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인연이란(3)
* * *
"내가 널 안다고?"
카샬은 족제비처럼 생긴 정령을 보며 물었다.
지금 너무 당황스러웠다.
애초에 정령을 볼 수 없는 자신이 정령을 알고 있다니.
아니, 그것보다 왜 아라와 저 정령이 보이는 건지.
무엇 하나 이해가 가질 않아 손에 쥔 검만 부르르 떨려왔다.
[너는… 그래. 잊어버렸구나.]
정령은 시선을 잠깐 떨구었다.
[아니. 사실 알고 있었어. 인간의 기억에는 우리와 달리 망각이 존재하니까. 그래도 나는, 나는 너를 잊지 않았어.]
카샬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정령이 꺼낸 말에는 당최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네가 그곳을 도망쳐 나왔을 때도, 스승님을 만났을 때도, 그리고 하벨 티에라를 만났을 때도 다 보고 있었어.]
"그렇게 카샬을 잘 알고 있다면서 왜 카샬이 정령을 보지 못하게 막고……."
[난 그런 적 없어!]
하벨의 물음에 정령이 소리치자 아라가 깜짝 놀랐다.
[그, 그럼 왜 네가 나왔을 때 카샬이 이 몸을 볼 수 있는 건데? 저번에 마차에서도 그랬구, 이번에도 그렇잖아.]
여전히 하벨의 옷자락을 꽉 잡은 아라가 나름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때, 한 정령이 나한테 했던 말을 들은 모양인데 너는 정령사의 눈을 조종할 수 있어?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만들 수 있냐고!]
꽤 사나운 목소리에 아라는 주눅이 든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나도 그런 거 못 해! 나는… 나는 그냥 카샬의 곁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야. 네가 혹여 오해받지 않게.]
날을 세웠던 정령의 눈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단지 그랬을… 뿐이라고.]
"그래, 알았어. 내가 오해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진정해, 으르렁아."
하벨이 손바닥을 흔들자 정령은 다시금 으르렁거렸다.
[나는 으르렁이 아니라 아코라고! 아코!]
"……?"
카샬의 눈이 잠깐 커졌다.
"아코… 라고?"
"알고 있는 이름이야?"
하벨은 카샬이 내민 손수건을 받으며 코피를 닦았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
얼떨떨한 카샬의 표정과 말에 아코는 당장 꼬리를 흔들었다.
[뭐야. 날 기억해줬잖아.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
활짝 웃는 아코를 가만히 보던 카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어 찬찬히 벌어지는 입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코는 하나뿐이었다.
아직도 잊지 못한, 어릴 적 소중한 추억 하나에 스며든 그 이름.
"그 족제비……?"
[그래!]
아코는 바로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내가 바로 그 족제비야. 네가 애완동물로 키우려고 했던 족제비 말이야!]
"하지만… 사라졌을 텐데?"
[아니야. 나는 사라지지 않았어. 네가 갑자기 나를 보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었어.]
아코는 조심스레 카샬에게 다가가 앞발로 그를 찔러보았다.
[…와아아.]
손끝에 전해지는 카샬의 체온에 아코는 눈을 반짝였다.
[진짜 카샬이다.]
하하.
아코는 활짝 웃었다.
[그때는 어렸는데. 아주 어렸는데.]
다시금 카샬을 건드린 아코는 찬찬히 그를 살폈다.
검과 하나가 되었을 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기에 모든 게 신기했다.
어느새 자란 카샬의 얼굴에 어릴 적 모습이 남아 있는 게 너무도 신기했다.
"내가."
카샬은 서서히 일렁거리는 아코의 눈을 보자 점점 입이 바짝 말랐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원래 정령을 볼 수 있었다고?"
[그건 나도 몰라. 그때 너는 나만 볼 수 있었으니까. 원래부터… 불안정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코는 코를 훌쩍이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나?"
하벨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갑자기 왜 자신을 보는 건가.
"도련님이 왜?"
덩달아 카샬 역시 아코를 재촉했다.
[하벨 티에라가 이상해지면서부터였어.]
'도련님이… 바뀐 뒤부터인가?'
카샬은 잠깐 생각했다.
[쟤 옆에 있으면서 네가 점점 안정을 되찾아갔어. 나는 네 옆에 있었기에 알 수 있었고.]
아코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카샬이 어느덧 눈을 뜨고 하벨을 바라보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쳐다봐도 내가 어떻게 했는지 몰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내 본질이 좀 고급스러웠다는 사실뿐이지."
하벨은 으쓱거렸다.
"나, 용왕이었다니까. 이제 믿겠어?"
[헤헤, 이 몸은 바로 믿었는데?]
