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떠보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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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샬이 하벨이 앉은 휠체어를 밀며 헤일리스가 안내한 방으로 나아갔다.
'와. 덕지덕지 뭐가 참 많다.'
하벨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며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포탈을 타고 나온 순간부터 마법사의 탑 벽이고, 탑 안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덕지덕지 도배된 마법의 모습에 잠깐 시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층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중첩된 마법들 역시 많아지고, 최상층에 올라와서는 아라든, 칼리우스든 얼굴을 가릴 정도로 마법에 틈이 없었다.
하벨은 슬쩍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역시 얼굴에 불편함이 쓰여 있네.'
아마 자신처럼 보이진 않아도 칼리우스는 마나의 축복을 받은 용이기에 이곳에 얼마나 많은 마법이 깔려있는지 느껴질 테지.
방의 위치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헤레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하벨에게 잠깐 속삭였다.
"도련님 여기가 어디인지 잊으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여기가 뭐가 어땠다는 거지?"
헤일리스는 그 말을 흘리지 못하고 곧바로 반응했다.
"뭐가 어떤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안경 너머에 드러난 헤레스의 눈빛은 너무도 날카로워 아라가 깜짝 놀랐다.
"더럽고, 역겨운 시궁창이 바로 여기라는 거. 진짜 몰랐어요?"
비웃음까지 담긴 그 말에 헤일리스는 헤레스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헤레스. 네가 마법사 협회를 위해 어떤 공로를 했는지 알지만, 선을 넘으면 곤란해. 나도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고. 알고 있잖아? 네가 다시 마법사 협회에 온다면 얼마든지 환영할……."
"헤레스가 말이 과했던 건 사실이나, 헤레스는 지금 내 주치의라는 걸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곧바로 하벨이 헤일리스의 꼬리를 물어버렸다.
헤레스를 건드리면 티에라 가문이 움직일 거라는 단호한 경고였다.
"헤레스."
하벨이 헤레스를 불렀다.
지금은 이 정도로 됐으니 그 울분은 나중을 위해 아껴놓으라는, 하벨의 말을 알아들었기에 헤레스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실례했습니다, 도련님. 제가 너무 예민했습니다."
"진짜 자중하는 표정이 아닌데?"
내내 침묵하던 시렌이 입을 열자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헤일리스 씨."
"말씀하시죠."
헤일리스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시렌을 의식하는 모양이었다.
"왜 가만히 있는 건가요? 설마 안 들린 거 아니죠?"
짜악!
헤일리스는 난데없이 시렌의 뺨을 때렸다.
[히익!]
아라가 날카로운 소리에 움찔거렸고, 하벨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렌이 잠깐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곧 다시 똑바로 서서 헤일리스를 쳐다보았다.
대놓고 기분 나쁜 감정을 드러내자 헤일리스는 시렌의 반대쪽 뺨을 때렸다.
짝!
그제야 시렌이 고개를 숙이자 헤일리스는 여유로움을 뽐내며 싱긋 웃었다.
"실례했습니다, 하벨 공. 부디 이걸로 넘어가 주셨으면 하네요."
"네. 충분하네요."
하벨은 시렌을 의식하며 대답했다.
'역시 이상하다.'
헤일리스와 시렌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웠다.
엘리베이터야 당연히 가까울 수밖에 없다고 쳐도 조금 전부터 시렌과 헤일리스의 거리는 묘했다.
'일정한 거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이 역시 자신의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하벨은 여전히 타오르는 랜턴의 검은 불꽃을 의식했다.
침묵이 오갔다.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발소리가 이어졌다.
하벨이 마법사 협회 밖에서 세웠던 가정을 더욱 굳히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헤일리스는 더미다.'
하벨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입니다."
헤일리스가 처음으로 싱긋 웃었다.
저 웃음에 하벨은 그녀의 생각이 자동으로 읽혔다.
'지금 얼마나 기쁠까.'
하벨 역시 웃었다.
'나와 용용이, 그리고 헤레스까지 손에 넣을 기회가 자동으로 손에 들어왔는데.'
마법사 협회가 유지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세뇌였다.
간단하게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 헤일리스가 너무도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밑에 있던 마법사들이 몇이며 자신들의 숫자는 몇인가.
'내가 이곳에 오는 걸 티에라 가문에 알리고 왔다고 생각은 하고 있겠지.'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넬시아와 라르웬하고 가기 전에 어디 간다고 알리기로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게 무슨 상관일까.'
그래.
