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구경하러 왔는데요?
* * *
"도련님."
헤레스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벨은 심각한 표정을 짓는 헤레스를 힐끔 보다 먼저 대답했다.
끔찍했던 마법사 협회에 다시 돌아가는 셈이니 얼마나 두렵겠는가.
"에이, 걱정하지 마. 지금 이 몸으로 바다를 건너는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까. 포탈이 있다며?"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뭘 말하는 거야?"
"왜 하필 오늘입니까?"
하벨이 피투성이가 되어 카샬에게 업혀서 온 지 겨우 삼 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도중에 엘라힘의 힘을 한 번 더 빌리긴 했어도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었다.
평소와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지만, 하벨답지 않게 조급함이 엿보였다.
"뭔가 다급해 보입니다.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자신의 속내를 읽은 듯한 헤레스의 말에 하벨은 잠깐 주춤거렸다.
영혼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아버렸으니 마음이 촉박할 수밖에.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을까.
이미 제정신이 아닐 때 카샬에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마저 말해버리지 않았던가.
'거기에다가 그 사실까지 말한다면…….'
"제가 도련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을 그대로 하셨군요. 겨우 44일 차밖에 되지 않으신 도련님께서 뭐가 그렇게 급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카샬이 비아냥거리자 하벨은 창문에 비친 하벨 티에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았다.
기가 막혔다.
하벨은 여전히 창문에 손을 댄 채로 고개만 돌렸다.
"44일 차 맞으시잖습니까. 혹시 45일이었습니까?"
카샬이 입꼬리를 올리자 하벨은 구겨진 얼굴 그대로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열은 받지만, 사실이었다.
[어음, 44일 맞아!]
열심히 손가락, 발가락으로 숫자를 세던 아라가 배를 내밀며 당당히 말했다.
[우와아. 이 몸이 벌써 숫자 100을 향해 달리고 있어! 우와. 이 몸의 나이도 이제 세 자릿수가 되는 거야.]
"나는 아직 두 자릿수인데. 장난 아니다, 아라야."
'그건 아니야, 아라야, 용용아.'
하벨은 간지러운 입을 참아냈다.
아라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면서 저렇게 좋아하고, 칼리우스가 이를 맞장구치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도련님. 정말… 아무 이유가 없는 거죠?"
분명 넘어갔을 거라 생각했지만, 헤레스가 조금 전 물었던 질문을 재차 꺼냈다.
시선을 살짝 흘리던 하벨은 잠깐 망설이다 다시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아니야, 헤레스."
헤레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그렇게 보였다면 자신이 정말 흔들리고 있다는 셈이니 마음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마법사 협회 뒤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바안 전하의 즉위식이 공개된 이상, 또 뭘 꾸밀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일로 정신이 없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래."
폭파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레놀드 왕국의 대표였던 샬룸은 이미 떠났고,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표로 찾아온 게리온은 바안과 정식으로 손을 잡은 상태였다.
자신의 불안정한 영혼 때문에 하벨 티에라의 몸이 고장 나는 그 이유와 별개로 아직도 장례식장 사건과 폭파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 혼란이 가시지 않은 지금이 마법사 협회를 치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나는 네가 더 걱정이야, 헤레스."
하벨은 뒷말을 이으려다 참고는 주춤거리는 헤레스를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마법사로서 찾아가는 게 아닌, 의사로서 도련님을 따라왔으니까요."
"진짜 괜찮겠어? 꼭 오늘이 아니라 나중에 찾아와도 돼. 그때까지 살려놓을게."
"아니에요. 이번 일은 오히려 바라던 바입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법사 협회를 찾아오고 싶었어요."
헤레스는 차분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제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던 헤레스는 잠깐 말을 멈추고 뜨거워지려는 눈시울에 마른침을 삼켰다.
아라가 조용히 다가가 헤레스를 쓰다듬자 그녀는 기쁘게 웃었다.
"제가 검은 물을 만들고 그 광경을 본 뒤에 저에게 걸렸던 세뇌가 풀렸죠. 모든 게 끔찍했어요. 맨정신으로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 없게 된 그때부터 계속 저에게 마법사 협회를 나오라고 권하던 드웰 아저씨를 찾아갔어요."
드웰이라는 이름에 하벨은 불편한 기색을 힘껏 숨겼다.
헤레스도 그걸 알기에 드웰이라는 이름을, 그가 자신에게 건네준 따스함을 속으로 삼켰다.
"아저씨가 준비해준 대로 공식 절차를 통해 마법사 협회를 나오려고 했지만, 저를 놔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죽어버리겠다고 협박도 했지만, 소용없었죠."
헤레스의 눈동자가 잠깐 일렁거렸다.
자신의 길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간단하게 줄일 수 있게 된 상황이 너무도 기뻤다.
떠올릴 때마다, 말을 꺼낼 때마다 목에 가시가 걸려버린 것처럼 따끔거리고 괴로웠으니까.
헤레스는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저를 도와준 게 크라마였어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마법사 협회를 탈퇴한, 제가 봤던 마법사 중 크라마가 유일했으니까요."
