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그놈이….
* * *
넬시아마저 고개를 돌리며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누가 징징거리던데? 하벨이 그렇게 무서웠어, 이 겁쟁이 톰톰아?]
루룸은 톰톰을 보며 낄낄 웃었다.
[시, 시끄러워! 너도 걔가 그렇게 하면 꼬리를 내리고 도망칠걸?]
톰톰이 이 악물고 외쳤지만, 루룸은 라르웬 머리 위에서 여유롭게 짧은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너, 벌써 와도 되는 거야?"
넬시아는 어느새 본분을 잊고 루룸과 톰톰의 신경전을 재미있게 지켜보던 라르웬에게 입을 열었다.
클로저 일로 잠깐 자리를 비우지 않았던가.
"아."
라르웬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 좀 걱정이 돼서 빨리 서둘렀지."
하벨이 또 무슨 짓을 저질렀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는 말을 어떻게 정령 기사들 앞에서 꺼내겠는가.
'그리고 갑자기 비도 내려버렸지.'
라르웬은 시선을 잠깐 저 멀리 두었다.
초대 왕의 가호로 왕궁에만 비가 내리지 않을 뿐, 이미 다른 곳에서는 거친 물살을 쏟아내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자신도 도중에 잠깐 맞아버렸고.
"…그런데 누님은 왜 여기에 있어?"
라르웬은 넬시아를 보자마자 생각이 났던 질문을 꺼냈다.
"그, 아니지……?"
이전처럼 하벨에게 압박을 가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 넌지시 물었다.
"그 문제는 이미 해결했어. 화해했으니까 이제 눈치 볼 필요 없어, 라르웬."
"화해했다고? 누님이?"
"라르웬. 방금 그 말은 살짝 거슬리는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어."
잠깐 주춤거리던 라르웬은 곧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그럴 수도 있지. 며칠 전 누님이 뭘 했는지 생각하면 말이야. 안 그래?"
"…으음."
이번엔 넬시아가 주춤거리자 라르웬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넬시아와 하벨 사이에 얽매였던 일이 풀렸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니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은 안 그래. 정말이야. 그러니까 너도 내 눈치 볼 필요 없어."
"눈치는 애초에 별로 안 봤는데? 그래. 가끔 봤지. 가끔. 그런데 왜 안 들어가? 하벨이 누님을 쫓아내기라도 했어?"
"아니 넌 하벨이 그런 얘로 보여, 라르웬?"
넬시아의 눈가가 좁혀지자 라르웬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뭐야. 바로 두둔하는 거야? 내가 누님하고 더 오래 지냈다는 거 잊으면 안 된다."
"두둔이 아니라 사실이니까. 하벨은 내가 그렇게 심한 말을 했는데도 나를 쫓아내지 않았어."
넬시아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쨌든, 하벨은 지금 치료 중이라고 하네."
"누가?"
"그야 당연히 헤레스가 말했지."
"…뭔가 이상한데?"
라르웬은 팔짱을 꼈다.
"안에 인기척이 적고, 너무 조용해. 누님이 이걸 몰랐을 리는 없고."
라르웬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넬시아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맴돌았지만, 그래도 믿어보기로 했다.
"진짜 치료 중일 수도 있잖아."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지금 물 냄새가 넘실거려.]
루룸의 말을 듣던 라르웬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당장 문을 열었다.
넬시아 말대로 그럴 수도 있지만, 자신은 그녀보다 하벨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하면 그 '혹시나'보다 더한 사고를 치는 사고뭉치가 아닌가.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한 하벨이 보였다.
이를 부축하는 이들을 찬찬히 살피던 라르웬이 입술을 깨물었다.
"…막내야."
아니나 다를까.
또 한바탕 무언가를 벌이고 온 모양이었다.
* * *
"…아무리 급하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건 무모하다고 생각해, 하벨. 나는 오늘 좀 실망했어."
넬시아가 조곤조곤 말을 꺼냈고, 라르웬은 옆에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누님. 지금 실망한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하벨아, 너 내가 분명히 말했지. 물의 길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어어, 음, 이 몸도 잘못했는데…….]
아라가 눈동자를 굴리며 이야기하다 날카로운 라르웬의 시선에 곧 꼬리를 잡았다.
[아라야. 쉿. 지금은 조용히 있어.]
루룸이 슬쩍 아라의 볼을 찌르며 말했다.
[하지만 대장이 막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보이잖아. 대장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
[혼이 날만은 하잖아? 몸이 좀 괜찮아졌다고 움직이고, 게다가 물의 내성도 없는데 비가 오는 날에 나가? 이건 누가 봐도 혼이 날…….]
톰톰은 줄줄이 말을 꺼내다 하벨의 움직임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럼 기다렸어야 합니까?"
하벨은 침대에 걸터앉아 넬시아와 라르웬을 쳐다보았다.