지금 상황에서는 티에라 가문이고 뭐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먹이가 제 발로 걸어왔고, 제 발로 거미줄에 걸렸으니 이걸 어떻게 내버려 두겠는가.
그저 이 최상층에 걸린 마법을 이용해 자신들을 잡고 마법사들에게 그랬듯이 세뇌를 사용하면 그뿐인 것을.
세뇌를 정령이 알아볼 수 있던가.
'아니. 지금 오히려 부정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 정령들마저 예외로 둬야겠지.'
정령도, 페트리오와 크라마까지 제외한, 표면적으로 보이는 이들은 겨우 5명.
이 중에 헤일리스가 탐내 하는 자는 자 헤레스와 칼리우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3명.
이건 조금만 욕심이 있다면 누구라도 걸릴 수밖에 없는 덫이었다.
헤일리스의 신중함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몰라도 하벨은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들어가자, 카샬."
당연히 헤일리스가 의심을 할 테지만,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 모두가 그녀에게 있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니 그냥 얌전히 낚싯대나 쥐고 있을 셈이었다.
이번 물고기는 알아서 저 스스로 낚싯바늘에 걸릴 테니.
[진짜 들어갈 거야, 대장? 이 몸은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아라는 제법 화려하게 꾸며진 방일지라도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더 화려한 방은 몇 번이나 봤고, 칼리우스가 긴장하고 있었기에 아라는 너무도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도련님."
카샬은 자신의 의도를 바로 눈치채 떡밥을 뿌리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좀 망설여집니다. 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평소의 카샬과 다른, 집사로서 훌륭한 행동과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저는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어 카샬은 헤일리스의 눈치를 보며 할 말을 삼켰다.
누가 보아도 초조하고 불안한 행동.
정말로 마법사 협회에 이 인원밖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었다.
"카샬 말이 맞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헤일리스를 알고 있으니까요."
헤레스가 카샬을 옹호했지만, 헤일리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미 마법사 협회를 아는 헤레스가 있었음에도 이곳에 온 인원이 겨우 이것뿐인지에 대한 의심을 만들어냈다.
'머리가 복잡하겠지.'
하벨은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헤일리스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미친 듯이 헷갈리겠지.'
조금 전 최상층에 도착하기 전에 정령 하나가 날아와 손가락 8개를 펼치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결계가 80%나 진행이 됐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헤일리스. 네가 내밀어야 하는 답은 하나잖아?'
헤일리스가 가슴 속에 품었던 그 욕심과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가장 아름다운 답을.
"도련님. 부디 한 번 더 생각해주십시오."
카샬이 다시금 하벨을 말렸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가자. 설마 헤일리스 씨가 나한테 해코지라도 하겠어?"
하벨은 헤일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렇죠?"
많은 것들이 담긴 물음.
'네가 방금 내 말에서 어떤 걸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소롭다는 감정 하나만큼은 확실히 느꼈으면 한다.'
하벨은 이어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와 달리 아주 살짝 뒤틀린 그 웃음에 헤일리스 역시 옅은 미소를 보였다.
뻔한 사실을 두고 나누는 살얼음 같은 신경전이 아닌가.
"물론입니다. 하벨 공께서는 물 마법사가 아닙니까? 우리 마법사가 그토록 바라온 존재인데 제가 무슨 짓을 하다뇨."
헤일리스는 이어 헤레스와 카샬을 불쾌한 듯 바라보았다.
"그러니 제발, 헛다리 좀 짚지 말았으면 합니다. 내가 하벨 티에라 공에게 무슨 짓거리를 한다면 너무도 우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요. 아주 우습죠. 그냥 우스운 게 아니라 아주 꼴사나운 짓인걸요?"
하벨은 헤일리스의 말에 동조하는 듯, 비아냥거리는 듯 말을 꺼내며 앞을 가리켰다.
"이제 됐지? 그만 가자, 카샬. 계속 여기 있을 셈이야?"
"…알겠습니다, 도련님."
잠깐 망설이던 카샬은 마지못해 휠체어를 밀었다.
이에 하벨을 따라 모두가 방으로 들어갔고, 문이 닫혔다.
그 순간, 헤일리스와 시렌의 입꼬리가 거의 동시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앞으로 향해 있었기에 꺼낸 웃음이겠지만,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헤일리스랑 어, 시렌이랑 같이 웃었어!]
아라가 저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슬슬 방향을 잡았다는 건가.'
저들의 선택은 공격이라는 걸 알자 하벨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좋아, 좋다.'
