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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07화 (207/415)

207화. 그놈이…(3)

* * *

'이게…….'

생각을 잠깐 멈췄다.

그만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자신이 흘린 피에서 난데없이 문자가 튀어나왔으니까.

애초에 읽으라고 만든 문자가 아니었기에 하벨은 그저 온몸을 핥는 불길함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저게 왜 피에……?'

하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내렸다.

피에서 튀어나온 문자의 꼬리가 얇지만, 자신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벨은 가까스로 문틀에 기대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쥐고 들쳤다.

둘둘 감긴 붕대 틈으로 그 문자가 이어져 있었다.

잠깐, 하벨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다 간신히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물을 만들어냈다.

'…저 불길함.'

자신은 저 불길함을 알고 있었다.

―푸욱!

아직도 때때로 떠오르는, 자신이 죽기 전 기억.

몸을 꿰뚫던 불길함이 가득한 그 무기에서 느껴진 것과 똑같지 않은가.

"…콜록!"

몸에서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물을 거부하는 것처럼 또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하벨은 만든 물을 손바닥에 펴 발라 억지로 자신의 가슴에 닿게 했다.

치이이익.

물에 닿자마자 문자가 녹아내리고 하벨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오만상을 쓴 얼굴에 주름이 더 짙어졌다.

"…으으."

이를 악물고 발을 바둥거리고, 신음을 삼켰지만,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순간,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눈동자에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긴 숨을 아주 천천히 토해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하벨의 가슴팍이 숨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미처 녹이지 못한 나머지 문자들이 자신의 속으로 들어가는 걸 정확히 보고 말았다.

하벨은 피가 묻은 가슴팍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찔렸던 부근이었다.

―네놈이 가진 그 열쇠.

'…그놈이.'

하벨은 자신의 온몸을 감도는 열기에 휩싸인 채 찬찬히 떠올렸다.

―그건 이제 내 것이 될 테니까.

자신에게 그 말을 꺼낸 뒤에 놈이 무얼 했는지.

'내게 손을… 뻗었다.'

그 후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을 여는 소리였을까.

'…그리고 놈이 내게 무언가를 했다.'

방금 보였던 저 문자, 그게 놈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저 문자가 내 권능에 반항하듯 나타난 게 아닐까…….'

하벨은 물끄러미 자신의 꼴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토한 피가 점점 옷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너는… 뭘 알고 있는가?'

하벨은 이제는 꺼져버린 랜턴을 바라보았다.

랜턴에게 빛이 나왔기에 한순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벨 티에라. 네가 나를 구하기 위해서 빛을 냈는가?'

하벨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랜턴에 손을 뻗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문틀에 축 늘어져 있던 하벨은 눈동자만 굴러 누군가를 보았다.

"…하."

두려움이 담긴 짧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제게 업히십시오."

침착하려 애를 쓰나, 카샬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하벨은 부들거리며 목소리를 꺼냈다.

"…알리… 지 마."

"예. 조용히 헤레스 씨에게 가겠습니다."

"…카샬."

"알았으니까,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하벨은 카샬이 지금 느끼고 있을 당황함과 경악 등 여러 감정을 간신히, 아주 간신히 참고 있다는 게 절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하벨은 잠깐이나마 걱정이 됐다.

그간 떠올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말하자면 자신은 이미 놈에게 진 게 아닌가.

만약에 자신이 방금 본 게 놈의 힘이 맞다면 놈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셈이니 자신이 혹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다른 이들이 너무 걱정됐다.

"…나."

그렇기에 하벨은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남은 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입을 열었다.

그 짙고도 질척한 슬픔이 모두를 덮치기 전에 카샬에게라도 말해야만 했다.

"죽었어."

"…그게."

카샬은 하벨을 업으려다 말고 그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깊은 의문 속에 당혹감이 꿈틀거렸다.

이미 당황할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자신의 방에서 잠깐 눈 좀 감으려다 왜인지 등줄기가 싸늘해져 그냥 하벨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랬을 뿐인데, 문틀에 기대어 온몸에 피를 도배한 듯 앉아 있는 하벨과 마주하지 않았던가.

아직도 이 당혹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 니까, 하아."

하벨의 눈동자가 가쁜 숨소리와 함께 반쯤 감겼다.

하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슬퍼하지… 말라고."

하벨은 기어코 눈을 감았다.

카샬은 새어 나오는 숨을 길게 내쉬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입술을 꾹 깨물고 아주 조심스럽게 하벨을 업었다.

옛 도련님의 몸 상태는 언제든 나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었다.

변종이 된 물의 저주는 '갑자기, 이유도 없이'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이상했으니.

