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이 몸은
* * *
하벨은 아라를 토닥이며 앞을 경계했다.
하벨의 발걸음이 무겁게 보이자 아라는 혹시 몰라 정령수를 미리 넣어주었다.
"도련님, 있잖아. 앞에 아무리 살펴봐도 마나 반응은 없어."
칼리우스가 말을 꺼내자 하벨은 자신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가게에서 방금 지나쳐온 문까지 마법사가 없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계단이었고, 마법사들이 숨어 있을 공간도 없으니.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공간 자체도 넓었고, 계속 직진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도 마법사들이 없다고?"
하벨이 찝찝함을 느끼며 묻자 칼리우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정말 없어."
"안에 왜 아무도 없는 거지, 개자식아?"
하벨은 바로 에멜을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폭파 소리에 무려 마법사 협회의 장로인 에멜이 바로 찾아오지 않았던가.
그만큼 중요한 장소인 건 분명했다.
"여차하면 없애야 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혹시 몰라 남은 흔적을 직접 지우러 온 겁니다."
"그만큼 정상적인 곳이 아니라는 말이네."
하벨의 물음 뒤로 긴 정적이 이어졌다.
에멜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려던 차 어둡던 내부에 불이 켜졌다.
앞서가던 레디나와 카샬이 저절로 걸음을 멈췄다.
나무로 된 감옥이 줄지어 양쪽 벽에 붙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이 뚫려있기에 작은 방처럼 꾸며진 모습에 잠깐 눈길이 갔다.
하지만 시선은 이내 그곳에 인형처럼 똑같이 얌전히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멈췄다.
하벨은 이질적인 그 모습에 입가를 쓸며 숨을 내쉬고는 정령들과 아라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여기서 움직이지 말아줘."
속에서 일어나는 불안감에 그들이 오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하벨은 달려갔다.
바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는 상태를 살폈다.
허벅지를 쥐는 하벨의 손아귀에 금세 힘이 들어갔다.
'…빌어먹을.'
숨을 쉬고 있는데 상태가 이상했다.
무언가가 깨져있듯 눈동자에 공허함이 깊었다.
그게 마음인지, 몸인지, 영혼인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되 산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몰려와 하벨은 속이 탔다.
"비키십시오."
카샬의 말에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물러섰다.
나무가 깔끔하게 잘리자 하벨은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목각인형처럼 그냥 앉아 있기에 혹여 부서질까 봐, 하벨은 아이를 만지지도 못한 채 그저 살폈다.
애타는 하벨의 손이 혼자 움직였고, 그의 시선은 아이의 손목에 달린 링거에 고정됐다.
'…이게 왜?'
찬찬히 줄을 따라가자 천장에 달린 작은 서랍과 연결되어 있었다.
쿵쿵.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대체 무얼 가리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하벨은 자신을 바라보는 정령들과 아라를 힐끔 살피며 서랍을 열었다.
"…우윽."
서랍을 열자마자 하벨은 속이 뒤틀려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도련님?"
레디나가 잠깐 휘청거리는 하벨은 붙잡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너무 수상해 보이는 검붉은 링거 액체가 전부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하벨은 가면을 살짝 올려 입가를 쓸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짓거리가 아닌가.
하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숨소리가 빨라지며 한 명씩 쳐다본 아이들의 손에 똑같이 링거가 달린 걸 보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바로 에멜에게 달려갔다.
퍼억!
"이… 이 미친 새끼야!"
하벨이 그대로 에멜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치자 뒤에 있던 아라와 칼리우스, 그리고 정령들이 깜짝 놀랐다.
에멜의 고개가 돌아가며 입가가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이렇게까지 하벨이 화가 났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칼리우스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버렸다.
"이 개만도 못한 놈아."
하벨은 조금 전보다 언성을 눌렀다.
가면을 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어도 아라는 꼬리를 쥐며 그대로 굳어 있었다.
"도대체."
하벨은 숨을 내쉬었다.
화를 억눌러야 하는 걸 알지만, 자신의 머리가 너무 뜨거웠다.
"도대체 네놈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저기에… 어떻게, 어떻게 그걸… 갈아서 넣어?"
하벨은 차마 핵심 단어들을 꺼내지 못했다.
애초에 어떻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이란 말인가.
저 끔찍한 모습을 아라는 물론 정령들에게 내보일 수 없었다.
하벨은 에멜이 말을 꺼내기 전에 당장 멱살을 쥐고 데리고 가다 중간에 멈췄다.
"…미안해. 언성을 높여서. 너희한테 화낸 거 아니니까 무서워하지 말아줘."
평소와 비슷한 하벨의 목소리에 아라가 다가가다 말고 다시 꼬리를 꼭 쥐었다.
