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나야(3)
* * *
시렌은 하벨의 공격에 하늘을 날다시피 올라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에 그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하벨 티에라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이건 마법이 아니었다.
아무리 몰라도 하벨이 펼치는 게 마법일 수가 없었다.
'정령사다.'
우리의 소중한 물을 빼앗아버린 증오스러운 정령사.
마법사들은 물 마법사를 되찾기 위해 정말 모든 걸 시도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몇 번이나, 쭉, 계속 실패했다.
저들이 물을 쥐고 있기에 물 마법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그다지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물 마법사가 탄생했다.
왜 기쁘지 않을까.
그날 오랜만에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며 울었다.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과 별개로 하벨 티에라가 정말로 우리가 된다면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세상에 단 한 명뿐인 물 마법사가 아닌가.
'그런데…….'
시렌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땅에 떨어지면서 느낀 충격보다 또 정령사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더 증오스러웠다.
"하벨… 티에라."
시렌은 입가에 핏줄기를 흘리며 그 이름을 곱씹었다.
자신이 하벨 티에라를 속였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속은 건 자신이었고, 온갖 들짐승 사이에 숨죽여 있던 하벨이 때가 되어 이빨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그냥 처음부터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게 한 거라니.
"하벨 티에라!"
시렌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다시피 할퀴며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금 소리쳤다.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그 모습을 잊지 않았다.
어떻게 잊겠는가.
마법사 협회를 그렇게 내몰았는데. 하벨 티에라 때문에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는데.
'하지만 이건 아니야.'
대체 하벨이 어디까지 손을 벌렸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물 마법사가 아니라면 이제 봐줄 필요는 없었다.
'이건 아니라고!'
"열 받았어?"
하벨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시렌이 몸을 일으키며 시선을 올리자 그녀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런. 진짜 화가 났나 보네."
하벨은 여전히 자신을 농락하는 그 말보다 그의 머리카락을 흔드는 어떤 힘을 보았다.
바람의 힘.
시렌은 하벨이 쥔 힘을 보며 일그러진 얼굴로 잠깐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정령사라니. 정말로 네가……."
하벨은 시렌의 말을 흘려들으며 바람으로 만든 창으로 내리찍었다.
들을 게 많았으니 일단 반쯤 죽여놔야 했다.
까드드득.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마법 방패가 시렌과 창 사이를 가로막았다.
"대체 보호 마법이 몇 개나 있는 거야?"
하벨이 미간을 찌푸렸고, 시렌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녀가 감았던 눈을 뜨자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여기는 마법사 협회."
쿠우웅!
시렌은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갑자기 느껴진 마법에 온몸이 짓눌렸다.
바닥에 바짝 붙어 있던 시렌은 비명을 토했다.
쩌적.
마법 방패에 균열이 가자 시렌은 놀란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마."
칼리우스가 인상을 가득 썼다.
"너는 틀렸어, 시렌."
"입… 다물고 있어, 아가야."
시렌은 자신을 부정하는 칼리우스를 향해 상냥하게 웃었다.
"뭐가 옳은 건지 아닌지 보여줄 테니까."
시렌이 재빨리 방어 마법을 두르는 만큼이나 방에 있던 마법들이 하나씩 빠르게 사라지는 걸 하벨은 보았다.
"뭐가 온다."
동시에 하벨은 꽤 커다란 마법이 발동되는 걸 보았기에 그들에게 경고했다.
[그러지 마, 대장! 용용이가 할 수 있어!]
"에잇!"
칼리우스가 아라의 말을 듣자 단숨에 뛰어 하벨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하벨은 칼리우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순간 뒤로 휘청거렸다.
"…요, 용용아?"
쿠쿠쿠쿠!
바닥이 흔들렸다.
마법 방패 위로 솟구친, 흙으로 된 여러 개의 팔이 튀어나와 하벨을 노렸다.
"죽어, 하벨 티에라!"
다른 건 몰라도 저놈은 죽여버려야 했다.
"나와 마법사들의 마음을 짓밟은 저……."
와르르르.
시렌의 입꼬리가 길어지던 차 흙더미가 무너져내렸다.
"이게 무슨……."
시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아까 말했어. 너는 틀렸다고."
"이게, 이게……."
시렌은 당당한 표정을 한 칼리우스를 보았다.
아무리 그가 마법을 지울 수 있어도 이건 선을 벗어났다.
마법에 깃든 마나가 커질수록 당연히 마법이 발동되는데 필요한 마법식 역시 복잡하기 마련.
이걸 단숨에 풀어 지워버렸다고?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머릿속에 '용'이라는 생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시렌은 억지로 의문을 삼키며 오직 하벨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하벨 티에라를 부수는 일이 먼저였다.
화르륵.
'…마법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더 많이 만들면 그뿐이다!'
자신은 지금 그게 가능했다.
시렌 주변에 불꽃이 우르르 생겨났고, 모래가 수십 개의 꼬리처럼 살랑살랑 움직였다.
칼리우스의 눈이 바빠졌다.
한 마법도 아니고 복층처럼 겹쳐진 마법에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파지지직.