지금 도련님이 아닌 이전 도련님을 모시면서 위험할 때를 몇 번이나 경험했다.

심장까지 멈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죽었다니.'

카샬은 하벨이 꺼내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의 몸으로 왔다면 이미 죽었다는 가정이 깔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정말… 돌아가셨다니.'

죽음을 경험한 자가 다시 산 사람 몸에 들어가 다른 인생을 경험하고 있다면 이건 과연 축복일까, 아니면 지옥일까.

* * *

"…용왕님!"

누군가 몸을 흔들자 자신은 눈을 떴다.

류아가 보였다.

순간, 류아와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에 휩싸였다.

얼마 전에 류아를 포함한 자신의 가족들이 수족 놈들이 만든 폭발에 휘말린 기억을 보지 않았던가.

그 광경을 보여주고 또 이런 기억을 끄집어내다니.

이 얼마나 잔인한가.

하벨은 자신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일그러질 것만 같았다.

'…적어도 내가 죽지 않았다고 안도해야 하는 건가.'

꿈을 꾼다는 건 적어도 하벨 티에라의 몸이 무사하다는 증거인 셈이니.

"아니. 용왕님은 안 주무셔도 된다면서요?"

류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왜 주무시는 건데요?"

"밤이 너무 고요하니까."

거짓말이었다.

사실 자신은 밤에 별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적어도 저 때는 고요함을 좋아하고, 즐기고 있었다.

"밤에 돌아다니는 게 그렇게 좋으시다면서요?"

"너도 그렇고 태련이고 그렇고. 무날도 그렇고. 다들 노래를 불렀잖은가. 제발 좀 잠을 자든지 쉬든지 하라고 말이다."

"…뭐, 그랬죠."

류아는 한쪽 눈썹을 올리다 말고 곧 입꼬리를 높게 올렸다.

"그래서 들어주신 거군요!"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에이, 또 부끄러워하시네요."

류아가 낄낄 웃자 자신은 물을 일으켰다.

거대한 물보라가 류아를 휩쓸자 그는 알현실의 끝까지 몰려서는 콜록거렸다.

"아니, 말로 하십시오. 제가 어인이지만, 물을 갑작스럽게 먹으면 불쾌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었습니까? 실망입니다, 용왕님."

'이 기억은…….'

하벨은 그제야 기억이 천천히 떠올랐다.

류아에게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에 용왕이라는 이 업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얼 하고 싶냐고.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바다 위에서 해가 떠오르는 걸 보고 싶다고.

―그럼 오늘 저랑 같이 봅시다. 저도 하늘 보는 거 좋아합니다. 아, 기왕 볼 거 다 같이 보죠? 좋아할 놈들이 엄청 많을 겁니다.

비록 용왕이라는 업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바로 오늘이 그 날이었다.

"…잊지 않았다."

정말로 잊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손꼽아 기다렸으니.

하여 자신도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혹시 설레셨습니까?"

'그래.'

하벨은 키득거렸다.

"아니."

하지만 자신은 단호할 정도로 세차게 입을 열었다.

'저 때는 부끄러움이 많았지.'

하벨은 괜히 그리워지는 마음을 꾹 눌렀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었으니 그저 바라보기로 했다.

"기대하셨군요."

류아가 키득거리다 또 밀려오는 물살에 다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너는 용왕님을 데려오는……."

열린 문으로 들어오던 무날이 그대로 파도에 휩쓸렸다.

"류아……."

자신이 놀라면서 류아를 부르자 그는 배를 잡고 웃었다.

"푸하하핫!"

"…하아. 진짜 너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냐?"

태련이 한숨을 섞으며 무날을 일으켰다.

"아니, 용왕님이 오늘 설레셨다잖아."

"뭐?"

태련은 류아의 말에 일으키던 무날을 밀치며 눈을 크게 떴다.

"진짜로?"

"그래. 조금 깝죽거리다가 바로 물벼락 맞을 뻔한 거지. 진짜 물벼락을 맞은 건 무날……."

"아니. 정말이십니까?"

태련은 류아의 말마저 끊어버리고는 무언가 기대하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올라가자."

하지만 자신은 대답해주지 않고 물로 무날을 다시 일으켜주며 알현실을 벗어났다.

순간, 하벨은 깜짝 놀랐다.

'알현실을 벗어나……?'

하지만 곧 차분해질 수 있었다.

원래 알현실은 자신이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고 소통의 장소로써 쓰이지 않았던가.

도중에 자신을 가두기 위한 장소로서 변질이 되었을 뿐.

하벨은 무언가 속이 트인 기분을 느끼며 조용히 바다의 부드러움을 느껴보았다.

