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스승님?(2)
* * *
"…다른 이유는 없어?"
칼리우스는 뭉클하게 일어나는 감정에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자신이 자신이라서 친절한 거라니.
"없어."
단호하기까지 한 하벨의 대답에 칼리우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
"자, 어서 가."
하벨은 칼리우스의 손등을 가볍게 쳤다.
"돌아올 때, 자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놀라지 말고."
[응응! 괜찮아. 이 몸도 대장 옆에서 잘 거야!]
아라가 하벨에게 날아와서 꽉 안아주었다.
[대장은 이 몸이 옆에서 자도 모를 정도로 잘 자고 있어야 해?]
"그래. 잘 자고 있을게."
벌써 하벨의 눈동자가 반쯤은 감겨왔다.
몸이 아프니 잠이 미친 듯이 몰려오는 게 신기했다.
"도련님."
칼리우스가 숨을 섞으며 말했다.
"내가… 좋아?"
"그럼."
이전에는 머뭇거렸겠지만, 지금은 편안하게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갖는 그 상황이 특정 세력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세력을 견제해야 할 목적으로 사용될 이유 역시 없었으니.
천천히, 느리더라도 하나씩 변화하고 배우려는 그 모습이 왜 어여쁘지 않을까.
"정… 말?"
"그래. 정말이야, 용용아. 네가 좋아."
하벨은 손을 뻗어 칼리우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왜 모를까, 칼리우스가 얼마나 애정을 갈구하는지.
가장 가까이 있는 헤레스는 물론, 정령들 역시 그걸 알기에 칼리우스에게 친절하게 대할 테고.
화르르륵!
랜턴에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이전보다 반은 줄어든 그 불꽃을 보던 하벨은 더욱 활짝 웃었다.
하벨 티에라가 회귀하기 전 칼리우스는 이 작은 말조차 너무도 큰 기쁨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외로웠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게 아니라면 칼리우스의 커다란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흐르지 않을 테니.
* * *
"…도련님."
카샬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막 잠이 오려던 참이었기에 하벨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너무도 커다란 말을 내뱉었으니까.
"정말… 죽으셨습니까?"
"그래. 사실이야."
"그게……."
"엄청 궁금했지?"
카샬은 자신의 물음에 망설이고,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안해, 카샬."
"뭐가… 미안한 겁니까?"
"쓸데없는 말을 했잖아. 괜한 말이고,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었는데."
"쓸데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받아들이기 힘든 말입니다."
"알아. 그래도 아예 모르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알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내질러버렸어. 미안해."
"…진짜, 도련님들은 왜 이렇게 다 손이 가는지."
카샬은 숨을 길게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전 하벨 티에라도, 지금 하벨 티에라도 죄다 제멋대로였다.
"너도, 그랬잖아."
하벨이 꺼낸 말에 카샬은 멈칫거렸다.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도 제멋대로인, 아니다. 이건 네 문제니까 네가 먼저 꺼내야지."
하벨은 말을 더 꺼내려다 멈췄다.
지금 카샬에게 이야기해야 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할 텐데 이보다 더 복잡하게 할 순 없었다.
"어젠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어."
하벨은 두 개로 늘어난 링거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따라가면 카샬이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압니다. 그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습니다."
"날 죽인 그놈의 힘이 느껴졌어. 갑자기 말이야."
"누가 도련님을 죽였는지 아십니까?"
카샬의 시선이 날카로워지자 하벨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카샬."
"예."
"나는 다른 세계에서 왔어."
"……?"
"그곳에서 나는 왕이었고."
하벨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그리고 죽었지."
"왜……."
"배신이었어. 나는 배신당해 죽었어, 카샬."
슬픔이 쌓이고, 쌓이다 못해 아주 단단한 벽처럼 변해버린 그 모습에 카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이 희미한 와중에 꺼낸 헛소리도 아니었고, 자신에게 심심할 때마다 꺼내는 말장난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게 진실이었다.
카샬은 눈을 떠 하벨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더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전부야. 그러니까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슬퍼하지 말라고. 나는 어차피……."
"도련님!"
카샬의 언성이 단번에 높아졌다.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됩니다."
"카샬. 처음에 내가 이 몸을 하벨 티에라에게 돌려주겠다고 당당히 말했지만, 이제 점점 자신이 없어져. 이 말을 가주님께도 꺼내지 못했고."
