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구경하러 왔는데요?(3)
* * *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포탈을 바라보던 카샬은 올 게 왔음을 직감하고 말을 꺼냈다.
"도련님. 내가 잘 잡아줄게. 도련님도 알다시피 나는 힘이 세."
칼리우스가 하벨 옆으로 가서는 슬쩍 속삭였다.
[이 몸도 대장을 붙잡을 거야. 온 힘을 다해서 말이야.]
아라는 이미 하벨에게 붙어서 꼬리를 흔들었다.
한 명씩 꺼내는 말에 하벨은 포탈로 걸어가며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자, 다들 듬직하니까, 이제 걱정하지 말고 마차로 들어가시죠, 도련님."
먼저 마부의 자리에 올라탄 레디나가 모두를 재촉했다.
포탈이 조금 전보다 힘을 잃고 있었다.
"그래."
하벨의 대답과 함께 모두 마차에 올라탔다.
헤레스는 마차가 출발하기 전 카샬이 다급히 꺼내는 푹신한 방석의 위치를 하나씩 기억해서는 당장 마나로 연결할 준비를 했다.
아라가 하벨의 옷자락을 잡았고, 칼리우스가 가장 중요한 머리를 잡은 채로 굳건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비장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 하벨의 웃음이 터지자 카샬이 이를 그냥 넘어가질 않았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절대로 말씀하지 마시고, 몸을 억지로 움직이지도 마십시오."
"알아."
하벨의 미소가 더 부드러워졌다.
"아는 게 아니라 잘 들어주십시오. 티에라 가문에서 사용하는 포탈과 이 포탈은 다릅니다. 그건 돈을 엄청 쏟아부어서 최대한 도련님께 맞춰 부작용이 덜 가는 방향으로 맞췄기에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탈로 일어나는 부작용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심하고 심하지 않고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걸 없애는 방법은 없었다.
하벨은 특히 포탈로 일어나는 부작용이 무척 심한 편이라 이렇게 다들 하벨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움직이자 카샬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그러니 이제부터 말씀하지 마십시오."
카샬은 하벨의 어깨를 붙잡았고, 헤레스가 숨을 멈췄다.
정작 하벨은 이상하리만큼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마차가 포탈로 들어서자마자 하벨은 마차 벽을 향해 몸을 날렸고, 칼리우스가 깜짝 놀라며 힘을 더욱 세게 줬다.
[으, 으아아아!]
아라가 하벨의 옷자락을 당겼고, 헤레스가 방석들을 움직여 벽지처럼 한 치의 틈도 없이 막아버렸다.
"도, 도련님! 그러면 다쳐!"
하벨에게 부작용이 있다는 건 들어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질 않는가.
어쩐지 하벨의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아가야.
포탈로 들어서자마자 하벨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에서 올라오는 답답함을 또 느꼈다.
카샬이 조금 전에 자신에게 경고했지만, 속으로는 설마 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정말 달랐다. 답답함을 넘어 간절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나가야 했다.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애가 타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왜?'
하벨은 깊은 의문을 느꼈다.
이전에 나가야 한다는 갈망 뒤에 느꼈던 편안함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스르르륵.
무언가 기어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자 고개가 아주 약간 뒤를 향했다.
검은 연기가 보여왔다.
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그 날카로운 눈빛만큼은 자신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광기에 어려 있었다.
그 검은 연기가 점점 자신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찾았다!
선명한 그 목소리에 자신의 몸은 더욱 앞으로 다급히 움직였다.
'나가야 한다는 그 사실이…….'
하벨은 그제야 알아챘다.
설마 저 연기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말일 줄이야.
하벨은 하벨 티에라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마주했다.
누군가로부터 도망가는 기억.
그리고 빛 너머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하벨은 제 몸이 통제권을 찾아오자 주변에서 들려오는 안도의 한숨을 들으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 '아가야'라는 말은 대체 누가 하는 거지?'
하벨 티에라가 룬델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부름은 하벨 티에라의 진짜 부모님일까.
'그런데 그 말을 분명 다른 경로로 들었을 텐데.'
[대장? 괜찮아? 이제 포탈 넘어섰는데?]
아라가 하벨을 흔들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차 너머에 마법사의 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틈의 세계에서 나온 괴물들에게.'
하벨은 마법사의 탑이 아닌, 창문에 비친 하벨 티에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
파악!
헤일리스는 서류뭉치를 내던졌다.
"빌어먹으을!"
콰앙!
당장 책상을 내리치자 큰 소리가 방에 울러 펴졌다.
"우린 아무것도 안 했다고! 이번 일에 관여한 적이 없단 말이야!"
