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떠보기
* * *
[오옵.]
아라는 에멜을 보자마자 귀를 파닥거렸다.
[지금 에멜이 신호를 보낸 거지? 그렇지? 이 몸도 열심히 들어서 알고 있다?]
에멜을 주축으로 칼리우스가 지배한 장로들은 크라마가 내부 협력자를 통해 조금씩 마법사 협회 안과 밖에 만들었던 결계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손을 보고 있었다.
에멜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결계의 완성이 50% 이상을 넘겼고, 안전성은 물론 장로들이 꼭두각시처럼 부리던 마법사들 역시 포섭했음을 알렸다.
"협회장을 만나러 이렇게 먼 길을 왔는데 돌아가라뇨."
하벨은 일부러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혹시 협회장님과 약속하셨습니까?"
"아뇨."
"그럼 당연히 만날 수 없습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아요."
"약속도 하지 않고 오셨는데 왜 말이 되지 않습니까? 지금 억지를 부린다는 걸 알고 계시겠죠?"
"적어도 지금 내 행동은 억지가 아니에요."
하벨은 자리에 앉아 마법사들이 지껄이던 말들을 계속 들었다.
자신이 마법사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대충 파악할 만큼의 시간도 있었고.
그렇기에 하벨은 자신감 있게 입을 놀렸다.
"내가 누군지 몰라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신은 마나와 마법사를 잇는 중간 다리였다.
―마법사가 마나에게 버림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았죠. 아니, 그냥 믿기 싫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나타났기에 그 말을 확실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마나는 저희를 버리지 않았다는 걸요.
마법사 협회로 가기 전 포탈을 관리하던 담당자가 머뭇거리다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던가.
'마법사에게 걸린 세뇌는 모든 만물이 마법사 위주로 흘러간다는 우월주의다. 그런 와중에 물 마법사만이 없다는 사실은 언제고 세뇌를 파괴할 수도 있는 아주 큰 위험이었겠지.'
마법사들이 대부분 자신에게 호의를 갖는 이유는 저 생각에서 비롯됐으며 동시에 마법사들이 그간 마나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셈이니 일부는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아.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은 유일한 마법사이기도 하니 싫어할 수도 있겠네.'
하벨은 여유롭게 한쪽 다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곧 누군가 자신을 옹호할 테지.
'나는 물 마법사이니까.'
"왜 물 마법사님이 협회장님을 만나지 못하는 겁니까?"
한 마법사가 입을 열자 하벨은 속으로 만족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장로를 차마 함부로 언급하지는 못하고 그저 대충 직급이 높은 사람처럼 대우했다.
"맞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물 마법사가 아닙니까?"
"솔직히 생각해보십시오. 이곳은 마법사 협회입니다. 물 마법사님이 이곳을 자유롭게 오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올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부당합니다."
한 명으로부터 시작된 말은 곧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제가 마법사 협회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는 이곳 마법사 협회는 마법사라면 누구든지 와도 되는 곳이라는 겁니다."
"맞습니다. 하벨 티에라 님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물 마법사가 아닙니까? 당연히 저 말에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지금… 마법사 협회의 모든 것인 그 말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에멜을 바라보는 마법사들의 눈빛이 살짝 비틀어져 버렸다.
왜 마법사를 억압하느냐는, 제법 거대한 압박에 미리 하벨과 입을 맞췄던 에멜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역시 미쳤군.'
에멜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뇌가 풀린 후에 에멜은 칼리우스와 하벨의 명령으로 마법사 협회로 돌아갔다.
언제나 포근한 집이라 생각했던 마법사 협회의 진짜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마법사들은 모두 어딘가 엇나가 있었다.
자신은 몰랐던 그 광기. 아니, 광기를 넘어선 맹목적인 어떤 믿음이 보였다.
'진짜 미쳤어.'
에멜은 다시금 탄식했다.
하벨 티에라는 고작해야 이곳에 1시간도 채 있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단지 물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장로인 자신에게 대들기까지 하는 마법사들의 모습은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들었죠?"
하벨이 한껏 여유를 뽐내며 말을 꺼냈다.
"이제 여기 있어도 되는 거겠죠?"
재차 이어진 하벨의 물음이 끝나자 칼리우스는 하벨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 모습을 빤히 본 아라가 하벨을 슬쩍 놓고는 위로 떠올랐다.
[어어, 헤일리스가 오고 있어!]
아라의 꼬리가 바짝 섰다.
이미 협회 내에 부정한 것들을 다 제거해 아라 자신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것과 별개로 마법사 협회는 싫었고, 헤일리스는 더 싫었다.
'역시 내가 헤일리스에게 갈 필요가 전혀 없네.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는 것을.'
기세를 드러내는 헤일리스의 행동에 마법사들이 그제야 그녀를 알아보고 고개를 조아리자 하벨은 속으로 웃었다.
화르르륵!