쏘오옵.
아라는 물을 먹는 흉내를 냈다.
그 물을 한 번 맛본 뒤로는 하벨이 얼마나 특별한지 알 수 있었다.
"새삼 물어보는 것도 웃기지만, 그 용왕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카샬은 솟구치는 말을 삼키지 못하고 내뱉었다.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 그게 용왕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야."
하벨은 묘한 침묵이 찾아오자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대충은 알겠습니다. 도련님께서 물을 지배하셨다는 말이 아닙니까?"
"아니야. 달라."
"다르다뇨?"
"내가 곧 물이야. 내가 곧 바다고."
[어어? 이 몸은… 더 모르겠어.]
아라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입마저 살짝 벌렸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바다는 내가 되었고, 물도 내가 되었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죽으면 모든 물이 사라지는 거지. 그게 용왕이야."
"그게… 가능한 겁니까?"
[그래서 내가 그 마차 안에서 물을 보고 바다를 떠올린 거였어! 아니, 그냥 반칙을 쓴 거잖아!]
아코가 털을 바짝 세웠다.
"뭐가 됐든 맛있었지?"
하벨이 방긋 웃자 아코는 끄응 앓으며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맛은… 있었어. 진짜 엄청, 많이.]
"그럼 됐지."
하벨은 순환의 길이 있는 배 부근을 가리켰다.
"카샬. 믿기지 않겠지만, 그게 가능했으니까 네가 보이게 된 거잖아."
"하지만……."
"이 세계를 이루는 근원은 물이며 정령들이 주는 힘도 물과 근접하잖아? 그러니까 내 고결한 영혼의 영향으로 물과 친숙해지고, 이게 결국 정령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진 거겠지. 대충 맞지, 으르렁아?"
마음껏 자랑하던 하벨은 카샬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더욱 즐거워하며 아코를 보았다.
[아코라고, 멍청아. 하지만 네가 말한 가능성은 내가 생각해도 얼추 맞는 것 같아.]
아코는 카샬에게 발을 올리려다 슬쩍 물어봤다.
[잠깐 만져도 돼?]
마냥 낯선 물음에 카샬은 반쯤 얼어붙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자신이 정령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코의 발이 자신의 손에 닿자 무언가가 흘러들어왔다.
포근하면서 부드러운 물의 감각이 느껴졌다.
아코가 깜짝 놀라며 멈췄다.
[…뭐야.]
아코의 시선이 하벨에게 향했다.
[너, 너 진짜 대단하다! 아니, 이게. 이게…….]
아코는 말을 제대로 이어가질 못했다.
자신이 정말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카샬에게 정령수를 넣고자 얼마나 많은 시도를 했던가.
하지만 카샬은 자신을 점점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령수를 전혀 받아들일 수도 없는 몸까지 되어버렸다.
"내가 좀 대단해. 더 칭송해 봐봐."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아코가 카샬에게 정령수를 넣은 게 틀림없었다.
[…고마워.]
아코는 처음으로 하벨과 제대로 눈을 마주했다.
따뜻했다.
자신이 알던, 인간들의 눈빛과 달랐다.
[나는, 나는 방법을 찾지 못했어. 내가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카샬이 가진 재능을 높여주는 방법뿐이었어.]
정령수를 받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것들을 받을 수 없는 상태의 카샬이 너무 안쓰러워 자신이 귀가 되어주고, 눈이 되어주며 그의 재능을 갈고닦아 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카샬이 놀라면서 물었다.
[너는 내 말을 들을 수도 없고, 정령수를 받을 수도 없지만, 나는 널 돕고 싶었어. 정말 많이.]
사랑스러운 아이.
아코는 애정이 담긴 눈으로 카샬을 바라보았다.
만약에 카샬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다면 이 말만큼은 꼭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널 도와줬다고 해도 검의 궤도를 보는 힘도, 검의 소리를 들은 것도 결국, 네 힘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카샬.]
정령사이지만, 정령수를 받지 못하기에 카샬은 기존 정령사와 다른 방향으로 성장했다.
이걸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코는 활짝 웃었다.
정말로 카샬이 모든 걸 해낸 거니까.
'내가……. 내가 했다고?'
카샬은 말문이 막혀왔다.
언제나 벽에 부딪혔다.
매일매일, 벽에 부딪히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정령사도, 다른 것도 되지 못한 자신에게는 정말로 이 길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카샬은 이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또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아코를 바라보았다.
[정말 기뻐.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코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카샬을 바라보았다.
오늘에서야 모든 소원이 이뤄진 것 같았으니까.
[축하해, 카샬.]
