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고찰의 결과(3)
* * *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 대장의 힘은 검은 물을 조종하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아주아주 예쁜 물을 만들기 위해서인데!]
아라가 에멜을 째려보며 이를 갈았다.
당장 그를 깨물고 싶을 정도였다.
'설마 했는데…….'
하벨은 조용히 이를 갈았다.
자신을, 아니,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 검은 물인 오미너스를 조종하려고 하다니.
"예. 검은 물이… 바로 '오미너스'입니다."
에멜은 자신의 목을 졸라오는 죄책감에 눈앞이 캄캄해질 지경이었다.
"미친 새끼. 아니, 미친 새끼들. 진짜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파내보고 싶을 정도네. 네놈들의 희망인 물 마법사를 뭐……?"
카샬은 기가 찬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검을 꽉 쥐었다.
"이러니까 진작에 다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세계의 도움도 안 되는 쓰레기들."
레디나는 대놓고 에멜에게 살기를 퍼부었다.
으득.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났다.
하다못해 하벨까지 건드리려고 하다니.
"네놈들은 대체. 대체 그 물 가지고 뭘 하려는 거지?"
하벨은 참다못해 에멜의 멱살을 쥐었다.
"그 속에 왜 정령들까지 산 채로 넣어 그 꼴을 만드는 건데?"
하는 꼴을 보면 마법사들의 이득과 대체 무슨 관계인가 싶었다.
그냥 세상이 망하라고 온갖 짓거리를 저지르는 것 같았다.
[못됐어. 진짜… 진짜 못됐어.]
[우리가 사라지면 너희 역시 멸망하는 길일 텐데. 왜 이 간단한 이치를 모르는 건데?]
정령 중 일부는 울상을 지었다.
"…오미너스는."
에멜은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밀려오는 죄책감도 숨이 막히거늘, 자신의 멱살을 쥔 하벨의 압박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오, 오염된 물을, 움직여 정화된 물을 넓혀가면서 이, 이 끝나지 않는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거대 정화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왜?"
에멜의 멱살을 쥔 하벨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내 가문이 소유한, 날씨를 예측하는 기술은 다른 나라가 가진 그 어떤 기술보다 세세할 정도로 물의 흐름을 읽을 수 있지. 마법사 협회가 지금 하려는 일은 오염된 물을 움직여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태를 종료하려는…….
전 기상국장 웨인 톨이 지껄이던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마법사 협회가 오염된 물을 정화하고자 했다는, 그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금 에멜이 지껄이고 있었다.
"현존하는 오염된 물은…… 여러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법을 위해서는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오염된 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거대 정화 장치가 가진, 정화 기능 말고도 불순물을 거르는 기능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에멜은 숨을 몇 번이나 들이마셨다.
"거대 정화 장치에 정화제를 넣지 않으면, 오염된 물은 고스란히, 유지가 된 채로 불순물만 걸러집니다. 하, 하지만… 그 오염도로는 마법을 유지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콰악.
"…커, 커헉!"
하벨이 더 힘을 주자 에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거기서 더 짙은 오염된 물을 얻기 위해 정령들을 희생시켰다?"
"커헉, 어, 어떤 것도, 헉, 어떤 것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정, 컥, 정령 이외에, 커어억."
[대장! 헤레스가 아직은 손에 그렇게 힘을 주면 안 된다고 했어!]
아라가 당장 속상한 사실보다 하벨이 더 걱정스러워 그의 손등을 가볍게 쳤다.
하벨이 손을 놓자 에멜은 기침을 몇 번이나 한 뒤에 흔들리는 눈동자로 말을 꺼냈다.
"잘못…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이것도 헤일리스가 지시했어?"
하벨이 묻자 에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마법을 버틸 만큼 물의 오염도를 높이는 여러 가지 실험 끝에 오직 정령만이 그걸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에멜은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자신의 목을 잡으며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들을 하나씩 되짚어가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저 오염도가 높아져 색이 검게 변한 물일뿐, 설계했던 마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에멜의 눈동자에 비치는 깊은 죄책감이 떼로 몰려든 벌레처럼 바글거렸다.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제가, 한 마법사를 유혹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 마법사의 재능을 보고 끔찍한 길로 걷게 했습니다."
에멜의 동공이 커졌다.
'설마, 헤레스?'
하벨은 에멜이 말한 '한 마법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헤레스를 짐작했다.
