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인연이란(2)
* * *
"미치이인……."
크라마의 눈동자가 이어 커졌다.
"지, 지금 용이라고요?"
"그래, 용. 혹시 처음 들어봤어?"
하벨은 키득거렸다.
"아니, 아니. 용이 어떻게 있다는 겁니까? 다 죽었잖습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나, 안 죽었어. 날 갑자기 죽이지 마."
칼리우스가 씩씩거렸다.
"와. 못됐다, 크라마. 살아 있는 용을 갑자기 죽였어?"
훅 치고 들어오는 하벨의 말에 크라마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아니, 제가 하려고 한 말은 그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크라마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고, 다시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용이십니까?"
"어……."
말꼬리를 늘이던 칼리우스는 가면을 벗었다.
하벨도 용이라며 언급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자신을 알렸다.
"나는 용이야."
"세상에……."
그 얼굴을 보던 크라마는 깜짝 놀랐다.
저번에 하벨이 소유한 땅에서 마차에 올라타 보았던 그 시종이 아닌가.
'왜 그때 마나가 일렁거렸다 했는데.'
용이었다니.
크라마는 칼리우스를 찬찬히 살폈다.
그때 잠깐 얼굴만 보았고, 동물을 통해 봤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보다 더 작은 한 아이가 자신의 눈에 천천히 보였다.
'설마…….'
크라마는 불현듯 밀려오는 생각에 주먹에 힘을 주었다.
"용용이가 바로 마법사 협회가 쫓았던 그 아이지. 설마하니 내 시종이 될 줄은 몰랐겠지? 어때? 갑자기 술맛이 확 돌지?"
하벨이 장난스레 꺼낸 말에 크라마는 당장 칼리우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용이시여……."
"갑자기 왜 그래?"
하벨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제가 지은 죄를, 그리고 미처 알아보지 못한 점. 무척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크라마답지 않은 진지한 모습에 하벨은 기가 찼다.
"용이라고 태도를 한 번에 바꾼 거 봐봐."
"…저의 어리석음이 극에 치달아 마법사 협회의 세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무렵, 당신을 쫓았습니다."
하벨은 크라마의 고백에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반쯤 농담인 줄 알았더니 크라마의 표정이나 자세, 그리고 눈동자에 어린 그 진지함에 하벨마저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무리의 대장이 바로 저였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이 힘으로 도망가는 당신을 몇 번이고 쫓았습니다."
그 아이였다.
그때보다 더 자랐지만, 마법사 협회가 그렇게 애타게 찾던 아이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크라마는 아직도 가지고 있던 그날의 가면을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냈다.
늑대 가면을 보자 칼리우스는 뒷걸음질 쳤다.
그의 손이 떨리자 크라마는 가면을 바닥에 내렸다.
"역시 기억… 하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너, 너였어?"
칼리우스는 속에서 올라오는 두려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 첫 번째 늑대는 저였습니다."
칼리우스를 쫓기 위해 구성된 이들을 '늑대'라고 불렀고 자신은 동물을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이 있기에 늑대들의 대장이 되었다.
"왜… 나를 쫓았어?"
칼리우스는 크라마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매만졌다.
슬픔이 가득한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크라마는 어깨를 떨구며 대답했다.
"제 잘못입니다.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
칼리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과거의 자신과 달랐다. 많은 게 변하지 않았는가.
적어도 지금은 도망치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법사들 대부분이 세뇌에… 걸려있어. 그러니까, 음, 더는 원망 안 해."
칼리우스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하벨이 보였다.
한없이 자신을 믿는 저 시선에 칼리우스의 가슴 속에 금세 용기가 생겨났다.
"괜찮아, 크라마. 나는 진짜 괜찮아. 그러니까 지금은 이유를 말해주면 좋겠어."
더는 뒷걸음질 치지 않고 칼리우스는 그 자리에 섰다.
크라마는 입술을 깨물며 영원히 가슴 속에 묻어두려 했던 그 말을 꺼냈다.
"검은 물이라 알고 있는 오미너스를 조종하려면 강대한 마나의 소유자가 필요했습니다."
'…또 오미너스가.'
하벨은 크라마의 말이 반갑지 않았다.
이놈의 마법사 협회는 그 오미너스를 위해 대체 어디까지 발을 뻗을 셈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이유일 뿐, 마법사 협회에서 계속 실험하고 있는 여러 프로젝트로 만들어지는 존재들을 위해 살아 있는 배터리가 필요했습니다."
