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토닥토닥(3)
* * *
"…잠깐만."
라르웬은 곧바로 웃음을 멈추고 당장 인상을 썼다.
"지금 어딜 부수자고, 막내야?"
"검은 달이요."
하벨이 실실 웃었다.
"내가 이건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더는 못 참겠다. 마법사 협회 때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말해 봐봐."
"성질 안 낸다고 했죠?"
"……."
하벨이 물었지만, 라르웬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형님이 그렇게 말한 거 들었죠, 누님?"
"들었지."
넬시아가 하벨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도 화 안 낼 거죠?"
"글쎄."
"누나도, 화 안 낼 거죠?"
훅 들어오는 하벨의 말과 초롱초롱한 눈빛에 넬시아의 손끝이 떨리더니 눈에 힘을 주었다.
"화 안 낼게, 약속해."
"그건 좀… 치사한데?"
라르웬이 언짢음을 드러내자 넬시아가 라르웬의 어깨를 붙잡으며 살짝 미소를 내보였다.
"누나라고 해봐, 라르웬. 어서?"
"치사한 거 아니네. …어후. 식은땀이 흐를 뻔했어. 그냥 필사적이었네, 막내야. 이건 좀 인정한다."
"라르웬. 그게 무슨 말일까?"
차분한 목소리와 다른 넬시아의 날카로운 눈빛에 라르웬은 입꼬리를 높게 올리며 말을 돌렸다.
"자자, 어서 말해 봐, 막내야."
하벨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라르웬을 바라보자 그는 못마땅한 말투로 소리를 내뱉었다.
"화 안 낼게. 안 낸다고."
"마법사 탑이 높잖아요."
"…그렇지 높지."
라르웬은 벌써 불안했다. 왜 탑의 높이를 꺼내는지.
"나는 마법사의 탑을 가까이서 본 적은 없어. 하지만 라르웬 말대로 높다는 건 알고 있어."
넬시아는 하벨의 이불을 올려주며 말을 꺼냈다.
"거기 꼭대기에서 떨어졌습니다. 슈웅, 하고요."
"……."
라르웬은 그대로 팔짱을 낀 손을 풀었고, 넬시아는 이불을 여전히 잡은 채로 하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 거, 거기 바다잖아! …합."
라르웬이 소리치다 말고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안 봐도 아라가 문에 귀를 쫑긋대고 있을 게 뻔했다.
"거기 바다라고. 바다. 막내야, 너, 바다가 뭔지 몰라? 밑에 모든 오염된 물이 모이는 바다가 꿈틀거리는데 거기로 떨어졌다고?"
가까스로 목소리를 낮춘 라르웬은 헛바람을 몇 번이나 삼켰는지 몰랐다.
하벨은 제 손에 묶인 붕대를 풀어보았다.
아직 폭파 사건 때문에 생긴 흉터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이미 엄청난 회복 속도를 내보이지 않는가.
"…신관이 널 치료했어?"
라르웬이 묻자 하벨은 씩 웃었다.
"맞아요. 그리고 방금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용왕이었다고요. 용왕이 바다에 빠져 죽으면 되겠어요?"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라고 했지?"
넬시아가 조금 전 하벨이 알려준 말을 언급하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살았죠."
"너, 솔직히 말해 봐."
라르웬이 입술을 핥았다.
"말하세요."
"…지금 아프지?"
"아뇨. 지금 안 아픕니다. 정말로요. 보이잖아요."
하벨은 제 손을 가리켰다. 이 정도면 거의 다 나아가니 아프지 않았다.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진통제도 맞았고, 이제 뭐가 문제일까.
라르웬은 기어코 이마를 붙잡았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미쳤다고 화를 안 낸다는 약속을 해버렸는지.
입이 너무 간지러웠다. 간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니 이제 나는 클로저들을 만날 준비가 됐습니다."
마법사 협회 뒤처리는 페트리오가 자진해서 맡게 되었다.
시렌의 피를 통해 무얼 봤는지 들어야 하지만, 대부분은 이미 자신이 알아냈고,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렇게 서두를 일은 아니었다.
"언제가 좋겠습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 잡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이 마법사 협회의 힘을 빌리기에 딱 맞거든요."
"…진짜 마법사 협회를 이용한다고?"
"손에 넣었으니 써먹어야죠. 이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검은 달의 지부란 지부는 다 부숴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리고 누님."
하벨은 여유롭게 넬시아를 불렀다.
방금 후다닥 지나간 여러 상황에 넬시아는 당황하고 또 당황했다.
"잠깐만. 그러… 니까, 클로저와 마법사 협회를 이용해서 너를 죽이려는 암살자 단체, '검은 달'을 부순다고?"
"예. 바로 그겁니다."
하벨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아무래도 헤스트리아 왕국 일은… 전하의 즉위식 후에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법사 협회 뒤에 검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헤스트리아 왕국 역시 몹시 걱정됐다.