"그 마법사가 만들어낸 마법으로 기어코 오미너스가…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멜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 끔찍한 짓을 자신이 하도록 뒤에서 밀어줬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역겨웠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온갖 세상의 끔찍함을 경험한, 자기 혐오로 마음이 부서져 버린 그 마법사의 표정을.
'그래서…….'
하벨은 생각했다.
―…그 물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건 제 연구 때문이에요. 제가…….
헤레스가 정화제 사건 때 가까스로 털어놓지 않았던가.
―제 멍청함이 어떤 결과를 불렀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어요.
왜 마법사 협회를 탈퇴하고 나왔는지를.
'…그래서 헤레스가 그렇게 괴로워했던 거였다.'
하벨은 그제야 또렷해진 사실에 헤레스가 더욱 안타까웠다.
그저 실패한 실험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그 모든 걸 헤레스가 가능하게 만들어버리지 않았는가.
'…크라마는 동물을 조종할 수 있다.'
하벨은 헤레스와 함께 마법사 협회를 탈퇴한 크라마와 드웰이 떠올라 설마 하며 하나씩 짚어갔다.
'드웰은 영혼을 보며 이를 건드릴 수도 있다.'
비록 자신은 치료하지 못했지만, 그게 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헤레스가 가진 마법은 무엇이든 움직일 수 있고.'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건 육체라는 겉껍질이 아니라 속에 든 영혼 때문이었다.
만약 겉껍질로 사람이 자신을 파악할 수 있다면 자신은 애초부터 용왕이 아니라 하벨 티에라라고 인지하는 게 맞았다.
'만약에. 정말 만약.'
하벨은 입가를 핥았다.
'오염된 물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동물이 오미너스와 하나의 영혼으로서 결합할 수 있다면.'
하벨은 그 끔찍한 생각을 멈췄다.
크라마가 왜 마법사 협회를 부숴버리려고 했는지, 그 이유가 부디 진실이 아니길 빌었다.
"저 아, 안에는……."
"닥쳐."
에멜은 하벨이 꺼낸 살벌한 말에 입을 꽉 다물었다.
숨이 단번에 막힐 듯한 위압감에 다리에 힘마저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하벨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빌어먹을 놈들. 이번에는 또 뭘. 뭘 저지른 건가.'
저 안에 뭐가 있는지 몰라도 자신이 직접 확인할 셈이었다.
아라가 하벨을 슬쩍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대장……?]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아라야. 내가 화난 건 마법사 협회와 저놈뿐이니까 괜찮아."
하벨이 가면을 올리며 싱긋 웃자 그제야 쭈뼛쭈뼛하게 서 있던 칼리우스까지 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 그렇게 긴장해? 나는 화를 잘 안 내는 편인데. 그렇지, 레디나?"
"저, 저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어요."
레디나가 하벨 옆에 걸어가다 순간 뜨끔해 깜짝 놀랐다.
방금까지 자신의 손가락이 간지러웠던 게 하벨의 눈에 보였던 걸까.
"에멜을 죽이지 마."
하벨이 꺼낸 말에 레디나는 들켰다는 걸 알았다.
"당연히 안 죽이죠. 대신 손가락은 안 되나요? 선물로 좋을 것 같은데요."
[레, 레디나. 그건 선물이 아니야. 이 몸도 안다구.]
아라가 레디나의 말에 깜짝 놀라 그녀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이 흔들림이 아라라는 걸 눈치챈 레디나는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혹시 들었어?"
하벨이 '헤레스'라는 말을 생략하고 말했음에도 레디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언뜻 들었어요. 그래서 좋아할 것 같은데. 역시 안 되나요?"
"거꾸로 생각해 봐봐."
"너무 좋은데요?"
레디나가 두 손을 꽉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 선물로 꼭 놈들의 목을 주세요. 그럼 정말로 최고의 선물이 될지도 몰라요."
검은 달이 생각된 말이었지만, 하벨은 잠깐 멈칫거렸고, 레디나는 그 모습에 손바닥으로 벽을 때리며 웃었다.
"…푸핫, 농담이에요!"
"거짓말하고 있네."
카샬이 툭 하고 던진 말에 레디나가 가면 위로 손을 올렸다.
"와, 들켰네요. 어떻게 알았어요, 카샬?"
"저번에 나한테 손가락 들고 와서 자랑한 거 잊었어?"
"에이, 그건 비밀로 해달라고 했잖아요."
