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스승님?(3)
* * *
"지금 경고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카샬이 물었음에도 도멘은 하벨을 지그시 보더니 어깨를 살며시 눌렀다.
"……?"
하벨은 자신의 몸으로 오는 어떤 기운에 갑자기 다리가 풀려 침대에 걸터앉아버렸다.
기껏 멈췄던 속이 갑자기 들끓었다.
"걱정하지 말게. 그냥 몸에 힘을 풀어버린 거……."
말하다 말고 도멘의 눈이 커지고, 카샬이 기겁하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이 입을 막았지만, 입안에 피 맛이 감돌았다.
다급히 카샬이 손수건을 꺼냈다.
"괜찮으십니까? 당장 헤레스 씨를 불러오겠습니다."
하지만 하벨이 손수건을 잡은 손을 흔들며 카샬을 말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어떻게 된 것 같습니까? 기껏 가라앉혔던 도련님 몸속의 푸른 돌을 스승님께서 뒤흔드신 거죠!"
카샬은 도멘을 향해 매섭게 쏘아붙였다.
자신도 많이 당해본 거라 저게 무엇인지 알기에 더욱 열이 받았다.
마나를 통해 몸속 전체를 뒤흔드는 기술이 아닌가.
일반 사람에게는 그저 갑자기 힘이 빠진 걸로 그치겠지만, 하벨은 아니었다.
헤레스가 하벨을 진찰할 때도 그녀가 가진 마법으로 일부의 푸른 돌만 흔들며 크기를 가늠하거나 마법으로 푸른 돌이 더는 움직이지 않게 억지로 흐름을 멈추질 않던가.
그만큼 하벨의 몸에 푸른 돌이 가득했고, 특히 비가 온 뒤에는 가만히 있던 푸른 돌이 무언가에 홀린 듯 움직인다고 했다.
"…푸른 돌이라고 하면."
도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 뭐가 있겠습니까? 물의 저주이지요, 스승님."
까드득.
카샬이 이를 갈며 정화 장치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단번에 거품이 올라오자 카샬은 주사기를 꺼냈다.
"미,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도멘은 당황했다.
물의 저주를 앓는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반응하진 않았다.
하벨 티에라가 물의 저주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다른 이도 아니고 그 유명한 정령사 가문인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인데.
보자마자 힘도 없으면서 서 있으려고 용을 쓰는 게 보기 안쓰러울 정도라 그냥 딱 앉혀놓으려 했을 뿐이었다.
"사람을 베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면 퍽이나 고맙게 느껴지겠습니다."
"……."
카샬의 빈정거림에 도멘은 말을 멈췄다.
긴 숨을 내쉬던 도멘은 하벨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하벨 티에라. 내, 추후 그대의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 약조하겠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라고 카샬에게 누누이 말했던 건 바로 자신이었다.
제자에게 부끄럽지 않은 스승이 되는 것.
그게 도멘 자신이 세운 긍지였다.
"그……."
뭐든 공짜로 얻는 건 즐거운 법. 하벨이 입을 열려다 말고 다시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렸다.
손수건이 또 붉어졌다.
"…말씀하지 마십시오. 눈빛만 봐도 알겠습니다."
카샬은 바로 고개를 돌려 도멘을 쳐다보며 대신 말을 전해주었다.
"도련님이 좋다고 하시네요."
"제자야."
"예, 스승님."
"뺨 한 대만 쳐봐도 되겠더냐?"
"미치셨습니까? 진짜 노망이라도 들었습니까? 갑자기 왜 제 뺨을 치겠다는 겁니까?"
"아니, 네가 이렇게 오냐오냐하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진짜 노망이 들었나 싶은 생각이 몰려와서 그렇구나."
"그럼 스승님의 뺨을 치셔야죠. 직접 아파봐야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능할 테니까요."
"예끼. 제자가 스승한테 하는 말이 어찌 저리도 고운지."
"저도 변합니다, 스승님.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여전하십니다. 막무가내인 점이나, 앞뒤 따지지 않는 면이나 완전 똑같네요."
카샬이 비웃음을 그리자 도멘은 싱긋 웃더니 그의 등을 때렸다.
짜악!
경쾌한 손놀림에 카샬이 온몸을 비틀며 아파하자 하벨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린 상태에서 '풉'하고 웃고 말았다.
입안에 여전히 피 맛이 맴돌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우리 제자님이 오늘 매를 버시네. 오늘은 제자님을 위해 이렇게 찾아왔다니까? 이 정도면 엄청 달라지지 않았나 싶은데."
"…손찌검은 여전하시잖습니까."
"소리만 요란하지, 피부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거 알 텐데?"
도멘은 씩 웃었고, 카샬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 말은 사실이었다.
얼마나 많이 당해왔는가. 또 억울함이 번져갔다.
"그러니까 여전하시……."
"요새 에르티안 왕국에서 벌어진 폭파 사건 때문에 나라가 떠들썩한 건 알지만, 그래도 레놀드 왕국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지 마렴."
