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만나다(3)
* * *
하. 하아.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누구의 숨소리인가 생각하다 곧 자신의 숨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푸욱!
"…도련님!"
검이 몸에 꽂히는 소리와 함께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놀란 듯이 눈을 떴다.
"도련님, 괜찮아? 마, 많이 아파?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
칼리우스가 울먹였다.
그의 등에 날개가 파닥이는 것처럼 보였기에 하벨은 눈을 힘없이 깜박거리며 시선을 움직여 마법사의 탑을 향했다.
'…결계가 풀린 건가? 아니면 용용이가 억지로 풀고 온 걸까.'
생각하려 했지만, 하벨은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다시 의식을 붙잡는 게 전부였으니까.
[용용아. 용용아아.]
아라가 아랫입술을 바짝 올리며 칼리우스를 불렀다.
칼리우스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라는 칼리우스를 왈칵 끌어안고 싶었고, 등에 달린 날개가 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해야 할 일부터 생각했다.
[대장이 지금 위험해! 빨리, 빨리 바다에서 벗어나야 해!]
다급한 아라의 말에 칼리우스는 하벨을 마법으로 띄웠다.
"걱정하지 마, 아라야. 저번에 봤지? 나, 엄청 빨라."
칼리우스는 달리며 위를 가리켰다.
"저기서 뛰어내렸어."
[저, 저기서? 저기 위에서?]
"응."
'……!'
하벨의 귓가에도 꽂히는 말에 그는 속으로 경악했다.
그 높이가 얼마나 아득했던가.
아무리 칼리우스라고 해도 죽을 수 있는 높이였다.
"그… 러면 안 돼."
하벨이 더듬거리며 꺼내는 말에 칼리우스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걱정하지 마, 도련님. 나 쉽게 안 죽어. 다리가 좀 많이 찌릿했는데, 나 잠깐 날았어."
칼리우스는 곧 울먹거렸다.
"조금이지만, 날 수 있다는 걸 잊어버렸어."
마법으로 하벨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바로 날아 하벨을 붙잡았으면 이러지 않아도 됐는데.
칼리우스는 잠깐 입술을 꾹 다물고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나는 왜 이렇게 매번 멍청할까."
점점 칼리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다 눈동자에 가득 찬 눈물이 기어코 흘러내렸다.
"미안해, 도련님. 무서웠어. 그 높이가 너무 아찔해서, 너무 무서웠어."
마법사의 탑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현기증이 몰려올 것만 같았다.
하벨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과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당장 아래로 뛰어내리겠다는 레디나와 카샬을 헤레스가 말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신은 그 높이에서 굳어져 버렸다.
탁.
머리 위에 누군가의 손이 느껴지자 칼리우스는 우뚝 섰다.
하벨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용감, 했어."
"내가?"
"잘… 했어."
"내가……?"
칼리우스는 환히 웃는 하벨의 모습에 눈물방울이 더욱 굵어졌다.
"결국, 뛰어… 내렸잖아?"
"…어헝."
칼리우스가 울음을 터트렸다.
하벨 말대로 늦었지만, 자신은 뛰어내렸다.
아라가 바람을 불러 하벨이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모습에 용기가 나서, 하벨에게 느껴지는 힘에서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몰려와서.
마음 한구석에 용기가 생겼다.
"고마… 워."
하벨은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눈을 감아버렸다.
칼리우스는 하벨을 바라보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일도 하지 않았음에도 하벨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마음을 토닥거렸다.
하벨은 왜 이렇게 상냥할까.
칼리우스의 발이 다시 빨라졌다.
* * *
푸욱!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이 자신의 몸을 관통했다.
'또 이 기억인가.'
하벨은 불쾌함을 토로했다.
소리만으로도 자신이 죽기 전 기억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하니까.'
아직 알아야 하는 기억임이 분명했기에 하벨은 불만을 잠재우고 집중했다.
―요, 용왕님!
―어떡해요. 어떡해요!
―이래서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불길한 자가 있어요. 저기에, 있다고요!
―망할 자식, 개자식, 저 새끼 죽여버릴 거야!
바다가 술렁거렸다.
'불길한 자?'
하벨은 바다가 꺼내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
자신은 숨소리와 함께 말을 꺼냈다.
지금 자신은 바다가 꺼내는 말도, 당장 느껴지는 아픔보다도 저들의 공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 설마하니 대신들이 나를 찌를 줄은 누가 알았겠어.'
