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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28화 (228/415)

228화. 놈인가(3)

* * *

* * *

[…우와아.]

정령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런 곳이 있었다고? 정말 그런 곳이 있어?]

[응응! 이 몸이 봤다? 거기에 정령들이 모여 있어.]

"맞아. 정령들이 가득 모여 있어."

아라의 뒤를 이어 칼리우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땅을 생각하면 그 일렁거리는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정령들에게 좋은 땅이라는 건 분명했다.

부정한 것들도 없고, 정령들도 뭉쳐 있고, 크라마 쪽 마법사들과 정령 기사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럼 갈래. 어딘지 알려줘.]

정령들은 아라를 재촉했다.

이미 정령들이 있고, 점점 모이고 있다면 당연히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정령왕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져 흩어진 너희가 부정한 것들로 더욱 떨어졌겠지. 사람들을 피해 더 깊게 숨어버리거나, 그냥 떠돌아다니거나.

열 받지만, 시렌이 꺼낸 말은 사실이었다.

저 이유로 자신들을 흩어졌고, 그 단절이 결국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벌어진 사태를 만든 이유로 이어질 줄이야.

"벌써 가게?"

하벨이 묻자 그를 진찰하던 헤레스가 슬쩍 눈을 돌렸고, 정령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에 바다를 보러 온 거거든. 왕께서 계신지도 보려고. 왕께서는 바다를 좋아하셨어. 엄청 좋아하셨어. 아직도 뒷모습이 잊히질 않아.]

[마법사의 탑이 뻥 뚫린 것도 계속, 계속 감상해서 이제 질렸어. 사실 이제 어디든 가려고 했거든.]

정령들이 하벨에게 모여들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자신들이 달려들기에는 하벨의 몸이 너무도 약해 보였다.

[달려가면 부러지겠지?]

정령이 다른 정령들을 보며 물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그 정도로 약하지 않아."

하벨은 기가 찼다.

정령들의 힘이 남다르긴 하지만, 무거워 봤자 얼마나 무겁다고.

[에헴. 그럼 대장 주변으로 둥글게 모여서 손을 뻗으면 되는 거지.]

아라가 하벨의 머리에 올라가 앞발을 뻗었다.

[짜아안. 이 몸처럼.]

[그럴까?]

정령들은 왠지 재미있게 보여 하벨을 둘러쌌다.

"아."

하벨은 무언가 떠올리다 손가락을 올려 카샬을 가리켰다.

카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샬한테도 선물을 줘야지."

[아아! 맞다. 착한 아이한테는 다 줘야 하는데.]

정령들은 그제야 카샬한테 매달렸다.

갑자기 밀려온 여러 촉감에 카샬은 당황했다.

"도련님 저는……."

"너도 이제 선물을 받아야지. 어엿한 정령사잖아?"

하벨이 꺼낸 정령사라는 말에 카샬은 참 낯설다고 생각했다.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일들이 하나씩 펼쳐지고 있었으니.

그때가 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는데 지금은 당황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럼. 우리를 도와줬는데 이건 당연한 거야.]

"손을 잠깐 떼야 할까요?"

헤레스가 눈동자를 굴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는 게 좋겠어, 헤레스. 정령들이 움직이고 있어."

대답은 하벨 대신 칼리우스가 꺼냈다.

헤레스는 행복함으로 번져가는 칼리우스의 표정에 덩달아 웃었다.

자신도 저 광경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고마워, 하벨, 카샬!]

정령들의 말과 함께 하벨과 카샬에게 축복이 밀려들었다.

찌르르.

갑자기 느껴지는 교감에 이어 축복은 카샬에게 너무도 낯설었다.

"너무 놀라지 마."

하벨이 꺼낸 말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포근한 이 감각에 하벨의 숨소리도, 안색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따뜻하네요."

아코가 나오지 않아 카샬은 정령들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에게 느끼는 고마움과 다정함만큼은 아주 깊게 느껴졌다.

순환의 길에 불순물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잠이 들 만큼 포근해 카샬은 왜 하벨이 정령의 축복을 받고 난 뒤에 항상 행복함에 찬 표정을 지었는지를 이해했다.

이렇게 다정한 손길을 어떻게 잊어버리겠는가.

카샬은 조심스레 눈을 떠 보이지 않는 정령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우, 우와.]

아라가 하벨에게 찰싹 매달리자, 정령들의 축복이 더욱 몸집을 불려 순환의 길에 다섯 번째 막을 넘어 여섯 번째 막으로 향하는 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익숙하게 그들의 기억이 스며들었다.

―있잖아. 떠날 거야?

정령이 묻자 다른 정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왕께서 사라진 이상, 이곳에 더는 머물 이유가 없어.

―어디로… 갈 건데?

―모르겠어.

―우리가 다시 모일 수 있을까?

―그럼. 왕께서 돌아오신다면 다시 모일 수 있을 거야. 반드시 그럴 수 있을 거야.

―응! 나도 그렇게 믿어.