옆에 선 헤레스와 카샬, 그리고 칼리우스까지 왜 또 죄인처럼 서 있는 건지.
레디나만이 평소처럼 초롱초롱한 눈을 뜨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니잖습니까."
"…막내야."
라르웬은 열 때문에 또 붉어진 하벨의 얼굴과 손목에 꽂은 링거를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그래. 네가 지금 나한테 기대한 말은 이게 아니겠지. 마법사 협회가 얼마나 개새끼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논하고 싶겠지."
조금 전, 하벨이 마법사 협회가 정령사를 만들기 위해 했던 말을 듣는 순간, 이게 현실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라르웬은 그 과정을 모조리 지켜보고 온 하벨이 안쓰러웠다.
하벨이 지금까지 정령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해왔던가.
그가 얼마나 정령들을 생각하는지 왜 모를까.
"그런데 막내야. 나는 네가 더 걱정이야. 더 걱정스러우니까 널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엘라힘이라는 신관이 하벨의 몸 상태를 좋게 만들어줬다고 해서 그게 면죄부처럼 작용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하벨 네가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볼 기회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 역시 있었다고 생각해."
넬시아는 하벨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 섭섭했지만, 이해가 갔다.
아직 하벨과 자신의 관계에 벽이 있는 건 분명하니까.
"만약 내가 이야기를 했다면 정말 반대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하벨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넬시아와 라르웬에게 물었다.
"아니. 그건 당연히 자신 없지."
라르웬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자 하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거 보세요. 그렇게 머뭇거릴 동안……."
"막내야. 애초에 그게 이상한 거야. 내가 널 안 말린다고? 미친 거지. 내가 미친놈이고 지랄 맞을 형인 거지."
"그럼 나는 음, 정신 줄도 놓고, 동생도 말리지 않은 매정한 누나가 되는 거겠네?"
라르웬을 이어 넬시아의 말이 이어지자 하벨은 입을 다물었다.
저들의 행동은 누나와 형으로서 너무도 당연했으니까.
오히려 하벨은 기쁨이 밀려와 목구멍으로 꺼내려던 말마저 잊지 않았던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벨. 나도 그렇고 라르웬도 네가 했던 행동이 나빴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넬시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해왔던 것들이 있어서 이게 한순간에 바뀐다는 게 어렵다는 것 역시 알고 있어. 하지만 네 상태는 알다시피 멀쩡하지 않았어. 물론, 나와 라르웬이 네가 원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말린다는 걸 알기에 그렇게 행동했겠지."
차분히, 서로 언성을 높이지 않게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가려는 넬시아의 노력이 보였다.
"그래도 하벨. 이건 아니야. 다 떠나서 네가 그 몸으로 말도 없이 나가는 일은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어렵습니다."
하벨은 넬시아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말을 꺼냈다.
"나도 어렵다, 막내야. 진짜. 네가 나가서 또……."
"라르웬. 잠깐만 멈춰봐."
넬시아는 라르웬의 말을 말렸다.
지금 하벨이 꺼낼 속마음을 들어야 할 때였으니까.
"계속 말해줘, 하벨."
"나는… 더는 망설이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굴 위해 포기하는 것도, 손에 놓아버리는 행동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벨이 숨을 내쉬자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뜨겁게 느껴졌다.
열이 머리를 빙글빙글 돌려서인지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자신을 막는 이성의 벽이 너무도 낮았다.
"…그 끝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아십니까?"
잠깐 하벨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알았어."
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말을 힘겹게 참는 하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어떤 심정인지 알겠어. 잘 버텼어. 이번 일은 내가 라르웬한테 잘 말해볼게.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하벨."
[대장, 울어?]
아라가 물끄러미 하벨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울어."
"하지만 하벨."
넬시아는 하벨을 다정하게 불렀다.
"말없이 가는 행동만큼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건 약속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라르웬은 자신만 뺀 이 묘한 분위기가 기가 찼다.
"누님이 그렇게 말하면 막내는 말만 꺼내고 또 도망칠 게 뻔해. 그리고 나중에 '아니, 알렸잖습니까'라고 한다니까?"
짝짝.
카샬은 자신도 모르게 나온 박수에 잠깐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건 맞지. 넬시아 네가 하벨을 몰라서 너무 봐준 거야.]
"…음. 그럼 라르웬이랑 루룸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넬시아는 볼을 살짝 긁적이며 물었다.
루룸 말이 맞았다.
자신은 지금 하벨을 많이 모르고 있었다.
"나는 당장 묶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냥 묶는 거로만 되겠어?]
라르웬이 꺼내는 말에 루룸이 한층 더했고, 레디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런데 도련님을 침대든 어디든 묶는 걸로 되겠어요? 겨우 그 정도로 진짜 도련님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둘째 도련님?"
"아니."
이번 일에 가담해 죄인처럼 앉아 있던 헤레스마저 손을 넌지시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결렬한 의지가 보였다.
