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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27화 (227/415)

227화. 놈인가(2)

* * *

레디나라는 이름에 시렌의 동공이 확장됐다.

"…레, 레디나?"

시렌은 벌써 몸을 떨었다.

레디나에게 손가락이 잘렸던 그 공포가 밀려와 몸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야, 도련님. 레디나는 이미 저쪽으로 갔는데?"

칼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가는 방향을 가리켰다.

킁킁.

아라가 냄새를 맡아보다 잠깐 코를 잡았다.

[아앗. 레디나는 냄새가 나지 않아! 냄새로는 못 찾아.]

"여기 있는데?"

하벨은 손가락을 들어 벽면을 가리켰다.

하벨도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시렌하고 대화하던 도중 벽면이 잠깐 떨리는 걸 보았다.

'웃다가 걸리다니.'

레디나가 시렌을 목표로 찍은 이상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칼리우스까지 속이고 있을 줄이야.

[진짜? 진짜 레디나가 있어, 하벨?]

정령들마저 눈을 반짝이며 하벨이 가리킨 곳으로 날아갔다.

눈을 깜박거리던 정령들이 바람을 일으키자 무언가 다른 모습에 그제야 정령들이 꺄르르 웃었다.

[와. 진짜다. 진짜 있었어.]

[여기에 워낙 많은 숨소리가 있어서 몰랐는데, 진짜 있을 줄이야!]

"봤지?"

하벨은 우쭐거리다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어깨를 살짝 늘어트렸다.

"이제 나와, 레디나.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한다?"

하벨이 우산을 세게 쥐고 허리를 펴자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레디나가 튀어나왔다.

시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몸을 느꼈다.

레디나가 자신에게 꺼냈던 그 말이 생각나는 탓이었다.

―도련님이 널 죽이라는 말이 떨어지면 하나, 하나씩 야금야금 잘라줄게. 나 그런 거 잘해.

정말로 자신에게 그럴까.

―고통이 온몸에 새겨져 날 보자마자 바로 네 피부 속에 그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잘해줄게. 믿어도 좋아.

시렌은 밀려오는 두려움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마법사는 그저 일반인과 다를 게 없었으니.

"아, 아니에요! 제가 할 거예요!"

레디나는 하벨 앞에서 순한 양처럼 손까지 흔들었다.

역겨웠다.

"입이 근질거려서 어떻게 참았어?"

하벨이 우산에 손을 올려 고개를 기대며 미소를 지었다.

"참은 게 아니라 도련님이 반드시 올 거라 생각해서 이곳에 있었어요."

"날 끌고 가려고?"

"네. 그럴 생각으로 있긴 했어요. 그런데 듣다 보니까 재미있어서 그냥 있다가……."

"도중에 웃음이 터졌고?"

"뭐 그런 거죠."

무안한 표정을 하던 레디나가 도중에 서순이 바뀐 기분에 당장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는 진짜 누구 말이든 안 들으시네요. 어쩜 저렇게 한결같을까요?"

"한결같으면 좋지. 게다가 나는 정말 말을 잘 들어주는데? 그게 내 아주 큰 장점이었어."

"그러면 여기에 왜 오신 거예요? 지금 엄청 힘들어 보이시는데요? 이거 못된 아이가 하는 행동이라는 거 알아요?"

"에이, 방금 재미있게 들었잖아?"

"아니 그건……."

"그리고 시렌이 흔들리는 걸 봤잖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잖아요. 솔직히 도련님만큼이나 입으로 찰지게 때리는 사람도 없단 말이에요."

레디나는 우물쭈물하다 곧 단검을 꺼냈다.

"그건 그렇고 진짜 죽여도 되나요? 헤레스 언니는요? 크라마 씨가 먼저 손을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다시 올라가면 헤레스를 불러서 내려보낼게."

"도련님은요?"

"나는 원하는 건 다 얻었어."

이제 페트리오에게 미뤄뒀던, 폭파 사건의 범인이 어디와 이어져 있는지 들어야 할 차례였다.

부탁할 게 있었고.

"원하는 걸 다 얻었다고요? 정말로요?"

레디나 자신이 봤을 때 하벨은 그저 시렌에게 일방적으로 질문만 한 게 고작이었다.

"충분해."

하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시렌의 시선이 올라갔다.

진짜 간다고?

진짜?

그런 눈빛이 점점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했다.

"아라야."

[응응. 이 몸이 지금 바로 물의 길을 만들어줄게.]

"도, 도련님."

칼리우스가 다급히 하벨을 불렀다.

"왜 그래, 용용아?"

"진짜, 시렌을 죽일 거야?"

"응. 내버려 두기엔 너무 위험한 존재잖아? 그게 아니면 혹시 할 말이 남아 있어? 남아 있으면 지금 해야 할 거야. 다시는 보지 못할 테니까."

"아니. 하고 싶은 말은 없어. 시렌한테는 미안하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어차피 거짓말에 변명만 늘어놓을 텐데."

칼리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 물론, 처음에는 그런 마음도 있었어. 날 끔찍한 세상 속으로 밀어 넣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은 나한테 한 적이 없어. 정말, 정말 …실망했어."