[이 몸은. 이 몸은 대장이 슬픈 거 알아. 이 몸도 아까부터 계속 슬픈걸.]
아라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밀려오는 슬픔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벨의 반응에 아라는 자신의 슬픔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아차렸다.
저곳에 정령들이 죽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 몸이 단 한 번도 정령이 죽은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까, 대장이… 이 몸하고 용용이하고 정령들을 말리는 게 분명해.'
아라는 무섭고 겁이 났지만, 어쩐지 다가가고 싶었다.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기에 아라는 잠깐 금화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 몸이 가도 될까. 가면 대장이 화낼까. 화… 안 냈으면 좋겠는데.'
아라의 시선이 하벨을 향했다.
"도련님. 제가 끌고 오겠습니다. 아직 죽이면 안 되잖습니까."
카샬이 하벨에게 공손히 말을 꺼내자 그는 단번에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내가 지금 저놈을 죽일 것 같아?"
"예. 그렇게 보입니까. 지금 도련님께서 얼마나 흥분하셨는지 모르실 뿐입니다. 진정하십시오, 도련님."
한 치도 망설임 없이 꺼내는 카샬의 대답에 하벨은 빠르게 머리를 식혔다.
"…카샬."
에멜을 카샬에게 던지며 하벨은 카샬을 불렀다.
"예, 도련님."
카샬은 평소와 비슷해진 하벨의 목소리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렇게 빨리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에멜의 멱살부터 쥐었다.
"나는 정말 많은 걸 봤어."
"무얼 보셨습니까?"
"사람이 죽는 모습을. 어떻게, 얼마나 끔찍하게 죽는지를."
하벨의 뒷모습이 어쩐지 무척 지쳐 보였기에 카샬은 얌전히 에멜을 끌고 뒤를 따라갔다.
"그래도 이게 익숙해 지지가 않아. …아니. 사실 웃긴 게 익숙해져 버리는 게 무서워. 내가 사라질 것 같았거든."
죽음에 익숙해져 버리면 사람과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의 장기 말로밖에 보이지 않을까 봐.
수만과 수천의 생명을 쥐고 멋대로 저울질할까 봐.
자신은 매일.
매일.
매일 죽음을 곱씹으며 가슴에 상처를 내 아픔을 느꼈다.
"그럼… 어떻게 버티신 겁니까?"
카샬이 머뭇거리다 묻자 하벨은 실없이 웃다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그냥 한탄하는 거지. 어디든 다… 비슷하구나. 어디든… 제 욕심과 안위를 위해 무슨 짓을 꾸미는 모습이 똑같네 하고 말이야."
하벨은 자신을 기다린 레디나를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서랍을 가리켰다.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궁금하긴 하죠. 알려주실 건가요?"
하벨은 레디나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뒤를 쳐다보았다.
"자, 에멜."
에멜은 아이를 보자마자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뒤에서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내 말에 대답해."
하벨은 목소리를 낮춰서는 조용히 에멜에게 경고했다.
주변이 시려질 정도로 차가운 하벨의 분위기에 에멜은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마, 마, 말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제가 죽일 놈입니다."
말을 꺼내는 에멜의 온몸이 죄책감으로 흔들렸다.
"…네놈들."
하벨은 속으로 '설마'하며 말문을 열었다.
아니겠지.
적어도 이건 아닐 거라 믿으며 그 말을 꺼내보았다.
"이 아이들을 이용해서 그걸 만들려고 한 건… 아니지?"
하벨은 정령사라는 말 대신에 자신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정령사는 자신뿐이었고, 에멜 역시 알고 있었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카샬은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하벨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정령사를 뜻하는 게 아니겠나.
"…만들다뇨?"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말에 카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애초에 정령사를 육성하는 방법조차 없었다.
윗대가 정령사였다고 해서 확률이 높을 뿐, 그 후손들이 무조건 정령사로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고, 도중에 정령에게 미움을 받으면 그 힘마저 빼앗기지 않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정령에게 휘둘리는, 불쌍한 자들이 바로 정령사였다.
그런 정령사를 만들려고 했다니.
"…마, 맞습니다."
하지만 에멜은 토악질을 하듯 대답했다.
당장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 눈동자에 또다시 눈물이 맺혀왔다.
"역겨우니까 흘리지 마."
하벨은 에멜을 끔찍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누가 눈물을 흘려야 하는데.
가장 억울한 건 이 실험에 이용당한 아이들이며 죽은 정령들이었다.
"…도련님."
카샬이 하벨을 재촉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고.
"여기에 말이야."
하벨은 천장에 달린 서랍을 가리켰다.
다시 생각해도 눈시울이 따끔거렸다.
"…갈려 있었어."
정령이.
하벨은 그 말을 삼켰다.
