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엣헴(3)
* * *
* * *
<…그래. 이걸로 됐단다. 네가 깨어났고, 이렇게 연락을 해주니 충분하구나.>
룬델은 하벨이 또 사과할까, 먼저 선수 쳤다.
그리웠고, 또 미안함이 가득 담긴 그 목소리에 하벨은 괜히 랜턴을 바라보았다.
랜턴을 조종하는 건 하벨 티에라였고, 그가 랜턴으로 지금도 지켜보고 있을 테지.
"아직… 해야 할 것들이 남았지만, 그렇게 걱정할 건 없어요."
하벨은 이번에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라면 더 제대로 알아본 뒤에 해도 늦지 않았으니.
<잘했단다, 하벨아.>
룬델이 활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쉽게 해낼 수 없는 걸 이뤄냈단다.>
"저 혼자 한 게 아니에요. 모두가 도와줬죠."
하벨은 이번 일을 잠깐 떠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페트리오와 뒷세계에 있는 이들로 이루어진 가면단은 물론, 아라와 정령들, 헤레스, 카샬, 레디나 등 여러 사람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번 작전에 가장 중요했던 자들이 있었다.
칼리우스가 장로를 지배했고, 크라마가 실처럼 얇디얇은 희망마저 버리지 않았기에 마법사 협회에 계속 저항해 이번 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 모두를 이끈 건 너란다, 하벨아.>
"……."
툭 치고 들어오는 룬델의 말에 하벨은 잠깐 멈칫거렸다.
[이 몸이 생각하기도 그래. 모두 대장이 좋아서 모였어.]
아라마저 배시시 웃자 하벨은 머뭇거렸다.
'아닙니다.'
하벨은 룬델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각자의 목표가 있기에 이렇게 모였을 뿐입니다.'
짊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페트리오는 에르티안 왕국에 진 빚을 갚고자.
레디나는 마법사 협회가 검은 달을 무너트리는 데 도움이 되기에.
크라마와 헤레스, 그리고 칼리우스는 마법사 협회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고.
정령들은 그간 마법사 협회에 시달려왔으며 드디어 그 빚을 청산할 시간이 왔기에.
그렇게 각자 다른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던가.
<설령 어떤 이유가 있든 네가 그들의 구심점이었기에 저들이 모일 수 있었단다. 그래서 나는 네가 너무도 자랑스럽구나, 하벨아.>
마치 저들을 짊어진 것처럼 느껴졌기에 하벨은 룬델의 칭찬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사 협회 내부를 뒤진 후에 정화제 사건과 정령사 사건의 증거가 더 확실해진다면 뒷배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하여 하벨은 말을 돌렸고.
<…미안하구나.>
룬델은 이를 바로 알아차렸다.
<네 기분을 생각하지 못하고 나 혼자 들떠버렸단다.>
"아… 니에요. 해결해야 할 것들이 아직 더 남아 있어서 그럽니다."
<하벨아.>
"……예."
하벨은 한참이나 늦게 대답했다.
과거의 기억을 보면서, 하벨 티에라를 만나면서 느꼈던 감정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네게 또 부담을 안겨주는 말 같지만, 들어주겠더냐?>
"듣고 있습니다."
<답답함이 밀려오거나, 무슨 말이든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연락하렴. 네 말이라면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 말에 하벨은 순간 울컥했다.
―너는 바다와 물의 지배자인 용왕이자 그것들의 심장이다. 네 존재는 세계를 위한 것이며 세계를 위한 열쇠가 되어라.
자신을 만든 그자가 유일하게 꺼낸 말조차 지키지 못했다.
소중한 열쇠를 놈에게 빼앗겼고, 바다, 그 가여운 아이들도 지키지도 못했다.
'저는……. 저는 왜 이렇게 무능할까요?'
하벨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찰랑.
랜턴이 살짝 흔들렸다.
하벨 티에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자신을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다.
'룬델에게… 네가 무얼 해냈는지 말해도 될지 물었어야 했는데.'
하벨은 그제야 미처 물어보지 못한 사실이 아쉬움이 되어 몰려왔다.
룬델은 하벨 티에라의 아버지가 아닌가.
설령 그 진실이 너무 잔인하더라도 룬델은 진실을 알 자격이 있었다.
[참는 건… 안 좋은데. 대장도 이 몸한테 뭐든 참지 말라고 말했잖아.]
하벨을 빤히 바라보던 아라가 하벨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라 자신이 봐도 하벨이 정말 많은 걸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아라는 전부 다 알고 싶었다.
룬델의 숨소리에 미안함이 섞여 들리자 하벨은 마지못해 말문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주실래요?"
<그럼.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으마.>
룬델의 목소리가 조금은 밝아지자 하벨은 안도했다.
"그럼 마법사 협회 내부 조사가 끝난 후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 형님이랑 누님한테는 잘… 말씀드려주세요. 꼭이요."
하벨은 뒷말을 재차 강조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지만, 라르웬이 제일 걸렸다.
