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구경하러 왔는데요?(2)
* * *
"도련님."
카샬이 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냥 넘어가면 하벨이 아니지.
그렇다고 설마하니 자신이 꺼낸 말을 고스란히 페트리오에게 전달할 줄이야.
"왜?"
"진짜 쪼잔하십니다. 정말 아까 44일 차를 언급했……."
푸흡.
카샬의 말을 막을 정도로 어디선가 웃음이 터졌고, 그 소리는 연락용 아이템에서 들려왔다.
"좀도둑……?"
하벨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반응하자 페트리오는 곧 헛기침을 내뱉었다.
<제가, 크흠. 이번 폭파 사건의 범인이 가진 기억을 읽어 찾아낸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아냈지만,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집중하셔야 할 순간일 테니까요.>
하벨 역시 지금 당장 폭파 사건의 범인이 어떤 나라에서 살고 있었는지를 알 생각이 없었다.
그만큼 지금 마법사 협회가 가장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다면 나중에라도 네 탓이라고 말해도 되는 거지? 그렇지?"
<…날, 날씨가 좋습니다. 하하하.>
페트리오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 * *
[우오옵! 우와!]
아라가 몰려오는 바람을 맞으며 입을 벌렸다.
이상한 맛이 느껴지고, 코끝을 건드리는 짭짤한 향이 감돌았다.
비록 색이 책과 달리 아름다운 파랑이 아닌 칙칙한 검정이었지만, 아주 큰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만약 퍼올린다고 한다면 평생 퍼올려도 부족할 만큼 아주 큰물이.
이게 바로 바다였다.
신기함과 놀라움으로 번져가던 아라의 눈동자에 슬픔이 갑자기 차오르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몰라도 아라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바다 근처에 모여 있던 정령들이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 몸이 왜 정령들이 우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아.'
바다를 보자마자 밀려오는 감정은 참담함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아주 소중한 걸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대장 있지…….]
아라가 고개를 돌리자 하벨은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었다.
무얼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 눈빛이 너무도 슬퍼 보였다.
[혹시, 대장도 슬퍼? 이 몸이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거야?]
아라의 물음에 하벨은 고이고, 고였던 눈물을 흘러내렸다.
[왜, 왜 울어? 너무 슬퍼서 그래?]
아라가 당황하다 점차 훌쩍거렸지만, 하벨은 이번만큼은 달래줄 수 없었다.
하벨 티에라의 몸으로 바다를 건너는 건 당장 무리라 생각했기에 당당하게 포탈을 타서 마법사 협회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나가다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우뚝 솟았던 마법사의 탑과 고개를 길게 내민 나무들 틈 사이로 바다를 보았다.
색은 오미너스와 비슷했지만, 분명 바다였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지나갈 수 있을까. 잠깐 마차를 멈춰달라고 부탁했다.
"…하."
하벨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바다에서 밀려온 바람이기에 허파에 스며드는 숨마저 욱신거려왔다.
당장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지만, 하벨은 가슴을 찌르는 이 슬픔을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바다가 죽어가고 있었다.
"이제 쓰십시오."
카샬이 평소보다 언성을 낮추며 비를 막기 위한 가면을 내밀었다.
지금 하벨에게 이게 필요했다.
"…도련님. 혹시 저 바다 때문에 아파서 그래?"
칼리우스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모든 오염이 모인 바다이기에 하벨이 아픈 건 당연했다.
"바다가 죽어가는 게 느껴져."
하벨은 눈물을 닦은 뒤에 가면을 받아 썼다.
숨쉬기가 한결 편안해졌지만, 울렁거리는 가슴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쏴아아아.
멀리서도 바다는 파도를 치며 자신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들리는 것처럼 경쾌한 소리가 아닌,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였다.
이 정도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다가가도 돼, 헤레스?"
하벨은 발을 떼려다 말고 헤레스에게 물었다.
방금 하벨의 눈물을 보았기에 헤레스는 안 된다는 말을 꾹 참고 최대한 양보했다.
"몇 발자국만요.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잖습니까."
"언니. 진짜 도련님이 여기서 더 가까이 바다로 가도 괜찮은 거예요?"
레디나가 조마조마하며 물었다.
비가 올 때마다 하벨이 죽어가듯 아픈데 바다는 오죽할까 싶었다.
"내가 멈출 거니까 괜찮아, 레디나. 대신 제가 정화 장치를 볼 수 있게 망토를 걷어주세요, 도련님."
헤레스는 레디나를 진정시킨 후에 하벨에게 부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정화 장치만큼 확인해야 했다.
"그래."
하벨은 대답한 후에 입술을 꽉 다물었다.
바다가 보이거늘, 자신과 바다의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한 걸음.