시렌 주변에 번개가 나타났다.
저 번개가 불꽃을 휘감기 전에 하벨이 그랬듯 아코가 카샬의 발에 바람을 둘러주자 용수철처럼 튕기며 앞으로 돌진했다.
카샬이 번개와 불꽃을 피하며 노린 건 시렌이었다.
팅!
마법 방패에 검이 막혔다.
카샬은 멈추질 않았다.
검 끝을 뒤로해 깊게 휘두르려다 쏘아진 번개를 검으로 튕기며 시렌이 두른 마법을 향해 다시금 칼날을 세웠다.
쉬익!
그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을 따라 그의 뒤를 따랐던 검이 줄줄이 같은 그림을 그려나갔다.
티잉!
팅!
깊게 이어지던 검들의 행렬 그 틈 사이에 레디나가 살포시 나타나 단숨에 시렌의 목을 노리듯 매섭게 단검을 찔러버렸다.
쩌어억.
또 갈라진 마법 방패의 모습에 시렌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와."
카샬과 레디나의 협공에 하벨은 감탄하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낸 우산을 살살 돌렸다.
"지금 감탄할 때입니까, 도련님?"
헤레스가 하벨을 타박하자 그는 오히려 더 실실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밖을 쳐다보던 아라가 그제야 활짝 웃으며 정령수를 하벨에게 밀어 넣어주었다.
[대장! 정령들이 오고 있어!]
"용용아."
하벨이 칼리우스를 부르며 앞으로 돌진하자 헤레스는 기겁했지만, 곧 집중했다.
지금 시렌이 죽이려는 자는 하벨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모든 공격이 하벨을 향할 테지.
헤레스는 방에 깔린 마법의 매개체가 무엇인지 찾으면서 모래 속에 숨은 추가 매개체들을 하나씩 자신의 마나와 이어가고 있었다.
스르르르.
하벨의 발걸음에 맞춰 모래가 움직였다.
헤레스가 놀라며 그 모래들을 움직이려고 하자 하벨은 목소리를 냈다.
"걱정하지 마, 헤레스."
자신의 발에 작지만, 흙을 둘렀다.
정화제 사건 때 정령들을 통해 보지 않았던가. 마법으로 만든 자연의 힘조차 정령의 힘이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는 걸.
바닥에 깔린 모래가 이전보다 느려지자 하벨은 망설임 없이 우산 주변에 바람을 둘렀다.
하벨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네가 없애야 하는 건 시렌의 방어 마법이니까."
"알았어!"
칼리우스는 그제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한 겹.
네 겹.
여덟 겹.
시렌이 하나씩 몸에 두른 마법 방어를 칼리우스가 더 빠르게 지워나갔고, 시렌의 표정에 절망이 깃들었을 때, 바람의 힘을 가득 담은 하벨의 우산이 그녀에게 닿았다.
빠악!
이미 하벨에게 어깻죽지가 찔렸던 시렌의 팔이 바깥으로 휘며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으, 으아아악!"
시렌은 밀려오는 고통에도 의식을 잡고 바닥을 쳐 불꽃과 번개가 뒤섞인 마법을 발동시켰다.
"죽어어!"
하벨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나갈 정도로 날카롭게 날을 세운 불꽃과 번개가 휘몰아쳤다.
하벨은 그 모습에도 편안하게 바라보았다.
앙증맞은 앞발이 하벨 앞으로 하나씩 내밀어지자 불꽃도, 번개도 위력을 잃어갔다.
[대장을 아프게 하면 안 돼!]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아라의 외침에 불꽃과 번개는 하벨 앞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처럼 온순함을 드러내다 사라져버렸다.
시렌은 그 모습에 가슴팍만 움직였다.
이게 현실이라니.
시렌의 아래쪽 눈 밑이 파르르 떨려왔다.
[오오. 여기가 이렇게 생겼구나.]
정령이 하나씩 하벨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와! 완전 살벌하다.]
[여긴 좀 답답해. 마나가 짙어서 그런가.]
더 뒤쪽에 있던 정령은 그 좁은 창문 틈 사이로 빠져나오며 바둥거렸다.
[아닌데? 네 배가 짓눌려서잖아. 대체 뭘 먹은 거야?]
[에잇!]
정령은 누군가 지적한 통통한 뱃살에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창문을 살짝 건드렸다.
드르럭.
창문이 조금 더 넓게 열리자 통통한 뱃살을 가진 정령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 이제 살겠네. 하지만 그래도 눌리는 건 비슷하잖아?]
[봐봐. 여기 마나가 엄청 짙잖아?]
킁킁.
정령들은 하나씩 주변 냄새를 맡았다.
[애들아! 지금은 이 몸이 부탁할게. 대장 몸에 벌써 불순물이 엄청 차올랐어. 대장은 이제 강한 걸 써야 해.]
아라는 앞발을 꼭 모으며 천천히 흔들었다.
[강한 거라니?]
[필살기? 실체화? 이런 거 말하는 건가?]
정령들의 물음에 아라는 잠깐 눈이 흔들렸다.
