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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36화 (236/415)

236화. 토닥토닥

* * *

* * *

'자자, 표정 관리. 표정 관리.'

하벨은 침대에 누워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감지 않아도 되는 붕대를 두르고, 볼에 반창고를 바르고, 안대는 풀었다.

[이렇게 보니까, 대장이 또 엄청 아파 보여. 엄청 신기해.]

아라가 눈을 깜빡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게. 진짜 아파 보여."

칼리우스까지 신기한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파 보이는 게 아니라 도련님께서는 정말 아픈 거 몰라?"

카샬이 툭 하고 꺼낸 말에 칼리우스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나 말실수 한 거야?"

"아니. 말실수라니. 그래 보여야 하는데 아라랑 용용이랑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하벨이 웃자 카샬은 기가 찬 듯이 반응했다.

"이미 그렇게 말씀하지 않아도 아주 아파 보입니다. 제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요."

"엘라힘한테 치료받은 뒤로는 막 활력이……."

"도련님."

헤레스가 조용히 하벨을 부르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농담이었어."

끅끅.

옆에서 웃음을 참는 레디나의 목소리에 하벨은 깜짝 놀랐다.

"아까 안 갔어? 주방장한테 간다고 안 했어?"

"아, 이제 가려고 했어요. 저는 발이 빠르니까요. 그런데 갔으면 후회할 뻔했네요. 이런 좋은 장면도 못 보고요."

"날 놀리는 게 재밌지, 레디나?"

"저는 도련님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있어요. 제 신이시고 전 도련님의 신도잖아요?"

레디나는 언제 웃었냐는 듯 살짝 표정을 다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너……."

"갔다 올게요."

하벨이 언성을 높이기 전에 레디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병을 꺼냈다.

"우리 도련님 배가 고프실라. 그동안 도련님께서 좋아하시는 쿠키랑 젤리를 먹고 있어요. 칼리우스 님도요."

하나는 하벨한테, 하나는 칼리우스한테.

"고마워, 레디나."

병을 두 손에 꼭 쥔 칼리우스가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보자 레디나는 덩달아 마음이 포근해지는 걸 느꼈다.

레디나는 눈을 깜박거린 채 병을 소중히 안은 하벨을 쳐다보며 피식거리다 동전 모양의 초콜릿을 꺼내 흔들었다.

"이건 아라 님 거예요."

[우와아아!]

아라가 바로 달려가 초콜릿을 껴안자 레디나는 배시시 웃었다.

보이지 않아도 얼마나 기뻐하는지 느껴졌다.

[고마워, 레디나!]

아라는 바로 레디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 보드라운 온기에 레디나는 아라를 한 번이라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표정인지, 어떤 말을 하는지 다 알고 싶었다.

[어서 기운 차렸으면 좋겠다.]

"아라가 네가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다고 하네."

하벨이 젤리를 한 입 먹으며 아라의 말을 전해주자 레디나는 살짝 놀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보드라운 감촉이 자신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꼭 토닥거리는 것 같지 않은가.

"저 이제 괜찮아요. 그때는 그냥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였어요. 진짜 괜찮아요, 아라 님."

칼리우스가 하벨을 데려왔을 때 그가 얼마나 많은 피를 쏟아내며 고통에 찬 비명을 얼마나 한껏 질렀던가.

모두가 입을 다문, 그날의 모습이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하벨은 모를 테지.

그냥 모든 게 분해서, 그래서 요즈음 힘이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투덜거리면서도 젤리를 맛있게 먹는 하벨의 모습에 레디나는 다시금 낄낄 웃다 힘차게 소리쳤다.

"그럼 갔다 올게요!"

"그래, 갔다 와."

하벨은 젤리를 우물거리며 레디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카샬."

하벨의 시선이 카샬을 향했다.

"너는 그간 나를 찾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준다며? 왜 안 줘?"

"명단은 이미 확보해뒀습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 구미가 당길 만한 인물은 없어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차후에 드릴 테니, 지금은 쉬셨으면 합니다."

"게리온은 어쩌고 있어? 너라면 동선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분명 정중히 부탁했음에도 여전히 나불거리는 하벨의 입을 쳐다본 카샬이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전하께 듣지 않았습니까?"

"아니. 말씀을 안 해주시더라. 너무 섭섭하게 말이야."

"역시 전하께서는 이 에르티안 왕국을 이끌어가실 훌륭한 왕이 되실 분입니다."