정령들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하벨이 조용히 눈을 감고 뜨자 볼이 빵빵하게 웃는 아라가 보였다.

[헤헤.]

아라를 따라 정령들이 웃었다.

[이상하게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졌어.]

하벨 주변에 있던 정령 중 누군가 문득 밀려오는 그리움에 입을 열었다.

하벨과 카샬에게 축복을 내린 뒤로 바다가 그리워졌다.

[나도. 갑자기 그래.]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고 와도 되겠지?]

"천천히 갔다 와. 시간은 많으니까."

하벨은 정령들이 내보이는 조급함에 그들을 달래며 실실 웃었다.

"출발은 언제 해도 괜찮잖아?"

[하벨 말이 맞아. 떠나는 건 우리 마음이니까.]

정령은 하벨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잠깐 갔다 올게, 하벨. 아프지 말고 있어.]

"그래. 갔다 와."

하벨의 배웅과 제 몸에 사라져가는 정령들의 촉감에 카샬은 눈치껏 창문을 열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하벨은 바람을 맞으며 다시금 드는 생각에 시선을 밖으로 뒀다.

'…놈이 왜 하필 장례식장에 있었을까.'

하벨은 오는 내내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장례식장에 놈이 있었다는 하벨 티에라의 말을 어떻게 잊을까.

―사, 사실 나도 놈의 얼굴을 몰라! 이상하게 얼굴만큼은 기억이 나지 않아. 진짜야!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시렌의 말에 하벨 역시 꿈속에서까지 얼굴이 지워진, 열쇠를 가져간 그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것도 의문이었지만, 랜턴이 꺼진 뒤 '딸깍' 소리와 함께 찾아오던 하벨 티에라의 과거를 아직 보지 못했다.

'네가 일부러 멈춘 것인가, 하벨 티에라?'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기에 하벨의 미간이 잠깐 찌푸렸다.

"혹시… 아프시나요?"

헤레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분명히 정령들의 축복을 받은 뒤였는데.

"살짝?"

아니라고 말하려다 이불에 파묻힌 아라가 고개를 내밀어 지그시 자신을 보자 말을 돌렸다.

"음. 혹시 많이 아프시면 말씀해주세요. 다른 진통제로 바꿔야 하나 싶네요. 축복이… 통하지 않은 걸까요?"

"아니야. 몸 자체는 개운한걸."

"이제 제가 계속 지키고 있겠습니다, 헤레스 씨."

카샬은 의자를 들고 와 옆에 덩달아 앉았다.

"피곤해 보이는데요?"

헤레스가 카샬의 안색을 살피자 카샬은 지그시 하벨을 쳐다보았다.

"아뇨. 방금 축복을 받아 몸이 개운합니다. 헤레스 씨는 이만 들어가 보세요. 해야 할 일이 있잖습니까?"

지금 헤레스는 마법사 협회 내부에 있던 매개체를 잃고 사라진 마법을 제외한, 시렌이 따로 옮겨둔 남은 마법과 그 권한을 칼리우스에게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새겨진 마법 자체를 옮기는 일은 헤레스를 제외하면 불가능한 상태나 다름없기에 그녀가 꼭 필요했다.

"맞아. 나도 옆에서 지키고 있을게."

칼리우스 역시 의자를 가지고 와 헤레스와 카샬 사이에 앉았다.

카샬은 살짝 놀라며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 일에 칼리우스도 포함되어야 하거늘 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하는지.

슬쩍 헤레스를 보자 다급히 안경테를 올리고 있었다.

'…아. 까먹은 모양이네.'

카샬은 금방이라도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렀다.

"그,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옆에 잠깐만 있다 갈게요."

헤레스는 말을 더듬었다.

"가도 되는데. 나 진짜 괜찮아."

하벨이 이불을 꼭 쥐며 말을 꺼냈다.

"아뇨."

단호한 헤레스의 음성이 바로 이어졌다.

방금 하벨의 상태를 진찰했을 때 그의 몸속에 있던 푸른 돌이 마치 누군가가 억누른 것처럼 불안하게 떨려와 언제 또 움직여 하벨의 몸을 공격할지 몰랐다.

하벨의 가슴팍에 칼리우스가 새긴 마법 사이로 새어 나온 검은 실처럼 생긴 것도 보였고.

이렇게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오는데 어떻게 바로 떠나겠는가.

"도련님께서 잠이 드는 모습까지 보고 갈게요."

헤레스는 망했다는 표정을 짓는 하벨의 얼굴에 매우 만족하며 뒷말을 이었다.

"칼리우스 님."

"으응?"

"나중에 도련님이 잠드신 후에 저랑 가셔야 해요."

"헤레스랑 어디를 가?"

"이 마법사 협회의 실제 주인이 되셔야죠."

"…내, 내가?"

칼리우스가 당황했다.

"나, 나는 그런 거 몰라. 그렇게 높은 자리는 엄청 똑똑해야 할 수 있는 자리인데. 나는 멍청……."

찰랑.