다른 자들도 아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누구보다 알고 있던 놈들이었기에 찌른 자도, 맞은 자신도 그렇게 서로를 한참 바라보았다.
"맹… 세를, 잊었는가."
자신은 그렇게 말했다.
'맹세?'
낯선 말이 천천히 익숙해졌다.
―…저희 모두 용왕님께 목숨을 바치나이다. 이 피가 흐른 한, 절대로 용왕님을 해할 수 없으며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용왕님에게 목숨을 바치겠다고 영혼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래. 맹세가 있는데 어떻게 나를 공격한 거지?'
하벨은 그제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이 멍청했던 게 아니라, 일어나면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하아아."
대신의 다급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덜덜 떨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러려고…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내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대신은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경악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라. 이미 모든 건 시작됐으니."
누군가 걸어오며 목소리를 내자 하벨은 귀에 익은 소리에 깜짝 놀랐다.
곧 움직이는 자신의 시선에 맞춰 하벨은 일어나는 분노를 느꼈다.
어떻게 저놈을 잊을 수 있을까.
―용왕님. 백성들을 지키고 싶으시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그냥 왕좌에 앉아 계십시오. 그것만이 백성들을 지킬 유일한 방법입니다.
비웃음이 섞인 그 말을 기억했다.
자신의 모든 걸 빼앗은, 개새끼였으니.
"이건… 네가 꾸민 건가?"
자신은 가슴팍에 꽂힌 검을 뽑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치이이익.
검이 제 손에서 녹아내리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벨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검이 아니었단 말인가?'
자신의 몸에 침식한 그 힘과 매우 유사했다.
"…유렌."
까드득.
자신이 이를 갈며 유렌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용왕님."
유렌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대답했다.
"내게 왜 이러는 것인가."
자신은 유렌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 전부 다, 네가 원하는 대로 주지 않았던가. 권력도, 자유도. 전부 다 네놈에게 내어주었다."
"하지만 거슬립니다."
유렌이 목소리를 내자 파도가 휘몰아쳤다.
―죽여버려요!
―아니, 죽일 거예요!
"당신의 모든 게 거슬립니다."
유렌은 벌써 바다가 반응하는 저 모습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리 지우고, 지워도 모두가 당신을 기억합니다."
'…나를, 백성들이 기억했다고?'
하벨은 처음 듣는 저 말에 가슴이 천천히 일렁거렸다.
알현실에 가만히, 그저 가만히 앉아 해가 뜨는지, 달이 뜨는지도 모르는 채로 존재했다.
자신이 죽는다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물이 사라질 테니까.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당신이라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거슬립니다. 정말 거슬립니다!"
유렌은 점점 언성을 높이며 물살이 자신을 덮치기 전에 무언가를 바닥에 꽂아버렸다.
―저게 뭐야? 저게 대체…….
치지지지직.
갑자기 이상한 소리와 함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일그러지고 쪼개졌다.
'이거 왜 이래?'
하벨은 이전에 자신의 의식에 침범한 정체 모를 놈을 떠올려보았다.
'또 그 정체 모를 놈인가?'
하지만 하벨 티에라도, 그 정체 모를 놈도 나타나지 않았다.
* * *
"으, 으아아아!"
그저 장면이 바뀌고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대신 중 다른 누군가가 불길하기 짝이 없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족쇄에 얽힌 것처럼, 누군가 자신을 있는 힘껏 짓누른 것처럼 몸이 너무도 무거워 저 단순하고도 따분한 공격에 자신은 당할 수밖에 없었다.
푸욱!
찔리는 고통이 가슴팍에 또다시 스며들었다.
"커헉……."
자신은 피를 쏟았다.
'이미 이렇게나 많은데.'
어느새 가슴팍에 꽂힌 무기는 손가락 개수를 넘어섰다.
바다가 꺼내는 말이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고, 자신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대, 대의를 위해서였습니다, 용왕님."
마치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놈은 그렇게 지껄이더니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털썩.
밀려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는지 놈은 그대로 주저앉아 소리쳤다.
"용왕님!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미친 모양입니다! 아악!"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아."
하지만 자신은 저놈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른 채 겨우 의식을 잡고 숨을 토해냈다.
'내가 힘을 쓰지 못한 게 몸에 꽂힌 수많은 무기와 아까 유렌이 꽂았던 지팡이 때문인가?'
