에 아라가 깜짝 놀랐다.
하벨이 머리를 긁는 척하며 아라를 찔렀다.
아라가 눈을 깜박거리더니 그제야 꼬리를 잡고는 수줍은 듯이 웃었다.
[…하, 다행이다. 이 몸은 진짜 놀랐어. 진짜 누가 큰일이 난 줄 알았어.]
"그러던 중에 여기 라르웬 씨가 저보고 사정사정하며 도와달라고 해서 이렇게 찾아온 건데, 이거 섭섭한데요?"
하벨은 일부러 튕기는 척 연기했다.
지금 설정은 라르웬이 자신에게 매달린 셈이니 이 정도는 괜찮았다.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브란스한테 말을 하지 않는 건 사실이거든요."
라르웬이 살짝 기겁하며 하벨을 붙잡았다.
"클로저가 딱히 비밀 조직도 아닌데 왜 이렇게 노골적으로 객 취급하는지 기분이 좀 나쁩니다."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라르웬은 속에서 뭔가가 비틀리는 것 같았지만, 꾹 참고 하벨에게 사과했다.
"…좋습니다. 저도 일단 참겠습니다. 협력자가 생기는 편이 저한테도 좋으니까요."
하벨은 속에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라르웬이 자신 앞에서 벌벌 기는 모습이 왠지 재밌었다.
웃음을 꾹 누르며 하벨은 브란스를 보았다.
"보아하니 그쪽에 내부자가 있는 모양인데, 잡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라르웬."
브란스가 라르웬을 닦달하자 하벨이 이를 가로챘다.
"당신 태도를 보면 딱 자동으로 나오는 답인데 왜 부하를 그리 못 잡아먹어서 난리인지 모르겠습니다."
"…크흠."
그제야 브란스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표정으로, 행동으로 정보를 흘린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뒤늦게 몰려와 괜히 민망했다.
"제가 마음에 안 들겠죠. 예, 저도 당신이 마음에 안 듭니다."
하벨은 말과 달리 손을 뻗었다.
"클로저가 세상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압니다. 그래서 저도 그 사실을 알고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하지만 이러면 곤란하실 텐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벨은 일부로 살짝 삐딱하게 기울어 서서 원래는 참을성이 없지만, 클로저라서 참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당신은… 입이 무겁습니까?"
브란스는 흔들렸다.
'지금 상황에 브란스는 무조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벨은 이 상황을 예상했다.
갑작스러운 습격.
그 습격보다 더 두려운 사실은 신뢰가 깨어지는 일이었다.
각 지역을 맡아서 틈의 세계를 닫아야 하는 클로저의 특성상 서로 구역이 나누어져 있는 게 당연했고, 다른 클로저들이 그 구역을 해결할 거라 믿는 것 역시 당연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이 벌어진 지금은 서로의 구역을 안다는 그 자체가 정체 모를 적에게 표적이자 위협이 되어버린 상황이 아닌가.
신뢰는 물론, 클로저의 가장 큰 목적마저 흔들릴 수도 있는 큰 사태였다.
'형님이 이번 일을 무조건 반대를 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고.'
하벨은 생각과 달리 팔짱을 끼고는 한심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애초에 이번 일이 새어 나가봤자 뭐합니까? 오히려 클로저들을 노리려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내서 처리하려는 이들이 많을 텐데요. 그만큼 클로저가 한 희생을 모르는 이들이 있습니까?"
갑자기 이어진 하벨의 칭찬에 담긴 진심에 라르웬은 하벨이 자신을 이렇게 바라보는구나 하며 뿌듯함을 느꼈다.
"좋습니다."
하벨은 계속 흔들리고 있는 브란스를 쳐다보며 무언가 결단을 내린 듯이 말을 꺼냈다.
자신이 말한 대로 클로저가 정체 모를 놈들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사실을 굳이 숨겨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저는 당신이 어떤 이유로 이번 일을 숨기려는지 이해합니다."
예상과 다른 하벨의 말에 브란스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해… 한단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클로저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 그 이름에 혹여 먹칠이라도 할까 두려운 게 아닙니까?"