칼리우스의 얼굴에 물이 튀었고, 그는 멍한 표정으로 하벨을 보았다.

"용용……."

[대장! 이 몸이 맛있는 물을 쓰면 안 된다고 했잖아!]

아라가 이불을 물어뜯으며 소리쳤다.

하벨은 기가 찼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할 말인지. 이불은 물어뜯는 게 아닌데.

"아라 너는 이불을……."

"도련님. 여기서 힘을 쓰시면 더 강한 진통제를 놓을 수밖에 없어요. 침대에 머무르는 시간도 더욱 길어질 테고요. 그걸 원하세요?"

헤레스가 싱긋 웃자 하벨은 억울했다.

칼리우스가 자학을 하기에 이를 말렸을 뿐인데.

"아니 나는……."

"벌써 몸이 쑤시는 게 아니길 빌겠습니다, 도련님. 지금은 안 됩니다. 나중에 즉위식 때까지 참으셔야 합니다."

카샬이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그러니까……."

"즉위식이라면 확실히 얼마 안 남았네요. 그 전에 또 뭘 하시겠다는 말씀은 아니겠죠?"

페트리오가 지그시 바라보았고, 하벨은 자신의 입을 막아버린 저들의 행동이 이미 머릿속에 사라진 채 시선을 흘렸다.

바안의 즉위식은 에르티안 왕국은 물론 티에라 가문,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하려던 일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었다.

왜 가만히 있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방해꾼은 없애야지."

지금 마법사 협회가 무너진 이상, 남은 위협은 검은 달이었다.

놈들은 클로저들까지 건드렸다.

바안을 건드리지 말라는 이유가 있을까.

"도련님. 전부 다 알겠으니 일단 며칠 간만이라도 그냥 쉬십시오."

카샬은 하벨의 마음에 불꽃이 붙기 전에 서둘러 꺼트리려고 노력했다.

"좀도둑."

"…꼭 지금이어야 합니까?"

페트리오 역시 하벨의 부름에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부탁할 것도 있고. 물론, 건너 건너 일이긴 한데."

페트리오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폭파 사건의 범인이 있던 곳은 코스모피안 왕국이었습니다."

"또?"

하벨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또 코스모피안 왕국이란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곤란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왕실에 붙잡힌 폭파 사건의 범인이 자백 전에 죽어버렸습니다."

"그놈이 죽었어?"

하벨은 살짝 웃는 얼굴로 물었다.

만약 놈이 살아 있었다면 기껏 가라앉혔던 바안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예. 자신의 믿음을 지키겠다는 말을 끝으로 머리를 박아 죽었다고 합니다."

"잘됐어."

"그럼 이제 저한테 부탁하실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시렌이 했던 실험 목록 좀 가지고 와줄래?"

그중 영혼을 바꾸는 실험도 분명히 있을 테지.

[…실험 목록?]

아라가 이불을 꼭 안으며 슬쩍 하벨을 바라보았다.

일단 실험이라는 말이 정령사 사건이 떠올라 괜히 슬퍼졌다.

"일단, 음… 실험을 당한 이들은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 남을 사람은 이곳에 남고 떠날 사람은 적잖은 자금을 쥐여주었습니다."

페트리오가 멋쩍은 표정을 하자 하벨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헤레스와 카샬한테 열 받은 페트리오가 어떤 일을 했는지 이미 듣지 않았는가.

"도망친 마법사들도… 계속 잡고 있고요. 그리고 복구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혹여 주변에 이번 일이 퍼져나갈까 입단속까지 확실히 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왜 이렇게 말을 돌려?"

하벨이 의아함을 드러내자 페트리오는 머뭇거렸다.

가면단과 크라마가 이끈 마법사들이 마법사 협회를 완전히 장악한 뒤에 자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벨이 자신에게 무얼 시킬지 어렴풋이 예측하는 일이었다.

하벨이 연신 꺼내던 말처럼 정말로 마법사 협회를 장악했으니 이제 다음 차례는 뻔했다.

―좀도둑, 나는 하벨 티에라가 아니야.

그때, 대충 넘기듯 흘러갔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봐왔던 하벨이라면, 하벨 티에라의 몸을 다시 돌려주고 싶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페트리오."

하벨이 이름을 부르자 페트리오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페트리오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정보는 없습니다."

"뭐?"

"드웰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사가 나간 뒤로 실험은 전부 중단됐습니다."

"…드웰이요?"

헤레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리가… 없어."

하벨이 부들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페트리오를 바라보았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그 모습에 페트리오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귀족들을 위해 일했을 때, 자주 보던 절망에 찬 표정이었으니.

그 표정을 하벨한테도 볼 줄은 몰랐기에 오늘따라 마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제가 정보 수집에 있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계시는지 아시잖습니까."

페트리오는 사실을 꺼냈다.

이는 지금까지 하벨이 사용했던 힘이었다. 이를 쉽게 부정하지 못할 테지.

"정말 거기서 끊어졌습니다, 도련님."

"……."

하벨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천천히 흔들리던 마음이 크게 요동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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