―좋은 아침에요. 아, 아직 해가 뜨기 전이지.

―오늘은 말이에요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냐면요…….

―아니, 글쎄 웬 물고기 한 마리가 무리를 잃고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용왕님이 자는 거 봤어요. 완전히 웃기던데요? 왜 입을 쩝쩝거리세요?

―저 사실 용왕님이 다 같이 해를 보러 간다고 엄청 기대하는 거 다 봤어요. 도중에 '만세'하고 몇 번이나 제자리에서 뛰셨잖아요.

소곤소곤.

물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어디에서 무슨 일이 생겼으며 불만을 늘어트리거나, 자신을 놀리고자 입을 놀리는 등 다양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래. 이 느낌이다.'

하벨은 오랜만에 자신이 용왕이었던 그 느낌을 느껴보았다.

혹시나 현실에서도 다시 권능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바다가 알아서 위를 향해 자신을 떠밀고 자신은 그저 몸을 맡겼다.

물살이 일어나고, 바다에 있는 생명체들은 자신을 보자마자 머리를 조아렸다.

방긋 웃어주고 싶었지만, 자신은 그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

바다 위로 올라오자 살짝 무거운 느낌이 몸을 짓눌렀다.

아직 어두운 밤하늘이 보였다.

벌써 설렜다.

해를 몇 번이고 보았는지 몰라도 오늘은 달랐다.

"용왕님!"

류아가 수면 위로 목만 내민 채로 소리치자 자신은 눈치껏 류아, 태련, 무날을 들어 올려주었다.

"그렇죠. 이거죠."

"갑자기 아침 해는 왜 보자고 했는가?"

자신이 묻자 류아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저번에 약속했잖습니까."

"그냥 평소에 네가 하던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용왕님께서는 기대하셨잖아요."

"……."

자신이 입을 다물자 태련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진짜네. 용왕님께서 기대하고 계셨어."

"죄송합니다, 용왕님."

갑자기 무날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제대로 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다시 밑으로 내려가 침대와 여러 가지를 들고 오겠습니다."

"됐어."

자신은 손을 흔들었다.

"이걸로 충분하니까."

진심이었다.

자신은 이미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 것이 지금 밤하늘을 바라보며 솟구치는 입꼬리를 억지로 막느라 애를 쓰고 있었으니.

무날은 그 말에 살짝 주춤하면서도 혹여 자신이 불편하지 않을까 이래저래 계속 살피기에 물로 무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늘이 보랏빛을 넘어 서서히 붉은 기가 돌 때쯤 류아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있잖습니까, 용왕님."

"말해 보거라."

"이건 저희끼리 진짜 열심히 고민한 결과입니다."

"그래."

자신은 별 감흥이 없다는 듯이 대답했지만, 사실 엄청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벨 역시 류아가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기대가 됐다.

그야 그럴 것이 무날과 태련마저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으니.

"만약에, 어, 음, 만약에 말입니다."

류아답지 않게 상당히 머뭇거렸다.

"그래. 만약에. 듣고 있으니 차분히 말해보거라."

"용왕님. 저희는 말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저희는 용왕님 편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저희를 믿어달란 말입니다."

자신은 저 소리에 기가 찬 반응을 보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시간이 얼마인데 믿지 못한다는 게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저희가 정말 용왕님을 얼마나 동생처럼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그렇지. 말 잘했어. 용왕님은 막냇동생이지. 아직도 손이 가는 동생 말이야."

"……?"

하지만 자신은 뒤이은 류아와 태련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쩍 무날을 보자 자신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마저도 동의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시죠?"

류아가 곧 씩 입꼬리를 올렸다.

"저희가 더 나이가 많습니다."

"시끄럽다."

자신은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과 웃음을 뒤로하며 파도 수면에 앉았다.

"어쨌든, 용왕님."

웃음기를 싹 뺀 류아의 말에 자신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믿는다."

"정말요?"

"그래. 나는 너희를 믿는다."

"예. 그거면 됩니다. 정말 딱 그거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저흰 무슨 일이 있어도 영원히 용왕님의 편입니다."

류아가 해맑게 웃자 그때, 태련이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용왕님! 해 떠요!"

태련의 광대가 높이 올라갔다.

자신은 태련의 손가락을 따라가다 잠깐 멈췄다.

점점 하늘을 붉게 태워가는 태양의 등장에 천천히 미소가 번져갔다.

고요한 새벽을 깨워버리는 그 우렁찬 모습에 가슴 속부터 올라오는 기쁨이 자신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예쁘다."

자신이 들어도 참 행복한 목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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