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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20화 (220/415)

220화. 만나다

* * *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벨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미 정령왕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져 흩어진 너희가 부정한 것들로 더욱 떨어졌겠지. 사람들을 피해 더 깊게 숨어버리거나, 그냥 떠돌아다니거나."

점점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해졌고, 시렌은 눈꼬리마저 올리며 하벨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부정한 것들에 갇혀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몸을 바쳐줬잖아. 안 그래? 이런 경험이 없는 거 아니잖아?"

시렌은 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령들을 자꾸 자극했다.

그래야 열 받은 정령들이 점점 이 방으로 모여 한 방에 터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내가 없앴어. 너무 위험해 보였어."

칼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은 얼마 전에 폭발로 엄청 다쳤어. 또 다치게 둘 수 없어."

"…이런 미친!"

시렌은 당황함에 소리쳤고, 이를 레디나가 비웃었다.

"아, 진짜 너무 재밌네. 너 순회공연이라도 갈래? 엄청 좋아할걸?"

덩달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던 칼리우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도, 도련님. 마법이 갑자기 엄청 쌓이……."

칼리우스의 눈이 바빠졌다.

방에 새겨진 마법의 1/3이 한 번에 움직이고 있어 뒷말을 이을 수도 없었다.

"침착해, 용용아."

하벨은 칼리우스를 말렸다.

그가 알려주지 않아도 시렌이 무리하게 마법을 당겨오고 있는 게 자신의 눈에 보였다.

놈은 지금 초조해하고 있었다.

"저 모습에 현혹될 필요 없어. 어차피 매개체가 부서지면 모든 마법이 다 사라질 테니까."

화르르륵!

하벨이 사실을 꼬집자 시렌은 뒤늦게 여유를 찾은 척 다른 마법을 발동시켰다.

"내 말은 사실인데? 너희는 날 원망하겠지. 하지만 멍청한 너희의 행동을 탓해야 하지 않을까? 나야 너희 덕분에 많은 데이터가 쌓여 엄청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사방에서 화염이 치솟았지만, 정령들은 이를 꺼트리며 이를 악물었다.

[입 닥쳐! 그 입 닥치라고!]

[너희가 우리를 죽였잖아! 그래놓고 고맙다고?]

공기가 술렁거리자 시렌은 활짝 웃으며 모래를 사정없이 쏘아냈다.

퍽퍽!

쏘아낸 모래는 정령들의 힘에 막혔지만, 시렌은 멈추질 않았다.

"날 원망하지 마. 사실 이건 다 그분의 뜻이었어."

'…그분?'

하벨은 어쩐지 그 말이 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우리의 바람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였지."

소곤소곤.

물이 자신에게 무어라 웅얼거렸다.

아직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물의 행동과 함께 밀려오는 불길함에 하벨은 조금 서둘렀다.

'자, 가자.'

저 밖에서 만들어 펼쳐 놓은 물을 한 번에 안으로 당기다시피 끌어왔다.

밖에서 본다면 마치 발길질하는 모습과 같을지도 몰랐다.

쿠웅!

쨍그랑!

유리창이 깨지고 바람을 일어나고 건물이 흔들렸다.

[오, 오오옵.]

"…도련님?"

카샬은 이 흔들림에 벌써 기겁했다.

장난스레 마법사의 탑이 부러졌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이나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놀라기보다는 신나게 때려 부술 시간이야. 이런 기회는 또 없다니까?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벌써 하벨의 얼굴에 즐거움이 한껏 담겨 헤레스는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뭐가 되었든 부수라는 말은 확실히 와닿았다.

"…알겠습니다."

헤레스는 깔끔하게 대답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마나와 하나씩 연결했던 모래 속 매개체를 모조리 당겨왔다.

이 기회에 시렌이 가장 익숙한 공격수단부터 뺏어버려야 했다.

"전부 베어주세요!"

헤레스는 매개체들을 묶어 카샬을 보았다.

그는 하벨을 잠깐 쳐다본 뒤 방향을 틀어 헤레스에게 달려갔다.

일단은 안심이었다.

"감히……."