"여러 프로젝트는 또 뭐고, 배터리라니?"
하벨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다른 마법사들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었던 하나의 '말'일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제가 알고 있던 건 물 마법사를 만들기 위해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벨은 크라마의 대답에 화가 나는 것보다 의문이 넘실거렸다.
'이렇게… 깊게 뻗어 있었는데 왜 아무도 몰랐던 거지? 아니, 애초에 협회 하나가 이렇게까지 넓게 확장할 수 있는 건가.'
나라마다 있는 마법사 협회의 교류가 얼마나 이루어지는지 모르는 이상, 자신이 추측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라는 그 힘과 위치를 따져 자신이 생각한 마법사 협회의 영향력을 이미 넘어버렸다.
'아무도 몰랐다는 건 그래, 에르티안 왕국이 주변을 살펴보지 못할 정도로 휘청거렸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다.'
하벨의 눈가가 좁혀지자 아라가 하벨의 이마에 발을 올렸다.
꿍.
[나쁜 생각을 하면 안 돼, 대장.]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 아라야."
하벨은 말랑한 촉감에 절로 번지는 미소를 막기 어려웠다.
"그리고 배터리는."
크라마가 입가를 핥으며 말문을 열었다.
"강대한 마법을 부리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커다란 마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마법사 협회가 바라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그 마법사가 가진 마나만큼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마성물의 성장으로도 한계가 오니까요."
'거기까지 준비했다고?'
하벨은 밀려드는 그 이상함을 더 이상 부정하기 어려웠다.
마치 당연히 이 계획이 진행될 거라 확신하며 이뤄지는 것 같지 않은가.
'마법사 협회를 박살 내야 한다. 더 빨리.'
즉위식 후에 진행하려고 했던 계획을 앞당길 필요성이 당장 보였다.
"그래서 살아 있는 배터리가 필요했습니다. 위대한 용께서는 가장 필요한 첫 번째 후보였으며 이후 기준에 미달이나, 타고난 마나가 평균보다 많은 이들이 살아 있는 배터리로서 키워지고 있습니다."
"크라마."
"예, 도련님."
"만약에 용용이가 용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마법사 협회에서는 뭘 할 것 같아?"
"당연히 자신들이 원하는 입맛대로 키워내지 않겠습니까?"
화르르륵!
마치 긍정을 하는 듯 랜턴에 갑자기 검은 불꽃이 붙었다가 사라졌다.
'미친… 랜턴.'
하벨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로써 확신할 수 있었다.
칼리우스가 세상을 멸망시킬 용이 되는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게 바로 마법사 협회라는 걸.
"그럼 마법사 협회는 대체 뭐를 위해 움직이는데?"
"…역시 도련님께서도 느끼셨군요."
크라마은 시선을 떨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모릅니다. 뒤에 누가 있는지, 왜 저런 짓을 하는지, 지금은 모릅니다. 아니, 모르겠습니다."
"세뇌 전에는?"
"당연히 다 세상을 위한 마법사들의 희생이며 결국 마법사들을 위한 행동이라고 믿었죠. 물이 오염된 세상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마법사들 손에 달렸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사로잡혀 무엇이든 하고 맙니다. 그게 어떤 것이든 말입니다."
크라마는 콧바람을 내쉬며 자조적인 미소를 잠깐 짓다 다시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용이시여."
"……."
칼리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든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한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잠깐만 미뤄주십시오."
말을 내뱉으며 크라마는 고개를 조아렸다.
"마법사 협회를 무너트릴 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그 후에 제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칼리우스는 낙엽을 침대 삼아 하늘을 이불 삼아 자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마구마구 때려줄 거라고 그땐 생각했는데.'
칼리우스는 크라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음이 그때와 달랐다.
원망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때리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나는 장로를 지배하러 왔어."
칼리우스는 쪼그려 앉아 크라마와 시선을 마주했다.
크라마의 눈이 커졌음에도 칼리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크라마 네 목숨도 필요 없고, 죄책감도 가질 필요 없어."
눈을 동그랗게 뜬 칼리우스는 하벨이 자신에게 그랬듯이 크라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곧 배시시 웃었다.
"나는 널 용서했어, 크라마."
"……?"
"괜찮아. 나는 크라마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많이 만났어."