도멘은 꽤 진지한 표정을 짓다 다시 손을 들었다.
한껏 경계하는 카샬의 모습에 도멘은 화사하게 웃으며 카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샬은 놀란 눈으로 도멘을 바라보았다.
"그걸… 전해주려고 왔습니까? 그 정도라면 아까 화살에 쏜 그 쪽지에 썼어도 됐을 텐데요."
"화살이야 내 환영 인사였고, 널 보러 왔단다."
"저를… 말입니까?"
"네가 너무 보고 싶었으니까, 제자야. 오랜만이구나."
도멘은 그제야 카샬을 안았다.
당혹감으로 물들어가는 카샬을 보며 하벨은 괜히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놀릴 게 하나 생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조용히 손수건으로 다시 입을 가렸다.
"이제 됐다."
도멘은 만족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오랜만에 보기도 봤고, 더 보고 싶지만 아마 슬슬 자신이 자리를 비웠다는 걸 눈치챌지도 몰랐다.
도멘은 하벨을 바라보았다.
카샬이 티에라 가문의 집사로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조금 화가 나기도 했으나 어쩌겠는가.
그게 카샬이 선택한 길이었다.
"못난 제자지만, 계속 부탁하겠네."
"그 전에 한 가지 묻겠습니다."
하벨이 입가를 가렸던 손수건을 내렸다.
"말해보게."
"왜 레놀드 왕국으로 가지 말라는 겁니까? 그걸 여기서 밝혔다는 건 저한테도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하벨이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여 꺼낸 말에 도멘은 기특한 표정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제자 놈이 그래도 보는 눈은 있네. 적어도 멍청이는 아니었다니.'
탐탁지 않던 도멘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다.
아니, 처음 봤을 때부터 나이에 맞지 않는 깊이 있는 하벨의 눈동자와 시선을 끌어 잡는 분위기에 도멘은 하벨이 소문과 너무도 다르다는 걸 알았다.
도멘은 일단 슬쩍 하나를 던졌다.
"이게 정확한 게 아니기에 아직 말을 하기가 어렵지만,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네. 그러니까 휩쓸리지 않게 미리 오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네."
"제가 물 마법사라서요?"
하벨이 방긋 웃자 도멘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네. 본인을 아주 잘 알고 있다니. 걱정을 덜어 다행이라네."
"알겠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지금 전 많은 것들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아니라네. 오히려 내가 더 미안했네. 몸 상태가 나빠지지 않길 빌며 다시금 사과하겠네."
도멘은 하벨에게 재차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에도 그랬지만, 인사마저도 꽤 각이 잡힌 모습에 하벨은 이를 그냥 흘리지 않았다.
관직에 몸을 담던 사람이 아닐까.
"이미 하나를 받았으니 충분합니다. 그럼 당신을 어떻게 찾아가면 되겠습니까?"
"카샬이…… 아니, 음. 그대의 아버지께 물어보게."
"가주님한테요?"
카샬이 오히려 놀라며 물었다.
갑자기 룬델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잠깐 머리를 굴려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아. 내가 말하는 걸 그만 잊어버렸지 뭔가. 룬델은 내 친우지."
"……."
카샬이 그대로 멈췄다.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카샬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가… 주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룬델을 원망하지 마렴. 룬델도 몇 개월 전에 나 때문에 알게 됐고,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럼 됐습니다. 원망 안 합니다."
카샬은 그제야 안도했다.
룬델이 자신에게 친절했던 게 설마하니 도멘의 제자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배신감이 크게 요동치고 말았다.
하지만 역시나 자신이 봤던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다.
룬델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자신을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서툴러도 혼내는 것 없이, 오히려 적응이 어려울까 봐 얼마나 많이 보듬어주었던가.
"룬델이 정말 멋진 놈이라는 건 알지만, 그곳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더냐?"
"예. 티에라 가문은 이제 제집입니다."
도멘은 그 대답이 몹시 섭섭했지만, 이건 자신의 탓이 컸다.
카샬이 울타리를 막 치고 있을 때, 다 컸다 생각해 카샬을 두고 훌쩍 떠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카샬은 자신이 아닌 티에라 가문에 뿌리를 박았겠지.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스승님. 제 첫 번째 집은 스승님이니까요."
마음을 살살 달래는 카샬의 말에 도멘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 고맙구나."
"스승님."
"그래, 제자야."
카샬은 도멘의 대답을 들으며 잠깐 하벨을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에 하벨은 며칠 전에 카샬이 스승님을 언급하며 이어 꺼냈던 말을 떠올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승님께서 용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카샬의 스승이 용을 찾으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충격이었다.
당연히 용이 없을 거라 생각한 카샬과 너무도 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던가.
'그때 카샬의 스승이 어떻게 용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하벨은 도멘이 여전히 위험한 인물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샬을 믿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카샬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임무의 결과를 당당히 보고했다.
"용을 찾았습니다."
"뭐라… 고 하였더냐?"
"용을 찾았습니다, 스승님."
카샬의 보고와 함께 도멘의 눈빛이 순간 매서워졌다.