검정이 마법사 협회를 시켜서 한 일을 본다면 정령들과 오염된 물, 그리고 정화제까지 모두 이어져 있으니, 이와 관련된 헤스트리아 왕국 역시 그 범위 안에 들었다.
"해결이라고?"
넬시아가 눈을 살짝 크게 뜨다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나는 너한테 이 일을 해결하길 요청한 적도 바란 적도 없어. 그러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돼."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저번에 말했잖아요. 헤스트리아 왕국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다고요."
하벨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 라르웬은 이를 갈았다.
'웃기고 있네. 그냥 보고 싶다고? 또 무슨 사고를 칠 셈이야, 막내야?'
방금 마법사의 탑 꼭대기에서 떨어졌다는 말에 안 봐도 어떤 상황일지 눈앞에 그려졌다.
이 간지러운 입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르웬의 걱정과 달리 하벨의 입은 잘도 움직였다.
"혹시 누님이 가주님께 아무 말씀 안 드렸다면……."
"아니야. 말씀은 드렸어.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아직 고민 중이셨어. 그래서 나도 너한테 말을 하지 않은 거고."
"누님께서는 내가 가는 걸 어떻게 생각해요?"
하벨의 물음에 넬시아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고민했다.
'안 된다고 그래, 누님! 절대로 안 된다고!'
라르웬은 넬시아를 지그시 쳐다보며 텔레파시를 보내보았다.
"나는 좋아."
넬시아는 곧 두 눈이 포근히 감길 만큼 활짝 웃었다.
"네가 포탈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하는데……."
팍!
라르웬이 제 이마를 세게 치자 넬시아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르웬은 이를 악물었다.
하벨의 실체를 아직 제대로 모르기에 넬시아가 저 말을 꺼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넬시아한테 하벨을 데려가지 말라고 말리는 건 모양새가 이상했고, 방금까지 잘해보자며 잔잔하게 흘러간 분위기라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라르웬은 하벨을 바라보았다.
소풍 가기 전 들뜬 모습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
저렇게나 기뻐하는 저 표정을 보고도 어떻게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그래. 그냥 누님한테 따로 말하자.'
뭐가 됐든 오늘은 좋은 날이었으니 라르웬은 참기로 했다.
넬시아는 라르웬을 힐끔 쳐다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하벨 네가 포탈을 버틸 수 있는 게 가장 걱정이 되지만 나는 정말로 좋아."
"고마워요. 저도 엄청 기대돼요. 그렇죠, 형님?"
하벨의 반짝이는 눈빛에 라르웬은 머뭇거리다 다시금 팔짱을 꼈다.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야 정말 정말 굴뚝 같지만, 일단은 모르겠어."
지금 틈의 세계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하벨이 언제 출발할지 모르겠지만, 또 그 주변에 틈의 세계가 나타날 확률이 높았기에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럼, 저번에 벌어진 검은 달 습격 이후로 언제 또 모이기로 했습니까?"
언제냐는 하벨의 물음에 라르웬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분명히 하벨이 움직일 게 아닌가.
"형님."
하벨은 상체를 일으켰고, 라르웬이 이마를 눌러 다시 눕혔다.
"누워, 막내야. 오늘 일어날 생각하지 마. 이미 마법사의 탑 최상층에서 떨어진 걸로 끝났어."
"신관님이 치료해줘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괜찮아졌습니다. 그리고 이게 피한다고 해서 오지 않을 일도 아니잖습니까. 지금은 서로 협력해야 할 차례입니다."
"알아."
라르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이 아무리 숨긴다고 한들, 루룸을 통해서라도 정보를 캐어낼 게 뻔했다.
"이틀 뒤야."
"현재 클로저의 상황 파악은 되고 있습니까?"
"이미 파악은 끝났지. 다행스럽게도 부상자는 있지만, 희생자는 없어. 혹시 검은 달 지부의 위치는 파악이 된 상태야?"
"가주님과 협력했기에 거의 파악이 된 상황입니다. 한, 20% 정도 남았다고 보면 되겠죠. 좀도둑도 엄청 고생했고, 정령들도 정보를 많이 물어다 줬어요."
"아! 정령들이 네 덕에 모이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어. 대단하더라. 아버지께서 정말 좋아하셨어. 나도 그 땅에 가보고 싶은데 가도 될까?"
넬시아가 대견해 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고 말고요. 나중에 같이 가요. 혹시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왔다는 정령의 소식이 닿을 수도 있잖아요?"
이전에 자신의 땅에 가본 뒤로 아직 들리지 못했다.
방금 넬시아가 말했듯 룬델에게 정령들이 모인다는 말을 들은 뒤로 다시 또 가고 싶었다.