죽지 않는 괴물을 토해내는 틈의 세계를 닫는 이들이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 불안에 떨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무엇보다 클로저의 운용에 드는 돈은 전 세계에서 걷는 세금 중 일부를 사용하기에 불만을 가진 이들도 많을 것이며 나아가 클로저가 정말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늘어날 테지.
"…내가 너무 날카로웠습니다."
브란스는 일단 자신이 뒤로 물러섰다.
솔직히 자신들을 이렇게 이해해줄지는 몰랐다. 마음이 흔들리는 와중에 브란스는 라르웬을 보았다.
클로저에 소속된 이들 중 가장 노골적으로 신분이 드러난 사람은 라르웬이었다.
처음에 라르웬이 클로저에 들어오고 싶다며 시험을 봤을 때도 난리가 났으니까.
그만큼 공인에 가까운 존재가 굳이 이번 습격에 왜 거짓말을 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라르웬의 거짓말은 바로 티에라 가문과 이어질 테니.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절박함도 이해하고 왜 조심하는지도 압니다."
하벨은 차츰 이성을 붙잡는 브란스를 보며 일단 그를 달랬다.
"혹시 그 암살자 단체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검은 달입니다."
하벨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가장 강렬한 모습을 보여야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을 테니.
"…검은 달이요?"
이름을 듣는 순간, 브란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의외라는 표정으로 하벨을 쳐다보았다.
'이름을 알려줄지는 몰랐겠지.'
하벨은 브란스의 표정을 읽었다.
"그런데, 음, 그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예. 못 들어보는 게 당연하죠. 기존 암살자 집단의 이름을 다 아십니까?"
"…아뇨."
"그런데 이 이름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애초에 유명할수록 어딘지는 알지만, 이름을 모르는 게 당연할 테고. 무엇보다 여기는 여러 암살자 집단 중 가장 악질인 곳이죠."
하벨이 말을 꺼내자 레디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악질이 아니에요. 아주 빌어먹게 악질인 놈들이에요."
순간 욕을 내뱉을 뻔했지만, 레디나는 나름 부드럽게 넘어갔다.
"어쨌든 저는 협력할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클로저랑 같이 일하게 돼서 오히려 영광이란 생각이 드네요."
하벨은 다시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브란스는 이전처럼 그 손을 가만히 보았다.
"가면을 왜 쓰고 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다시 도돌이표처럼 시작된 말에 하벨은 브란스가 무척 신중한 사람이라는 걸 파악했다.
기껏 라르웬과 동행한 이점이 사라지고 있는 게 눈에 보였기에 하벨은 일부러 짜증을 냈다.
"가면이 수상한 건 이해합니다. 신분을 숨기고 있으니 더 수상하겠지요. 하지만 그건 저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솔직히 당신이 검은 달과 내통하지 않았다는 증거부터 내밀어보시죠."
"…없습니다."
"봤죠? 저도 이런 불안함을 떠안고 있습니다. 솔직히 당신이 의심스럽습니다. 이곳에 가장 신분이 명확한 사람은 라르웬 씨가 아닙니까?"
"확실히 그렇게도 볼 수 있죠."
라르웬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이다 손가락을 들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 제가 잘못하면 손해 입을 곳이 명확하잖습니까."
티에라 가문.
라르웬이 티에라가 가문을 등에 업자 브란스는 내심 섭섭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믿어서 이렇게 부른 게 아니었어?"
"믿지만, 지금 브란스가 저를 믿지 않잖습니까?"
오히려 라르웬이 섭섭함을 드러냈다.
"제가 괜한 사람을 붙잡아 이렇게 데려왔겠습니까? 방금 브란스가 말한 대로 규칙을 어긴 건 사실이지만, 지금 규칙이 먼저입니까? 브란스. 뭐가 먼저인지 선택할 때라 봅니다."
평소 브란스가 신중하다는 걸 알지만, 오늘따라 괜히 짜증이 났다.
그 감정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났기에 브란스는 곤란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라르웬이 브란스 마음에 틈을 더 깊고 넓게 만들어주었으니 하벨은 지금 몰아붙여야 한다는 걸 알았다.
