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그놈이…(2)
* * *
"아, 물론 지금 당장 때려 부숴야 할 게 있어서 검은 달을 부수는 건 잠깐 미뤄질 겁니다."
하벨은 여전히 즐겁게 웃으며 순서를 알려주었다.
우선순위를 두자면 역시 마법사 협회가 먼저였다.
저놈들이 무얼 저지를지 모르는 이상, 마법사 협회 뒤에 혹시 있을 누군가를 알려면 제일 먼저 무너트려야 하는 게 맞았다.
"먼저 부서트려야 할 게 마법사 협회란 말이지?"
라르웬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전부터 하벨이 마법사 협회를 부서트리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물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힌 뒤였기에 전혀 다르게 들려왔다.
마치 신이 신성 국가에 강림하여 이를 다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예. 맞습니다."
하벨은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날 건드린 게 싫어서 부서트려야겠다 싶었습니다."
과거에서 배우지 않았던가.
모든 걸 내어주었고, 어설픈 용서와 관용으로 베풀어봤자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걸.
"그런데 이제는 다릅니다. 저들이 저지른 짓을 하나씩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나는요, 진실을 다 알면서 외면할 만큼 용감하지 않습니다."
또 내뱉은 저 말에 카샬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폭파 사건 때 자신을 보호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하벨이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던가.
―구할 수 있는데도 이를 외면할 만큼 내가 용감하지 않아서.
그걸 세간에서는 '미련'이라고 부르는 줄도 모르고.
"누님과 형님은 마법사 협회가 저지른 일이 용서가 됩니까? 너희는 용서가 돼?"
하벨의 시선이 모두에게 천천히 옮겨졌다.
그들의 눈동자 속에 보이는 감정들을 보며 하벨은 안도했다.
마법사 협회를 향한 질타, 역겨움, 분노, 짜증 등 온갖 부정적인 부분밖에 볼 수 없었으니까.
"내가 오지랖이 넓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겁쟁이입니다.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겁쟁이요."
이게 하벨 티에라와 다른 용왕인 자신이었다.
미련하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 할 겁니다."
"애초에 말이 안 맞잖아. 겁쟁이면 몸을 사려야지."
라르웬이 질색하며 말을 던졌다.
"겁쟁이니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짓밟아야죠. 그렇죠?"
"아니……."
"그러니까 누님, 형님. 그냥 나한테 협력하세요. 아마 나만큼, 콜록, 든든한 자는 없을 겁니다."
하벨은 가볍게 기침해서는 입꼬리를 올렸다.
"원래 다 짜고 치는 고스톱."
"…무슨 톱?"
라르웬이 한쪽 눈썹을 올리자 하벨은 아차 하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님께서는 내부에 적을 파악할 확실한 조력자가 필요할 테고, 새로운 조력자의 등장에 검은 달은 이를 파악하느라 시선이 분산될 테니 그때를 노려 클로저랑 같이 손잡고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모든 검은 달의 지부를 부서트리면 되겠네요."
신나게 떠드는 하벨의 모습에 라르웬은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까 망설였다.
이번에 클로저 사건을 말하며 동시에 전해야 할 게 있었는데 아직 틈이 보이질 않았다.
"아. 덤으로 검은 달을 부서트릴 때 마법사들도 이용할 겁니다. 어때? 제법 괜찮지, 레디나?"
하벨은 청사진을 언급하며 레디나를 쳐다보았다.
검은 달을 무너트리는 일이야말로 레디나가 자신의 옆에 있는 가장 큰 이유이며 그녀가 자신을 돕는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그걸 증명하듯 벌써 레디나가 군침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와. 진짜 얼른 보고 싶은데요? 빨리 보고 싶어요, 도련님!"
"레디나. 왜 도련님을 자극해?"
"하지만 언니."
레디나는 헤레스의 말에 멈칫거렸지만, 하벨이 그랬던 것처럼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검은 달을 무너트린다고 하시잖아요. 도련님이 지부를 습격한 그때, 현실을 알아버렸어요. 혼자서는 무엇도 못 한다는 걸요."
레디나 자신이 그렇게 무너트리고 싶었던 지부 하나가 아주 쉽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지금도 계속 지부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고.
만약 계속 혼자였다면,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음에도 아무도 달라지지 않은 저들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지.
그래서 기뻤고, 그래서 고마웠다.
레디나는 헤레스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솔직히 기쁘지 않아요? 언니도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니잖아요."
"……."
헤레스는 그 말에 입술을 꽉 다물며 괜히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왜 기쁘지 않을까.
혼자가 아니라는 그 기분도, 자신이 할 수 없었던 것들마저 이루어지는 그런 마법 같은 기분도 정말 좋았다.
"만약 도련님을 침대에 묶는 것 이상으로 어떤 조치가 없다면 도련님께서는 당연히 움직이실 거고, 그럼 진짜 가만히 손 놓고 도련님께서 돌아다니는 걸 보고 있을 거예요?"