"희망에 찬 말이라는 건 알지만, 나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넬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눈앞에 헤스트리아 왕국 사람들의 모습과 정령들이 일렁거렸다.
"그냥 정화제가 줄어든 건 내부에 사소한 일이 발생했다던가 정령들이 삐지거나 화나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어. 도움을 요청한다는 건, 진짜 큰일이 벌어졌다는 거니까."
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하벨이 위를 쳐다보며 아쉬움을 드러내자 넬시아는 그 눈빛이 참 낯설다 싶었다.
"다른 나라 대신들과 약속이 있어. 바안 전하를 지키는 게 먼저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으니까."
입꼬리를 살짝 올린 넬시아는 라르웬의 어깨를 쳤다.
"너도 일어나, 라르웬. 하벨은 이제 쉬어야지."
"나는 조금 더 있다가 가려고. 클로저 일로 말해줄 것도 있고."
"그럼 나 먼저 일어날게, 하벨."
넬시아는 발을 떼려다 떠오른 사실에 입을 열었다.
"하벨 네가 바안 전하를 꽤 신경 쓰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사절단들이나 귀족들은 걱정하지 마. 지금처럼 만나면서 입도 틀어막았거든. 아버지가 써먹으라고 주신 정화제 유통 경로를 보면 야금야금 처먹은 게 참 많더라고."
넬시아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면서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는 느낌이 몰려왔다.
"돼지 새……. 아니야.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줘."
도중에 자신의 입을 막은 넬시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하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자야지, 하벨. 눈에 잠이 오는 게 보이네."
"누님."
"응?"
"전하께 보고할 일이 있습니까?"
"있지."
"그럼 곧 뵈러 간다고 말씀해주실래요? 전하께 전해야 할 말도, 허락받아야 할 일도 있습니다."
마법사 협회의 방향도 바안이 결정해야 하는 게 맞았고, 코스모피안 왕국의 비밀 조직 일은 당연히 그 왕국의 사절단 대표인 게리온에게 물어봐야 했다.
"우리 막내는 쉬어야 한다는 말을 모르나 봐? 지금 헤레스를 불러와서 어떤 상태인지 들어야겠어?"
넬시아의 표정도 좋지 않았지만, 그녀는 슬슬 언성을 높이는 라르웬을 잠깐 말리며 물었다.
지금 라르웬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했고, 또 하벨을 무조건 막는다고 해결될 게 아니란 것도 파악했다.
"급한 거야?"
"급한 겁니다."
"그럼 좋아. 일단 네 말을 전할게. 하지만 전하께서 응할지 아닐지까지는 확답할 수 없어."
"괜찮습니다.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아, '마법사 협회' 이야기도 살짝 언급해주세요."
이러면 아무리 바안이라도 거절하지 못하겠지.
하벨이 웃자 넬시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에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라르웬. 하벨한테 너무 화내지 말고."
"화 안 내. 약속했잖아?"
라르웬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 갈게, 하벨."
넬시아는 그제야 안도하며 하벨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에 먼저 자리를 떠났다.
"막내야."
"말씀하세요."
"일단 네가 원하는 대로 분위기를 이끌어갈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 봐."
라르웬은 손을 흔들어 하벨을 재촉했다.
"이번에는 무리할 일이 없잖아요? 클로저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지부도 마법사 협회랑 가면단이 다 부술 건데요. 형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 걱정되는데. …무섭진 않았어?"
라르웬의 물음에 하벨은 그가 무얼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마법사의 탑에서 떨어진 일을 말하는 거겠지.
"무서웠습니다."
"고마워."
라르웬은 하벨의 팔을 토닥거렸다.
"고마워, 막내야."
하벨은 라르웬이 꺼낸 고마움에 많은 것들이 담겼으며 팔을 토닥이는 라르웬의 손길처럼 따스했기에 하벨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아직 남은 젤리를 입에 넣었다.
'맛있다.'
* * *
"…자, 자, 잠깐만요."
바안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그만큼 하벨이 꺼낸 말은 엄청난 것이었다.
"나보고… 마법사 협회를 쥐라고요?"
바사삭.
태연하게 과자를 먹던 하벨이 씩 웃었다.
"이 나라가 전하의 것인데 그럼 누가 쥐겠습니까? 뭐, 정 부담스럽다면야 공동으로 관리하면 됩니다."
"왜 이렇게 나한테 주는 겁니까?"
바안은 앞으로 쏠렸던 몸을 살짝 뒤로 움직였다.
누구든 무얼 넘기면 경계해야 하는 건 맞았다.
"훌륭하시네요."
하벨은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딱 한 가지만 약속해주십시오."
"뭐든 말해보세요."
"혹여나 전쟁을 일으키고 싶으시다면 무조건 저한테 허락을 맡으십시오."
어쩌면 바안은 전쟁광일지도 모르니 미리 단속시켜놓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