하벨은 살벌한 저 대화를 흘려들으며 칼리우스를 불렀다.
"용용아."
"으응?"
"저놈이 자살하지 못하게 명령을 내려줘."
하벨은 에멜의 눈빛을 보았다.
지금껏 자신이 저지른 짓과 마주한 눈빛이었기에 자기혐오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장로가 저 정도로 세뇌에 강하게 걸렸다면 밑에 있는 놈들은 오죽하겠어.'
하벨은 마법사들이 왜 하나의 병졸처럼 움직이는지 대충은 이해가 갔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밖으로 아무도 나갈 수 없게 철로 된 거대한 문과 그 문을 걸어 잠근 여러 개의 자물쇠를 보자 하벨은 마음이 벌써 무거워졌다.
[이 몸은 왠지 벌써 슬퍼.]
아라가 하벨에게 꼭 매달리며 훌쩍거렸다.
문을 보는 순간, 왜인지 몰라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도련님. 아라랑 정령들은 여기에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칼리우스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마법사 협회와 정령들이 얽혀 있었다.
저번처럼 팔과 다리가 잘린 정령사들과 구석에 몰려 벌벌 떠는 정령들처럼 또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면 아라가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나도 그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우리는 볼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어. 그래야 우리도 대책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혹시 정화제 사건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음, 잔인할 수 있어. 어쩌면 인간이 미워질 수도 있고."
하벨이 정령들을 향해 손을 뻗자 그들은 활짝 웃으며 손 주변에 다다닥 붙었다.
[괜찮아, 하벨. 너처럼 좋은 정령사들도 있으니까.]
[나는 네가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린 너처럼 우릴 아껴주는 아이가 정말 좋으니까.]
정령들은 하벨의 손과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찌르르.
교감이 느껴지자 하벨은 몸이 가벼워졌다.
[아, 그 소식을 들었어. 폭파 사건에 휘말렸다며?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 걱정했어.]
[그래. 이걸 제일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우리에게도 큰일이 생겨서 말하는 게 늦어졌어. 미안해.]
"괜찮아. 지금 벌어진 일은 정말 큰 일이 맞으니까."
하벨은 오히려 정령들을 쓰다듬어주며 아라를 바라보았다.
[…대장. 이번에 이 몸이 원하면 따라가도 되는 거야?]
"따라오고 싶어, 아라야?"
[으응. 이 몸도… 알고 싶어. 보고 판단하고 싶고, 대장이 걱정도 되고, 이 몸만 모르는 건 싫어.]
아라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같이 가자, 아라야."
하벨은 밀려오는 섭섭함을 꾹 누른 채로 가면을 올려선 아라를 바라보았다.
아라가 조금만 더 밝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길 원했지만, 아라가 바라는 거라면 자신은 수용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무서우면 언제든 눈 꼭 감아도 돼."
[응응! 이 몸은 무서우면 안 쳐다보고 꼭 꼬리로 가릴게. 약속해, 대장.]
"그래."
하벨이 아라를 쓰다듬으며 카샬과 레디나를 바라보자 그들은 서로를 힐끔 쳐다보더니 검과 단검을 움직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가 서로 교차하자 문에 십자가 모양이 그려지더니 이내 부서져 내렸다.
콰앙!
잔해가 떨어지자 먼지가 살짝 일어났다.
[후우!]
아라가 바람을 일으키자 뒤따라 정령들이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쫓아내 버렸다.
[문을 부수는 건 우리가 하면 되는데.]
정령들은 손을 휘휘 저으며 카샬과 레디나를 바라보았다.
하벨이 앞으로 나아가자 카샬과 레디나가 그의 앞에 서서 걸어갔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하벨은 가볍게 실실거리며 말했다.
"아뇨. 이럴 거예요."
레디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실에서 제 역할을 못 했으니 여기서라도 제대로 해야지.
"저는 원래 이랬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카샬이 슬쩍 목소리를 꺼내며 검을 꽉 쥐었다.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앞에 소리가 들려요."
카샬보다 더 앞서가던 레디나가 귀를 쫑긋 세웠다.
[어어, 소리가?]
아라도 덩달아 귀를 쫑긋 세우다 말고 흠칫 놀라며 하벨의 목을 꽉 잡았다.
[…대장. 앞에 뭔가, 뭔가 이상해.]
하벨은 아라의 반응에 정령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라와 달리 멀쩡했기에 적어도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앞에 뭐가 있길래 그래?'