"제 불안함이 가면이라는 건 압니다. 이는 제 적이 많아 어쩔 수 없는 조치였을 뿐, 저는 방금 적이 속한 단체의 이름을 말해줬습니다. 여기서 뭘 더 바랍니까? 지금 놈들이 있는 위치까지 알려달라고요? 그건 사기꾼인 거 아시죠?"
하벨은 브란스를 비웃었다.
"분명 내부에 숨은 적의 시선을 흔들 사람도 필요할 텐데요. 하지만 기어코 저를 믿지 못할 것 같으면 그냥 여기서 끝내자고요."
하벨이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는 발바닥으로 가볍게 바닥을 쳤다.
"정하시지요. 제 손을 붙잡을지 아닐지. 저도 이 이상 시간을 뺏고 싶지 않네요."
브란스는 울창한 나무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무슨 선택지가 있을까.
자신을 습격했던 놈을 붙잡아 심문했지만, 아무것도 밝히지 못했다.
농담이 아니라 지금까지 클로저를 건드린 나라도 없었다.
이미 몇십 년 전, 클로저의 도움을 무시하고, 틈의 세계를 닫지 못해 멸망해버린 나라도 존재하지 않던가.
"브란스 웰입니다."
브란스는 클로저가 가진 힘과 이름, 그리고 라르웬을 믿고는 손을 잡았다.
"가면단의 달님입니다."
"…가면단이요?"
"정의를 위해 일하는 어둠의 집단이죠."
[응응! 대장은 정의를 위해…….]
"…푸흡."
카샬은 낯간지러운 소리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의를 위해 일하는 어둠의 집단이라니.
설마하니 저 소리를 맨정신인 사람이 꺼낼 줄이야.
"아, 죄송합니다. 꽃님이가 발작 증세가 있어서 종종 이럽니다. 이해해주세요."
"…큽! 푸하핫!"
겨우 웃음을 참고 있던 레디나가 하벨의 말에 기어코 터져버렸다.
[이게 왜 웃긴 거야?]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름이는 광대 병, 뭐, 그런 게 있어서 시도 때도 없이 웃을지도 모릅니다. 이 역시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슬쩍 뒤꿈치 들던 칼리우스는 하벨과 시선을 마주하자 왜인지 손이 기뻐 보였다.
'으음, 칼리우스는 굳이 저런 별명을 쓸 필요가 없는데.'
하벨은 칼리우스의 어깨에 손을 얹어 몇 번 두드린 후에야 브란스를 보았다.
"자, 어쨌든 이렇게 손을 잡았으니 다른 클로저가 오기 전에 일단 이야기부터 나누죠."
하벨은 클로저와 함께 일하게 되어 기뻤다.
* * *
"…와. 진짭니까?"
숲을 빙그르르 둘러싼 수많은 클로저 중 눈썹이 진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각자 무기가 옆에 놓여 있는 것 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이곳에 있는 클로저 중 정령사는 라르웬이 유일했기에 들킬 염려 역시 줄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벨은 이 상황을 달리 보지 않았다.
화르르륵.
랜턴에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협력이요? 하지만 외부인과 협력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분은 다음 아닌 브란스 형님이잖습니까?"
"시끄럽다, 엘란."
브란스가 엘란을 꾸짖었고, 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벨을 쳐다보았다.
"대단한데요? 그 브란스 형님을 설득하다뇨."
"그건 솔직히 저도 인정합니다. 능력이 좋네요."
누군가 손뼉을 쳤다.
"와, 저 꼰… 아니, 브란스 씨를 설득하다니. 클로저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다들 브란스를 설득한 하벨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클로저들은 어미 새를 쳐다보는 새끼 새처럼 하벨을 바라보았다.
[우와아! 다들 대장이 좋은가 봐.]
아라가 흡족해했지만, 하벨은 그 시선이 하나같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달님 씨는 얼마나 강해요?"
갑자기 엘란이 손가락을 풀며 하벨에게 물었다.
꼭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