시렌은 헤레스와 카샬을 쳐다봤지만, 카샬이 매개체를 베어버리는 걸 보면서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쿠쿠쿠쿠!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방 전체가 울리는 이 불길함에 시렌은 매개체를 일단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잠깐만."

시렌은 다급히 말을 꺼냈다.

하지만 하벨은 계속 밀려드는 정령수를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무언가 가득 차는 느낌이 좋네.'

하벨은 손에 땅의 힘을 가득 담아 천천히 무기로 만들어나갔다.

손아귀에서 퍼지는 땅의 힘은 곧 망치가 되었다.

"당장 멈춰!"

시렌이 소리치다 다급히 숨을 참았다.

모래를 움직이려 했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발동하는 마법의 절반은 지워졌고, 절반은 정령들 손에 막혔다.

'괘, 괜찮아. 매개체라면 또 있어. 침착해.'

시렌이 손을 움직이자, 갑자기 날카로운 느낌과 함께 손목이 엇나갔다.

'……?'

피가 튀고, 손목이 스르르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어때, 예쁘게 잘 잘랐지?"

레디나의 눈이 휘었다.

"나는 만족스러운데. 너는 어때?"

레디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시렌 앞에 내보이다 연기에 휘감겼다.

"으아아아악!"

쿠쿠쿠.

시렌의 비명은 다른 소리에 잡아먹혔고, 다시 방이 흔들렸다.

하벨은 정령들의 든든한 지원에 조금 전처럼 물을 이동시키며 망치를 들었다.

콰앙!

헤레스가 시렌의 옷자락을 바닥으로 잡아 당겨버리자 시렌의 머리가 갑작스러운 힘에 바닥에 처박았다.

"기억해. 이게 도련님을 쳐다봐야 할 네 눈높이야."

"머, 멈춰, 하벨 티에라! 이렇게 해봤자 좋을 거 없어! 이건 모두를 망치는 길이라고!"

시렌은 그 상태에서 손을 뻗었고,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싫은데."

"나는… 경고했어! 분명히 경고했다고!"

하벨은 망치를 머리 뒤로 넘겼고, 레디나는 허공에서 바닥을 향해 떨어지며 자신의 단검을 마법 방패에 꽂았다.

콰직.

바람을 실은 단검에 마법 방패가 부서지고, 똑바로 꽂혀버렸다.

휘이이잉.

"균열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맞죠?"

레디나가 눈꼬리를 올리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잘했어, 레디나."

레디나가 활짝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이 몸도 도와줄게!]

아라가 망치에 손을 대자 망치의 크기가 더 커졌다.

"경고는 너보다 정령들이 먼저 했어, 시렌아!"

하벨은 든든함을 느끼며 망치를 휘둘렀다.

콰아앙!

땅의 힘을 담은 망치가 비명을 토하듯 바닥을 온몸으로 때려버렸다.

공기를 치는 소리만큼이나 바람이 일어났고, 하벨은 여전히 가득한 정령수로 그 바람마저 고스란히 잡았다.

"그런데 경고? 웃기고 있네."

하벨은 망치를 지우며 비웃음을 토했다.

쩌억.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이 흔들리고 있어."

칼리우스가 그제야 안도하며 가슴 앞에서 손을 뻗었다.

시렌이 사용한 중력보다 더 강한 중력이 바닥을 짓눌렀다.

쿠웅!

매개체가 불안해진 만큼 마법 방패의 위력 역시 약해져 균열이 더욱 깊어졌다.

하벨이 칼리우스를 불렀다.

"용용아."

"응!"

"띄워줘."

하벨의 손에는 어느새 그의 키만 한 대검이 들려 있었다.

식물로 만들어진 검처럼 보였다.

"카샬하고 나를."

하벨은 헤레스가 시렌을 짓누르는 걸 보며 부탁했다.

"물론이지, 도련님."

칼리우스가 활짝 웃으며 카샬과 하벨의 몸에 중력을 역으로 이용해 천장에 붙게 했다.

"아코."

하벨이 아코를 부르자 아코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너나 신경 써. 나는 유능하니까.]

"든든하네."

하벨은 자신이 쥔 검이 무거울까 정령들이 들어주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웃으면 안 돼, 대장. 지금 얼굴이 빨개!]

