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귀 파고 잘 들어
* * *
"그럼. 진심이지."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도련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페트리오도 모른다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크라마는 도중에 생각을 멈추고 일단 하벨의 말을 따랐다.
지금까지 하벨이 헛발질을 한 일이 없었으니.
크라마의 손길을 따라 헤일리스의 손과 발을 묶던 밧줄이 풀려갔다.
"설령 시렌의 꼭두각시가 되더라도 네가 바라는 대로 편해지고 싶으면 죽고, 괴롭더라도 시렌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살아."
잔잔하게 퍼져가는 하벨의 목소리에 헤일리스는 그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내가 너한테 많은 시간을 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하네. 지금 몸도 좀 안 좋아서 말이야."
자신의 가슴팍 쪽에 푸른 돌이 생겼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정말로 숨을 쉬는 게 이전보다 힘겨워질 줄이야.
[이것 봐봐. 이 몸이 침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말렸잖아.]
아라가 또 입을 삐죽 내밀었다.
[대장은 가만히 보면 나쁜, 아닌데 대장은 나쁘지 않아! …으음, 이걸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장이 다들 바쁠 때 그런 말을 했잖아? 그건 어, 어, 나빠!]
'…저런, 벌써 알아차렸나?'
하벨은 아라가 툴툴거리면서 꺼낸 말에 속으로 살짝 놀랐다.
이렇게 눈치가 빨라질 줄이야.
성장한다는 건 역시 즐거우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맛이 있었다.
"자. 이제 선택해, 헤일리스."
하벨은 아라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손과 발의 자유를 찾은 헤일리스의 선택을 기다렸다.
헤일리스가 칼을 잡자 크라마가 긴장했다.
저 칼로 하벨을 찌를 수도 있었다.
"이리 와."
크라마가 부르자 조용히 숨죽여 있던 검은 표범이 걸어왔다.
[오, 오오옵!]
아라가 검은 표범을 보는 순간 눈에 별이 박힌 듯 반짝거렸다.
[고, 고양이다! 아주 큰 고양이이!]
아라의 목소리를 느낀 건지 표범의 걸음걸이가 영 편해 보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어딘가 위축되어 보였다.
"고양이가 아니고 표범 같은데?"
하벨이 넌지시 입을 열었지만, 이미 아라 눈에 고양이든 표범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너무, 너무 예쁘다! 이, 이 몸이 만져봐도 될까? 가까이 가도 될까?]
아라가 슬쩍 다가가도 표범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얌전히 크라마 옆에 앉자 아라는 활짝 웃으며 표범 위에 올라갔다.
표범은 흠칫 놀랐지만, 크라마의 마법에 걸렸기에 달아나지 않았다.
[우와아아!]
아라가 표범의 털에 묻혀 배시시 웃었고, 헤일리스는 손에 쥔 칼을 유심히 바라보며 상체를 일으켰다.
"…날 경계할 필요 없어."
죽어가던 헤일리스의 눈동자에 차차 생기가 어렸다.
하벨은 결정을 내린 모습에 뭐가 되었든 잠깐 미소를 지었다.
"하벨… 티에라 님."
헤일리스가 말을 바꿨다.
이는 자신을 세뇌에서 풀어줘 더한 악행을 멈춰준 그들을 향한 존중이었다.
"마법사… 협회는 서로 다른 나라에 존재하지만, 사실 이어져 있습니다."
"알고 있어. 이미 들었거든."
하벨이 말했다.
헤일리스는 칼을 들었고 서서히 자신의 목에 칼을 가져갔다.
[으아앗!]
아라가 기겁하며 당장 하벨의 품에 매달렸다.
[어떡해! 저러다 큰일이 나는데!]
칼을 따라 크라마의 눈동자가 올라갔고, 여전히 헤일리스를 경계했다.
"저는 말이에요."
헤일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사실 죽고 싶지 않아요. 제가 역겨워서 죽고 싶은데, 죽고… 싶지 않아요."
"알아. 그게 본능이니까."
"그 모든 게 제 잘못처럼 느껴지는데 사실은 제 잘못이 아니잖아요. 제가 했지만,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헤일리스는 다른 손으로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그런. 그런 끔찍한 짓을 할 마음도, 생각도 없었어요. …알고 계시죠?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게 얼마나 추할지 알지만, 제가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계시죠?"
헤일리스는 마지막 의지를 다잡듯 그렇게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물었다.
하벨은 왜 헤일리스가 자신에게 매달리는지 이해했다.
세뇌당한 헤일리스가 마지막에 저지른 죄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럼. 네 잘못이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야."
하벨은 진중하게 말을 꺼냈다.
누군가 세뇌에 당해 저지른 죄 역시 죄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자신은 달랐다.