소곤소곤.
물이 하벨에게 속삭이자마자 그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향하는 살기를 느꼈다.
거대한 살기.
하지만 하벨은 평온했다.
까드드드득!
카샬이 검을 뽑아 도멘이 찌르는 팔을 막았고, 하벨은 그저 도멘을 바라보았다.
찰랑찰랑.
도멘의 목덜미에 이미 날을 세운 물이 닿아 있었다.
"더 힘주면 제자의 검이 부서지는 것보다 목이 날아가는 게 먼저겠지요?"
하벨은 웃었고, 도멘은 이를 세게 악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실까."
하벨이 위를 올려다보며 눈꼬리를 살짝 올렸다.
"왜 이러십니까, 스승님? 진짜 미치셨습니까? 지금 누구를 죽이려 했는지 아시는 겁니까!"
도멘을 막은 카샬의 검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가 그 사실을 발설하라고 했더냐, 카샬!"
도멘이 살기를 드러내자 하벨은 정신 좀 차리라고 물을 가볍게 튕겼다.
도멘은 뒤로 물러섰고, 핏대가 선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
그제야 도멘이 왜 이러는지 알자 하벨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용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멘은 지금 한 가지를 착각하고 있었다.
"제자를 믿지 못하는 스승이라니. 정신 차려라, 도멘아."
하벨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지금 네 제자가 모시고 있는 자야."
도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덤으로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 진짜 나를 죽일 수 있을까?"
하벨은 다리를 꼬며 턱을 괬다.
"날 시험하는 거라면 여기 멈춰야 할 거야. 내 인내심은 바다보다 더 깊지만, 이런 건 용서 못 하거든."
"…오냐. 배신하지 않을 건 분명하니."
도멘은 카샬을 힐끔 보더니 곧 살기를 거뒀다.
순간 욱한 건 잘못이지만, 자신은 카샬을 믿지 하벨을 믿지 않았다.
"그만 좀 보거라, 카샬. 얼굴이 뚫릴 것 같으니."
"스승님. 이건 정말 무례했습니다!"
"무례가 아니라 당연한 절차였다, 카샬. 널 믿지만, 하벨 티에라를 내가 어떻게 믿겠더냐?"
"에이, 그런 거라면 말로 하셨어야죠."
하벨은 물을 거두며 조금 전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았다.
"용이 절 좋아하거든요. 절 죽였으면 끝날 뻔했잖아요."
"요, 용이 널?"
도멘이 말을 더듬었다.
"왜? 믿기 힘듭니까? 하지만 믿어야 할걸요. 용을 데려온 게 바로 접니다."
하벨은 다시 자세를 풀고는 다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럼 이제 어서 가시죠. 오늘 이렇게 업보를 쌓으셨으니 하나 더 내놓으신다고 알고, 차후에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똑똑!
하벨이 손가락으로 정령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리키기도 전에 꽤 거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금방이라도 정령 기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기에 하벨은 고갯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카샬, 어서 달래줘. 별일 아니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스승님."
카샬은 한 걸음 떼다 말고 도멘을 바라보았다.
"방금 일은 너무 놀라, 말이 험해져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스승님을 뵙게 되어 기뻤습니다."
잠깐 웃는 카샬의 모습에 도멘 역시 미소를 지었다.
저럴 때 보면 어릴 때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카샬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끼고 있죠. 저렇게 잘났는데 왜 안 그러겠습니까?"
"내 제자니 당연하지 않은가."
하벨은 흡족해하는 도멘의 표정에 창문을 가리켰다.
"그럼 이제 안심하고 가시죠. 창문으로 말입니다."
"정말 실례했네."
도멘은 품을 뒤지더니 여러 가지 색으로 빛이 나는 얇은 천을 넘겼다.
"부디, 용을 지켜주게. 조금 전 실수했지만, 지금은 믿고 있네."
이 천의 용도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은 채로 도멘은 들어왔던 그대로 창문 너머로 움직였다.
"잠… 하아."
하벨은 카샬이 스승 이야기를 꺼낼 때 왜 이를 갈았는지 조금은 이해했다.
순 자기 마음대로가 아닌가.
* * *
"…와아. 진짜 높다."
창문에 붙은 하벨이 입을 살짝 벌리자 그 옆에 덩달아 붙어 있던 아라까지 꼬리를 흔들었다.
[응응응! 이 몸은 끝이 보이질 않아!]
"저 탑이 쓰러지면 진짜 재밌겠다, 그렇지?"
[쓰러지면, 어음, 사람들이 엄청 다칠 텐데?]
"당연히 농담이지, 아라야."
하벨은 아라를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무너트리려고 했는데, 일단 미뤄두려고."
"…결국, 그게 그거 아닙니까?"
카샬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단지 미룰 뿐, 마법사의 탑을 결국 무너트린다는 말과 대체 뭐가 다를까.
카샬은 슬쩍 시선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법사의 탑이 있는 섬 하고 거리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고 해도 벌써 걱정이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