그 속에 아라도 있기에 하벨은 더욱 웃음을 흘렸다.

"거꾸로 서 있어서 그래."

하벨은 불만이 가득한 카샬의 표정에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불순물이 얼마나 찼습니까?"

카샬이 입을 열자 아라가 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엄청 많이!]

카샬은 그 대답에 천장에 발을 떼기 전까지 하벨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뭐 해?"

하벨이 재촉하자 카샬은 욕지거리를 삼키며 대검을 꽉 쥐고 정령수로 검을 강화했다.

카샬이 쥔 검도, 그의 주변에 떠도는 검도 어둡게 변했다.

"갑니다."

카샬은 천장을 걷어찼다.

탁.

타이밍에 맞춰 칼리우스가 다시금 중력을 정상으로 가동하며 쪼개지고 갈라진 그 틈으로 카샬은 검을 집어넣었다.

콱!

마법 방패에 검날이 박히고, 다리가 땅에 닿고 나서야 천장에 있던 검이 추가로 날아왔다.

슈슈슉!

줄이어 박힌 검은 작은 망치처럼 땅에 때리 박았다.

쾅쾅!

소리가 달랐다.

카샬은 시렌의 절규를 들으며 검을 박은 그대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화르륵!

하벨은 식물로 만든 대검에 불을 붙이며 한층 더 강화했다.

[이 몸이 바람을 일으켜줄 테니까, 대장은 앞만 봐.]

아라가 하벨에게 다가가 그를 꼭 안았다.

[부숴버려, 하벨!]

[네가 마법사 탑을 부수고 싶다면 나는 언제든, 얼마나 됐든 정령수를 줄 수 있어!]

찌르르.

정령들의 격한 감정과 함께 교감이 느껴졌다.

하벨은 솔깃한 그 심정으로 아라가 일으켜주는 바람을 느꼈다.

부드럽고, 또 조심스러웠다.

화르르륵!

검에 둘린 화염이 커졌고, 속이 따끔따끔했다.

아라가 꺼낸 말대로 밀려드는 정령수 틈으로 불순물이 빠르게 커져 벌써 다섯 번째 막 아래로 범람하고 있었으니.

하벨은 칼리우스를 보며 천장에 발을 굴렀다.

중력이 뒤바뀌자 속이 조금 울렁거려왔다.

땅에 닿기 전에 천장을 향했던 대검을 아래로 내리며 그대로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카샬이 박은 검이 못이 되어 깊게 들어가 균열이 방 전체까지 퍼졌다.

"그만두라고!"

시렌이 소리쳤고, 하벨은 외쳤다.

"한 번 더!"

칼리우스가 깜짝 놀라며 하벨을 다시 띄웠다.

하벨은 다시 천장을 발판 삼아 다시금 아래로 떨어지며 대검을 아래로 박아버렸다.

쿠우우우웅!

흉포한 소리가 이어지며 불이 퍼져나갔다.

"일어나라."

불꽃은 마법 방패를 녹여버리며 대검이었던 것이 천장을 향해 치솟는 나무가 되어버렸다.

파파파파파!

정령들은 자라나는 나무에 둥글게 모여 천천히 회전했다.

[자라나라!]

[쑥쑥 자라나!]

정령들의 힘에 천장을 향해 길게 가지를 뻗던 나무의 뿌리가 더욱 굵어지고 가지 역시 두 배 이상 두꺼워졌다.

콰콰콰콰!

천장이 흔들리자, 바닥이 요동쳤고 위로 아래로 마법 방패를 힘으로 짓눌렀다.

쩌억.

시렌은 쪼개지는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쩌어어억.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시렌은 경악했다.

"아, 안 돼."

상체를 일으키려 힘을 쓰지만, 헤레스는 시렌을 더욱 눌러버렸다.

코가 뭉개지고, 팔로 그 힘에 저항해보지만, 소용없었다.

시렌은 주변에 널린 것들을 매개체 삼아 마법을 일으키자 칼리우스가 마법을 멈춰버렸다.

이제 오로지 시렌에게 집중할 수 있기에 이 정도는 가뿐했다.

"…커헉!"