도무지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나라들에서 밀려오는 청구서가 몇 개이며 에르티안 왕국, 그 같잖은 꼬마 왕이 보낸 서신이 더 기가 찼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시렌이 걸어왔다.
"협회장님."
시렌이 조용히 헤일리스를 불렀다.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
"하지만 이거 봐. 네 두 눈으로 이거 보라고."
헤일리스는 바안이 보낸 편지를 쥐어서는 시렌에게 내보였다.
[친애하는 헤일리스 협회장에게.
이번 폭파 사건으로 심려가 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여 이런 결단을 내리게 된 사실이 몹시 유감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전까지 그대가 이 에르티안 왕국을 위해 이바지했던 모든 것들을 살펴볼까 합니다.
하루바삐 범인을 잡기 위함이니 협조해주리라 믿습니다.]
편지를 쥔 헤일리스의 깊은 분노에 눈동자가 커지고 핏대가 선명해졌다.
"이건 겉으로 드러난 우리 사업을 모조리 감시하겠다는 거잖아? 그 의미가 아니면 뭐라고 말할 수 있어? 응?"
꼬마 왕이 어느새 여기까지 기어오를 줄은 몰랐다.
자신들이 귀족들 속에 숨어 성장했던 그대로 왕실 역시 소리도 없이 되살아나고 있을 줄이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시렌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밑에 누가 왔는지 확인하시라고요."
"오늘 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다 막았는데?"
"정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헤일리스는 시렌의 물음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마법사의 탑에 설치한 모든 감시장치가 모이는 곳이었기에 큰 화면 속 여러 개로 분할된 영상이 보였다.
시렌이 손가락을 놀리자 화면은 딱 하나를 가장 크게 띄웠다.
모두에게 누군가 둘러싸여 있었다.
익숙한 얼굴을 한 소년은 왕처럼 자리에 앉아 있다 갑자기 화면을 쳐다보며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소년이 누구인지 알아본 헤일리스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하벨 티에라?"
헤일리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벨… 티에라잖아?"
"그렇죠."
"하벨 티에라가 왜… 왜 마법사 협회에 있는 거야?"
헤일리스는 말을 더듬었다.
"그걸 저한테 물으면 이상하지 않나요?"
시렌의 입꼬리가 살짝 길어졌다.
"이제 협회장님이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시렌의 손길이 헤일리스에게 향하자 흔들리던 헤일리스의 눈길이 차분해졌다.
"…아니."
헤일리스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내려가야지. 내가."
"그리고요?"
"왜 하벨 티에라가 왔는지 알아낸 뒤에 적당히 돌려보내야 해."
"맞아요. 지금은 티에라 가문의 시선을 피할 필요가 있어요. 며칠 전에 그곳이 터졌잖아요."
"정령사… 를 만드는 곳 말하는 거지?"
"네. 이걸 티에라 가문한테 걸리게 된다면, 아니, 에트리안 왕국이 알게 된다면 이보다 더 골치 아파질 거예요? 협회장님께서 이루고 싶은 목적도 놓치게 되어버린다니까요."
"그러면 안 돼. 놓치고 싶지 않아."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나가던 헤일리스는 눈을 깊게 깜박거렸다.
시렌의 눈이 휘었다.
"그리고 어쩌면 말이죠. 좋은 기회가 찾아온 걸지도 모르고요."
"좋은 기회……?"
"물 마법사를 차지할 기회요."
흐리멍덩한 헤일리스의 눈빛에 빛이 살짝 반짝거렸다.
"나도 알아. 시끄러워, 시렌."
헤일리스는 쫑알쫑알하는 시렌의 손을 치며 대답했다.
"내가 협회장이야. 네가 아니라."
"알아요."
"평소처럼 입 닥치고 있으란 말인 거 모르겠어?"
헤일리스가 날카롭게 쏘아붙임에도 시렌은 오히려 더 만족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협회장님."
헤일리스는 시렌을 달갑지 않게 바라보다 방을 나섰다.
시렌을 보면 볼수록 참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당최 왜 쫓아내지 못하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 * *
헤레스는 하벨을 진찰하다 말고 그의 주변에 몰린 마법사들을 보며 짜증이 점점 치솟았다.
포탈을 타기 전부터 자신은 이미 예민했다.
하벨이 포탈을 넘어가면서 겪는 부작용 때문에 재차 놀랐고, 마법사 협회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던 상태였다.
하지만 막상 들어온 마법사 협회는 별거 없었다.
자신을 알아본 이들도 있지만, 김이 빠질 정도로 큰 반항은 없었다.