하벨은 넘실거리는 흐름이 눈에 보였기에 만족하며 슬쩍 창문으로 시선을 뒀다.
"살짝만 열어도 되겠습니까? 조금 답답해서요."
[에헴. 이제 이 몸이 나설 시간인 거야?]
아라는 하벨의 신호를 알아차렸다.
설렘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라의 모습에 하벨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크라마와 에멜을 시켜 마법사 협회 내에 부정한 것들을 왜 없애라고 했겠는가.
"…창문을 말입니까?"
하벨의 물음에 헤일리스는 잠깐 고민하는 듯 망설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고민이 길어졌다.
특히, 하벨이 대체 어떤 생각으로 마법사 협회를 찾아왔는지를 모르기에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벨이 마법사 협회에 왔다는 건 룬델이 허락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내 아들에게 손대지 말게.
아직도 기억이 났다.
―그 더러운 욕심도 내보이지 말게.
룬델이 자신에게 내보이던 그 강한 살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벌써 몸이 떨리지 않던가.
―분명 후회할 걸세.
이어지는 비웃음.
'…재수 없는 룬델 티에라. 감히 나를 비웃어?'
"협회장님."
시렌이 헤일리스를 불렀다.
그 미묘한 시선을 볼 때마다 헤일리스는 어쩐지 가슴이 일렁거려왔다.
이다지도 불쾌한데 이상하게도 떼어낼 수가 없으니.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속삭이듯 들려오는 시렌의 목소리에 요동치던 헤일리스의 마음이 금세 한쪽으로 쏠렸다.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일까.'
창문을 여는 것 정도야 뭐가 대수로운지.
지금 중요한 건 하나였다.
하벨 티에라가 여기까지 제 발로 왔고, 그를 포함한 다른 이들까지 손에 넣을 기회가 왔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환상적인 기회가.
그 기회 앞에서 하벨 티에라가 왜 찾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벨 티에라를 돌려보낸다는 멍청한 생각은 대체 왜 한 거지?'
설령 하벨이 무언가를 준비했다고 한들 이곳은 마법사 협회.
모든 걸 갈아 넣어 만들어진 마법사들의 가장 안전한 곳.
감히 장담하건대 다른 나라에 있는 마법사 협회보다 이곳이 가장 힘이 강하다 할 수 있었다.
"예. 괜찮습니다. 물론 여기가 아니라 저 안에서 열면 됩니다."
헤일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안내했다.
겉보기에 화려한 방이라 생각했던 곳은 어딘가로 가기 위한 하나의 장소에 지나지 않았고 진짜 장소는 따로 있었다.
원탁 탁자가 정 가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중간에 누군가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구멍과 그 틈이 존재했는데 하벨은 그곳에 유난히도 많은 마법이 존재한다는 게 신경 쓰였다.
"원래 여기는 회의 장소로 쓰여서 자리가 많습니다. 아무 곳에나 편한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헤일리스의 말에 카샬은 창문과 가까운 자리로 휠체어를 끌고 갔다.
레디나가 기존에 있던 자리에 의자를 빼냈고, 그 속에 하벨이 들어갔다.
그 단순한 동작에도 마치 처음부터 하벨을 위한 자리 같아 보여 헤일리스는 속에서 솟아오르는 질투심을 억눌러야만 했다.
하벨이 책상에 손을 올릴 때쯤, 카샬이 뒤에 있던 커다란 창문을 살짝 열었고, 바람이 일어나 커튼이 흔들렸다.
"하."
하벨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답답함이 풀리네요."
"그렇게 답답했습니까?"
헤일리스가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려고 하자 하벨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높은 건물은 처음이라서요."
하벨의 시선이 창문 틈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아라를 향했다.
"알고 보면 고소공포증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라가 창문 틈으로 나가자마자 힘껏 외쳤다.
[다들 여기야! 이쪽으로 오면 돼!]
"헤일리스 씨."
헤일리스가 자신과 마주하는 곳에 앉자 하벨은 싱긋 웃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해봐요. 그러려고 오늘 찾아왔어요."
[땡땡땡! 작전을 시작할 시간이야!]
아라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넘쳤다.
하벨 자신은 이곳에서 용왕이기 전에 정령사였다.
정령사라면 자고로 정령들의 힘을 빌려야지 않겠는가.
"나도 이제 이곳 소속이잖아요?"
"…푸흡."
갑자기 시렌이 하벨의 말에 웃었다.
너무도 기가 찬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이기도 했다.
"이곳 소속이요? 당신이요?"
시렌은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한 채로 하벨이 꺼낸 말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