레디나가 싱긋 웃으며 묻자 칼리우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도련님이 움직이면 나도 같이 움직일 거야."
[헤헤. 용용이랑 이 몸이랑 생각이 같아. 이 몸은 언제나 대장하고 함께인데?]
아라가 눈을 깜박거리다 하벨의 팔에 매달려 머리를 비볐다.
"내가 잘 살았네요. 보셨죠?"
하벨은 단번에 뒤바뀐 여론에 만족했다.
원래 반 이상만 가져가도 성공하는 셈이었다.
"헤스트리아 왕국은……."
"궁금해서라도 갈 겁니다."
넬시아가 말을 꺼내자 하벨이 이를 가로챘다.
"헤스트리아 왕국이 쇄국 정책을 유지한다면서요? 이 기회가 아니면 갈 수 없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게, 음."
넬시아의 눈썹이 안쪽으로 모였다.
"아니면 내가 가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하벨의 물음에 넬시아가 이것저것 생각해보지만, 걸리는 건 딱 하나였다.
"헤레스."
"예, 아가씨."
"하벨이 먼 거리를 버틸 수 있을까? 배로는 당연히 불가능하니 포탈을 타고 가야 할 텐데. 나라와 나라 사이의 그 거대한 포탈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건 저도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른 나라로 가보신 경험이 없으시잖습니까."
"없지. 주로 저택에 있었으니까."
"이참에 가보면 되겠네요. 오. 벌써 신납니다."
말과 달리 하벨의 안색이 더 창백해지자 헤레스는 창문을 힐끔 바라보았다.
비가 저 멀리 내리는데도 하벨의 안색이 왜 더 나빠지는 건지.
"이건 일단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볼게. 아버지의 허락도 받아야 할 테고."
넬시아가 생각 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하벨은 도리어 놀랐다.
"정말요?"
"날 그렇게 딱딱하게 보지 않아도 괜찮아. 적당한 이유만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니까 사람들이 너보고 차디차다고 말하는 거잖아. 나는 그게 진짜 속상한데.]
톰톰이 입을 열자 넬시아는 무표정을 지으며 톰톰을 살짝 건드렸다.
"그게 나야."
넬시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하벨을 향해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그리고 지금 이 모습이 하벨 너고. 그렇지 않아?"
"그렇죠, 누님."
하벨은 든든함을 느끼며 라르웬을 쳐다보자 라르웬은 한숨을 섞었다.
훈훈한 분위기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지만, 더는 미룰 순 없었다.
"…막내야. 지금 클로저들이 에르티안 왕국에서 벌어진 틈의 세계를 조사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죠. 아까 말했잖아요."
"널 찾고 있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벨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상체가 천천히 흔들리는 하벨과 눈에 띄게 당황한 넬시아의 반응에 라르웬은 마음이 살짝 조급해졌다.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틈의 세계가 네 주변으로 열린 것 같아."
"뭐라고……? 그거… 정확한 거 맞아?"
넬시아의 안색이 단번에 나빠지자 라르웬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 말해도 될지 망설이다 어차피 알게 될 거 내지르는 느낌으로 닫았던 입을 열었다.
"사실이야, 누님. 내가 클로저로서 여기에 오면서 에르티안 왕국에 열린 틈의 세계는 총 다섯 번. 그중 세 번이 바로 하벨이 있을 때 열렸어."
"자, 자, 잠깐만."
넬시아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넬시아?]
아라가 깜짝 놀랐다.
"…미안해. 미안해, 하벨."
갑자기 넬시아가 가쁜 숨을 내쉬더니 공포에 질린 얼굴 그대로 방을 벗어났다.
[라르웬 너어…….]
톰톰이 라르웬에게 성질을 내려다 당장 넬시아의 뒤를 쫓았다.
"제가 쫓아가겠습니다."
헤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나도 곧 갈게."
라르웬이 그제야 안도하며 다시 하벨을 바라보았다.
"누님이… 갑자기 왜 저렇게 행동하는 겁니까?"
"트라우마 때문이야. 틈의 세계와 좋지 않은 일이 있었거든."
라르웬은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역시 누님을 보내고 말했어야 했나 봐. 내 욕심이 컸어."
"하벨 티에라가 틈의 세계와 뭔가 관련이 있는 겁니까?"
이전에 하벨은 틈의 세계에서 나온 괴물에게 '아가야'라고 예상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가야, 아가야.
그 말은 포탈을 이동했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을 겪으며 더 또렷하게 들었기에 속에서 일어나는 호기심을 꺾기는 어려웠다.
"미안해.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시면 나도 말할 수 없어."
너무도 무겁게 들리는 말에 하벨은 재촉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쨌든, 막내야."
라르웬이 긴 숨을 내쉬었다.
"예."
"클로저에서 틈의 세계가 열렸던 곳들에 네가 있었다는 걸 언제 발견할지는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일단 막아볼 거야."
"만약 알게 된다면 어느 정도로 위험한 겁니까?"