그럼에도 모든 오염이 모인 바다로 향하는 이 한 걸음에 금세 몸이 찌릿하게 울렸다.
아직은 숨을 쉴 만했다.
두 걸음.
바람이 스칠 때마다 피부를 뚫고 찔러오는 것만 같았다.
세 걸음.
숨을 쉬는 게 살짝 이상해졌다.
네 걸음.
정화 장치에 거품이 올라왔다.
'…여기까지구나.'
오늘은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하벨은 일그러진 얼굴로 바다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대체 바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을 정도였다.
'…미안하구나.'
하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가가지도 못하고, 바다를 매만질 수도 없으며 심지어 저들이 꺼내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다.
소곤소곤.
그저 웅성거림으로 들려왔다.
하벨은 그 안쓰러움에 아주 조금만 용왕의 힘을 사용해보았다.
파도의 흐름도, 소곤거림도 갑자기 멈춰버렸다.
저 너머에 바람을 타고 천천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엇 때문에 우는지, 자신을 알아챈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바다의 서글픈 울음소리를 들었다.
'나를… 기억하는 것인가.'
하벨은 물음을 속으로 감추며 용왕의 힘을 거뒀다.
파도가 다시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다의 울음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하벨은 바다를 등졌다.
[대장.]
아라가 꼬리를 붙잡은 채로 하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괜찮아, 아라야."
하벨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자 아라의 귀가 축 늘어졌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저게 어떻게 괜찮을 걸까.
[이 몸이 꼭 안아줄게.]
아라는 하벨의 목을 잡고는 얼굴을 비비며 안아주었다.
방금 하벨이 용왕의 힘을 사용했을 때 아라 자신이 느끼던 참담함이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바다가 울었어.'
누군가를 서럽게 불렀지만, 말에 웅얼거림이 강해 아라도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바다는 내가 되었고, 물도 내가 되었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죽으면 모든 물이 사라지는 거지. 그게 용왕이야.
물과 바다하고 하나였던 하벨은 오죽할까.
"괜찮아. 정말로."
하벨의 목소리에 안쓰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가자. 바다 구경은… 다음에 해도 되니까."
마차로 올라타는 하벨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선다는 것 자체가 또 무능해지는 것만 같았지만, 순간 감정에 휩쓸려 다른 것들을 망칠 수는 없었다.
가면을 벗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검게 너울 치는 바다의 모습을 눈으로, 가슴으로 담아두었다.
* * *
마법사의 탑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마을 근처에 양 뿔처럼 두 개의 얇은 건축물이 서 있었다.
겉보기에는 당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건물을 보호하고자 순찰하는 이들이며 사주경계하고 선 이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마을에서도 그 건축물이 들어선 곳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차 하나가 도착했다.
마차는 마법사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무슨 일이 있든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명령을 받지 않았던가.
마법사들의 시선이 빠르게 사나워져 갔다.
"멈춰."
그곳을 지키던 한 마법사가 다른 이들을 말리며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내가 먼저 확인한다. 적인지 아닌지 확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전과 달리 위에서 새로운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왕실에서 폭파 사건이 터진 후로 자신들을 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다.
평소 자신들이 근처 마을에 들렸을 때 언뜻 보이던 선망과 두려움 대신 매국노를 보는 듯한 시선이 이어져 오히려 눈치를 보게 되지 않았던가.
이번 폭파 사건과 관련해 협회장이 직접 마법사 협회와 관련 없다는 걸 밝혔지만, 솔직히 계속 찝찝한 상태였다.
내적으로 여러 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법사는 가슴팍에 달린, 이곳 담당자라는 걸 의미하는 배지를 바로 잡고는 살짝 긴장한 채로 마차에 다가갔다.
'아무 무늬도 없다.'
마차에 으레 각 가문의 문장이든 자신들을 나타내는 특정 문양을 붙이길 마련이지만, 아무 문양도 없는 그저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마차였다.
담당자 주변에 벌써 여러 명의 마법사가 호위처럼 둘러쌌다.
똑똑.
담당자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잠깐 확인을 위해 열어주십시오."
마차 문은 생각 외로 순순히 열렸기에 담당자는 긴장감을 더욱 바짝 세웠다.
예상외로 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갈 무렵, 집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내렸다.
"포탈을 여십시오."
명령 같은 저 말에 담당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포탈을 열어도 된다는 명령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 지금 열면 되겠네."
마차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당자의 시선이 마차 안쪽으로 향하자마자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아마 모르는 사람도 꽤 되겠지만, 적어도 자신은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은색에 바다를 뿌린 것 같은 머리카락과 비록 한쪽에 안대를 끼긴 했지만,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여러 색이 뒤섞인 에메랄드빛 눈동자.