갚아야 할 빚이 있고, 다시 바로잡는 책임을 피할 수 없어도 적어도 헤일리스가 저지른 죄가 아니라 생각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헤일리스는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며 활짝 웃었다.
이 굴레에서 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사람쯤, 단 한 명에게라도 듣고 싶은 말이었다.
헤일리스의 손에 쥔 칼이 움직였다.
촤악.
[으아아앗!]
아라의 비명과 달리 헤일리스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잡고 베어냈다.
후두둑.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졌다.
"…복수할게요."
헤일리스는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내보였다.
마지막 죄이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모든 악행의 진짜 시작이 될 수 있었던 하벨 티에라가 자신이 추하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자신은 하벨 티에라를 질투하지 않았다.
그 시기심과 질투마저 꾸며진 감정이었을 뿐이었다.
"제 기억은… 마법사 협회로 들어왔던 순간에 끊어졌습니다. 그다음 기억은 제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차 있어요."
헤일리스는 떨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제 손에 묻혔던 피는 이것보다 더 짙고, 많은데.
"그 기분 이해해. 나도 그랬거든."
크라마가 작게 으르렁거리는 듯 인상을 구겼다.
"아주 개같지."
헤일리스는 잠깐 미안한 표정을 짓다 다시 하벨을 보았다.
"이미 오래전에 끊어졌지만, 제 선조들은 대대로 물 마법사였답니다. 저 역시… 물 마법사가 되기 위해, 아니, 찾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헤일리스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하벨 티에라 님이 설령 정령사일지라도 저에게는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훌륭한 물 마법사이십니다."
애초에 마법사란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 붙이는 그냥 호칭일 뿐이었다.
대체 다른 이들보다 무엇이 특별하며 무엇이 존중받아야 할 존재인가.
존중받아야 하는 건 지금 눈앞에 있는 하벨 티에라이며 티에라 가문이며 이 세상, 선을 향하는 모두에게 내려져야 하는 말이었다.
헤일리스는 하벨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비록 자신의 두 손은 더럽혀졌지만, 감히 이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고마움을 담아 말을 꺼냈다.
"저는 이제부터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하벨 티에라 님."
"아니. 나를 따르지는 말고, 그냥 방향만 맞추자."
헤일리스는 잠깐 하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깜박였다.
"어차피 나는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마법사 협회로 끝내지 않을 거라서. 너도 그렇지?"
하지만 곧 이어진 말에 헤일리스는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렸다.
이 역시 자신의 복수니 처음부터 마음의 빚은 없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헤일리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은혜를 전부 갚기 전까지 저게 저분의 의지라면 그에 맞춰서 따르는 수밖에.
"예. 다 이어져 있다면 다른 나라까지도 그 쓰레기의 의지가 남아 있다는 말이니까요."
헤일리스는 시렌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좋아. 그러면 나랑 같이 하나씩 부서트리자."
하벨은 지팡이를 짚었다.
"일단 여기 수습이 먼저이긴 한데, 그건 나보다 네가 더 잘할 거라 생각하는데?"
"예.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참에 하나 도와주라."
"도와드리겠습니다."
헤일리스는 하벨의 부탁을 넙죽 받았다.
지금 자신이 어떤 위치인지 인지하고 있었다.
위장이든 뭐든 일단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이었다.
"내가 없애고 싶은 곳이 있어. 마법사 협회 내부도 혼란스러우니까 이참에 잘됐다 싶어. 네 생각은 어때?"
"그러니까 적을 만들어 이 혼란을 잠재우시겠다는 말입니까?"
"그래."
하벨이 씩 웃자 크라마는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에 따라가지 못했다.
"자, 잠시만요, 도련님."
"왜?"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갑니까?"
"나는 처음부터 이걸 노렸는데?"
"노렸다고요?"
"부숴야 할 단체가 있거든."
똑똑!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에 크라마가 경계했다.
[어음…….]
킁킁.
아라가 냄새를 맡다가 활짝 웃었다.
[레디나다!]
"열어줘."
"하지만……."
"레디나야."
하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크라마가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도련님!"
레디나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툭.
그녀는 무언가를 던지며 활짝 웃었다.
[히익!]
아라가 레디나한테 달려들려다 다급히 하벨에게 매달렸다.
하벨은 아라를 토닥이며 레디나한테 이게 무슨 상황인지 눈으로 요구했다.
"이용할 거 찾아왔어요."
그제야 하벨은 레디나가 던진 사람을 보더니 미소를 흘렸다.
"지금 딱 뭔가 이용할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계셨잖아요."
"어떻게 알았어?"
"제가 도련님을 한두 번 봐요?"
"그렇지. 그럼 어디에 있었어?"
"마법사들 사이에 끼어 있던데요?"