시렌이 피를 쏟았고, 하벨은 히쭉 웃었다.

"왜 안 돼?"

하벨은 시렌이 내보이는 간절함을 역겹게 바라보며 밖에 있던 물로 움직였다.

"그 말도 정령들하고 네놈들이 실험체로서 죽여버린 이들이 했던 말이겠지."

"잠깐만. 잠깐만!"

"끝났어."

하벨의 손짓을 따라 물이 방을 때려버렸다.

콰아앙!

바깥벽이 하나씩 부서져 나가며 바깥에서 밀려오는 햇살이 쏟아졌다.

유리창이 깨진 듯 마법 방패가 사라지는 소리가 뒤쪽에서 줄지어 들려왔다.

'부서져 간다.'

하벨은 벽면에 가득했던 마법들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걸 보았다.

나무가 자라나는 영역이 넓어지자 천장과 문마저 부숴버렸다.

문 너머를 바라보던 하벨의 미간이 잠깐 찌푸려졌다 펴졌다.

'그래서.'

햇살이 위에서 내리쬐며 부서진 문 사이로 방 너머에 새겨졌던 마법까지 지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필사적이었던가.'

정말로 이곳이 마법사 협회 내부에 새겨진 모든 마법의 근원지였다니.

찰랑.

뒤쪽에서 물이 튀자 하벨은 우산을 펼쳤다.

자동기능을 사용해 공중에 띄우며 안으로 휘몰아치는 물을 조종하며 하나씩 기다란 창처럼 만들었다.

하벨 뒤에 여러 개의 물이 둥둥 떠다녔고, 그는 절망으로 물들어가는 시렌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여기가 핵심이었어?"

하벨의 물음에 시렌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하벨을 노려보는 그 눈빛에 오직 증오밖에 없었다.

방에서 소란이 일어났으니 이제 기회는 뒤바뀔 일만 남았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어."

"알아. 그래서 누가 널 구하러 올 것 같지?"

하벨이 손을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탁.

[신호다!]

아라가 반응하며 다급히 창문으로 날아갔다.

탁.

화르르륵!

아라가 앞발에서 불꽃을 피워 올렸다.

[짠. 이 몸이 신호를 보냈다?]

"포기해."

하벨은 물을 움직였고, 이전보다 더 환하디환한 불꽃이 그의 등에서 타오르자 시렌의 눈에 절망이 하나씩 차올랐다.

"내가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어?"

하벨이 씩 웃었다.

어렴풋이 소리가 하나씩 들려왔다.

"잘 들어봐."

슈우우욱!

마법사의 탑 가장 아래층에서부터 결계가 작동했다.

"작동했어, 도련님!"

이를 금방 알아챈 칼리우스가 활짝 웃으며 알려주었다.

크라마가 그렸던 그 결계가 올라오고 있었다.

"…하."

헤레스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방금 봤어? 엄청 예쁘네."

은은한 미소를 띤 하벨의 표정에 시렌은 금방이라도 울먹일 것만 같았다.

"결계……?"

"그래. 결계야."

하벨이 손을 들자 아래층에서 은빛을 품고 마법이 올라왔다.

한순간 마나를 멈출 결계였다.

"아무도 못 와."

하벨은 물을 움직이며 시렌에게 다가갔다.

푸욱.

물 하나를 시렌의 팔에 꽂아버렸다.

"너도 이제 아무것도 못 해."

시렌은 설마 하며 마나를 움직였다.

하지만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이게 하벨이 준비한 결계라니.

시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 이게 가능하냐고?"

하벨이 물었다.

푹.

"네가 저지른 죄가 이만큼이나 쌓인 거고."

시렌의 나머지 팔에도 물을 꽂았다.

물과 피가 번져갔다.

"…으흑!"

"장로가 이제 우리 편이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는 시렌의 눈빛에 하벨은 차분히 물을 움직여 다리에 꽂아버렸다.

"간단히 말해서 그냥 네가 끝이라는 소리야."

푸욱.

"아, 아아악!"

하벨이 시렌의 비명을 들음에도 밋밋한 표정으로 또 다른 물을 움직이려 하자 아라가 하벨에게 매달렸다.

[대장!]