그 지팡이 주변에 어떤 힘이 검게 너울 치고 있었다.
바다가 온 힘을 다해 그 힘에 부딪히고, 또 부딪혀왔다.
조금씩 부서지고, 깨져가던 그때, 얼굴이 검게 물든 자가 걸어왔다.
그저 걸어옴에도 그에게 가득한 불길함이 모든 바다를 삼킬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용왕이여?"
놈이 웃었다.
"가엾어라. 네가 대체 무얼 했기에 이렇게 가슴팍에 꽂힌 검들이 많은지."
놈은 자신을 비아냥거리다 말고 하늘을 바라보는 듯했다.
"대체 무얼 했기에 이리도 강한 권능을 가졌음에도 신에게 버림받은 건지."
놈은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가 내 사람이었다면 달랐을 텐데."
놈이 속삭였다.
"네가… 열쇠를 가지지 않았다면 달랐을 텐데."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놈이 자신을 가엾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
자신은 숨을 토했다.
용왕으로서 가진 권능이 필사적으로 생명을 움켜쥐고 자신의 의식을 붙잡아주고 있었다.
아니. 이런 와중에도 조금씩 생명을 회복하고 있었다.
"너였구나."
자신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내던진 말에 하벨은 깜짝 놀랐다.
'알고… 있었다고? 내가 저놈을? 대체 언제?'
"역시 용왕인가. 나를 기억했다니? 이거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놈 역시 자신이 꺼낸 말을 오히려 반기며 키득거렸다.
"내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말했지?"
"분명히… 죽여버렸을 텐데."
자신은 이를 갈았다.
'내가? 내가 저놈을 죽였다고?'
하벨은 계속 이어진 낯선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만약 기억이 났다면 놈의 얼굴이 저런 식으로 가려지지 않았을 테니.
"그랬다면 너한테 행복한 결말이었겠지? 아쉽게도 아니야. 나는 그때 살아남았거든."
놈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이렇게 네 앞에 섰잖아. 봐, 약속은 지켰어."
놈이 낄낄 웃다 곧 배를 잡으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놈이구나."
자신은 대신들과 유렌을 가엽게 바라보았다.
"저 어리석고, 가여운 이들의 마음을 흔든 존재가."
"닥치십시오!"
유렌이 바로 언성을 높였다.
"이젠 제발 죽으란 말입니다. 몸에 지금 몇 개가 박혔는데 왜 아직도 안 죽냔 말입니다!"
"어리석은… 유렌아. 저자가 네가 원하는 걸 이루어주겠다고 말하던가. 그렇게 똑똑하던 네가 그 꾐에 넘어간 것이냐."
"아뇨. 어리석은 건 당신입니다. 과거에 얽매인 망령이 아니었다면 저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가여운 유렌아……. 네가 바라던 건 이룰 수가 없다."
"닥치세요."
"콜록, 저자가 바로 수족을 뒤에서, 조종했던 놈이다."
"그, 그게 무슨… 무슨 개소리입니까?"
유렌은 그 말에 정말 몰랐던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하벨은 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릅니다. 하지만 수족 뒤에 누가 있어요. 그 누군가가 용왕님을 원합니다. 용왕님이 가지신…….
류아가 폭파 사건에 휘말리기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수족 뒤에 누군가 있고, 그놈이 '열쇠'를 노린다는 사실을.
"맞아."
놈이 긍정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유렌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무리 그가 자신을 싫어했더라도 수족이 어떤 놈들인지는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수족이 이 세계에 어떤 짓을 했는데 누가 모르겠는가.
"맞다고. 내가 수족을 뒤에서 움직였어."
놈은 키득거렸다.
"…당신이 수족을. 제가, 제가 속은 거라고요?"
놈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유렌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털었다.
"그래. 하지만 너하고 약속한 건 지킬 거야."
"그건……."
"그러니 걱정하지 마. 보상은 확실히.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하거든."
유렌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일그러졌고, 놈은 그런 유렌을 위해 말을 하나 꺼내주었다.
"하지만 기억해. 네 손으로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걸 부숴버렸으니까."
"그, 그, 그……."
"그래, 용왕이야. 이 세계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존재 말이야. 유렌아, 병신같은 유렌아. 용왕이 멍청해서 저런 꼴이 되어서까지 버티는 줄 알아? 다 너희를 위해서잖아. 죽으면 곤란해지니까, 너희를 너무도 사랑했으니까."