[이, 이 몸은 실체화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
[그건 우리도 쓸 마음이 없어.]
[그럼 대장한테 정령수를 넣어줘! 아주 많이! 정령수를 많이 넣을수록 대장은 강해져!]
아라가 양발을 하늘로 높이 뻗었다.
딱딱.
하벨이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아라는 하벨의 신호를 보며 밖을 향해 불꽃을 피어올랐다.
신호 하나가 쏘아졌다.
결계를 준비하라는 의미였다.
"…그럴 리가 없어."
시렌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상했다.
상황도, 자신의 몸도.
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모래로 상처를 틀어막아 바닥에 떨어진 피도 별로 없을 텐데.
"그럴 리가……."
시렌의 눈에 다시 이채가 어린 순간 무언가 그녀의 등을 찔렀다.
푸욱!
"아아악!"
시렌이 하벨은 조금 전 모래 속에 묻어뒀던 손에 삼지창을 들며 흔들었다.
어디서 또 마법을 쓸까.
"독이야, 독."
시렌은 하벨의 얄미운 행동에 무어라 말하기 전에 비틀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분명 칼리우스가 가만히 있었음에도 마법이 저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을까.
시렌은 곧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정령이… 어떻게 있어?"
분명 부정한 것들로 도배하지 않았던가.
아니, 사실이 아까부터 들던 위화감이었다.
하벨 티에라는 어떻게 정령의 힘을 쓰고 있는 건지.
"정령이… 정령이 어떻게 있는 거지? 말해! 말하라고, 하벨 티에라!"
시렌이 사납게 소리쳤지만, 하벨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꺼냈다.
발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저 수많은 마법의 매개체는 이 방이 맞지? 그렇지?"
하벨은 처음 방 전체에 깔린 마법 방패를 보고 혹여 외부에 있을 자신들의 세력에 신호를 보내는 걸 막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외부에서 어떤 추가 습격이 오지 않았다.
물론, 칼리우스가 장로를 지배해 장로들이 마법사들을 막을 테지만, 시렌은 인원 차이로 일어나는 불리함과 상처를 입었음에도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갈 수도 없는 상태라면 답은 하나지.'
하벨은 방금 전투를 통해서 곧 마법사 협회를 습격할 페트리오와 크라마에게 닥칠 위협이 그다지 없다고 판단했다.
시렌이 가장 큰 힘은 바로 세뇌였고, 자신은 이걸 미리 잘라버리지 않았던가.
하벨은 우두머리를 잃고 허둥지둥거릴 마법사들의 꼴을 생각하며 밀려드는 정령수에 미소를 지었다.
"아, 아아악!"
시렌은 악에 찬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어진 모든 모래를 움직였다.
조금 전 하벨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작게 쪼개고 나뉘었다.
"전부 내 뒤로 물러서."
하벨은 밀려는 정령수를 이용해 흙의 벽을 일으켰다.
쿠쿠쿠쿠쿠.
[걱정하지 마, 하벨.]
정령들은 벽을 더 단단하게, 튼튼하게 맞바꾸며 동시에 시렌이 사용하는 마법을 억제했다.
[우리가 널 도우니까.]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정령들의 숫자가 수십이 넘어갔기에 그 위력은 이미 자신의 힘을 넘어버렸다.
[강한 걸 쓴다며? 어디 마음껏 날뛰어봐.]
[마법사들은 우리를 수도 없이 건드렸지만, 우리는 아직 한 번도 건들지 못했어. 오늘 건드려보려고.]
이를 갈고 나온 듯한 정령들의 소리에 하벨은 만족하며 그들에게 알렸다.
"방을 날려버릴 거야."
"…예?"
카샬이 반문했고.
"자, 잠시만요. 여기가 매개체인 건 알겠지만, 부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헤레스가 당황했으며.
"진짜 그래도 되는 거야?"
칼리우스는 어쩐지 주눅이 들어 있었다.
"방금 그렇게 정했어."
하벨은 호기롭게 웃었다.
"부러트리지는 못하더라도 날려버리겠다고."
원래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마법사의 탑을 똑 부러지게 하고 싶었지만, 바뀐 흐름을 보면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방 하나쯤은 가져가야 하지 않겠는가.
"…정령들은 모일 수 없어!"
시렌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정령들이 모일 구심점이 없다고!"
"왜?"
하벨은 정령수로 밖에서부터 물을 대거 끌어오며 태연하게 물었다.
"정령왕은 없으니까!"
시렌은 낄낄 웃었다.
[그게 무, 무슨 소리야?]
[웃기지 않은 소리 하지 말라고!]
[왕께서는 살아계셔!]
정령들은 저 말에 발끈했다.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이었다.
"아, 이거 실수했네. 여기에 정령들이 가득 있을 텐데."
시렌은 정령을 도발하며 이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희가 흩어진 게 우연이라고 생각했나, 멍청한 정령들아?"
아직 원점으로 되돌릴 수단이 자신의 손에 존재했다.
"마을에 있던 부정한 것들이 괜히 생겼다고 생각했어?"
[…뭐라고?]
정령들은 기겁했고, 하벨은 그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