갑자기 랜턴에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뭐야? 왜 갑자기 랜턴이 반응하는 거지?'
하벨은 헤일리스의 등장에 난데없이 켜지는 랜턴을 보며 깜짝 놀랐다.
장례식장에서 헤일리스를 만났을 때 전혀 미동도 없었는데.
하벨의 시선이 뒤이어 헤일리스 뒤에 선 한 소녀에게로 옮겨졌다.
양갈래를 곱게 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의 모습에 하벨은 그녀를 기억했다.
왕실에서 보지 않았던가.
"저자가 시렌이에요."
헤레스가 작게 속삭였다.
'…저 소녀가 시렌이라고?'
잠깐 하벨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벨 티에라 공."
걸어오며 하벨을 부르는 헤일리스의 목소리는 어쩐지 날이 서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요?"
하벨은 다 알면서 일부러 실실거렸다.
"사전에 연락이라도 하고 왔으면 좋지 않았겠어요?"
헤일리스의 눈이 빠르게 하벨의 상태를 살폈다.
안대와 볼때기에 아직 붙여진 반창고, 옷깃을 넘어 목까지 오는 붕대, 마법 아이템으로 띄운 링거까지.
상태는 이전과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그게 정상이었다.
그만한 상처를 입었는데 어떻게 며칠 사이에 좋아지겠는가.
"연락요? 이전에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우리라고요."
하벨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반응하자 헤일리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우리 사이에 연락이 왜 필요합니까? 여기는 곧 내가 있을 곳이 될 테고, 왕실이 너무 답답해 잠깐 왔습니다. 많이 놀라셨나요?"
장난기가 가득 섞인 저 표정에 헤일리스는 갑자기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무슨 의도로.
아니.
애초에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왜 보고가 없었지?"
헤일리스는 에멜을 보며 바로 질책했다.
"너무 놀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협회장님."
"놀라? 내가 당분간 마법사 협회로 오는 포탈을 다 막고, 뱃길 역시 제한한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너무 화내지 마세요, 헤일리스 씨. 내가 오고 싶어서 왔을 뿐이니까요."
하벨은 카샬과 레디나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로 갈아탔다.
"저들이 내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그러니 포탈 담당자 역시 문책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하벨은 안쓰러움이 담긴 표정을 지으며 헤일리스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있는 감시마법을 보고 깜짝 놀라서 왔겠지.'
헤일리스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자신이 난데없이 마법사 협회를 찾아왔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하지만 자신은 한때 위에 서본 자였기에 밑에 있는 자들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헤일리스는 이곳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이었고, 자신은 마법사들의 희망인 물 마법사였다.
어쩌면 헤일리스가 가진 권력에 부딪힐 수 있는 자였고, 마법사들 역시 그렇게 보고 있었을 테지.
'헤일리스. 너는 내가 왜 여기에서 가만히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있었는지 모르겠지.'
하벨은 이 작은 행동으로 마법사들에게 간단히 보여주었다.
헤일리스가 자신에게 왔고.
"이제 그만 노여움을 풀고 올라가요. 할 말도 있으니까요."
이제 자신이 헤일리스를 위로 데려갈 차례였다.
"…알겠습니다."
헤일리스는 마법사들이 있는 이 공간에 묘한 껄끄러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하벨 티에라가 어떤 말을 할지, 무슨 목적인지,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은 무조건 숨겨야만 했다.
헤일리스가 움직였고, 하벨은 싱긋 웃었다.
'보거라.'
헤일리스가 걸어가는 걸 보던 하벨은 마법사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마법사들에게 하벨은 대놓고 알려주었다.
자신이 헤일리스를 움직였으며 사실상 그녀보다 더 높다고.
하벨은 그렇게 마법사들에게 하나를 각인시켜주었다.
어차피 하루도 안 가 끝날 효과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 작은 행동은 마법사들이 걸린 세뇌와 뒤섞이며 엄청난 효과를 발휘할 테니.
헤일리스와 자신, 누가 더 중요한지를 둔 상황이라면 더더욱.
'헤일리스 네가 세뇌로 마법사들을 이용했으니. 나도 이용하는 게 뭐가 나쁘겠는가.'
하벨은 여전히 타오르는 랜턴에 헤일리스는 물론, 조금 전부터 미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렌 역시 경계했다.
* * *
"몸도 좋지 않은데 왜 이곳에 온 겁니까?"
헤일리스는 최상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하벨에게 물었다.
이곳은 적어도 주변 시선을 의식할 일이 없기에 적의가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아까 말했, 아, 들은 적이 없네요. 그냥 구경 왔어요."
"…구경요?"
헤일리스의 시선이 곧 칼리우스를 향했다.
비록 후드에 가려졌으나 자신들이 쫓던 그 아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저 아이까지 데려와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도무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분명히 자신들이 쫓고 있다는 걸 알 텐데.
이건 대놓고 자신을 잡아가라고 하는 꼴과 뭐가 다를까.