거의 모두 물 마법사라고 알려진 하벨에게 푹 빠진 탓이 컸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하벨은 왕과 같은 으리으리한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차와 쿠키를 대접받지 않을 테니까.
[이 몸은 어, 뭔가 이상한 것 같아.]
아라는 하벨의 목을 껴안은 채로 여전히 주변을 조심스레 살폈다.
장로들이 이번 작전을 위해 부정한 것들을 치웠기에 자유로운 것과 별개로 아라 자신이 생각한 분위기는 이런 게 아니었다.
모두 하벨에게 으르렁거리고, 차갑게 노려보며 나가라고 말을 꺼내는, 아주 무서운 광경을 생각했는데.
물론 모두가 하벨을 신기하고, 대단하게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보다 못해 말씀드리는데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한 마법사가 하벨을 둘러싼 마법사들의 무리를 뚫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하벨의 등장에 모두가 어쩌질 못하고, 장로들마저 당황한 듯 하벨의 행보를 막지 않았다.
그때, 누구인지 몰라도 한 마법사가 하벨에게 묻지 않았던가.
―아, 왜 왔냐고요?
당황할 법하나, 하벨은 당당히 말했다.
―구경하러 왔는데요?
그 말에 한순간 정적이 내려오지 않았던가.
구경한다니.
마법사 협회를?
그 얼마나 오만한 말이던가.
카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마법사를 내려보았다.
은은하게 깔린 살기에 마법사는 주춤거렸다.
무슨 집사가 이렇게 살벌한지.
"보는 대로 가만히 앉아 있는데요?"
하벨은 태연하게 쿠키를 내밀며 활짝 웃었다.
"먹을래요?"
해가 없는 생명체를 보는 듯 너무도 순진한 웃음에 마법사는 주춤거렸다.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하벨이 말하는 대로 마법사 협회를 구경하러 찾아온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도 자신은 속지 않았다.
"당장 치우십시오!"
"싫어요?"
하벨이 실망하더니 쿠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쉽네요. 나는 먹고 싶어도 먹질 못하는데요."
이 속에 오염된 물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이상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지금 장난하시는 겁니까?"
곧 하벨이 자신이 놀렸다는 걸 알자 마법사는 단번에 인상을 썼다.
"아뇨. 지금 여기가 어딘데 장난을 치면 되겠어요?"
여전히 여유가 가득한 하벨의 말에 잠깐 헤레스의 입꼬리가 부들거렸다.
이곳 마법사 협회는 적의 아지트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수십 명 이상의 마법사가 하벨을 둘러싼 상태고, 저들이 동시에 공격해 온다면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날 테지만 이상하게 걱정이 되질 않았다.
헤레스는 슬쩍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후드를 꽉 눌러 썼기에 마법사들 몇 명이 그를 의심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지만, 칼리우스는 생각보다 평온한 편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차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끄러우니까 다들 좀 꺼질래요?"
헤레스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퍼져갔다.
아무래도 마법사 협회가 섬에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바다가 가까운 편이기에 하벨에게 영향이 아예 없다고 할 순 없었다.
"헤레스."
그때, 다른 마법사가 분노를 담아 헤레스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가 널 보며 가만히 있으니까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잊어버린 것 같아?"
"개같은 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지라는 말 안 들려요?"
헤레스는 이곳 마법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든 말든 아무 상관 없었다.
자신이 해야 하는 건 분명했으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다들 일 안 하세요?"
하벨이 그 말에 히쭉 웃었다.
이상하게 얄미워 보이는 웃음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헤일리스 씨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들 안 바쁜가 봐요. 나는 이렇게 마법사 협회가 한가할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이어지는 하벨의 말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마냥 순진했기에 놀리는 건지 아닌 건지 헷갈렸다.
물 마법사가 왔다는 소식에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온 이들도 꽤 많았고,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하벨을 볼 수 있냐는 아쉬움에 머물러 있는 마법사들 역시 많았다.
얄밉든 뭐든 하벨 티에라는 물 마법사가 아닌가.
'…끔찍하네.'
하벨은 자신이 마법사 협회 내 광장 같은 곳에 마법사들에게 의자를 가져오게 하고, 먹지도 않을 차와 쿠키는 물론 비아냥까지 거렸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선망하는 저 눈빛이 사라지지 않자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대체 물 마법사에 대해 얼마나 환상을 심어놓으면 저럴까 싶었다.
계속되는 소란이 잠깐 끊어졌다.
"협회장님은 지금 바쁘십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누군가 말을 꺼냈다.
헤레스가 그렇게 언성을 높였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길을 비켰다.
"하벨 티에라 공."
모습을 드러낸 건 장로 에멜 콘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