칼리우스의 눈꼬리가 아래로 향했다.

자신이 하벨을 만나지 못했다면 얼마나 슬펐을까.

[씨잉! 못됐어! 못됐어, 시렌!]

아라가 시렌에게 다가가 앞발로 나름 세게 쳤다.

[이건 용용이 몫이야! 이 몸은 네가 싫어! 너무너무 싫어!]

"용용아. 적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한참 전에 너한테 그렇게 말했을 거야."

시렌은 지금도 자신이 정말 이대로 떠나는 건지 아닌지를 눈짓으로 판단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냥 속 시원하게 한 대 때리는 게……."

"어엇!"

레디나가 갑자기 기겁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왜 그래?"

콰앙!

문이 거칠게 열렸고, 헤레스에 이어 휠체어를 짊어진 카샬과 페트리오가 우르르 들어왔다.

[…어, 어.]

고개를 이리저리 굴리던 아라가 꼬리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고, 하벨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살짝 움츠러들어서는 우산을 세게 쥐었다.

"도련님! 제가 진짜 미치겠습니다! 제가 대체 어떻게……."

헤레스가 도중에 말을 멈추고 자신의 이마를 쳤다.

카샬이 힘을 주자 휠체어의 손잡이가 휘어가고 있었다.

빠악.

"한눈만 팔면. 진짜 한눈만 팔면 이렇게 도망가시니…! 예? 왜 자꾸 몰래 나가십니까!"

"보고 목적으로 왔는데……."

뒤쪽에서 걸어오던 페트리오는 숨을 짧게 내쉬며 눈꼬리를 살짝 올렸다.

"도련님. 이건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도련님 편을 들려고 해도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도련님."

우르르 쏟아지는 살벌한 시설에 하벨은 정말 면목이 없었다.

"…미안해."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살짝 들렀다가 오려고 했는데 페트리오라는 변수가 생겨날 줄이야.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많이… 놀랐지?"

하벨이 눈치를 보며 사과하자 헤레스와 카샬, 그리고 페트리오는 단번에 입을 다물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밀려오는 아픔에 진땀을 흘리는 게 보이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화를 내겠는가.

"일단, 앉으십시오."

카샬이 휠체어를 밀고 가자 시렌은 그제야 일그러졌던 표정을 풀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렇지. 네가 나를 죽이지 않을 리가 없……."

빠악!

헤레스가 시렌의 얼굴을 걷어찼다.

"넌 닥치고 있어! 눈치 없어? 낄 때 안 낄 때 몰라?"

"와! 이 언니 평소에 좀 걷어차봤는데?"

레디나가 어깨를 신나게 들썩거리다 곧 밀려오는 헤레스와 카샬의 시선에 살짝 굳은 채로 입을 열었다.

"아니, 음, 저는 말렸어요."

"맞아."

"말렸는데… 도련님이 저 새끼한테 꺼내는 말이 재미있어서 도중에 말리는 걸 까먹었어요."

"그럼."

하벨이 응답하자 레디나는 마지막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이미 내뱉은 이상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도련님."

"이제 갈 거야."

카샬의 재촉에 하벨이 서둘러 대답했다.

"가… 신다고요?"

카샬은 놀라며 시렌을 바라보았다.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은 살의가 일어났다.

하지만 의문이 더 컸다. 하벨이 시렌을 두고 순순히 간다니.

이상했다. 너무 이상했다.

"내가 레디나보다 시렌을 더 잘 죽일 자신이 없어서 레디나한테 맡기려고."

하벨이 꺼낸 말에 시렌은 다시금 흔들렸다.

진짜 진심일까.

"아무래도 나를… 흔들려는 셈인데 내가 이런다고 넘어갈……."

"헤레스."

시렌이 꺼낸 말을 하벨은 자연스레 무시하며 휠체어로 자리를 옮겼다.

"그간 나 때문에 참게 해서 미안하고 고마워."

하벨은 지금까지 자신을 기다려준 헤레스에게 진작 꺼냈어야 할 말을 내뱉었다.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시렌한테 필요한 건 다 얻었으니까. 지금까지 많이. 아주 많이 참았잖아?"

헤레스와 시렌은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둘이 저지른 죄를 옹호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헤레스는 잘못을 깨달았고, 이곳을 벗어나 속죄하며 살았다는 점이 달랐다.

"도련님의 마음은 알지만, 저는… 시렌을 죽일 수 없어요. 똑같은 죄를 지었는걸요."

헤레스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시렌과 자신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잘못을 알았기에, 그 한 끗 차이가 바닥에 빌빌거리고 있는 시렌의 꼴을 피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 마법을 옮기면 그때, 에멜의 목숨을 거둘 셈입니다. 에멜만큼은 내가 죽일 수 있어요."

자신의 모든 걸 시작하게 했던 장본인.

헤레스는 그제야 엷은 미소를 내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늦었지만, 이제야 인사하고 싶어요. 고맙습니다, 도련님. 제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고마운 건 나야, 헤레스. 매번 내 목숨을 붙잡아주네."

하벨의 발언에 헤레스는 당장 싱긋 웃었다.