"절대 안 되지. 부족해. 그렇기에 저도 레디나의 말에 동의합니다. 아가씨, 둘째 도련님."
"아. 루룸하고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까 내가 생각이 짧았네. 그렇지? 너는 그걸로 부족하지."
라르웬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덩달아 카샬 역시 만족스럽게 웃었다.
암.
하벨을 묶어두는 걸로는 부족했다. 추가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됩니까?"
하벨은 억울한 표정을 힘껏 지어 보였지만, 지금 여기서 자신의 편이 될 수 있는 넬시아가 조금씩 흔들리는 게 보였다.
"…많이. 음.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심각했구나. 그럼 이건 조금 더 생각해보자. 그래야 할 것 같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하벨?"
"일단, 좋습니다. 이번에 중요한 건 이 문제가 아니니까요."
"아니. 되게 중요해. 되게 중요한데, 지금 조금 더 급한 문제들이 나타났을 뿐이야."
라르웬은 팔짱을 끼며 하벨의 말을 부정했다.
"아무래도 확인하고 오셨나 봅니다."
하벨이 씩 웃자 라르웬은 당장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리고 싶을 정도였다.
"확인하고 왔지."
"내 생각이 맞았죠?"
"그래."
"보십시오. 내가 좀 잘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말리는 건 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애석하게도, 전혀."
"치사하시네요."
하벨은 혀를 차다 말고 떠오른 생각부터 꺼냈다.
"이번에 마법사 협회가 벌인 문제는 내가 가주님께 보고하겠습니다."
룬델에게 추가로 보고해야 할 상황이 있었다.
―정령들을 동물로 찾아 마법사 협회에 바쳤습니다. 이게 제가 늑대였을 때 했던 짓입니다. 아마… 헤레스는 모를 겁니다. 저와 헤레스가 한 행동들은 다르니까요. 저는 진짜 빌어먹을 놈이지만, 헤레스는 아직 아닙니다.
하벨은 물의 길을 넘기 전에 크라마가 꺼냈던 말을 떠올리며 헤레스를 잠깐 보았다.
마법사 협회라는 이름만으로 그녀의 얼굴에 고민이 가득했으니.
갑작스럽게 찾아온 넬시아와 라르웬의 등장에 아직 헤레스에게 장로 에멜 콘스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하벨, 네 생각대로 검은 달이 클로저들을 죽일 의뢰를 받아들였어."
라르웬이 꺼낸 말에 레디나가 입을 벌렸다.
"…미친 새끼들."
"일단 나한테 놈들이 찾아왔더라고. 아마 다른 클로저들한테도 공격이 갔겠지. 이 부분을 정식으로 회의에 올릴 셈이야."
"알겠습니다. 제가 달님으로서 찾아가겠습니다."
"……?"
라르웬은 하벨이 꺼내는 발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천천히 일그러지는 라르웬의 표정에 루룸은 꺄르르 웃으며 발을 동동거렸다.
[이야, 이래야 하벨이지. 아, 오랜만에 너무 흡족하다.]
"누님께서는 아마 바안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신 듯한데, 콜록, 참고로 헤스트리아 왕국의 사절단이 파견된다면 저도 갑니다."
하벨의 숨소리가 빨라졌지만, 넬시아는 그가 내뱉은 말이 더 기가 차 순간, 울컥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헤스트리아 왕국의 사절단으로 간다니?"
"그렇게 바안 전하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못 들으셨습니까?"
"……."
넬시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뒤통수가 그저 따끔거려왔다.
―…음. 혹시 이 문제를 누구하고 의논할 생각입니까?
그래서 바안이 자신에게 그렇게 물어본 거라니.
그게 우려를 담은 말인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하벨을 언급해버렸다.
넬시아는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누님, 봤지? 울컥한다니까. 아니, 막내가 나를 울컥하게 한다고. 뭐? 달님이로 와서 뭘 어쩐다고?"
"에르티안 왕국 내 검은 달을 부수려면 지금 놈들의 시선을 돌릴 수단이 필요합니다."
하벨의 시선이 레디나에게 향했다. 벌써 바짝 독이 올라 있었다.
"그러니까 왜?"
라르웬이 재촉하자 하벨은 당연한 말을 꺼내듯 여유로움을 내비쳤다.
"저들이 먼저 헛발질을 했잖아요."
"헛발질이라니?"
"아마 이번 의뢰를 받아서 즐거웠겠죠. 클로저를 부수면서 어떤 쾌감을 느끼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작 뽑은 건 최악의 패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
라르웬은 그제야 하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검은 달은 이제 티에라 가문에 이어 클로저들까지 적으로 돌려버렸다.
당장 눈앞의 이득만 보고 달려든 최악의 패라는 건 분명했다.
"저렇게 헛발질할 동안 부서지는 게 놈들의 지부인 줄도 모르고 말이죠."
하벨이 낄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