그가 쏟아낼 말들이 벌써 상상이 갔다.
딱밤을 몇 대나 맞아야 하는지.
룬델은 잠깐 웃었다.
<네가 걱정할 일은 없을 테니 편안히 쉬렴.>
"정말요? 누님이 막 실망한다는 말도 없었어요?"
<라르웬이 넬시아를 말린다고 정신이 없을 테지. 그리고 지금은 두 사람이 왕실에 자리를 떠나서도 안 되고.>
"왜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곧 대관식이 열릴 테니 준비해야 하지 않겠더냐.>
"…아."
하벨은 그제야 바안의 즉위식을 떠올렸다.
마법사 협회에 시선을 빼앗기는 바람에 잠깐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벨아.>
"듣고 있어요."
<저번에 선왕께서 승하하셨을 때, 그 암살자가 들고 있던 쪽지에 그려진 표식을 기억하더냐?>
"그 표식이라면……."
하벨은 잠깐 생각했다.
레디나가 왕을 죽인 암살자의 품을 뒤져서 발견한 쪽지가 있었다.
분명 그 쪽지에 폭탄 모양처럼 검은 점 위에 꼭지가 살짝 그려진 문양이 그려 있던 걸로 기억했다.
"떠올랐습니다. 폭탄 모양이 맞죠?"
<그래. 그건 코스모피안 왕국의 조직 중 하나가 가진 표식이란다.>
"코스모피안… 왕국이요?"
<그것도… 비밀 조직의 문양이었단다.>
[우오옵! 비, 비밀 조직?]
아라가 입을 벌리며 더, 더 귀를 쫑긋 세웠다.
"비밀 조직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정령한테서 들었단다. 다 네 덕이란다, 하벨아.>
"제 덕이라뇨? 저는 정령들에게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네가 정령들을 위해 했던 행동 덕에 정령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단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령왕께서 사라지셨다는 말은 이미 들었을 테지>
[응. 이 몸도 엄청, 엄청 많이 들었어.]
아라가 말을 하며 시무룩한 표정을 내보였다.
마법사 협회에서 정령사를 만들고자 실험했을 때, 자신이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정령을 하벨과 함께 다시 돌려보낸 적이 있었다.
―…이건 왕께서 가지신 힘일 텐데?
한 정령이 꺼낸 말로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정령이 자신을 너무도 낯선 눈길로 보지 않았던가.
아라는 아직도 그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아니, 너무 싫었다.
"여러 번 들어봤습니다."
하벨은 아라의 턱밑을 긁어주며 아라를 다독였다.
<그 뒤로 정령들이 흩어졌단다. 구심점을 잃어버린 거지. 일부는 이곳 티에라 가문으로, 또 일부는 정령사 왕국 헤스트리아로, 그리고 대부분은 네가 지나다니다가 봤던 것처럼 그렇게 떠돌아다니고 있는 거란다.>
[하나 더 있어, 룬델.]
아라가 곧 눈을 반짝거렸다.
<더 있다니?>
[대장이 가진 땅 말이야!]
아직 이름이 없지만, 그 땅에 반짝거리던 나무와 정말 기뻐 보였던 정령들을 떠올렸다.
<아, 그 땅 말인가? 아라 네 말이 맞단다. 하벨 네가 가진 땅에 정령들이 모이고 있다는 소식을 계속 듣는구나.>
"정령들이 모이고 있다고요? 정말로요?"
하벨은 처음 듣는 소식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차. 내가 이 소식을 너한테 전해주지 못했구나. 미안하단다. 너한테 제일 먼저 알려줬어야 했는데.>
룬델은 멋쩍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닙니다. 저도… 음, 깜빡했네요."
크라마가 자신이 가진 땅을 관리하고 있었고, 그곳을 지키는 이들은 마법사와 룬델이 주둔시킨 정령 기사들이었다.
보고를 크라마 쪽에서만 받다 보니 당연히 정령과 관련된 이야기가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에요. 고맙습니다."
하벨은 정령들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뻐 미소가 잔잔히 번져갔다.
<이제 쉬거라. 너무 오래 붙잡아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렇지 않아요. 저는 사실 가주님하고 이야기하는 게 되게 즐거워요. 물론, 마음에 찔리는 구석도 있지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하벨은 이번만큼은 편안하게 말을 꺼냈다.
<그, 그게 정말이더냐?>
룬델이 말을 더듬으며 묻자 하벨은 실실 웃었다.
"물론이죠. 아, 이 사실을 혹시 바안 전하께 말씀드렸나요?"
<아직 전해드리지 못했구나.>
"제가 전할게요. 아무래도 코스모피안 왕국 이야기는 전하께 있어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잖습니까?"
<그럼 하벨 너는… 괜찮더냐?>
룬델의 물음에 하벨은 잠깐 눈만 깜박거렸다.
"저는 왜……?"