하벨은 숨을 겨우 토해냈다.
약속은 신의와 마찬가지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걸 경험을 통해 배워왔다.
하지만 약속을 하더라도, 지키려고 노력하고자 해도 하지 못하는 게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
"이상하게 다들 그렇게 말하네. 그럼, 하벨 티에라가 섭섭할 텐데."
"그건 모두 이전 도련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이게… 슬프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그건……."
"알아. 사라진 그 상황이 슬프지만, 하벨 티에라가 한 선택을 존중하는 거겠지. 무엇보다 본의 아니게 그 빈자리를 내가 채웠으니까."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련님. 정확히 누구인지 못 알아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후로 이전 도련님을 대신해서 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변한대로 제가 맞춰갔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고요."
카샬은 웃음기를 쫙 뺀 상태에서 이대로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하벨 티에라를 입에 올렸다.
"이전 도련님께서는 지금 도련님과 달리 유약하신 분이셨습니다. 칼리우스를… 많이 닮으셨죠."
그 말에 하벨은 자신이 만났던 하벨 티에라를 떠올려보았다.
유약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이었다.
자신에게 멋대로 많은 것들을 떠넘기지 않았던가.
얽매이지 않겠다, 얽히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했지만, 하벨 티에라 때문에 이미 하나씩 엮여버렸다.
하지만 하벨 티에라의 기억을 볼 때마다 느꼈던 이유 모를 불안감만큼은 확실히 유약하다고 할 수 있었다.
"도련님."
"그래."
"이미 어지럽게 펼쳐진 이 상황이 많이 힘드십니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 느낌이 어떤 건지 모르고, 알 수도 없었다.
이해한다는 말은 사치이며 오히려 새롭게 다가온 이 환경 자체가 하벨에게 있어 지옥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카샬의 물음에 하벨은 잠깐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하벨의 눈동자에 많은 감정이 엿보였다.
"…미안했어."
하벨은 잔잔히 목소리를 냈다.
자신이 티에라 가문의 소중한 막내를 빼앗았다는 그 죄책감에 너무도 미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행복해."
말을 내뱉다 말고 하벨은 피식 웃었다.
"이게 내 행복이 아닌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어쩌면 역겨울 수도 있지만, 나는 지금 정말 행복해."
잠깐 하벨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들이 내 손에 들어왔거든."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누군가와 호흡하며 행동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줄 몰랐다.
다시는 느껴보지 못할 것들이라 생각했기에 기뻤다.
"지금 느끼고 있는 건 오로지 도련님의 행복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카샬은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하벨 역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카샬은 하벨의 이불을 끌어 올려주었다.
"제가 너무 많은 말씀을 하게 했습니다. 이제 그만 주무십시오."
"카샬."
"예, 도련님."
"미안하고, 고마워."
아주 낯선 하벨의 모습에 카샬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말도 할 줄 아시는군요."
"그럼. 나는 자애가 넘쳤으니까."
"많이 졸리신 모양입니다. 그만, 주무십……."
카샬이 피식 웃다 말고 말을 멈췄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바람 소리가 달라졌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을 조금 더 열고 밑을 지켜보다 말고 아코가 튀어나왔다.
[뒤로 물러나!]
쉬이익!
아코가 바람을 역으로 일으켰고, 카샬은 손쉽게 화살을 쥐었다.
"…또 뭐야? 어떤 미친놈이 화살을 날린 거야?"
하벨은 벌써 상체를 일으키고 제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물었다.
기가 찬 표정을 짓던 카샬은 화살에 달린 편지를 보며 대답했다.
"제… 스승님입니다."
"어, 음. 어, 아주 훌륭하신… 분이네."
어색한 웃음이 하벨의 입가에 맴돌았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던 하벨은 문득 카샬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음, 누군가를 봤는데. 아는 사람이랑 너무 똑같아서 저도 모르게 찾고 있었습니다.
왕실에서 아는 사람을 봤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사람은 제 스승님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 사람이 스승이라는 말까지 꺼냈고.
"그때 네가 말했던 그 스승님이야?"
"예. 제게 스승님은 한 분뿐이니 일단 앉아 계십시오. 은근슬쩍 일어나실 생각하지 마시고요. 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카샬은 화살 끝에 매달린 쪽지를 열어보았다.