그래서 아코는 영원히 할 수 없었던 말까지 조심스레 꺼내보았다.
[축하해. 정말 축하해, 카샬!]
카샬은 천천히 아코에게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찌르르.
무언가가 느껴져 깜짝 놀랐지만, 곧 익숙한 감각임을 확인했다.
어머니 이외에 손에 닿았던 그 따뜻함이 맞았다.
"…너였구나."
카샬의 입가에 미소가 부드럽게 번져갔다.
"네가 맞았어, 아코."
[응. 나였어, 카샬.]
자신의 이름은 원래 아코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 아이가 지어준 이름을 계속 간직하고 싶을 만큼 카샬이 좋았다.
[내가 아코야.]
아코는 카샬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어헝.]
아라가 기어코 울먹이자 하벨은 손가락을 올렸다.
쉬잇.
"지금 아라 네가 울면 어떡해. 울어도 카샬이나 으르렁이 울어야지."
[어어업. 이, 이 몸은 지금 엄청 감동해서 그랬어. 미안해.]
"…전 안 웁니다, 도련님."
갑자기 밀려오는 민망함에 카샬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아니. 나 신경 쓰지 말고 몇 년인지는 몰라도 오랜만의 재회를 만끽해."
콜록.
하벨이 기침하며 손을 휘휘 젓자 카샬이 입술을 깨물었다.
"안 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으르렁아. 카샬이 정령을 볼 수 있는 조건이 네가 옆에 있어야 하는 거야?"
[그 조건이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
[응! 맞아!]
아코는 의문을 드러냈고, 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코가 카샬한테 정령수를 주려고 많이 많이 시도했지?]
아라는 카샬에게 다가가 앞발을 올리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코가 나타나니까, 카샬한테 나는 냄새가 달라졌어. 이 냄새는 정령사들한테 나는 냄새랑 닮았어.]
아라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벨은 아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아들었다.
"으르렁 네 노력 덕에 카샬의 체질이 조금씩 변했고, 그걸 마무리한 게 나라는 말이지?"
하벨이 으쓱거리자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이 몸이 하려던 게 바로 저 말이었어! 그래서 어, 으르렁이, 아니, 아코가 옆에 없으면 카샬은 이 몸을 보지 못해.]
헤헤.
아라는 자신의 리본을 잡으며 덩달아 으쓱거렸다.
"카샬."
하벨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예, 도련님."
장난기가 한껏 어린 하벨의 시선에 카샬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나한테 빚진 거야. 알지?"
"……."
방금까지 가슴에 날뛰던 설렘과 기쁜 마음이 싹 사라졌기에 카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진짜, 최악이다.'
* * *
"…헤레스?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넬시아는 다시금 하벨의 방에 노크했다.
"고, 곧. 금방입니다! 다 되어가니까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다급한 음성에 넬시아는 머리카락을 꼬며 정령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없다는데 왜 자꾸 여기 있어? 그냥 가면 안 돼?]
톰톰이 넬시아의 옷자락을 당기며 울다시피 말을 꺼냈다.
[하벨하고 마주치기 싫단 말이야아.]
"그럼 먼저 돌아가 있어."
[싫어. 왕실은 그냥 숨이 막힌다고. 날 기운도 없는데.]
넬시아는 톰톰의 징징거림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정령 기사들에게 물었다.
"카샬이 어디에 갔는지 알고 있어요?"
"잠깐 자리를 비워 달라고 하셔서 그 후로는 모르겠습니다."
"카샬이요?"
넬시아는 눈동자를 떼구루루 굴렸다.
뭔가 아주 많이 수상했다.
방금 자신은 바안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헤스트리아 왕국에 생긴 문제를 가만히 숨길 수도 없기에 룬델 대신 자신이 직접 바안에게 말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음. 혹시 이 문제를 누구하고 의논할 생각입니까?
바안은 헤스트리아 왕국에 생긴 일을 생각보다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자신은 도리어 바안의 늠름함을 감탄했다. 언제 저만큼 성장하신 건지.
어쨌든, 평소 바안하고 하벨이 친하다던 라르웬의 말을 떠올려 하벨을 언급하자 바안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지 않았던가.
'아직도 전하께서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어.'
넬시아는 생각을 떨쳐내고는 문을 바라보았다.
'…라르웬이 하벨에 대해 또 뭐라고 했더라.'
―…누님. 아라는 세렌과 같은 물의 길을 여는 힘이 있어. 조심해.
우수수.
그제야 넬시아는 온몸에 올라오는 소름을 느꼈다.
'물의 길!'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넬시아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손잡이를 쥐던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누님?"
라르웬이 눈을 깜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