<괜찮다면 더는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룬델이 급하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혹시 뭔가를 예상한 걸까.
<이제 진짜 쉬렴.>
자신을 다독이는 것처럼 들리는 룬델의 말에 하벨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상황을 보고요."
<상황을…….>
"끊겠습니다!"
하벨은 다급히 연락용 아이템을 끊었다.
[대장. 왜 이렇게 급하게 끊어?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아니면 막 아픈 거야? 이 몸이 지금 바로 카샬을 불러올까?]
"아라야."
하벨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어리자 아라는 털을 바짝 올렸다.
[이, 이 몸은 방금 나쁜 생각이 들었어.]
"어떤 나쁜 생각일까, 아라야?"
[봐봐, 대장. 대장한테 달린 게 아직 세 개나 있어!]
아라는 하벨이 달고 있는 링거 쪽으로 날아갔다.
"용용이 상태가 나빴지?"
하벨의 물음에 아라가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시렌하고도 만나야 해."
하벨은 마법사의 탑에서 떨어질 때도, 떨어진 후에도 랜턴의 불이 꺼진 신호를 듣지 못했다.
즉,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끝을 내야지.
[하지만 헤레스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카샬도 엄청 화냈고. 아까… 대장이 보지 못했지만.]
아라는 귀를 축 늘어트렸다.
밝게 웃던 레디나가 페트리오와 크라마와 같이 남은 마법사들을 잡으러 가려고 뒤로 돌자마자 금방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을 떠올렸다.
[…레디나가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어.]
하벨의 눈이 순간 커지다 못해 입을 열었다.
"레, 레디나가?"
[응응. 이 몸이 봤어. 레디나는 우는 거 모르는 줄 알았는데.]
시무룩한 아라의 표정에 하벨은 잠깐 망설였다.
"…미안해, 아라야."
[꼭. 꼭 가야 해, 대장?]
"응. 꼭 가야 해.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를 놓칠지도 몰라서 그래."
[이 몸은 지금 좀 어려워. 헤레스는 대장이 움직이면 안 되는데 대장은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구.]
아라가 하벨의 이마에 앞발을 올리다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 몸은 지금 너무너무 어려워.]
"아라야."
[이 몸은 대장이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 몸도 용용이가 걱정되는데, 진짜 그런데, 지금은 대장이 더 걱정된단 말이야.]
"시렌하고 매듭지어야 할 게 있어. 내가."
하벨은 잠깐 입을 열다 자신이 꿈을 통해 확인한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용왕일 때, 패배한 적이 있어."
[대장이, 졌다고?]
아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벨을 바라보았다.
[대장이?]
"그래, 아라야. 나도 패배한 적이 많았어. 이번에는 그중 하나를 해결하려고 가는 거야."
[하지만 대장은 이곳에 살았던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아라가 조심스레 물어보자 하벨은 바로 답을 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계속 아니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만약에 이곳이 자신이 살던 세계라면.
"그것도 해결하려고 가는 거고."
[대장한테… 아주아주 중요한 문제가 맞지?]
"그래, 아라야."
[…엣헴.]
아라는 으쓱거렸다.
[이 몸은 지금 판단했어.]
"어떻게?"
그 모습이 귀여워 하벨은 가볍게 웃었다.
[대장을 도와주려구. 이 몸은 원래라면 무조건 반대하려고 했어. 지금 대장의 몸은 정말정말 안 좋으니까.]
아라는 헤레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앞발로 하벨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지금 대장 가슴팍이 푸르게 물들었대. 바다에 가까이 있어서 폐에도 문제가 조금 생겼다구 그랬어. 그래서 숨을 쉬면 당분간은 힘들 거래.]
아라의 고개가 점점 아래를 향했다.
[헤레스가 또, 대장 몸이 나빠졌다는 걸 말했는데 이 몸은 도중에 엉엉 울어서 제대로 못 들었어.]
"울었어?"
하벨은 바로 웃음을 멈추고 아라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쓰다듬었다.
[참았는데, 그때 대장을 멈추지 못한 게 생각이 나서 계속 눈물이 나왔어. 하지만 그 뒤에는 하나도 안 울었어.]
"힘껏 참았네?"
[응.]
"아라야.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눈물은 참아봤자 가슴만 아프게 할 뿐이야."
[그럼, 대장도 참지 마.]
아라가 하벨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이 몸 눈에는 대장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게 보여.]
"그럴게, 아라야."
[약속하는 거다?]
"응. 약속해."
[그럼 이 몸은 이제 출발할 거야.]
아라가 손짓하자 하벨의 손 높이에 맞춰 식물이 자라났다.
[이거 잡고 일어나면 돼. 이 몸은 물을 만들고 있을게.]
아라는 제일 편한 물로 길을 만들었다.
하벨은 아라가 만든 식물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 말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지러움이 한순간 덮쳐왔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네.'
하지만 무엇이 됐든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하벨 티에라를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하벨은 링거를 띄우고 아라가 만든 물의 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