'하벨… 티에라.'
담당자의 표정이 굳어지자 하벨의 눈이 휘었고, 그의 왼쪽 눈가에 찍힌 눈물점마저 덩달아 움직였다.
하벨 티에라가 맞았다.
모든 게 하벨 티에라를 가리키고 있었다.
몽글몽글.
천천히 주변에 물이 떠올랐다.
공격 의사를 내보였던 이들까지 물을 보고는 멍한 표정으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이제 포탈, 열어야지. 그렇지?"
하벨이 물을 흔들며 히쭉 웃었다.
물 마법사, 하벨 티에라.
수백 년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그 이름의 값어치는 과연 얼마나 높을까.
자신이 저 명령을 무시해도 되는 걸까.
담당자는 혼란으로 가득 찼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 땅에 마법사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던가.
"이건 명령과 다릅니다!"
그때, 한 마법사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물 마법사가 대수인가.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이 아닙니까. 정령사일 수도 있잖습니까! 저는 협회장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증오스러운 정령사의 핏줄이 흐른다는 게 중요했다.
쉬익.
그때, 마법사의 목 주변에 조용히 나타난 물이 넘실거렸다.
목덜미에 닿는 그 간지러운 느낌에 마법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할 테니,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십시오."
하벨이 되물었고, 담당자가 다급히 고개를 숙이자 물이 찬찬히 사라졌다.
'…물 마법사야말로 마법사들이 보호해야 하는 분이다.'
정령사에게 물을 빼앗긴 후에 많은 이들이 마법사들이 마나에게 버림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나는 여전히 마법사들에게 응답해주었으니.
하지만 딱 하나, 물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답을 해주지 않았기에 마나에게 버림받았다는 그 말만큼은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내 앞에 물 마법사가 계신다는 거다.'
하벨을 보는 담당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저분이야말로 마법사가 가진 오명과 흩어진 마법사들을 한곳으로 모을 수도 있는 희망이 아닌가.
"물론입니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담당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대로.
세상이 마법사를 핍박하고, 이 핍박에서 벗어나려면 마법사들이 뭉쳐야 하며 오직 마법사만이 세상의 위기를 구할 수 있다는 그 믿음대로.
고개를 숙였다.
담당자가 숙인 고개에 하벨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그렇지. 이거지.'
저들의 세뇌는 결국 마법사 우월주의를 위함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세뇌를 이용할 만큼 충분한 위치는 물론 저들의 바람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함부로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영문도 모른 채 담당자를 따라 마법사들이 한 명씩 고개를 숙였다.
* * *
웅웅.
밖에서 어렴풋이 포탈이 가동되는 소리에 담당자가 하벨에게 다가왔다.
[우, 우오옵. 온다, 온다. 대장한테 온다구!]
아라가 설레는 마음으로 발을 허공에서 동동 굴렀다.
미리 싸 들고 온 쿠키도 먹고, 차도 먹으며 휠체어에 깊게 기대어 앉던 하벨은 담당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다 됐어?"
"예. 이제 어서 들어가시지요. 짧게 가동된 만큼 금방 닫힐 겁니다."
"고마워."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물 마법사님을 뵐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담당자의 표정에 기쁨이 가득 하자 하벨은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아, 아닙니다."
그 손길에 담당자는 잠깐 환희로 물들다 곧 당황해하며 뒷걸음질까지 쳤다.
"고마워서 그래."
하벨은 진심을 담았다.
이 담당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손쉽게 포탈이 열리진 않았겠지.
'세뇌를 걸어준 걸 고마워해야 하나?'
하벨은 속으로 키득거렸다.
―미치셨습니까?
마차를 포탈 앞에 세우겠다는 말에 카샬이 단번에 언성을 높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보는 것처럼 미쳤다는 말이 나오기에는 자신이 가진 패가 너무도 유리했다.
'내가, 물 마법사가 마법사 협회에 찾아왔다는데 뭘 어쩔 셈인가.'
저 마법사들은 자신이 포탈을 타지 못하게 말릴 수는 있지만, 어차피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이번 일로 자신을 죽일 멍청한 놈이 어디 있을까.
'아니,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었겠지.'
하벨은 먼저 담당자의 손을 잡았다.
"그럼 갈게."
이름은 모르지만, 앞으로도 알 생각은 없지만, 하벨은 손을 가볍게 흔들고 밖으로 나갔다.
포탈을 탄다는 건 하벨이 가진 후유증과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웅웅웅.
두 건축물 사이로 포탈이 나타났다.
여전히 검은빛을 띠었고, 하벨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 너머에 마법사 협회가 있었다.
이 너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