―창문 열어라, 제자야.
어이가 없는 그 말에 카샬은 당장 쪽지를 구겼다.
"왜 그래?"
쪽지 내용을 알 리가 없는 하벨은 의문을 띄우며 카샬을 바라보았다.
똑똑.
갑자기 창문에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하벨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한 남자가 손을 흔들며 서 있지 않은가.
"어서 열거라. 들킬라."
"…스승님."
카샬이 눈을 찡그리며 창문을 열었다.
이곳이 왕실임에도 제집 드나들 듯 버젓이 빈방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스승밖에 없을 테지.
남자는 창문 틈을 가볍게 통과해서는 바닥에 낙법을 시도한 뒤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오, 제자야."
카샬보다 한 뼘 더 큰 키를 가진 남자는 팔을 벌렸다.
얼굴에 사선으로 그인 흉터가 있어 활짝 웃는 표정을 따라 흉터가 꿈틀거렸다.
"미치셨습니까?"
"에잉, 미치다니. 널 보러 이리 위협을 감수하고 왔는데? 너무 섭섭하구나."
"여기가 에르티안 왕실인 거 모르십니까?"
"아직 노망나지 않았으니 언성부터 낮춰라. 여기가 어디인지 잊었더냐?"
아주 손쉽게 치고 들어오는 스승의 말에 카샬은 금세 짜증이 일어났다.
스승님을 보지 못한 지 벌써 2, 3년이 되어감에도 반가움보다 짜증이 먼저라니.
"내가 슬쩍 흔적을 내보였고, 너도 내 흔적을 대충 확인했으니 어렴풋이라도 예상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이것 참 새롭구나."
남자는 카샬이 짜증을 내든지 말든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힘껏 두드렸다.
"…그런데 누구인가?"
남자는 호쾌하게 웃다 말고 고개를 살짝 내리더니 하벨을 바라보았다.
딱 보아도 비실비실한 게 톡 치면 죽을 것만 같지 않은가.
"안녕하세요."
하벨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 반갑네."
남자는 카샬보다 더 자신을 반기는 모습에 흡족하게 웃었다.
"하아."
카샬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이 근처에 정령들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한층 강화된 왕실의 경계를 뚫고 자신에게 찾아온 스승의 행동에 별다른 말이 없는 하벨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인 하벨 티에라입니다. 제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모르시지 않겠죠."
카샬은 일단 침착하게 하벨을 소개했다.
이미 하벨에게 여러 가지를 들어버렸으니 자신도 기꺼이 하나를 내어줄 수 있었다.
"예. 저는 하벨 티에라입니다."
하벨이 활짝 웃었지만, 남자는 순간 그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널 집사 노릇이나 하라고 키운 게 아닌데 말이야."
"그럼 돈 좀 두둑이 챙겨주셨어야죠. 안 그렇습니까, 스승님?"
"그렇지. 돈을 두둑이 챙겨줬어야 카샬이 그렇게 돈돈 거리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하벨이 태연하게 꺼낸 말에 카샬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고, 카샬의 스승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초면에 실례하지만, 저를 빤히 보는 것보다 허락 없이 제 방을 찾아온 일을 사과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는데요?"
"푸하하학!"
남자는 그 말에 그만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며 카샬의 어깨를 몇 번이나 때리자 그는 매섭게 남자의 손을 내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자연스럽게 카샬의 손길을 피하며 여전히 어깨를 내리쳤고, 덩달아 카샬의 얼굴을 구겼다.
"아직 멀었구나."
남자는 카샬을 향해 낄낄 웃었다.
"…망할."
성질을 내는 카샬을 웃는 낯짝으로 힐끔 쳐다본 뒤 남자는 하벨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실례했네. 나는 카샬의 스승인 도멘이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하벨은 도멘이 상당한 실력자임은 방금 일로 알 수 있었다.
―음. 몇 년간 못 봤습니다. 어디서 뭘 하시는지, 뭘 하면서 돌아다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어딘가 잘 살아계시겠지요.
카샬도 스승의 흔적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카샬 앞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저 아둔한 제자에게 경고 하나를 해두러 왔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도멘이 입꼬리를 길게 올리자 그의 얼굴에 그인 흉터가 사납게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