툴툴거리는 하벨의 말을 이어 카샬이 작은 감탄을 내보였다.

코스모피안 왕국의 사절단 대표인 게리온이 어떻게 하고 있다는 걸 하벨에게 알린다면 과연 그가 가만히 있겠는가.

이걸 알아챈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안은 현명했다.

"카샬, 보고해줘. 아니면 내가 정령들한테 물어서 직접 들을까?"

"…완전히 냉전으로 돌입했다고 합니다. 전하의 부름에도 몇 번이나 응답하지 않았으니 소문이 퍼질 만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벨은 게리온과 손을 잡기 전, 바안의 부탁으로 그와 합의점을 찾아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폭파 사건을 일부러 늦추고자 서로 으르렁거리는 거였다.

"게리온이 약속대로 제 역할에 심취했네. 하지만 굳이 전하의 부름까지 무시하지 않아도 될 텐데."

즐거움이 가득 담긴 하벨의 목소리에 카샬은 불안해하며 물었다.

"…게리온을 만나러 가실 겁니까?"

"글쎄."

"제발, 확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야, 카샬. 그러니까 진정해."

하벨은 카샬을 달랬다.

아무리 평소처럼 말을 꺼내도 요새 다들 예민하다는 왜 모를까.

마법사의 탑 꼭대기에서 자신이 떨어졌던 그 일이 그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새삼 또 알아버렸다.

'미안하다. 당분간은 나도 자제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머뭇거릴 틈이 없다.'

이것 말고도 자신이 처리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카샬이든 헤레스든 누구든 자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했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제일 싫었다.

이미 얼마나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있었던가.

이제 와서 원래대로 돌아가라는 말 같아 그다지 달갑지도 않았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카샬은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과했다 생각하며 사과했다.

이전 같았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일도 계속 감정이 섞여 들어갔기에 굉장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었다.

"아니야. 이해해. 저번 일이 카샬은 물론 너희에게도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을까 생각하니 다 이해할 수 있어."

저들 역시 자신을 이해했기에 하벨은 한 명씩 바라보았다.

자신이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고, 하벨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해주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샬은 살짝 감동했다.

설마하니 그 부분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지금도 평소처럼 행동하는 거라 생각했다.

갑자기 밀려오던 감동이 잠깐 멈췄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알면서도 도련님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거잖아.'

쉬어야 한다는 헤레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무리해서까지 왕실로 왔다.

도중에 엘라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얼마나 끙끙 앓고 있을지 상상이 가니 더욱 화가 밀려왔다.

"그래서 말이야, 카샬."

하벨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자 카샬은 뒤통수가 얼얼했다.

'…49일 차면서 왜 이렇게 얄미운지.'

카샬이 굳은 얼굴로 숨을 길게 내쉬자 하벨은 웃음을 꾹 참았다.

"이 이상 아무 말씀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진짜 화가 날 것 같습니다."

"멱살도 잡혔는데 뺨이라고 못 내주겠어?"

"그건… 제가 몇 번이나 잘못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49일 차인 도련님께 제가 못 할 짓을 했습니다."

"…큽."

헤레스가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이러면 안 되지만, 솔직히 하벨하고 나이가 너무 잘 어울렸다.

"여기 기준이라고, 카샬. 나, 나이 많아."

"원래 기준점은 현재로 잡는 겁니다. 몸이 바뀌었으니 그때부터 잡는 게 맞는 거죠."

카샬이 우쭐거렸고, 하벨은 젤리를 신경질적으로 씹어먹었다.

"그럼 도련님께서는 원래 몇 살이셨어요?"

헤레스가 넌지시 묻자 젤리를 질겅질겅 씹던 하벨이 곰곰이 생각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대장은 이 몸하고 나이가 같은데?]

칼리우스와 마주하며 초콜릿을 먹던 아라가 귀를 높이 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으음, 세어 본 적이 없어. 처음에 숫자를 몰랐거든."

하벨은 입가를 핥으며 말했다.

"원래 처음에는 숫자를 몰라. 아기 때는 다 몰라, 도련님."

칼리우스가 키득거렸다.

세상에 하벨도 모르는 게 있다니.

칼리우스가 왜 즐거워하는지 알지만,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못된 정보를 전해줄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처음부터 너만 했어, 용용아."