"이것만큼은 아셔서 다행입니다. 매번 간당간당하게 저를 찾아오시네요. 다음번에는 정말 안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이러다가 제 심장이 남아돌질 않을 테니까요."

"…노력할게."

"레디나."

헤레스는 입가가 간지러웠지만, 하벨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네, 언니."

"저것 좀 치워줘. 크라마는 나한테 기회를 넘겼는데,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서."

"그럼 제 마음대로 할게요. 칼리우스 님. 이제 저 쓰레기의 마나를 막을 수 있는 곳을 알려주세요. 이제는 방해물도 없잖아요."

마법사 협회 내에 있는 여러 마법에 등이 얼마나 따끔거렸는지 몰랐다.

아마 칼리우스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혹시 모르겠으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대충 찔러보면 되니까요."

"아니야. 지금은 어딘지 눈에 보여. 저번처럼 마나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가만히 있었거든. 그런데……."

칼리우스가 하벨을 마지막으로 쳐다보았다.

"알려줘, 용용아. 그간 고생했어. 너도 좀 쉬어야지."

"이거… 실수하는 거야."

시렌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하벨의 눈빛에 오히려 흔들리는 건 자신이 되어버렸다.

진짜였다니.

"실수하는 거라고, 하벨 티에라! 내가 마법사들을 위해 얼마나 했는지 알아? 마법사들이 널 죽이러 올 거야! 모든 마법사의 적이 되는 거라고!"

"아니. 실수는 네가 했지. 아주 많이."

하벨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여긴 이제 우리 용용이 거고."

"…무슨 소리야? 여긴 내 거야. 내 거! 내 협회고, 내 마법사의 탑이야!"

발악에 가까운 시렌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하벨은 손가락을 들어 입술 위에 올렸다.

"쉿.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거든."

"웃기지 마! 내가 죽을 것 같아? 내가 죽을 것 같냐고!"

"응, 지금."

환하게 웃던 하벨은 손을 흔들었다.

"그럼 안녕, 시렌.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갈게."

"네네. 먼저 들어가세요."

레디나는 즐겁게 웃으며 하벨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레디나. 시렌이 가진 마나의 길은 지금 여기에 있어."

칼리우스가 하벨을 따라가기 전에 자신의 발목을 탁탁 치자, 레디나는 거리낌 없이 단검을 움직였다.

탁!

시렌의 발목에 단검을 쑤시고 날을 바깥으로 빼내 버렸다.

"아아아아악!"

시렌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돌렸지만, 피가 별로 나지 않았다.

"음. 바로 이 맛이야. 이 감각이 그리웠다고."

레디나는 밀려오는 기쁨에 화사하게 웃었다.

"이제 칼리우스 님도 가셔도 돼요."

눈동자에 어린 광기에 레디나가 무서울 법하나, 칼리우스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응. 나중에 봐, 레디나."

"네. 나중에 맛있는 간식 들고 갈게요."

레디나가 단검을 숨기며 밝게 대답하자 시렌의 안색이 새하얗다 몰래 새파랗게 질려갔다.

"…자,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너희도 가자. 여기 있어봤자 뭐 해?"

하벨은 시렌의 절규를 흘리며 정령들에게 말을 꺼냈다.

[응. 혹시나 비명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이제 그만 나갈래.]

[맞아. 별로야. 기분도 이상하고. 역시 웃음소리가 좋아.]

정령들은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들 중 누군가 시렌에게 다가왔다.

[네가 우리를 그렇게 아프고, 괴롭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 우리는 네 말에 잘못을 알았고, 앞으로는 뭉칠 거야.]

[대장한테 좋은 곳이 있어!]

이때다 싶어 아라가 목소리를 꺼냈다.

정말로 정령들이 뭉치고자 한다면 역시 그곳이 제일 좋았으니까.

[이 몸이 나중에 방에 도착하면 말해줄게!]

[좋아. 들려줘, 아라야. 네 이야기라면 뭐든 좋으니까.]

[으응! 기대해도 좋아!]

아라가 행복해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카샬이 걷자 하벨의 휠체어가 움직이고, 아라와 정령들이 소곤거리고, 칼리우스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헤레스는 가벼운 발걸음을 힘껏 땅을 디디며 앞으로 나아갔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레디나가 히쭉 웃으며 시렌에게 걸어갔다.

"시렌아. 시렌아. 이젠 너하고 나밖에 안 남겠네? 저기 보이지? 도련님이 나가시고 계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

"이, 이건 아니야! 그래. 내가 정보를 줄게! 다 알려 준다고! 네가 이겼어! 네가 이겼다고, 하벨 티에라!"

"삼."

"사, 사실 나도 놈의 얼굴을 몰라! 이상하게 얼굴만큼은 기억이 나지 않아. 진짜야!"

"이."

"하지만 내가 접선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응? 도와줄 수……."

"일, 땡!"

레디나는 땡과 함께 시렌의 발을 잡아당겼다.

후.

랜턴이 꺼지는 소리에 하벨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끄아아악!"

뒤에 울려 퍼지는 시렌의 비명은 칼리우스가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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