"크라마는 어떻게 마법사 협회를 탈퇴하게 된 건데?"
하벨은 조심스레 물었다.
크라마는 칼리우스를 쫓았던, '늑대'라고 불린 집단의 우두머리였다.
마법사 협회에서 꽤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헤레스는 안경테를 올렸다.
"보내주지 않는다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들고 페트리오를 찾아가겠다고 말했대요."
페트리오 이야기가 나오자 카샬은 미간을 찌푸렸고, 하벨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좀도둑을?"
"네. 당시 귀족 중에서 마법사 협회를 가지고 싶은 자들이 많았나 봐요. 그때 페트리오 씨가 유명했잖아요."
"하긴. 그랬다고 했지."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트리오가 나라도 휘청거리게 했는데 협회가 대수롭겠는가.
"저도 비슷한 방법을 써먹었죠. 제가 만든 마법이니 취약한 부분을 퍼트리겠다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운이 좋았죠. 그때는 진짜 취약한 부분이 많았거든요. 마나를 움직일 수 있다면 누구나 파훼할 수 있을 정도로요."
헤레스는 하벨이 먼저 묻기 전에 그가 원하는 걸 넘겼다.
"이게 솔직히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벨은 헤레스에게 받은 종이를 살폈다.
"제 기억력에 의존해서 검은 물, 아니, 오미너스를 유지하는 마법의 허점을 몇 가지 추렸어요. 더 정확한 건 지금 오미너스에게 어떤 마법이 시전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해요."
"이걸 알게 되면 마법을 파훼할 방법을 손에 넣는다는 말이지?"
"예. 맞습니다.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제 마법을 바탕으로 운용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마법사 협회에 다시 갈 수 있는 날을 쭉 바라고 있었어요."
그제야 헤레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신이 바라던 부분은 하벨이 이뤄주지 않았던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거나 패배자가 되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다시 마법사 협회에 찾아가는 게 아닌, 포식자이자 모든 걸 바로 잡을 희망을 품은 상태로 마법사 협회에 다시 돌아왔으니.
"그래서 저는 도련님이 걱정입니다."
헤레스는 자신을 걱정하는 하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벨이 지는 싸움을 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법사 협회가 가까워질수록 어딘가 일어나는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헤레스야. 나는 그분이… 걱정이란다. 아마 궁지의 끝까지 내몰리고 계실 테니 네가 잘 봐야 한다.
드웰에게 여러 가지를 묻던 와중, 그가 망설이고, 망설이다 꺼낸 말이 아닌가.
'궁지에 내몰리다'라는 말은 하벨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심지어 그 궁지의 끝까지 내몰렸다니.
안경 너머로 드러나는 헤레스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 달려 있었다.
"오늘은 말이에요. 평소와 달리 주춤거려도 괜찮습니다. 도련님께서 가지신 '물 마법사'라는 부분은 저들에게 너무도 크기에 더 시도할 기회가……."
"괜찮다니까, 헤레스.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실패하러 가는 것도 아니야."
[마, 맞아. 대장은 그러지 않을 거야.]
아라는 힐끔힐끔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사실 아라도 하벨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 조금 무서웠다.
"다들 나한테 용용이라는 훌륭한 아군이 있다는 걸 잊었어?"
하벨이 꺼낸 그 말에 아라는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한껏 으쓱거렸다.
[맞아! 용용이는 엄청 대단하지! 용용이는 이 몸의 친구야!]
"다만, 헤일리스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게 많이 걸려."
"…아. 헤일리스라면, 음."
헤레스는 하벨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이것저것 생각하려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하벨은 걱정되는 게 하나 더 있었다.
헤일리스에게 랜턴이 반응하지 않았다.
마법사 협회가 지금까지 한 행동들을 종합한다면 마법사가 바라는 세상을 위한다는 목적 뒤로 세상의 멸망에 이바지하고 있지 않은가.
랜턴에 반응이 없다는 건 저 행동들이 결국 쓸데없는 노력이었다는 걸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이 미친 짓이 세상을 위한다는 말인지.
'…개소리.'
하벨은 단번에 자기 생각을 뒤엎어버렸다.
아무리 자신이 꺼냈어도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봐, 하벨 티에라. 대체 무슨 말인지 나한테 그냥 속 시원하게 공유해.'
하벨은 신경질적으로 랜턴을 건드렸다.
이번 장례식 사건을 포함해 폭파 사건까지. 랜턴에 검은 불꽃이 들어왔던 적은 딱 한 번이었다.
그마저도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기에 진짜 제대로 작동한 건지 아닌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려면 제대로 지목해주든지. 이러면 나보고 어쩌란 건지.'
하벨은 솟구치는 생각을 억눌렀다.
이것저것 생각해봤자 당장 눈앞에 둔 중요한 일을 뒤흔들 뿐이었다.
"헤레스 씨. 혹시 헤일리스 옆에 있던 양갈래를 딴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를 보셨습니까?"