"나? 나는 지금 엄청 쑥쑥 컸는데? 벌써 2cm나 자랐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칼리우스가 머리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라도 칼리우스처럼 앞발로 머리를 가리키다 말고 괜히 시무룩해졌다.

[이 몸은 조금밖에 안 자랐는데.]

"아라야, 너도 잘 자라고 있어. 처음에 이만했잖아?"

하벨이 자신의 손톱을 가리켰다.

"아라가 그만큼 작았어?"

칼리우스가 놀라며 묻자 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이 몸은 처음에 엄청 작았어!]

"그때는 말도 못 했지."

이제는 그리운 과거가 되어버린 사실에 하벨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나는 하늘도 몰랐고, 바다도 몰랐고, 그냥 백치 상태라서 바다만 바라봤어. 몇 년이 흘렸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서 몰라. 허송세월을 좀 많이 보내기도 했고. 그래서 나이를 따지면 좀 많아."

과거를 말하는 하벨의 표정에 짙은 그리움과 괴로움이 섞여 있었기에 헤레스는 하벨의 과거가 순탄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뭐가 됐든 지금 도련님하고 상관없죠. 49일 차라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도련님?"

카샬은 말을 꺼내다 말고 등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왜 밖으로 나……."

말을 멈춘 하벨은 숨을 살짝 들이켰다.

올 게 왔구나 싶었다.

꿀꺽.

하벨은 마른침을 삼키며 벌써 밀려오는 두려움에 눈앞이 아찔했다.

마법사 협회에서 자신이 가져온 거라고는 턱없는 사실뿐이었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그 사실에 하벨은 벌써 가슴이 먹먹했다.

룬델한테도 말을 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미룰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살아가기로 했다.'

하벨은 그때 모두에게 꺼냈던 말을 떠올리며 차분해지려 애를 썼다.

"막내야."

라르웬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룸은 보이지 않았다.

"하벨."

이어 넬시아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녀 역시 톰톰을 데려오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말을 나눌 거라는 의지가 보였다.

"다들 비켜줬으면 좋겠어. 아라 너도."

넬시아는 차분히 목소리를 냈지만,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이, 이 몸도?]

아라가 손을 흔들려다 살짝 주눅이 든 채 넬시아를 바라보았다.

[이 몸은 지금 대장이랑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미안해, 아라야. 하지만 하벨하고 나눠야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이 몸이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이 몸은 아무 말도 안 할게.]

"아라야."

하벨이 아라를 쓰다듬자 아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 몸은 대장이랑 같이 있고 싶은데. 라르웬이랑 넬시아가 대장을 몰아붙이면 대장은 혼자인데.]

"막내를 몰아붙이는 일은 없을 거야, 아라야. 약속할게."

라르웬이 슬퍼하는 아라를 보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바로 밖에 루룸이랑 톰톰이 있어. 언성이 높아지면 들릴 거니까, 그때는 들어와도 돼."

[진짜? 그때는 들어와도 되는 거야?]

아라가 그제야 화색 하며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안심해."

[응!]

아라가 라르웬을 보며 활짝 웃다 하벨을 안아주었다.

[이 몸이 소리가 나면 들어올 거니까, 괜찮아 대장.]

하벨은 의젓해 보이려는 아라의 모습에 볼을 잡았다.

아라가 놀란 나머지 눈이 커졌다.

"그러지 않아도 돼, 아라야. 나는 계속 여기 있을 거고, 내가 형님하고 누님이라고 해서 순순히 당할 것 같아?"

[아니! 대장은 안 그래!]

아라는 소리치면서도 어쩐지 울먹였다.

자신이 떨어진 걸 고스란히 봤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생하게 아는 자는 아라뿐이겠지.

하벨은 아라가 느끼는 두려움을 이해했다.

하벨의 손가락을 잡은 아라는 하벨과 시선을 마주하다 무언가 만족했는지 칼리우스 옆에 섰다.

[이 몸은 잠깐 나갔다 올게.]

아라는 하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벨은 이제 괜찮았다.

"용용이하고 산책 갔다 와도 돼. 너희도 잠깐 자유시간을 즐겨."

칼리우스와 아라를 보던 하벨이 헤레스와 카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고개를 숙인 채로 밖으로 나갔다.

분명 자신의 옆에 있고 싶다는 말을 꺼내고 싶었겠지.

모두가 나가고 라르웬과 넬시아가 자리에 앉았다.

"자. 이제 이야기할까요?"

하벨은 손을 배 위에 올린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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