레디나는 자신의 손등에 문양이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검은 달이에요.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레디나는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검은 달이 이렇게 와준 건 고마운데, 대체 왜 마법사 협회에 기어들어 온 거지?'
하벨은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마법사 협회에 들어온 이유는 마법사 협회 내에 누군가를 죽이거나 마법사 협회의 상황을 살피는 것 이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왜 하필 지금일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크라마는 레디나와 하벨의 대화를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갑자기 레디나가 내던진 저 사람은 대체 무엇이며 이용할 거라니.
"얘가 내가 부수려던 그곳 소속이라네?"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헤일리스 역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그제야 레디나의 눈에 헤일리스가 보였다.
"잘 해결이 된 거예요?"
레디나의 물음에 하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레디나가 가져온 걸 가리켰다.
"내가, 그리고 마법사 협회가 앞으로 부숴야 하는 놈들이야."
"그러니까 왜요? 이유를 말씀해주시죠."
크라마 역시 일어났지만,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
"나를 노리고 있거든."
"죽이겠습니다."
하벨이 꺼낸 말에 크라마는 표정을 싹 바꿨다.
이제 마법사 협회가 달라지기 시작한 시점이고, 헤일리스 역시 마지막 정신적인 기둥인 하벨이 없다면 완전히 무너져버릴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하벨을 노린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놈을 이번 사건과 엮으실 셈입니까?"
헤일리스가 물었다.
그녀의 눈에 강한 살기가 어리자 레디나는 미묘한 시선을 하며 헤일리스에게 걸어갔다.
"진짜 도련님을 따르기로 한 거야? 아니면 따르는 척하는 거야?"
"저를 의심하는 건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너무 엉망이고, 당장 목에 이 칼을 쑤셔 박고 싶은 생각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힘들거든요."
헤일리스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 레디나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헤일리스 주변에 자신이 익히 봐왔던, 죽음을 각오하는 자의 눈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럼 그때는 저한테 말해요. 아프지 않게 죽여드릴게요. 약속해요."
레디나는 뒤로 물러서 헤일리스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자신을, 그것도 아프지 않게 죽여준다니.
지금 이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을까.
"하벨 티에라 님. 혹시 이 칼… 가져도 됩니까?"
"가져. 비싼 거니까."
하벨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가끔 충동이 들 때 보려고요."
"보통 반대가 아닌가 싶은데?"
"칼로 목숨을 구했으니, 이걸로 자살할 수 없죠."
헤일리스는 칼을 소중히 잡으며 하벨이 넘긴 검집에 조심스레 넣었다.
"지금 마법사 협회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검집을 손에 쥔 헤일리스는 눈에 의지를 불태웠다.
* * *
웅성웅성.
헤일리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마법사 협회 내부가 시끌벅적해졌다.
"…아직 안 죽었다고? 아직?"
한 마법사가 헤일리스를 보며 분노를 드러내자 옆에 있던 다른 마법사는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내 말이."
얼마 전에 마법사 협회에 습격이 벌어졌다.
그 일의 중심에 하벨 티에라가 있다는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을까.
일단 죽고 싶지 않아 항복했고, 협회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생활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습격이 벌어졌던 그 날, 옅은 장막이 사라졌다는 느낌이 든 후에 참을 수 없는 혼란이 밀려왔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자 헤일리스를 향한 원망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벨 티에라가 했던 행동이 과연 습격인지 애매한 구석이 많았고, 그런 와중에 페트리오라고 하는 그 무섭던 귀족이 찾아왔다.
눈동자가 신기한, 칼리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들이 쫓던 그 아이와 함께.
―자, 순순히 진짜 이름을 말해.
페트리오의 협박에 진짜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었고, 칼리우스에게 이름을 불리자 자신들이 당연한 진리라 믿었던 것에 대한 확신마저 단번에 깨져버렸다.
다시금 자신들이 했던 그 끔찍한 행동과 강제로 마주했고, 밀려온 짙은 죄책감에 실제로 몇 명이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죽는 건 안 돼. 그건 내가 허락할 수 없어.
어쩌면 이름을 언급한 칼리우스가 뒤이어 꺼낸 그 말 때문일지도 몰랐다.
겉으로 보기에 여러 가지 안정화되는 듯했지만, 여전히 마법사 협회 내부는 어지러웠다.
"…모두 정숙."
헤일리스가 입을 열었다.
세뇌가 풀렸음에도 습관적으로 모든 마법사가 그녀를 쳐다보았고, 헤일리스 역시 습관적으로 그들을 낮게 쳐다보았다.
이를 어색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 시선에 헤일리스를 향한 원망이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오늘. 습격과 얽힌 이야기를 하고자 잠깐 이 자리를 빌렸다."
이 역시 예상했기에 헤일리스는 모두가 군침이 돌만 한 이야기부터 차분히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