이야기를 듣던 카샬은 이전에 레디나가 했던 말이 떠올라 말문을 열었다.
―카샬. 제 말 좀 들어봐요. 지금까지 헤일리스 뒤에는 항상 같은 사람이 붙어 있던데, 뭔가 이질적인 기분이 드네요. 사람을 많이 죽인 저로서 의심이 들만한 구석이 꽤 많아요. 이거 그냥 제 기분 탓일까요?
'나도… 본 적이 있다.'
하벨은 기억을 더듬었다.
바안을 만난 뒤, 복도에서 쿠키를 먹다가 갑자기 랜턴에 나타난 검은 불꽃에 주변을 살피다가 카샬이 말한 그 소녀를 보았다.
묘하게 시선을 끌지 않던가.
"봤습니다. 아주 많이 봤죠. 이름은 시렌이고, 헤일리스의 말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헤레스가 입을 열었다.
"음. 시녀 같은 위치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헤일리스하고 엄청 가깝다는 거지?"
"맞아요. 헤일리스와 떨어져 지낸 걸 본 적이……."
하벨의 물음에 대답하던 헤레스가 이를 차차 이상하게 생각하더니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의 없네요?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시녀 역할을 한다면서요. 시녀 역할을 담당했으면 따라다니는 건 당연합니다. 도련님을 보십시오. 제가 잠깐 한눈을 팔면 사고를 치고 있지 않습니까?"
도리어 카샬이 헤레스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집사였기에 품을 수 있는 의문이었다.
"아니. 나를 왜 걸고넘어져?"
하벨이 기가 찬 소리를 내자 카샬은 활짝 웃었다.
"사실이니까요, 도련님."
"음. 애초에 시렌은 진짜 시녀가 아니에요. 헤일리스를 모시는 마법사들이 따로 있었거든요. 그럼 시렌이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일 뿐인데, 왜 계속 붙어 있는 거죠?"
헤레스가 꺼낸 말에 하벨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설 하나가 떠올랐지만, 하벨은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가서 제대로 확인하면 되겠네. 시렌이라는 자가 어떤 존재인지."
하벨은 손에 들고 있던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했다.
"좀도둑."
<예, 도련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페트리오가 대답했다.
"바안은?"
<그렇지 않아도 방금 보고를 들었습니다. 한순간이지만, 마나를 차단할 수 있는 결계를 내부와 외부에 설치 중이며 대략 1, 2시간 뒤에 완성이 될 것 같다고 합니다.>
[오오. 1, 2시간 뒤라면 금방이잖아? 대단하다.]
아라는 평소처럼 연락용 아이템을 향해 귀를 댔다.
3일 전, 하벨 자신은 페트리오에게 연락해 크라마한테 여러 가지를 물었다.
특히, 마법사 협회를 무너트리려고 하는데 준비가 됐냐는 물음에 크라마는 제법 비장하게 말했다.
―…가능합니다. 지금 도련님께서 저희를 한자리에 모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땅에 저택을 짓기 위한 인부든, 심부름꾼이든, 상인이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입니다.
고마움까지 섞인 그 말을 이어 마법사 협회를 무너트리기 위해 크라마가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마법사 협회와 통하는 물길이 있습니다. 제가 몇 년 동안 땅속 동물들을 시켜 해오던 작업입니다. 내부와 외부에 언젠가 작동하기 위해 대략 청사진만 그려뒀던 결계 또한 있습니다.
그 말에 자신은 바로 칼리우스에게 부탁했다.
장로들을 움직여달라고.
오늘 이렇게 마법사 협회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마법사 협회 내에 모든 장로가 칼리우스에게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크라마가 청사진으로 만들어뒀던 결계가 작동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이 마법사 협회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도 전부 그 장로들 덕이었다.
'이러니까 내가 이 기회를 포기할 수가 없지.'
여러 가지 불안함을 잠재울 정도로 시기가 좋았기에 하벨의 미소가 잔잔히 퍼져갔다.
"그래. 크라마 쪽은 이제 준비가 됐다면 너는 어떻게 됐어?"
페트리오가 맡은 주 역할은 마나가 차단되는 동안 마법사 협회 내부에 크라마가 파둔 물길을 따라 이동해 기습하는 역할이었다.
<뒷세계에 사는 이들이 무얼 제일 잘하는지 잊었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부정한 것들 역시 치워놓은 상태고요.>
자신감 넘치는 페트리오의 목소리에 하벨 역시 입가에 웃음꽃을 피웠다.
언제 봐도 제일 든든했다.
"잘난 척은."
카샬이 빈정거렸고 하벨은 이를 고스란히 알려주었다.
아까 자신한테 44일 차, 45일 차 거리지 않았던가.
"카샬이 너보고 잘난 척한대."
<지랄 떨지 말고 도련님이나 잘 모시라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혀 망설임 없이 꺼내는 페트리오의 말에 하벨은 웃음을 터트리며 한껏 미간이 구겨진 카샬을 보았다.
"그렇다는데, 카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