하벨은 그대로 아라를 바라보았다.

[이제 안 돼! 여기까지 해.]

"왜 그래, 아라야?"

[피가 나잖아.]

아라가 울먹이자 그제야 하벨은 자신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다급히 닦았다.

당황한 눈으로 헤레스를 보았다.

그녀는 이미 입을 꽉 다문 상태였다.

지금 상황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솟구치는 걱정은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제가 할 수 있게 해주세요."

헤레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하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래. 캐낼 말이 있으니까, 잘 부탁해."

하벨은 물을 천천히 거뒀다.

이다음에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을지는 대충 예상이 됐다.

"용용이 너도. 결계가 끝나고 시렌이 마법을 마구잡이로 사용할지도 몰라. 부탁해."

"응. 내가 시렌을 잘 감시할게."

칼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샬, 레디나."

이어 하벨은 카샬과 레디나를 불렀다.

"예, 도련님."

카샬은 대답했고, 레디나는 시렌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괜찮아요?"

"그래. 좀도둑을 도와줘. 특히, 카샬 네가 내키지는 않겠지만, 피해는 최소화해야 할 테니까."

하벨은 바로 일그러지는 카샬의 표정에 키득거리다 등을 돌리고 뻥 뚫린 벽면으로 걸어갔다.

점점 넘실거리는 검은색을 띤 바다가 보였다.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도련님."

카샬이 하벨을 말렸다.

"나도 알아."

바람이 하벨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어쩌면 이제 마지막으로 보는 바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 협회가 꼭꼭 숨기고 있는 정보들을 뒤지다가 하벨 티에라의 몸을 돌려줄 방법을 찾는다면 이제 끝일 테니까.

"…하하하!"

시렌이 갑자기 웃었다.

"정신 줄을 놓은 모양인데요?"

레디나가 검지를 들어 머리 옆에 빙글빙글 돌렸다.

소곤소곤.

하벨은 물이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에 등을 돌려 시렌을 보았다.

까득.

무언가를 씹는 소리가 시렌에게 들려왔고.

"웨엑…!"

시렌은 무언가를 토해버렸다.

꿈틀거리는 무언가에 정령들은 그대로 멈췄다.

[…아, 아.]

아라가 부들부들 떨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저 개새끼가…!"

하벨은 당장 용왕의 힘을 끌어왔다.

"내가, …내가 후회한다고 했지?"

시렌의 얼굴에 검은 줄이 쭉쭉 그어졌다.

그녀는 경련이 난 듯 온몸을 떨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니."

치이이익!

하벨이 일으킨 물이 오미너스를 덮어버렸다.

"후회하는 건 너야."

아직도 끊어지지 않은 정령수를 통해 정화제를 만들어 오미너스에게 날렸다.

아주 약간이면 충분했다.

바람을 따라 하벨의 머리카락이 넘실거렸다.

하벨이 뻗은 손을 움켜쥐었다.

화르르륵.

오미너스가 정화제에서 일어난 불꽃과 함께 타들어 갔다.

"…쿨럭."

하벨의 몸이 당장 앞으로 휘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도련님!"

레디나가 다급히 자신을 부르며 누군가를 막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들자 레디나가 헤일리스의 다리를 걸고 넘어트렸다.

"이 미친 게 도련님을 밀려고……."

또르르.

무언가 하벨의 발밑으로 굴러왔다.

[아, 안 돼!]

아라가 억지로 힘을 쓰나, 하벨이 더 빨랐다.

용왕의 힘으로 만든 물로 아라와 자신을 감쌌다.

퍼엉!

무언가 터지는 소리는 났지만, 겨우 거센 바람이 일어날 뿐이었다.

칼리우스가 만든 보호막 뒤로.

무너진 벽 뒤로.

하벨의 다리가, 몸이 허공을 떠돌다 아래로 향했다.

"하하하!"

시렌이 웃었고, 레디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샬이 아코에게 바람의 힘을 받은 채로 다급히 가속해 하벨에게 손을 뻗어왔다.

하지만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거봐, 내가… 후회한다고 했지?"

시렌은 시야에서 사라진 하벨을 보며 히쭉 웃었다.

"하벨… 티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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