"왜요? 구경 오면 안 되나요?"
장난기를 넘어 능글맞기까지 한 하벨의 태도에 헤일리스는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
"무슨 일로 마법사 협회에 찾아왔는지 솔직히 말씀하시죠."
"와. 오늘도 살벌하시네요. 이건 단순히 꺼내는 질문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요."
하벨은 말을 던지고서는 통유리로 된 엘리베이터에 찰싹 달라붙어 꼬리를 흔드는 아라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걸까.
하벨은 칼리우스의 애처로운 눈빛에 잠깐 웃었다.
얼마나 아라와 같이 엘리베이터에 매달리고 싶으면 저렇게 부러운 눈초리로 아라를 바라볼까 싶었다.
"뭐가 웃기죠?"
헤일리스가 물었다.
가뜩이나 지금 모든 게 짜증 난 상태였다.
폭파 사건을 뒤집어쓴 것도, 꼬마 왕 바안이 마법사 협회가 운영하는 모든 걸 감시하겠다 통보한 것도, 하벨과 저 아이 때문에 벌어진 일도, 정화제 문제도, 며칠 전에 벌어진 정령사 문제 역시.
'…그리고 진전되지 않는 오미너스 상태와 헤레스까지.'
헤일리스는 화를 가라앉히려 숨을 짧게 내쉬며 엘리베이터에 같이 있는 헤레스를 의식했다.
제 발로 나간 헤레스가 이렇게 다시 마법사 협회를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하벨 티에라의 주치의가 될 줄이야.
'저 아이도, 헤레스도, 물 마법사도. 전부 다 내 거여야 했는데.'
헤일리스는 자신이 갖고자 하는 모든 걸 손에 쥔 하벨이 너무도 부러워 속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음……."
하벨은 말꼬리를 늘이며 벌써 살짝 울상을 지었다.
"그저 내 시종이 이렇게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가 신기한 모양인데… 음,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는 모습이 귀여워 웃었을 뿐입니다."
이어 하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나는요. 헤일리스 씨가……."
마치 이걸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말꼬리를 늘리던 하벨이 겨우 말을 토해냈다.
"헤일리스 씨가 왜 이렇게 성이 났는지, 나한테 왜 예민하게 구는지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요?"
헤일리스가 기가 찬 소리를 내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은…. 네, 이건 내가 잘못했죠. 그래도 나는 나를 환영해줄 거라 생각했어요."
하벨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고 카샬의 짧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 왕이었다는 말에 이제는 저 노련한 표정을 이해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소름이 끼칠 만큼 자연스러웠다.
"애초에 나는… 그냥 환영받지 못한 존재가 아닌가 싶네요. 그게 아니라면 저번에 그 일 때문에 화가 많이 난 거죠? 그렇죠?"
하벨은 씁쓸함을 토로했다.
"그 일… 이라뇨?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잘못한 게 많은가 봐요."
헤레스가 넌지시 말을 꺼내자 헤일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는 조용히 하는 게 어때, 헤레스? 여기서 입을 놀린다는 건 너무 뻔뻔한 게 아닐까……."
"내 시종을 납치하려고 했잖습니까."
하벨이 헤일리스의 말을 자르며 허를 찔렀다.
"그건……."
헤일리스가 억울함을 담아 말을 꺼내려고 하자 하벨이 가볍게 가로챘다.
"당연히 아니라고 하시겠죠. 하지만 그건 이유를 떠나 헤일리스 씨 쪽에서 잘못한 게 맞습니다. 마법사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잘못까지는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건 아직 조사 중이니 섣부른 결론은 그만두시지요."
"그럼 나는 이곳에 내쳐질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만 쏙쏙 언급하는 하벨의 말에 헤일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를 질투하거나……."
"하벨 티에라 공!"
헤일리스의 언성이 단번에 올라갔고, 하벨은 그녀의 약점을 찾았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바꿨다.
"뭔가 찔리는 게 있나 봐요?"
하벨의 미묘한 시선에 헤일리스는 일단 물러섰다.
여길 더 파고들어 가봤자 당하는 건 자신이었으니.
"제가 날카로웠다면 사과할게요. 오늘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헤일리스는 배에 힘을 가득 주었다.
하벨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켰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아니에요. 너무 갑작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아, 엘리베이터에 가까이 가도 되는 겁니까?"
하벨이 사람 좋은 얼굴로 헤일리스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예. 가능합니다."
"이제 편안하게 봐도 돼."
하벨의 말에 칼리우스가 후드를 젖히자 헤일리스의 시선이 따라왔고 시렌의 눈빛이 미묘하게 날카로워졌다.
아라와 칼리우스가 엘리베이터에 매달려 아래로 고개를 내릴 때쯤 하벨은 헤일리스를 위해 하나 던졌다.
"도착하면 진짜 온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약속해요."
거짓은 없었다.
어차피 말하고 싶지 않아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끝을 내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