놈은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금방이라도 죽어갈 것처럼 행동하는 유렌을 쳐다보다 피식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내가 네놈을… 확실하게 죽였어야 했다."
자신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랬으면 좋았겠지."
놈이 대답했다.
"아쉽게 됐어."
진심으로 꺼내는 말 같아 기분이 너무도 더러웠다.
"그때 날 죽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게도 삶이… 중요했는가?"
"그럼."
"무얼 손에 넣으려는 건지, 콜록, 몰라도 너는 틀렸다."
"그리고 너도 틀렸네? 네 꼴을 봐봐. 이게 정상인지. 먹이를 잠깐만 흔들었을 뿐인데도 좋다고 달려들던데? 안타깝네. 네가 이 세계를 위해 한 희생을 손톱만큼이나 이해했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놈은 자신을 비웃었다.
"나는… 가엾다. 너도, 그리고 저들도 모두… 가엾다."
자신은 진심으로 그 말을 꺼냈다.
삶을 포기한 자신이 보았을 때, 유렌을 포함한 대신들도 놈도 똑같이 한심하게 보였던 탓이었다.
'아니. 여기서 가장 가여운 건 너다, 용왕.'
하벨은 자신을 딱하게 바라보았다.
다시 시작할 기회마저 손에서 놓아버리고 모든 걸 포기한, 아주 멍청한 자가 아닌가.
"…감히."
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감히 날 동정했는가?"
놈이 자신의 목을 쥐었다.
"나는 네놈이 감히 동정할 그런 자가 아니다."
놈의 손에 힘이 더욱 강해지자 주변에 너울거리던 검은 힘을 향해 바다가 더욱 거세게 달려들었다.
쩌억.
그 힘이 점점 으깨지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여. 나 역시 어리석지만, 적어도 남을 밟고 올라간… 그 자리에 영광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여… 가엾다."
자신이 토해낸 말에 놈은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 나는 달라."
놈은 그대로 손을 들었다.
유난히 손톱 끝이 날카로워 보였다.
"기억하거라."
자신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어차피 죽거늘 대체 무얼 기억하란 말인지.
"신은 널 버렸다."
"…아니. 이곳에 신은 없다. 원래부터 없었어."
자신은 입꼬리를 올렸다.
푸욱!
검이 가득한 자신의 복부를 향해 놈은 손을 찔러왔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배를 헤집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어, 어억!"
복부가 타는 고통.
자신은 그 격렬한 통증에 잃어버리면 안 될 것을 손에 놓아버린 기분을 느꼈다.
"하여 나는 정당하다. 승리자로서 패배자인 네놈에게 낙인을 새겨주마."
뱃속에 들어온 놈의 손에서 뻗어 나온 불길함이 온몸에 퍼져갔다.
'이때다.'
하벨은 비로소 알았다.
'바로 지금이었어.'
자신을 침식한 그 문자를 놈이 남긴 건 물론, 이때 새겨놓았다니.
"그뿐만 아니라 패배자인 네놈이 가진 그 열쇠."
팔딱팔딱.
심장이 거칠 게 뛰었고.
"그건 이제 내 것이 될 테니까."
푸우욱.
놈이 무언가를 꺼냈다.
손에 움켜쥐었음에도 손가락 사이에 빛이 났다.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모아와도 그것보다 더 반짝거리며 아름답게 빛이 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저게 무엇인지 몰라도 세계의 생명과도 같은 존재라는 게 느껴졌다.
"푸하하하! 이게 들어오다니! 이게 내 손에 들어왔다고!"
'이럴 수가…….'
하벨은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투투둑.
"…안 돼에. 저건, 저거만큼은……."
자신은 피를 줄줄이 토하며 손을 뻗었고, 강제로 물과 바다와 이어졌던 모든 것들이 끊어지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돼."
놈이 웃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여기서 벗어나. 곧, 주인을 잃은 바다의 폭주가 시작될 테니까."
놈은 등을 돌리다가 말고 손을 흔들었다.
"세계의 수호자이자 균형의 수호자여. 만나서 영광이었다. 나머지는 요긴하게 잘 쓸게. 여러모로."
놈의 목소리가 한순간 끊어졌다.
아니, 의식이 끊어져 버렸다.
"…용왕님."
그리고 폭풍우가 치는 파도처럼 요란하게 변한 바닷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아.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