하벨, 아라, 레디나, 카샬을 보는 칼리우스의 눈동자에 애정이 어려 있었다.
"고마워. 이렇게 말해줘서."
칼리우스는 속이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크라마. 도련님이 더 아프기 전에 어서 헤레스한테 가야 해."
"…크리온 데브란입니다."
"응?"
"제 진짜 이름 말입니다. 크리온 데브란입니다."
크라마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한 뒤 앞서 걸었다.
"응, 크라마."
칼리우스는 활짝 웃으며 크라마의 뒤를 따라가다 하벨과 아라, 그리고 카샬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아."
카샬은 조용해진 방안을 보며 숨을 돌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닫았다.
"도련님."
스으윽.
커튼이 닫히자 창문에 튀기는 빗소리가 천천히 가려졌다.
"왜?"
하벨은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소파에 웅크려 누워버렸다.
"왜 그렇게 필사적입니까?"
"내가?"
"예. 그렇게 보입니다. 하나, 하나가 너무 필사적입니다. 이전에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제게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게 하고 싶은 건데?"
하벨은 카샬에게 시선을 뒀다.
[이게?]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카샬마저 고개를 돌려 하벨을 보았다.
"그럼."
하벨은 이걸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나는… 음. 과거의 나는 멍청했어. 그래서 날 건드리는 모두에게 관용을 베풀었지."
괜히 웃음이 났다.
새삼스레 자신이 죽었다는 게 생각이 나 웃음이 나왔다.
"결과는 좋지 않았어. 지금에 와서야 하고 싶은 게 될 정도니까."
[대, 대장이 하고 싶은 거 많이 해! 이 몸도 막 반대 안 할게!]
하벨은 당황한 아라와 입을 살짝 벌린 카샬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니까 둘 다 하고 싶은 걸 해.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도련님."
카샬이 커튼을 잡은 채로 말문을 열었다.
"듣고 있어."
"제가 정령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몽글몽글.
하벨은 대답 대신 카샬 앞에 물을 띄워놓았다.
"…물을 왜 사용하십니까?"
"검을 꺼내 봐봐."
카샬은 그 말에 입을 다물고 검을 꺼냈다.
"야."
하벨이 검을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다 듣고 있는 거 알아."
[맞아. 이, 이 나쁜 정령아. 이 몸도 으르렁거릴 줄 알아. 이전에는 놀라서 그런 거였어. 이 몸도 성질낼 줄 안다구!]
아라가 하벨에게 매달려 툭툭 쏘아붙였다.
하벨은 키득거리며 물을 휙휙 돌리다 검을 향해 쏘았다.
툭!
검에 고스란히 물이 쏟아지자 족제비 모습을 한 정령이 단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
정령의 눈이 커지고, 덩달아 카샬 역시 놀랐지만, 하벨은 웃었다.
"놀랐어? 내 물이 좀 특별하거든. 숨어봤자 결국 카샬 옆이지."
[나와 카샬을 건들지 마!]
"역시 너였어."
하벨은 처음 카샬이 하벨 티에라와 비슷한 증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땅에서 처음 정령들이 살게 된 그 날, 나무를 만들지 않았던가.
그때, 자신은 보고 말았다.
저 족제비 정령이 나타나고 카샬이 뒤를 돌아 정령들을 보며 놀라던 모습을.
아무렇게도 않게 '왜 그래?'하고 물었지만, 저 정령이 카샬이 정령을 볼 수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게 아닐까 하고.
"…도련님?"
자신의 가설이 맞지 않았다면 카샬이 지금 족제비 모습을 한 정령을 보고 놀라지 않았을 테니.
[못된 인간…….]
족제비 모습을 한 정령이 으르렁거렸지만, 하벨은 여유롭게 물이나 튕겼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덤비게? 그럼 덤벼봐."
[대장을 아프게 한다면 이 몸이 용서 안 해.]
덩달아 아라까지 으르렁거리자 정령은 아라를 보며 살짝 놀랐다.
이전과 다른 어떤 기백이 느껴졌다.
"이제 카샬을 놔줘, 으르렁아."
[너는 아무것도 몰라. 카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카샬도 널 모르는 것 같은데?"
하벨은 가볍게 기침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말에 정령은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카샬은 날 알고 있어.]
"…내가?"
저 정령과 아라를 보며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을 하던 카샬이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