"네가 물 마법사라는 사실을 뒤엎을 정도로. 세계의 적이 되는 셈이지."
틈의 세계는 여전히 진행되는 물의 오염만큼이나 큰 재난이었다.
그 재난이 알고 봤더니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식으로 흘러가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곤란하네요."
[이건 그냥 곤란한 게 아니라고, 바보야.]
루룸이 태평한 하벨을 보다 말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 제가 더욱 가면단이 되어야겠네요."
하벨이 히쭉 웃자 라르웬이 기겁했다.
"아니, 왜 또 그렇게 흐르는 건데?"
"진짜 틈의 세계가 내 주변에서 열리는 거라면 가면단의 달님이 주변에도 틈의 세계가 열린다는 거잖습니까? 클로저들의 추적 방향을 하벨 티에라에서 가면단의 달님이로 천천히 바꿀 겁니다."
시선을 분산시키고.
"그리고 그 달님이는 클로저들을 도울 셈이니 일단 쉽게 적이 되진 않을 거잖습니까."
의심을 거두는 행동까지.
하벨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잡을 생각이었다.
"……."
잠깐만 생각해도 그렇게 나쁜 계획은 아니었지만, 라르웬은 기가 찼다.
이건 결국 눈속임일 뿐이었다. 언젠가 들킬지도 모르는 눈속임.
"고마워요, 형님."
"…하."
활짝 웃는 하벨이 너무도 얄미워 라르웬 허파에 찬 바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딱 한 대만 때렸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 * *
손에 일어나는 떨림을 느끼며 하벨은 눈을 떴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속에서 울컥하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벨은 머리를 짓누르는 뜨거운 열에 숨을 가쁘게 내쉬다 옆에서 새근새근 잠이 든 아라를 보며 잠깐 웃었다.
하지만 이내 인상을 쓰며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뭔가 달라.'
지금까지 비를 겪지 않았던 것도 아니며 하벨 티에라가 가진 물의 저주 때문에 몸에 푸른 돌이 움직이며 일어나는 통증을 경험해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밀려오는 이 통증은 이제껏 느꼈던 고통과 달랐다.
'여기는… 비가 내리지 않을 텐데.'
의문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이미 영혼에 났던 상처가 다시금 커진 건 아닐까 싶은 생각과 헤레스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말하던 물의 저주로 몸 상태가 최악까지 나빠진 게 아닐까 고민하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엉……?]
아라가 움직이자 하벨은 토닥거리며 '쉬쉬'라는 말을 꺼냈다.
다시금 아라의 눈이 스르르 감기는 걸 보며 하벨은 잠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속에서 움직이는 무언가에 하벨은 다른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언제 새로 달았는지 모를 링거를 띄우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 일어났을 뿐임에도 시선이 흔들려 하벨은 침대를 잡고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누르시면 됩니다.
카샬의 말이 떠올라 하벨은 바로 옆에 보이는 종으로 시선을 살짝 돌렸다.
'이 정도는 괜찮다.'
언제 달았는지 모를 링거나 이마를 축축하게 적셨을 땀이 없는 걸 보면 헤레스와 카샬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움직였을 게 분명하니.
지금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이것만 쏟아내면 곧 편해질 테지.
하벨은 시선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앞으로 나아갔다.
"…허억."
갑자기 숨이 막혔다.
목구멍이 뜨거워지자 하벨은 다시금 입을 막았다.
'…아니. 조금 안 좋아.'
대체 자신이 이전과 달리 무얼 했기에 몸 상태가 이렇게 나빠질 수 있을까 싶었다.
'내가 진짜 무리했나?'
비틀거리다 입가에 뜨거운 게 왈칵 쏟아지자 하벨은 잠깐 멈췄다.
아무리 어두워도 입에서 무엇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피였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무언가가 온몸을 기어가는 감각과 함께 심장이 움켜쥔 듯한 느낌이 밀려왔다.
위험하다.
본능이 그렇게 알리자 하벨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화장실 앞에서 더는 버티지 못하고 참았던 것들을 쏟아냈다.
"…우웨에엑."
붉은 피가 땅으로 쏟아졌다.
'미친.'
한 번.
'…미치인.'
두 번.
온몸의 피를 뿌리듯 작은 웅덩이가 큰 웅덩이가 되었다.
누군가 자신의 생명력이 쥐고 가져가는 그 느낌에 저항하지 못하고 몸이 무너져내렸다.
철퍼덕.
팔이 피 웅덩이에 떨어져 피가 얼굴에 튀었다.
화르르륵!
말조차 나오지 않던 그때, 랜턴에 하얀빛이 솟아올랐다.
그 따뜻한 빛에 하벨은 흐려지던 의식을 단번에 붙잡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문틀을 잡아 무너져 내린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
쿵쿵쿵!
몸이 죽음의 임박을 알리듯 심장이 너무도 빨리 날뛰고 있었다.
"…하, 아."
겨우 숨을 토하며 시선을 올리자 무언가가 보였다.
'이게… 뭐야?'
하벨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