처음에 자신도 서랍 안을 보다 의심했다.
검붉은 액체 무언가가 동동 떠다니는 게 이상해 조금 더 자세히 봤을 뿐이었다.
그러니 하나씩 보였다.
앙증맞았던 손가락도,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입술도, 쫑긋거리며 움직이던 그 작은 귀마저 보였다.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순수한지 알기에 그런 추악한 죽음은 너무도 맞지 않았다.
"…갈려요?"
레디나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자신이 보았던 그 링거 안에 정령들이 갈려 있다니.
내장이 튀어나오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레디나는 입을 가렸다.
이건 다른 역겨움이었기에 당장 하벨이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도련님이…….'
몽글몽글.
카샬이 단번에 에멜의 목을 쥐려고 하자 이를 막은 건 물이었다.
"진정해, 카샬."
이번에는 하벨이 카샬을 말렸다.
"아니, 도련님!"
카샬의 언성이 단번에 올라갔다.
"저 새끼가! 저 개새끼가 지금……!"
에멜을 가리킨 카샬의 손가락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려왔다.
촤악.
물이 카샬의 얼굴에 튀었다.
카샬은 얼굴에 튄 물을 닦으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금… 가장 많이 화가 나시는 건 도련님이 아닙니까?"
"아니. 내가 아니지. 진짜 화를 낼 자는 따로 있어."
하벨은 여전히 '정령'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저들의 귀는 무척 좋을 테니.
"그러니 나는 여기까지 하는 거야."
내 분노는 여기까지.
그렇게 선을 정해두는 하벨의 모습에 카샬은 기가 찼다.
지금 이걸 참는다고?
이걸?
"지금 저 아이들은 어떤 상태인데? 되돌릴 수 있어?"
하벨은 조금 전과 달리 차분히 에멜에게 물었다.
저 개같은 짓거리가 정령사를 만들기 위한 일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방법을 알아내야 했다.
털썩.
에멜이 무릎을 꿇었다.
"왜 또 거지 같은 짓거리를 하는 건데? 나는 방법을 물어본 거잖아, 응?"
하벨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아뇨."
에멜의 목소리가 지진이 난 것처럼 떨려왔다.
"아뇨, 아뇨."
언성이 조금 올라갔지만, 하벨은 변함없었다.
"뭐가 아니야?"
"되… 돌릴 수 없습니다."
"실패작이라는 거네?"
"…예."
"죽은 거야?"
하벨의 시선이 다시 아이들을 향했다.
바라볼수록 딱했다.
"…그렇습니다. 이미 죽었… 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왜?"
하벨이 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직 저렇게 심장이 뛰고 있는데?"
"…저걸 뺀다면 죽습니다."
에멜은 손가락을 들어 서랍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떨리든 말든 하벨은 밀려오는 착잡함에 조용히 입술을 꽉 다물었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이 너무도 가혹하지 않던가.
"가, 가루가… 된 채 말입니다."
"여기에 있던 자료들은 어디에 있어? 가지고 있어?"
하벨은 에멜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예.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하벨이 다시금 긴 숨을 토하며 이 사태를 어떻게 끝낼지 생각했다.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적어도 위로 데려가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하벨은 익숙한 감각에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라야?"
아라가 바로 자신의 뒤에 있지 않은가.
[이 몸이 와서 화… 났어, 대장?]
아라의 물음에 하벨은 가면을 벗었다.
"아니. 전혀."
화보다는 오히려 슬퍼 보이는 하벨의 모습에 아라 역시 울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몸은 있지. 여기에 와야 한다고 생각했어.]
"…왜?"
하벨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 몸을 부르고 있어. 이 몸은 이 목소리를 무시하고 싶지 않아.]
"아라야. 내가 나중에 설명해줄게. 그러니까, 저쪽에 가 있는 게 어때?"
아라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에 하벨에게 다가가 그를 꽉 안아주었다.
[이 몸은 강해, 대장.]
"알지. 알아."
[이 몸은 있지. 방금 들었다?]
"…뭘?"
[정령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하벨은 마음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머뭇거리다 자신과 시선이 맞는 순간 활짝 웃어주었다.
[괜찮아, 하벨.]
[그래. 우리는 괜찮아.]
정령들이 다가왔다.
여전히 웃으며.
[아마 많은 인간이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우리는… 있잖아, 매일매일 죽어가.]
[누군가 우리를 죽이고 있어. 어쩌면 왕께서 모습을 감췄기 때문일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는 왕을 원망하지 않아.]
[있잖아, 하벨. 왕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그때까지만이라도 우리끼리 버텨야 해.]
[우리는 정령, 이 세계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어.]
정령들은 굳건한 의지를 드러내다 다시 하벨을 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실을 봐야겠어, 하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